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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하나님6(로마서 10 : 1 ~ 8)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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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하나님6(로마서 10 : 1 8)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장사한 지

 

사도신경 강해 아홉 번째인 오늘은 예수님께 대한 고백 가운데서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장사'했다는 대목에 대하여 공부할 차례입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왜 이토록 고난 당하신 것을 거듭해서 고백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빌라도에게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이렇듯 예수님의 고난을 거듭해서 구체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은 그 고난이 우리 죄의 구속(救贖)을 위하여 대신 치러주신 대가이기 때문입니다. 그 치러주신 댓가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안다면 내 생애, 내 생명의 값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이 문제를 'Archimedean Method'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의 크기를 앎으로 우리 죄의 크기를 알 수 있다는 이 과정은 마치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발견한 과정과도 같다고 해서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액체 속에 있는 물체의 무게는 그 물체가 밀어낸 액체의 무게만큼 가벼워진다'라는 것이 이른바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입니다. 이것은 물체가 액체의 부력(浮力)을 받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 원리는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요 물리학자인 아르키메데스가 왕의 명령으로 왕관이 순금으로 되어 있는지를 알기 위하여 연구를 하던 중에 목욕탕 속에서 자신의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깨닫고 발견하였다 합니다. 이와도 마찬가지 이치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알면 나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십자가의 고난을 거듭 음미해야 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컸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만 이 죄가 사함 받을 수 있었단 말입니까?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토록 거듭해서 구체적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예수님의 죽으심이 참되고 구체적인 것임을 증거하는 데에 이 고백의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설명하는 내용은 성경의 여러 곳에 있습니다. 그 말씀들을 다시 한번 음미해보면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50절은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라고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는 장면을 아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숨을 거두는 그 시각, 그 순간이야말로 결정적인 시각입니다. 또 마가복음 1539절은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라고 말씀하여 예수님의 죽으심이 얼마나 확실하고 놀라운 사건이었던가를 웅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우고 처형하는 일선 지휘관이 예수님의 장엄한 죽음을 목도하고 탄식하듯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토로하는 것일진대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사람인 동시에 참으로 죽으셨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그 죽으심이 얼마나 장엄한 것이었으면 원수에게까지 그렇듯 감명을 주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346절에서는 특별히 "예수께서 큰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라고 말씀하여 '운명'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930절에서도 운명하시는 모습을 생생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네 복음서가 한결같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장면을 이렇듯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죽음이 참이기 때문입니다. 가사 상태도 아니요, 한 사람의 완전한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을 말씀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례치른 것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이라고 하는 아리마대 사람이 예수님 시신을 정한 세마포에 싸서 자기네 새 무덤에 안치하고 큰돌로 막아놓았다고, 네 복음서가 똑같이 구체적인 설명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마가복음 1542절로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했다고 까지 말씀합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 오래냐 묻고 백부장에게 알아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주는지라……" 유대에는 본래 시신을 오래 두지 않는 관습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관습으로는 죽은 지 24시간이 지나야 장례를 치를 수가 있는데, 유대사람들은 24시간도 지나기 전에 장례를 치른다고 합니다. 더운 지방이어서 시체가 쉽게 부패하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무덤에 장사하는 것입니다. 부자들이면 시신에 향유를 바르고, 보통사람들은 그냥 세마포로 싸서 돌로 된 굴속에다 안치하고 입구를 돌로 막습니다. 그들은 시신을 땅 속에 묻지 않습니다. 지금도 유대사람들은 돌무덤을 사용합니다. 돌로 된 굴이 없는 곳에서는 벽돌이나 대리석으로 집처럼 조그맣게 굴을 지어놓고 그 속에다 시신을 안치하고 입구를 막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아무 때에나 가서 열어볼 수 있도록 합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자기네 가족을 위하여 만들어놓았던 새 무덤에 장사지냈고, 그 무덤을 큰돌로 막았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 무덤을 막은 돌은 20여 명이 힘을 합쳐야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큰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큰돌로 입구를 막아버린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혹시 되살아나시더라도 무덤 밖으로 나오실 수 없게, 혹은 누가 시신을 도둑질해가지 못하도록 하자는 속셈이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시신을 완전히, 아주 철통같이 매장해버렸다는 것이 성경에 기록된 바 예수님의 고난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죽음에서 장례까지, 성경이 저렇듯이 세세하게 밝히 말씀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들 사람의 여느 죽음과 똑같이 죽어 가셨다는 것을 의심 없이 믿게 하려 함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한 말씀이 복음서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223절에서도 예수님의 죽으심이 한 사람의 완전한 죽음이었다는 것을 베드로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라고. 또한 사도 바울도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고 하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빌라도에게 죽여달라 하였으니(13:28)"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이렇듯 예수님의 인성을 일삼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이렇게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인성이 분명해져야 예수님의 고난이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분명해지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쇼(show)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고난과 고통을 당하더라도 아프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 고난 운운은 한낱 형식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저렇듯 생생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설명하거나 믿기가 어려웠던 반면에 예수님의 인성은 오히려 믿기가 쉬웠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과 같이 다니고, 만나 뵙고, 손을 잡고, 식사하는 것을 불편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하나의 사람으로 비쳤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의 인성이 믿기 어려워집니다. 예수님께서 병 고치시던 일, 물위로 걸어가시던 일, 죽은 사람을 살리시던 일이 있는 데다 부활 승천까지 하시고 보니 눈에도 선한 살아생전의 예수님 모습이 무엇에 홀려 환상으로 뵈온 것이 아닌가도 싶고, 그러다 보니 예수님은 역시 여느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다, 그 몸은 여느 사람의 육신과는 다른 것이었다-라고 발전하여 마침내는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고 신성화(deify)하게까지 됩니다. 그리하여 교리를 거꾸로 잡는 이른바 이단(異端)이 나타납니다. 이를 경계하여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 특히 요한일서 4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는 이단이라고 못박아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사를 보면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하여는 상호 긴장관계를 가지고 시대에 따라 이해를 달리하는 일이 많았음을 살필 수 있습니다.

저렇듯, 예수님의 생전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믿기가 어려워서 애를 썼는데,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는 예수님의 사람되심, 곧 육체로 오셨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고, 그 고난받으심이 얼마나 확실하고 사실적인가를 강조하고자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노스틱주의(영지주의)라고 하는 이단사상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철저히 이원론에 근거한 사상으로, 사람은 육()이요, 하나님은 오직 영()일 뿐이므로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그리스도가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예수님께 씌었던 것이라고 강변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의 인간이고, 그 인간 위에 비둘기 모양으로 그리스도가 오셔서 얼마동안 계시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에 그 비둘기 모양의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가시고 육체만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볼 수 있도록 현현(顯現)된 몸- seeing body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사람들이 3년 동안 '홀렸었다'하는 소리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어떤 영이 사람의 눈에 보일 만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군데군데 나타난 것일 뿐이라고, 완전히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하나님께서 어찌 그렇게 되실 수 있느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십자가의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라고 하는 한 인간이 당한 것이 되어 결국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영적인 존재가 되고 맙니다.

성경은 노스틱주의를 엄히 부정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지내졌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이는 분명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온전한 '인간' 그리스도입니다. 장사지냈다고 한 것은 그 시신이 틀림없는 인간 시신(屍身)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한군데 더 보십시다. 요한일서 55절로 보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라고 말씀합니다. 물로 임하셨다 함은 세례 받으신 것을 말씀함입니다. 이는 세례 받으실 때에 영으로 임하셨다고 하는 영지주의의 주장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피로 임하셨다 함은 예수님께서 분명한 인간으로 오셔서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을 말씀함입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확실한 인성(人性)을 분명하게 일러주기 위해서 말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그 고난은 절대적이고 완전한 고난이요, 그리스도의 그 인간 된 경험은 순간적이거나 찰나적인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한 생애의 경험입니다. 세상에 나실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의 모든 경험이 한 인간으로서 체험할 수 있는 완전한 것이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이 아니고는 인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회사의 사장님이 식당에 간간이 나타나 근로자들과 나란히 앉아 함께 점심을 듭니다. 열심히 일한 뒤에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점심은 보리밥과 된장국과 약간의 반찬뿐입니다. 이렇게 빈약한 식사를 그들과 똑같이 하곤 합니다. 이것을 보는 근로자들의 반응은 사장님이 자신들의 어려움에 동참한다고 해서 고마워하는 사람들도 있고, 늘 잘 잡수시다가 가끔씩 나와서 이런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돈 많은 양반에게는 별미가 될 수 있겠지 하고 시큰둥하게 여기는 축도 있습니다. 어느 쪽의 생각이 가타고 보십니까? 아무래도 후자의 생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평소 잘 차려서 먹다가 이따금씩 보리밥 한 그릇쯤 먹는 것, 별미일 수 있습니다. 남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아십니까? 요즘도 보면 고아원에서 며칠 봉사 좀 해본 것 가지고 그들의 고난에 동참했다고 떠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이 역시 진정으로 그들의 고난에 동참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제가 신학대학에 다닐 때, 광주 근교의 송정리라는 곳에 있는 '백선육아원'에 가서 겨울방학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원장님 댁에서 쉬라는 것도 마다하고 고아들의 고난에 동참해보겠다고 고아들과 함께 자고 먹고 생활했습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고 나니 그들의 고충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들의 고난에 참여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시고 우리의 고난 속에 오신다는 것은 어쩌다 식사 한번 같이 하시고 가다오다 내 아픔 한번 어루만지시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구유에 나시고, 더불어 사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시고-그럼으로 비로소 우리의 고난에 온전히 동참하신 것이 됩니다. 고난에 조금 참여하는 듯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가서 뒤로 빠지는 것으로는 안됩니다. 우리와 다름없이 같이 죽으셔서 장례까지 끝남으로 고난에 동참하신 것이 됩니다. 이렇듯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인즉 찰나적이거나 연극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입니다.

나시고, 사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에야 비로소 완전한 부활의 능력, 승리의 능력을 행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 죽으심과 장사됨이 있음으로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옛날사람들은 흔히 위대한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들 생각했습니다. 죽지 않아야만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 위대한 분이 신데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장사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어떤 축복을 기다리십니까?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복을 주시려거든 돌을 먹어도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게, 공해가 아무리 심해도 병에 걸리지 않게, 모든 시험에는 합격만 하게, 무엇이든지 하는 일은 잘되게만 해주십사고, 심지어는 죽지도 않게 해주십사고 기도합니다. 보아하니 건강하면 복 받은 것이요 병들면 저주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 마지막에는 천당에 못 갈 것 같아 걱정입니다. 혹시 그분들 병들어 죽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할 것입니까? 저주받아 죽는다고 할 것입니까? 모름지기 우리는 죽음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통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주시는 극복의 은혜를 깨닫고, 죽음을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이 생길 때까지 훈련을 쌓아놓아야 '할렐루야' 하고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병에 걸린 것은 다 저주요 죄라고만 생각한다면 마지막에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는 정말이지 뭐라고 할 것입니까? 하나님은 안 계시다고 할 것입니까? 말도 안됩니다. 마땅히 우리는 나의 신앙을 다시 한번 정비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십시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그가 병들어 죽게 되자 누이들이 예수님께 가서 오라비의 병을 고쳐주십사 하고 와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을병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결국 죽고 맙니다. 오시라고 할 때에 오시지도 않고, 죽을병이 아니라고만 하셨으니 누이들이 예수님을 원망하기에 충분합니다. 장례를 치른 지 나흘째에야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나가 맞으면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원망하는 듯한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말에 괘념치 않으시고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마지막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하고 마리아는 좀 볼멘소리를 합니다.

무덤으로 향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십니다. '오시랄 때는 안 오셔 놓고 이제 와서 새삼스레 우시기는……' 주님 우시는 것보고 나사로의 누이는 속으로 이렇게 투덜거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죽고 나서 우실 바에야 처음부터 죽지 않게 하실 것이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11:37)"하고 바리새인들은 드러내어 비아냥거렸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에 이르시어 예수님께서는 입구를 막아놓은 돌을 치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나서서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말씀드립니다. 이제 와서 무덤을 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어이없어 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나사로가 죽도록 내버려두시고 시간을 지체하셨을까요? 주님이신 데 뜻 없이 그렇게 하셨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애시당초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하실 수 있는 예수님께서 시간을 지연시켜 죽은 다음에야 살려내신 데에는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깊은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죽지 않기를 바라는 신앙으로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기독교의 진리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죽고 장사되고, 그 다음에 살아나는 것입니다. 죽지 않는 이적을 나타내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가 아닙니다. 죽은 다음에 살아나는 부활의 능력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이 깊은 뜻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죽지 않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병들지 않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병들고 죽는 이 과정을 그대로 두고 죽은 다음에 다시 살려내는 부활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으며, 여기에 기독교 진리의 진수가 있음을 잊지 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오묘한 뜻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죽고자 했고, 실제로 순교를 했습니다. 나아가 그는 실존적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I am crucified with Christ(2:20)"라고 갈파했습니다. 위대한 말씀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장사되었다, 그리고 부활의 능력으로 오늘을 산다-이 같은 고백적 신앙이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사실상 이미 오래 전에 죽은 것이요, 앞으로 남아 있는 삶은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살든 짧게 살든, 건강하게 살든 병들어 살든, 부유하게 살든 가난하게 살든 우리는 할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범사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이러한 자세가 그리스도인 된 바른 자세입니다. 그런데 이미 죽은 바 된 우리에게 왜 이리도 소원이 많습니까? 심지어는 복을 주시면 믿고 안 주시면 믿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 '협박'까지 합니다. 이런 믿음은 십자가 없는 믿음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이것이 그리스도인 된 우리의 고백임을 명심할 것입니다.

영어로 된 사도신경을 보면 장사되었다고 하는 고백 다음에 지옥까지 내려가셨다(into the hell)고 하는 고백이 덧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말씀만은 괄호 안에 들어가 있거나, 다른 고백보다 조금 작은 글씨로 씌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도신경을 외고 있을 때 보면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하는 대목은 조용하게 외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고, 아예 생략하고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좀 아리송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영어로 된 사도신경에는 장사되고 지옥까지 내려가셨다고 고백되고 있습니다.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음부까지 내려가셨다"가 됩니다. 그런데 "음부까지 내려가셨다"라는 이 고백은 고대의 사도신경에는 없습니다. 그로부터 약 100년 후에 이 고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왜 추가되었는지 확실치 않아 괄호 안에 넣어놓고는, 어떤 교단에서는 외고, 어떤 교단에서는 외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 교단에서는 이 고백을 외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신경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이 고백에 관한 설명을 간략하게 해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데는 조직신학적 방법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의 교의를 학술적 지식에 비추어서 계통 있는 진리로서 표명하는 신학'을 조직신학(組織神學)이라 하는데, 이에 입각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into the hell"에서 'hell'은 우리말로 하면 '지옥'이지만 원문을 따지고 보면 '음부'라고 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히브리 원문은 '쉬올(Sheol)'의 의미를, 헬라어는 '하데스(Hades)'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쉬올' '하데스'는 우리말로는 '음부(陰府)'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음부란 죽은 사람들이 가서 머무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형벌을 받는 곳이 아닙니다. 죄지은 것을 벌받는 장소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쉬올'이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죽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묘하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죽음'이라는 개념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어떤 공간이나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함입니다. 괜찮은 해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구약성경에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15:15)"라든가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7 : 9)"라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음부' 역시 죽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헬라어에는 '하데스' 외에 '게헨나'라는 말도 있습니다. '게헨나'는 죄인들이 형벌 받는 곳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25:30)" 하신 말씀의 '바깥 어두운 데''게헨나'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내려가셨다는 것은 죽으심을 의미하는 것이지 죽음의 망령들이 가는 곳, 형벌받는 곳에 가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음부까지 내려가셨다"라고 하는 고백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육체만의 죽음이 아니요, ()과 육()이 아울러 죽으신 완전한 죽음이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자 함입니다. 육체만이 아니라 영까지 완전히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영은 그대로 있고 육체만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전인격적인 완전한 죽음이라는 것을 확실히 이해시키기 위하여 'into the hell'을 삽입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죄는 완전히 죽어 땅 속에 묻혔음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 정욕, 욕망, 허영…… 세상적인 이것들은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혔을 뿐만 아니라 아주 무덤에 장사되고 말았습니다. 완전히 썩어 없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각자에게 남겨진 생을 그리스도로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었다는 고백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나라고 하는 존재는 장사되어 완전히 사라졌음을 고백함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부활의 능력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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