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50-52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람들은 거의가 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목숨을 바쳐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한 사람들의 정신은 위대한 삶으로 승화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 역사를 보더라도 이 민족을 지키고 역사를 살리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특별히 우리 민족 역사에서 세계사에 자랑할만한 사건으로 남아있는 것이 기미년 삼일절 독립만세입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이 민족이 자유와 평화를 갈구하면서 외쳤던 독립만세는 삼천리 방방곡곡에 메아리쳤던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일본은 창과, 무기와, 총칼로 우리를 진압했지만 우리는 끝까지 평화와 무저항주의로 저들에게 민족의 독립을 호소했습니다. 여기에서 희생된 애국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애국자들의 희생 정신이 이 민족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애국자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서 목숨을 바친 위대한 순국 선열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이순신, 유관순, 안중근입니다.
성경은 이 민족의 가장 큰 애국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애국자일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의 애국자이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민족의 애국자이십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50절)
'한 사람이 죽어야 이스라엘 민족이 망하지 않는다' 이것은 당시에 이스라엘의 제사장이었던 가야바가 한 말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의 학대를 받으며 가난과 굶주림과 헐벗음의 천대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수많은 표적으로 굶주린 백성들에게 떡을 먹이고, 병든 자들을 고치고, 심지어 죽은 자까지 살려내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당시에 교권주의자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공회원들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로마와 결탁해서 자신들의 이권을 유지하면서 살아왔는데 만약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민중봉기를 일으킨다면 로마의 권력자들이 이 모든 책임을 자신들에게 전가하면서 자기들의 지배체제를 위협할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민중들의 봉기를 예방하고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지키려고 모여서 회의를 하는 중에 가야바가 이 말을 합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민족이 망하지 않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어찌 알지 못하느냐 이 한 사람을 죽여야 한다."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가야바는 한 사람을 죽여야 민족이 산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한 사람이 죽어야 자신들이 산다는 매국적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야바가 한 말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가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그 민족 뿐만 아니라 흩어진 전 세계의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아서 하나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라"
다시 말하면 가야바는 자기 욕심으로 예수를 죽여야 된다고 말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입을 통해서 그 민족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민족을 위하여 예수가 죽어야 된다는 것을 미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또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그 예언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스라엘을 살리시고 온 세계 민족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죽으실 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을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한국 민족의 최대의 애국자를 말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 민족을 사랑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창세 전부터 '내가 죽으므로 이 민족이 산다'는 생각을 가지고 죽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도 애국 운동을 하면서 죽었지 '내가 죽으므로 이 민족이 산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순신도 임진왜란 때 남해 바다에서 왜구들이 침략한 배를 격침시키고 왜놈이 쏜 총에 맞아 죽었지만 그가 이 민족을 구한 것은 아닙니다. 조금 희생했을 뿐입니다. 유관순도 민족을 위해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죽었지만 그가 민족을 살리지는 못했습니다.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등박문을 저격해서 죽였지만 이등박문 하나 죽였을 뿐이지 민족을 살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민족을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민족을 살리는 위대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예수와 함께 살기 때문에 나 자신도 이 민족을 살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분명한 비전과 의식을 갖고 있어야 됩니다.
민족을 살리는 믿음
이 민족을 살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나 한 사람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세계 인류가 산다는 생각을 가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각 분야에서 저마다 목소리를 냅니다. 정치가들은 정치가들이 나라를 살린다고 열변합니다. 사업가는 경제발전만이 나라를 번영시킨다고 말합니다. 군사 전문가들은 국방력을 강화하는 것이 나라 안보의 최우선이라고 주장합니다. 교육자들은 새로운 지식, 조기 교육을 통해서 새로운 조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진보적인 사상가들은 사회를 개혁해야 나라가 산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만 나라가 바로 선다'
이것은 기독교 2천년 역사뿐만 아니라 수천년에 걸친 세계 역사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나라가 망한 것은 정치, 경제 때문도 아니요, 군사력 때문이 아니라 죄 때문에 망했다." 나라의 흥망성쇠가 어떤 군사력이나 정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의가 강물처럼 흘러야 됩니다.
"의인은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 14:36)
오늘 이 민족을 살리는 믿음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죽여서 우리를 살려주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똑바른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미군철수를 반대하는 기도나 북한 핵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기도는 민족 양심을 회복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빈약할 때 미국을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국은 우리의 좋은 우방입니다. 이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해서 복음을 전해준 나라입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때 가장 좋은 연합국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해방후 가난할 때 식량을 원조해 주었습니다. 경제 협력을 통해서 우리나라가 오늘의 경제의 부를 이루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미국의 도움을 입고 여기까지 왔다 할지라도 미국을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의존해야 합니다.
오늘 이 민족 역사를 보십시오. 이 민족을 살리는 것이 뭡니까? 기독교의 복음이 이 민족을 살리고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말하든간에 복음이 이 민족을 살렸습니다. 복음이 이 민족에 들어올 때부터 이 민족은 미신을 타파했습니다. 우상을 철거했습니다. 우매한 지식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들을 수없이 배출했습니다. 민주주의 정신도 기독교에서 싹튼 것입니다.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다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 민족을 살리는 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무슨 믿음입니까? 자기를 죽이는 믿음입니다. 예수 한 사람이 죽어서 민족을 살리고 전 세계를 살린 것처럼 그 정신이 우리 속에 들어와야 민족을 살릴 수 있습니다.
민족을 살리는 사랑
민족을 살려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국민의 가슴속에 사랑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속에 독이 들어왔습니다. 외국의 침략을 통해서 들어온 독, 남북 분단으로 말미암아 동족을 원수 삼은 독, 군사독재자들로부터 학대받으면서 응어리진 독, 이 독들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이 독을 뭘로 치유하겠습니까? 이 민족을 치유할 수 있는 처방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몸을 희생해서 사랑하신 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들어가야 이 민족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나라를 사랑한다는 말속에는 국토를 사랑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좁은 땅덩이에 살면서 무덤을 수백평씩 깔고 누워있는 사람들은 애국자가 아닙니다. 자기 땅이라고 자손만대가 함께 살아야 할 땅을 마음대로 깎아서 수백평씩 깔고 누워있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옳은 일 아닙니다. 국립 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을 했다고 하더라도 무덤 만들어 거기 누워있는 것은 애국자가 아닙니다. 중국의 등소평은 죽을 때 자신을 화장시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애국적인 정신입니까?
도산 안창호 선생이 중국 남경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을 때 어느날 밤 선생을 열렬히 사모하던 애국 동지중 한 여인이 선생에 대한 불같은 정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선생의 침실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때 도산은 아버지와 같은 위엄있고 인자한 음성으로 그 여인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엇을 찾으러 왔오. 책상 위에 양초와 성냥이 있으니 불을 켜고 찾아보시오."라고 했습니다.
이 위엄있는 한마디에 그 여인은 꿈에서 깨어난 듯 말없이 나가버렸습니다. 그 후 도산은 그 여인을 만나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나는 그대가 조국을 애인으로 삼고 조국을 남편으로 삼고 섬기기를 바라오." 이런 도산의 숭고한 정신에 감동을 받고 이 여인은 그 정신을 본받아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생을 바쳤다고 합니다.
애국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일한다면 그것이 바로 애국입니다. 주부가 가정에서 설거지 할 때나 옷을 세탁할 때 세제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애국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아'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그 사랑을 받아야 이웃도 사랑하고 나라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에 큰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조사해 보면 대개 성장 과정에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라를 살리는 길이 됩니다. 부부가 불화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한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우리만의 불행이 아닙니다. 사회 전체의 불행이 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서로 웃어주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칭찬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격려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죽기 얼마 전 남을 위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에게 미소를 보여주십시오. 아주 잠시라도 좋습니다. 외로운 사람을 찾아가십시오. 비를 맞고 있는 사람에게 우산을 건네십시오. 눈먼 사라에게 책을 읽어주십시오. 잠시 시간을 내어 아이들을 돌봐주십시오. 당신의 작은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길 건너편에, 당신의 집 옆에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한 일로 좋아지고 아름다워진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기 목숨을 내놓고 죽어야만 애국이 아닙니다. 자기 목숨을 죽여서 민족을 살린 예수의 정신을 담아서 자기를 부정하고 살아가는 것이 애국입니다.
민족을 살리는 소망
지금 이 나라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성인들은 너도나도 이 역사의 부정적인 것만을 들춰서 나라가 금방이라도 망할 것처럼 떠들어댑니다. 조금만 경제가 어려워도 나라가 거덜날 것처럼 떠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끝까지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십니다. 이 나라를 지키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이 백성을 살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던 어느 집사님이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습니다. 낙심이 되어 집으로 가다가 졸업하는 조카에게 꽃을 선물하려고 꽃 가게에 들렀습니다. 꽃집 주인인듯한 할머니는 뭐가 그리도 기분이 좋은지 환한 얼굴로 찬송을 부르면서 꽃을 팔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는 늘 그렇게 기분이 좋으세요. 괴롭고 걱정되는 일이 없으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내 나이만큼 살아봐요. 왜 걱정이 없고 괴로움이 없겠오. 그럴 때 나는 예수님을 생각한다오. 양손과 양발에 못박히시고 옆구리에 창 찔리시며 돌아가셨지요. 그러나 사흘째 되는 날 부활하셔서 우리의 소망이 되셨지요. 그래서 나는 고통스럽고 앞이 캄캄할 때마다 '사흘만 참자 어두움은 사흘 뿐이다. 사흘만 소망을 잃지 말자'라고 다짐한다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집사님은 할머니의 고백에 은혜를 받고 '아무리 가슴 아프고 힘들어도 사흘만 참자 사흘만 참자' 하면서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습니다. 결국 사흘만 참자고 한 것이 수십년을 살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소망을 심는 자만이 애국자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다 망하는 것처럼 떠들어댈 때 분명한 소망을 가지십시오. 아무리 사업이 안된다고 해도 옛날 흉년에 굶주리던 때보다는 낫습니다. 경제가 어렵다고 말해도 6.25전쟁을 겪던 시대보다는 낫습니다. 전세방을 산다고 탄식해도 옛날 우리 조상들에 비하면 우리는 잘살고 있는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십시오. 만나는 사람마다 희망을 주십시오. 자녀들에게 희망을 주는 아버지가 바로 애국자입니다.
빌리그레함 목사님이 여의도 광장에서 외쳤던 한마디는 지금도 이 민족의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나는 카나다에 갔다. 아침 새 소리에 잠을 깼다. 나는 일본 동경에 갔다. 자동차 엔진 소리에 잠을 깼다. 나는 한국 서울에 왔다. 새벽 종소리에 잠을 깼다. 세계의 희망은 한국에 있다. 새벽에 깨어 기도하는 나라, 새벽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나라 이 코리아가 세계의 희망이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기도할 수 있는 한가지만 있다면 절망하지 않습니다.
링컨의 대통령 취임사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당면한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할 때 우리의 지혜와 열심만으로는 안됩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의지해야 하며 하나님을 굳게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 나라를 돌보셨으매 결국 우리나라를 어려운 위기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기도는 민족을 살립니다. 예수님은 소망이십니다."
예수 한 사람이 죽어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민족을 살려낸 것처럼 애국자이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사랑을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소망 위에 이 민족을 세울 때 이 민족은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제사장의 나라, 번영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출처/이중표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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