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데살로니가전서 1:12-18)

by 【고동엽】 2022. 11. 15.

바울사도가 여러교회에 보낸 편지들의 형식을 보면 문안과 인사로 시작한 후 본론적 인 교훈을 준후 말미에선 반드시 권면과 마지막 인사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통용되던 일발적인 편지의 형식이 기도했습니다만 바울의 경우는 여 러 교회에 보낸 편지였던 탓으로 편지내용의 신앙과 삶, 교리와 교회전반에 관한 교훈 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의 끝부분으로 권면과 인사로 구성되어 있습니 다. 권면의 내용을 중심으로 몇가지 중요한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1. 다스리며 권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교훈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 희가 알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알고"라는 것은 단순한 지식을 말하는 것 이 아니라 이해하고 알아주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를 꼽는다면 미국을 들수 있는 것입니다. 클린턴의 성 추문 사건이 불거지자 언론, 정치권, 상하양원, 종교계 할것 없이 일제히 포문을 열 어 클린턴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국회 청문회를 거쳐 그 사건이 마무리 되자 미국 의 모든 언론과 국회는 더이상 그문제로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대통령으로서의 권위가 더이상 흔들리면 안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이 말한 "너희가 알고"라는 것은 권위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사랑안에 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그뜻은 영적지도자를 귀히여기고 화목하하는 것입니다. 클린턴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만 클린턴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그의 부인 힐러리입니다. 얼마나 속이 썩고 아프고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클린턴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단 한마디도 입을 열 지 않고 자기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랬기에 부부관계가 유지됐고 가정이 깨지지 않았습 니다. 물론 거기에는 힐러리의 정치적 계산도 있었을 것입니다만 아무튼 지혜로운 여인이 었습니다. 교회란 영적지도력을 인정하고 화목할 때 평안하고 행복하게 되는것입니다. 2. 항상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기뻐하라의 반대어는 슬퍼하라입니다. 연기자들의 말을 빌리면 웃는 연기보다 우는 연기가 더 어렵다고 합니다. 갑자기 웃는 연기는 얼굴을 펴고 큰소리로 떠들고 웃으 면 되지만 우는 연기는 눈물을 흘리고 슬픈표정을 지어야 하기 때문에 더 힘이 든다 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슬퍼하라, 울어라"는 교훈 보다는 "기뻐하라"는 명령이 더 많습니다. 예수님의 공적생애의 시작역시 장례식 집에서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가나 혼인잔치집 에서 시작하셨습니다. 포두주가 모자라 걱정스럽고 우울했던 혼인잔치집에 포도주를 만들어 주심으로 기쁨 이 넘치게해 주셨습니다. 우울증 치료를 위한 의사들의 권면가운데 하나가 웃어라, 기뻐하라 입니다. 싫건 웃고나면 우울증세가 감소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방편이 될 수는 있어도 근복해결책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의사였고, 사회사업가였습니다. 한평생을 이웃을 돌보는데 바친 사람 입니다. 그가 남긴 말가운데 "내생애 가운데 몇가지 큰 기쁨이 있었다. 첫째는 하나님 이 장남 택용이를 선물로 주셨을 때 천하를 얻은 기쁨을 누렸고, 둘째는 손기정선수 가 마라톤에서 우승했을 때였다. 그런나 이런 기쁨도 스스로 회개하고 하나님에게서 죄함 받은 기쁨에는 비할바 못된다. 이 기쁨이 있어야 진정한 기독교인인 것이다"라 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쁨, 바울이 말한 그 기쁨이 돈벌고 성공하고 출세하고 누가 잘되어서 오는 그런 기쁨이 아니닙니다. 기쁨을 카이로라고 합니다. 그뜻은 유쾌하다, 행복하다, 유복하다는 것입니다. 행복 이나 유쾌한 것은 얼마나 지속되냐로 그 가치가 결정됩니다. 어떤 글을 보니까 목욕하면 하루 기분좋고, 새옷입으면 일주일 기분좋고, 결혼하면 3년 기분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믿으면 일평생 유쾌하고 행복하기때문에 우리 는 거기서 기쁨과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때 서울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신학생이 겨울방학을 맞아 시골교회에 내려와 아이들에게 서울이야기며 신나는 동화와 노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때 제가 그 선생님한테 배운 3개국어 노래가 있었습니다. "나는 기쁘다 나는 기쁘다 나는 기쁘다 항상 기쁘다" "워짱 콰일라 ∼ ∼ 창창콰알라" "아엠쏘해피 ∼ ∼ 해피올더데이" 라는 노래였습니다. 주안에 있어야 항상 기쁘고 행복합니다. 주안에 있어야 그 행복이 도망치지 않습니 다. 3.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권면입니다. 초대교부 크리소스톰은 "환난 중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방법을 쉬지 않고 기도 하는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24시간 쉬지않고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 상 불가능합니다. 잠도자야하고 밥도 먹어야 하고 일도해야하고 사람도 만나야 하고 쉬기도 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 기도를 생활화 하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생활화란 일하때는 기 도하고 밥먹을 때도 기도하고 놀때도 기도하고 사람만나는 때도 기도하고 잠잘때도 깰 때도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 시간을 정하라는 것입니다. 새벽에 시간을 정할 수도 있고 저녁기도 시간 을 정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낮시간을 정하여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의 삶의 구조나 시간형편은 낮시간이나 밤시간에 기도하기가 어렵습니 다. 힘들고 피곤하겠지만 새벽시간이 가장 기도하기에 좋습니다. 주님도 새벽미명에 홀로 감람산으로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시인 다윗도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시계에 달린 큰 추가 힘들게 왔다 갔다하는 걸 보고 얼마나 힘들까 싶어서 시계 추를 떼어 냈습니다. 그랬더니 그 순간 부터 시계 바늘은 서고 시계는 죽어 버렸습니다. 새의 날개는 무겁습니다. 그러나 날개때문에 날아갑니다. 배의 돛역시 무겁지만 그 것때문에 항해가 가능합니다. 비행기 날개 역시 거추장스럽지만 날게 없으면 비행기 도 날지 못합니다. 우리 역시 힘들고 고달파도 쉬지않고 정한 시간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영이 살고 힘을 얻고 비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기도 시간을 늘리라는 것입니다. 하루 5분 기도하던 사람은 10분으로, 10분기 도하던 사람은 1시간으로 그 기도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1952년 한국전쟁이 끝난 12월 어느날 밥 피얼스 박사와 빌리 그레이엄 박사가 한국 을 방문했습니다. 피얼스박사가 빌리그레이엄박사에게 한국교회는 새벽마다 모여 기도 를 드린다고 말하자 빌리그레이엄은 "그것은 완전히 모든 것이 갖춰진 기성 교회에서 나 가능한 일이지 천막을 치고 예배하는 개척교회에서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대답했습 니다. 그러나 피얼스는 내일새벽 4시반에 일어나 천막교회를 찾아가 보자고 했습니다. 다 음날 새벽 두사람은 어둡고 추운새벽 길을 걸어 그들이 말한 천막교회를 찾아 갔습니 다. 기둥과 천막만 서있는 꽁꽁언 땅 바닥위에 장작개비를 깔고 앉아서 새벽기도을 드 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새벽 모인 사람들은 189명이었습니다. 추워도 더워도 힘들어도 피곤해도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방송상담을 위해 보낸 편지가 있었습니다. "어떤 흑인 목사님이 오셔서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성령충만한 집회가 되려면 찬송 을 많이 부르고 기도해야 된다면서 설교는 안하고 계속 찬송을 부르게 했다는 것입니 다. 그분의 질문은 왜 빨리 설교나 할 일이지 찬송만 계속부르냐는 것이었습니다. 찬 송 30분, 기도 30분, 설교 30분이라면 가장 이상적인 균형 잡힌 조화라고 대답했습니 다. 그리고 찬송은 곡조 부친 기도기 때문에 많이 부를수록 좋습니다. 찬송부를때 옥문이 열렸고 찬송부를때 성령이 임재하셨습니다. 기도와 찬송하는 시 간은 늘어날수록 좋습니다. 잡담하고 신문보고 잡지보고 사람만나는 시간보다 하나님 만나는 시간이 길어져야 합니다. 기도 시간을 늘립시다. 기도 시간을 정합시다. 새벽을 깨웁시다. 4.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늘 기뻐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은 늘 기쁘고 늘 감사 합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기쁨이 떠나고 감사가 떠납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성밖을 떠돌던 열사람의 나환자가 주님을 만나 병고침을 받 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홉사람은 말한마디 없고 저갈곳으로 가버렸고 그들중 한 사 람만 주님을 찾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주님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나(17:17)"라고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아홉은 나병은 고침받았지만 영혼이 구원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찾아와 감사하며 경배했던 그 한사람은 병고침도 받았고 구원도 받았 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감사는 받은 은혜에 대한 응답이며 구원받은 증거라는 것입 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 은혜로 구원받고 죄사함 받은 사람이라면 감사를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9:15에서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 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감사해야 합니까? 날마다 순간마다 감사하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감사 합니다"라고 마음 속에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언어나 고백은 마음 먹은대로 되기때문입니다. 그리고 물질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드리고 바치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하다고 고백합시다. 마음속에 감사 신앙을 가집시다. 그리고 물질을 감사함으로 드립시다. 주님. 감사합니다. 아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