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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요한계시록 22장1-7 / 생명수 강과 생명나무 과일

by 【고동엽】 2022. 11. 18.
■2022년 9월1일(목)■


(요한계시록 22장)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묵상/계 22:1-7)


◆ 새명수의 강과 생명나무 과일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거기에 있는 새 예루살렘.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의 강이 흐른다. 이것은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됨을 상기시킨다.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는데, 좌우에 있으면 여러 개라는 것인데, 흥미롭게도 이 생명 나무가 단수로 기록되어 있다.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퍼져나간 것임을 의미한다. 생명수 강의 근원이 하나님이듯이 생명나무의 뿌리도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이 나무에서 열두 가지 열매가 나온다고 했는데, 마치 종류가 열두 개인 것처럼 번역했다. 대부분의 성경이 그렇게 번역했다. 그러나 직역은 12개의 과일이다. 12개는 만국 백성이 따먹기에는 너무 작기 때문에 과일이 복수형으로 쓰인 것에 맞추어서 그렇게 의역한 듯 하다. 그러나 생명나무 과일이 구태여 열두 종류일 필요가 있을까? 12가 계시록에서는 선택된 백성의 숫자임을 상징했음을 기억할 때, 이 숫자를 문자 그대로 12개로 상상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모든 백성이 먹을 만큼 많이 열렸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달마다 맺혔다고 하는데, 따지고 보면 달마다 맺혔다는 말이 불가능하다. 새 예루살렘에는 해와 달이 없는데 어떻게 매월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오류인 듯 지적하겠지만, 아니다. 이것이 성경이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소통방식을 썼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소통 방식을 오류라고 하면 안 된다. 이것은 한번 따먹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마다 다시 열리게 됨을 의미하는 관용구다.


그런데 요한계시록과 에스겔의 묘사가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에스겔서 47장에 보면 강이 성전으로부터 나오고 이 강이 도달하는 곳마다 모든 생물이 살고, 바다에 도달하면 바다가 산다(겔 47:8). 그리고 강 좌우편에 무수히 나무들이 있고(겔 47:7), 이 나무의 실과는 먹을 만하고, 잎사귀는 약재료가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과 에스겔은 같은 장면을 묘사한 것인가?
아닐 것이다. 에스겔은 성전을 묘사했고, 요한은 새 예루살렘을 묘사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차이는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다.


따라서 에스겔에서 묘사된 것은 이 땅에서 성취되는 사건이고, 요한계시록에서 묘사된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에스겔이 천년 왕국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말하고 있다면 요한은 그 왕국 후에 오는 세계까지 언급한다. 천년 왕국이 길지만, 영원한 세계는 아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은 영원한 세계다.


생명 나무는 에덴동산에도 있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금지되었는데(창 3:22-24)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다시 허용될 것이다.




◆ 왕노릇하는 하나님의 종들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천국이 천국이 될 수 있는 것은 환경이 좋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과 그의 어린 양이 계시기 때문이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거기 계시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어린 양이 주인이 되신다. 두려운 것이 없고, 걱정할 것이 없다. 가장 안전하고, 가장 행복한 곳이다.


성도들의 가장 큰 복은 그렇게 선하고 사랑 많으신 하나님을 매일 뵙고, 그를 섬길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깨달은 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 없고, 하나님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으며, 하나님보다 더 신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면 세상 중독에서 벗어난다.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라는 찬양이 의례적인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국민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대통령과도 절대 바꿀 수 없는 영광의 직분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모르는 자들은 이 영광을 모를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든 종의 이마에 새겨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분명히 밝히신 것이며 이것처럼 영광스러운 시민권이 없다. 이들은 하나하나가 노예가 아니라, 모두 왕 노릇을 하는 자들이다. 사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시다. 인간의 섬김이 필요한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우리를 부려 먹기 위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창조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에게 영광 돌리기를 원하신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5,6)


◆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새 예루살렘은 지금 우리의 환경에 비교할 만한 곳이 없고, 또한 적은 지식과 빈약한 머리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곳이다. 그리고 물질세계인지 영적 세계인지, 아니면 비유인지조차 구별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러한 묘사들이 설사 비유일지라도 후에 이 세계에 들어가면 그것이 얼마나 적절한 묘사였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가령 우리가 답답한 일을 보면 '고구마를 먹은 듯하다'라고 한다. 그런데 고구마를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게 뭔 말인지 모른다. 그러나 고구마를 먹는 순간, 그게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지 알게 된다.


새 예루살렘이 문자 그대로인 곳일지, 아니면 현재 소통을 위해서 비유적으로 묘사된 것인지 몰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새 예루살렘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거기에서 살게 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과 거기에 거하는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이름을 걸고 약속하신 신실한 말씀이다. 우리가 이것을 의심하면 안 된다.




◆ 복 있는 자


(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익숙해도 예언의 말씀을 지킨다는 말은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지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레오(τηρεω)는 계명을 지키라(마 19:17)는 말에도 사용되었지만, 예수님의 무덤에서 누가 시체를 훔쳐 가지 못하도록 병사들이 지켰을 때(마 28:4) 사용하기도 했다. 영어 성경은 모두 keep이라고 번역했다.


다시 말해서 예언의 말씀을 지키라는 의미는 마음에 새기고,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 격려와 권면의 말씀을 기억하고 잘 견디고 이기라는 의미다. 세속의 물결에, 세상 철학에, 자유신학 따위에 휩쓸려 흘려 보내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계시록의 예언을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해서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계시록의 예언은 지금 시점에서 또렷이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정확하게 해석해주겠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사이비 이단일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역사가 그것을 보여주었다. 계시록의 예언은 성취될 때가 되면 바보도 해석이 가능할 정도로 또렷해질 것이다.


따라서 해석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잘 기억해두는 것이다. 계시록의 예언은 읽고 기억해두는 것만으로도 복이 있다고 했다(계 1:3). 그래서 일제강점기 시절의 길선주 목사는 복 있는 자가 되기 위해 계시록을 일만 번 읽었다고 했다.


지금까지 해석한 것은 다 잊어도 상관없다. 그러나 말씀은 잊으면 안 된다.
미래에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과 모든 상황이 역전될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잊지 말자.


어떤 고난과 핍박에도 계시록의 말씀을 기억하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복된 자다.


아멘, 주 예수여,
제가 믿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잘 지키겠습니다.
이 말씀이 세상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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