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강해
김해곤 목사
본문:마태복음 6:9-13절
제목: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①
오늘부터 우리는 몇주동안 ‘주기도문’에 대해 함께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도를 흔히 ‘주기도문’이라고 지금까지 말해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주님이 하신 기도인줄 아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기도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기도인 동시에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본문의 시작은 방금 우리들이 읽었던 것처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입니다, 이 말씀속에서 우리는 먼저 기도란 스스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주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도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 여러분중에 평소 스스로를 생각해볼 때, 내가 기도를 잘 못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제부터라도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또한 기도는 잘 하는 것 같은데, 응답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주님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하시면서 기도의 모범을 제시해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몇가지 특징이 발견되어 집니다, 그 첫 번째 특징은 매우 간결하다는 것입니다, 눈으로 얼핏 오늘 본문을 보아도 그 사실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9절에서 13절까지 별로 길지 않은 기도입니다, 주일학교 아이들도 몇차례 반복하면 쉽게 외울 수 있는 짧은 내용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한 내용을 담고 있는 요한복음 17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내가 기도를 잘 못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의 경우를 보면, 그 이유가 다른 사람들처럼 기도를 길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은 기도를 잘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은 20분, 30분, 심지어 한시간, 두시간 기도를 한다는데 나는 5분하고 나면 기도할게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기도를 잘 못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기도를 못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비하(卑下)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길지 않았습니다, 매우 간결했습니다. 간결하게 기도해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저희집에 둘째아이가 제가 생각기로는 다른 아이에 비해 말이 조금 느린 것 같습니다, 지금쯤이면 그래도 몇 개의 단어를 연결해서 적어도 서너마디정도는 한꺼번에 할만도 한데 아직까지 서툽니다. 그래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때 말을 줄여서 합니다,
예를 들어 다른 아이들이 “아빠! 나도 따라갈래요”라고 말한다면 저희집 아이는 “아빠! 따”라고 합니다, “아빠! 차 타고 가요”라는 말도 “아빠! 차”하면 그만입니다, “엄마 잠잘래요”라는 말도 “엄마! 코”하면 끝입니다, 그러나 저나 제 아내는 아이의 말을 다 알아 듣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기도가 간결하다고 해서 기도를 잘 못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길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조차 파악이 안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첫째아이가 유치원을 갔다오면 가끔 유치원에서 있었던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습니다, 한참 듣고 있노라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 그 의도가 파악이 안될때가 있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지 말고 요점만 말해봐! 아빠가 도무지 헷갈려서 무슨 말인지 잘 못알아듣겠어”라고 말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매우 쉽고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기도를 잘 못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의 또 다른 이유를 살펴보면 남들처럼 어려운 말을 썩어가면서 유창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은 기도를 못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아니 쉽고 매우 단순합니다. 누가보아도 이 정도의 내용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말 자체가 어렵게 번역된 것이 흠이지만 새번역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받들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옵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우리가 용서한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옵시고 악에서 구원하여 주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하도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다니는 개역한글판의 번역보다 훨씬 쉽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도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 기도를 어렵게 하려고 애를 쓸 필요없습니다. 그저 쉽게 또 단순하게 하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김진홍목사님이 수원교도소에 있을 때일입니다, 한번은 수원교구의 신부님이 오셔서 죄수들 앞에서 설교를 하셨다고 합니다, 50분정도 주어진 시간에 이 신부님께서 파스칼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샤르트르가 어떻게 야스퍼스가 어떻고 하면서 현대철학자들의 얘기를 늘어놓더라는 것입니다,
김진홍목사님이 가만히 앉아 있다가 도대체 몇 명이나 말하나 헤아려 보았더니 자그마치 27명의 이름을 들먹이더라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죄수들이 얼마나 지겹겠습니까? 죄수들은 단 5분도 정자세로 앉아 있지 못하는데 50분 동안을 알아 듣지도 못하는 현대 철학자들 얘기했으니 … 그런데 다 마치고 나오는데 한 죄수가 투덜거리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내가 자식 낳아서 예배당에 보내면 성을 확 갈아버리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김진홍목사님이 화를 진정시켜 볼양으로 “여보시오! 그건 예배당이 아니고 성당이요 성당” 했더니 그 죄수가 “그게 그거지 뭐”라고 하더랍니다.
어렵게 말하는 이유는 자기 속에 충분히 소화가 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학창시절 실력 있는 선생님일수록 쉽게 가르치셨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말을 많이 늘어놓으면 자신도 그 뜻을 잘 모를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쉽게, 단순하게 기도하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주님도 기도를 가르치시는데 어려운 문장을 길게 늘어뜨려 말씀하시지 않고 쉬운 문장을 간단명료하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세 번째 특징은 비록 간단하고, 쉬운 말을 사용했지만 기도의 본질을 빠트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잘하는 기도는 본질을 빠트리지 않는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을 크게 두부분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하늘에 속한 부분이고, 뒷부분은 땅에 속한 부분입니다, 십계명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습니까? 1-4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고, 5-10계명은 사람에 대한 계명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사람에게 있어서 첫 번째 되는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다음계명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두 번째가 땅에 대해서입니다, 아무리 유창하게 기도를 해도 땅에 대한 것만 기도했다면 그 기도는 잘한 기도가 아닙니다, 또 하나님에 대한 기도만 하고 땅에 대한 기도를 빠트린다면 어쩌면 그 기도는 위선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항상 첫째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두 번째가 땅에 대해서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아는 자입니다, 만약 기도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순서에 따라서 하나님께 대해 먼저, 그리고 그 다음 땅에 대한 것, 설령 이렇게 기도했다할지라도 자신의 삶의 우선순위가 땅에 대한 것이 먼저고 그 다음이 하나님에 대한 것이라면 그 사람은 참된 기도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도의 본질은 단순히 순서에 읊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그 순서에 따라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남들앞에 유창하게 기도하고도 삶의 우선순위가 변하지 않는 사람이야마로 세상에서 제일 기도를 못하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남들앞에서는 유창하게 말을 못해도, 그래서 간단하게 몇마디 못하고 기도를 마무리 지어도,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렇게 변화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이 지구상에서 가장 멋진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멋진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제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어떤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는 내용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기도의 특징은 하나님앞에 구구절절이 수식어가 많이 붙는데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전지전능하셔서 역사를 주관하시며 무소부재하시고 온 천하만물을 다스리시는 만군의 주 여호와 아버지 하나님”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요즘 우리들이 기도하는 모습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다보면 하나님이 참 위대하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는 있지만 그분이 너무 우리와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저 하나님을 부를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만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와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내 삶과 무관하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저의 아버님은 사업을 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업이 얼마나 잘되었든지 제가 살았던 동네에서 저의 집이 제일 잘 살았습니다, 학교에 가도 저의 반에서 저의 집만큼 잘 사는 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저를 참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업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실때가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한번 집에 오시면 괜히 낯설게만 느껴지곤 했습니다, 제가 막내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저를 보면 귀여워 하셨지만 저는 왠지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물론 질서가 있어야겠지만 너무 위대해 보여서 가까이 다가갈수 없다면 그리고 내 삶과 관련이 없다면 그것은 오히려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든 다가가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수 있는 그런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그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제가 아버지가 되기 전에는 아버지의 심정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식을 낳고 아버지가 되어보니 정말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분이십니까?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녀를 향해 가지고 계신 것과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아니 그보다 더 넓고 깊은 마음으로 다가오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번째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셨습니다. 이 기도의 내용은 십계명중 세 번째 계명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올 추석은 아무런 사고없이 지나가는가 했더니 아주 끔찍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집단 가출해서 함께 생활을 해 오던 폐쇄적 종교집단의 목사와 신도 7명이 추석인 지난 5일 강원도 양양군 남대천 부근에서 승합차안에서 집단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영생교회의 우종진 목사와 친족, 그리고 광신도들로 밝혀진 그들로 인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교회들마저 곤혹을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또 지난 문민정부 당시 부정부패와 관련된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이 교회의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뉴스를 접할 때마다 우리 스스로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즉 “사이비 목사와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교인들 때문에 우리까지 도매급으로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참 그렇습니다. 요즘 이래 저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는 것은 물론이고 전도의 문이 꽉 막혀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우리모두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이비 목사와 교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데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통과 보수를 주장하는 우리들이 정작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할만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하셨습니다, 그런데 빛으로 소금으로 역할을 잘 감당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잠을 잘 때 넥타이를 메고 잡니다, 왜 넥타이를 메고 주무십니까? 물었더니 “예수 믿는 사람이 거룩해야지요”라고 대답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 목소리가 갑자기 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위기를 잡고 목소리를 밑으로 쫙 깔아서 기도합니다, 그래서 “왜 기도할 때 목소리를 밑으로 쫙 깔아서 기도하십니까?”라고 물었더니 “기도할 때 거룩하게 해야지요”라고 대답합니다, 이런분들을 두고서 거룩의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많은 교회들 중에 개인적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설교시간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자주 등장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로부터 편지를 받을 무렵은 그들이 예수를 믿은지 얼마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기간동안에도 그들에게는 믿음의 역사가 있었고, 사랑의 수고가 있었고, 소망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소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뿐 아니라 각처에 퍼졌고 그들은 모든 믿는자의 본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받은 교회로 또 믿음의 소문이 아름답게 퍼진 교회로 하나님께 영광돌린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도 문제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는 삶을 살지 않는 것은 더 큰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할 수 있습니까? 세상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밝은 빛이 되고, 맛을 잃고 부패한 세상을 향해서는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고, 사랑을 위해서는 열심히 수고를 하고 힘들때에 언제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인내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부분이 “나라이 임하옵시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나라는 어떤나라입니까? 세상의 정치적인 나라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나라는 어떠나라입니까?
하나님 나라는 크게 두가지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천국’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가는 하나님나라를 뜻하는 것으로써 이것은 장소적인 개념입니다, 어딘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아뭏튼 우리가 죽으면 가게되는 천국을 의미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입니다. 이것은 장소의 개념이 아닌 통치의 개념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국의 개념보다는 통치의 개념이 훨씬 더 강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죽어서 분명히 천국에 갈것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에도 그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단칸셋방에 살아도 예수를 모시고 살면 그곳이 천국입니다. 실직을 해서 잠시 어려움을 겪어도 예수를 모시고 살면 실직의 아픔 속에서도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장 12-13절에 “내가 비천에 처할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예수를 모시고 사는 사람들만이 할수 있는 고백입니다, 천국을 경험하면서 살면 지금 처한 잠깐의 어려움 때문에 쉽게 좌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속에서 새롭게 힘을 얻고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그처럼 열심히 따라다녔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에 속한 나라를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를 따라다니면 건강얻고 예수 따라다니면 먹을 것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예수 따라다니면 정치적 억압에서 해방되리라 생각을 해서 열심히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 속한 나라를 거부하시고 하나님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속한 나라를 구하고 찾습니다. 그래서 관심이 물질과 건강과 자녀에 대한 축복에 쏠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예수를 안믿어도 얼마든지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한번 여러분의 주위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믿는데 기가 막히게 잘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안 믿는데도 불구하고 나이 80-90이 되어서도 청년처럼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정말 그것이 목적이라면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 포기하셔도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 안 믿어도 얼마든지 건강하게 사실 수 있습니다, 예수 안믿어도 얼마든지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사실 수 있습니다. 예수 안믿어도 여러분의 자녀를 세상적으로 얼마든지 훌륭하게 키울 수 있습니다, 예수 안믿어도 인격적으로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세상사람들에게 존경받으면서 살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믿으면 하나님나라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예수 안믿으면 천국시민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 안믿으면 영생을 소유할수 없고 주님의 주시는 평안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소유하고 천국시민이 되는 것은 세상에서 부유하게 살고 건강하게 살고 칭찬 받는 삶을 사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기도는 어떠합니까? 예수 믿는다고 말하면서 밤낮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이 물질과 건강과 출세와 자녀에 대한 축복이라면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삶을 사는 것입니까? 물론 이런 것을 기도하지 말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 기도하도록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천국이 되고, 우리교회가 천국이 되고, 우리의 나라가 천국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배워야 합니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워야 합니다, 이제 몇주동안 계속해서 여러분을 주님이 가르치시는 기도의 학교로 초대합니다, 주님이 가르치시는 기도를 배워 참된기도, 올바른 기도가 여러분의 평생에 함께 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마태복음 6:9-13절
제목: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②
어린시절 저의 집에 ‘식모’가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파출부’지만 사실 그 당시 ‘식모’는 오늘날의 파출부와는 조금 다릅니다, 집에서 함께 기거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여러분이 저의 집을 거쳐 가셨는데 아직도 제 기억속에 남는 분이 한분 계십니다, 나이가 예순이 거의 다 되신 분이셨는데 제가 그 분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분이 늘 시간만 있으면 벽쪽을 향해 머리를 두고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린 저는 그분을 보면서 처음에는 “야! 우리집에도 다니엘 같은 분이 계시는구나!”하고 참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그런데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그분의 기도가 좀 특이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무언가 주문을 외우듯이 일정하게 반복되는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관심을 가지고 그분의 기도를 들어보았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려웠습니다. 훗날 알고 봤더니 그분이 ‘남묘호랑케교’를 믿는 분이셨습니다,
여러분!
이방종교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차이는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이방종교는 그들이 믿는 신과 인격적인 만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드리는 기도는 그저 주문을 외우듯이 일정하게 반복되는 기도입니다.
요즘 가정마다 전화를 걸면 자동으로 응답하는 장치를 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처음 이 자동응답기가 나왔을 때, 전화를 걸면 어떤 분은 이렇게 녹음을 해둔분도 계셨습니다.
“안녕하세해요! 제 이름은 김아무개구요, 제 아내의 이름은 이아무개입니다, 저의 집에 전화를 걸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한 하루가 되시구요 삐소리와 함께 메모를 남겨두시면 돌아와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참 그리고 며칠 있으면 저의 집에 식구가 한명 더 늘어날거에요 축하해주세요” 아예 며칠 뒤에 있을 일까지 다 자동응답기에 녹음을 해 두신분들도 있습니다, 이런경우 다 듣고 있으려면 정말 대단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래도 요즘은 좀 세련되어서 이렇게까지 하는 분은 없고 “안녕하세요! 누구네 집입니다, 저는 외출중이오니 잠시후 삐 소리와 함께 메모를 남기시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삐’합니다, 이 정도면 그래도 양호한 편입니다, 그런데 아주 최근에는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동응답기에 대해 사람들마다 보이는 반응은 시시각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안녕하세요”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그냥 끊어버리는 분도 계십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도 한 두번은 다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왜 전화를 끊으셨나요? 아마도 상대가 없는데 얘기하는 것이 쑥스럽거나 아니면 “나중에 다시 전화하지”라는 생각으로 끊으셨을 것입니다, 아무 말도 없고 ‘삐’소리만 나는 경우에는 불쾌한 생각이 들어 끊어버리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기야 지금은 워낙 자동응답기에 익숙해져서 그래도 많은 분들이 음성으로 메모를 남깁니다, 하지만 메모를 남긴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한결같이 말하는 투가 매우 부자연스럽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기만 합니다,
어떤분은 아예 헛기침을 몇번씩 하고나서야 말하는 분도 계십니다. 또 용건은 다 말하고도 끝 마무리를 어떻게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상대방이 없는 대화였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인 만남없이 혼자 중얼대는 말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방종교의 기도가 이와같습니다, 인격적인 만남이 없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혼자 주문을 외우듯이 중얼대다가 끊나는 기도가 이방종교의 기도입니다, 제가 이방종교라고 하니까 굉장히 어렵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은데 쉬운 예로 불교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불교에서도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는 흔히 이를 가리켜서 ‘불공’이라고 합니다, 불공에 인격적인 만남이 있습니까? 거기에는 기도하는자와 기도의 대상이 서로 만나는 ‘만남’이 없습니다, 그저 온갖 정성을 다해 치성을 드리고 반야심경을 주문 외우듯이 계속해서 외우는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속에는 인격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인격적인 대화가 있습니다, 기도는 공을 쌓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자와 기도의 대상이 서로 주고 받는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지금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기도를 일정한 형식을 갖춘 주문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가르치고 있고, 인격적인 대화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대화는 모름지기 주고 받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일방적인 말은 대화가 아니라 ‘명령’이거나 ‘선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인격적인 만남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주고 받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에서 이루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이하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중세시대 한수도원에서 수도사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에 대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어떤제자는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굳이 감옥이 아니더라도 자유가 없는 곳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몸이 갇혀야만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할수 없다면 그것도 자유를 억압당하는 것입니다, 글로서 생각을 자유롭게 펼칠수 없다면 그것도 자유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차이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감옥에서는 하루가 불평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수도원의 하루는 기쁨과 감사로 시작합니다, 이것이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옥’과 다른 것은 그곳에는 언제나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까? 마땅히 이땅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주로 이땅에서 물질이 풍성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건강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자녀에게 축복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우리에게 기쁨과 감사가 넘쳐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현대의 가정들에 있어서 가장 큰 비극이 무엇일까요? 물질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적어도 ‘나는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으시겠지만 알게 모르게 우리들은 다 물질에 노예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요즘 나이드신 분들의 생각에 훗날 자식들에게 괄시를 받지 않으려면 모아둔 재산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식들도 그렇습니다,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려는 마음은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부모로부터 재산을 조금이라도 더 물려 받을까?하는 생각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재산 때문에 형제간에 다툼이 생기고, 심지어는 칼부림이 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조금은 부족한듯 사는게 가장 좋습니다, 너무 잘살려고, 풍족하게 살려고 하지 맙시다, 오히려 내가 가진 것으로도 감사하고 기뻐할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부족해도 늘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그속에서 작은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가지고도 끊임없이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은 늘 불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지옥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인생에 있어서 주요관심사는 몇평아파트에 사느냐?가 아닙니다, 월급을 얼마 받느냐?도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사업이 잘 되느냐?도 우리의 주요관심사가 되어서는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직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생활속에서 감사와 기쁨이 넘쳐나고 직장에서도 항상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누구보다 우리의 먹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실 때 우리에게 먹는문제부터 먼저 언급하지 않으셨을까요? 우리의 관심사는 먹는문제가 우선일는지 몰라도 주님의 관심사는 먹는문제가 우선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지난주일 김서택목사님의 설교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솔직히 목사가 은혜 받는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제일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을 순서대로 열거하면 1위가 목사이고 2위가 전도사라고 합니다, 그리고 3위가 장로, 권사이고, 4위가 집사라고 합니다, 은혜를 제일 잘 받는 사람은 평신도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만큼 세상적으로 말하면 목사는 닳을데로 닳았다는 뜻입니다, 왠만해서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결코 좋은 말이 아닙니다, 정말 부끄러운 말입니다, 목사들이 다 반성할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은혜받기 어렵다고 말하는 목사인 제가 이번 집회기간에 너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 갈릴리 바닷가로 돌아간 제자들에게 대한 말씀이 너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김목사님이 설교시간에 언급하신 내용이지만 오늘 본문의 내용과 관련이 있어서 언급을 하겠습니다.
제자들은 3년동안 주님을 쫓아다니면서 능력의 주님을 경험하고도 막상 갈릴리로 돌아갔을때에 그들은 먹는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현실에 부딪쳤습니다. 그렇다고 베드로와 그리고 함께 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몰랐던 것도 아닙니다, 이미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빈무덤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상태였습니다.
주님이 누구이십니까? 그들이 보는 앞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신 분이십니다. 아니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다시 사신 분이십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 못한 것도 아니고 믿지 못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먹는문제에 부딪혀야만 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믿음을 저버린것도 아니고, 예수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못믿는 것도 아니지만 그와는 별도로 먹는 문제를 가지고서 늘 염려하고 근심가운데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를 열심히 믿으면 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줄 알았는데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사업은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건강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자녀들은 시험에서 떨어지고, 열심히 믿어보아도 상황이 나아지는 것이 없으므로 스스로 내리는 결론이 예수 믿는 것과 먹고 사는 문제는 별개이며 적어도 먹는 문제만큼은 순전히 내 노력여하에 달려 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정말 먹는문제를 전적으로 주께 맡기기는 사람들이 없는듯합니다. 주께 맡기기 보다는 내 자신의 노력여하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새벽에 하나님께 나아와 도움을 요청하는 것보다는 그 시간에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가게 문을 여는 것이 현명한 생각이라고 판단합니다. 주일날 문을 닫는 것보다 예배만 드리고 영업을 하는 것이 수익면에서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입시를 앞둔 자녀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합격하고 난 뒤 교회에 열심히 참석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런 모든 문제들은 내가 스스로 노력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다른 그 어떤것들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 인생의 우선순위가 먹는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우리의 먹는 문제보다 우리 자신의 영혼에 있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 찾아가신 것은 그들이 먹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때문이었습니다. 아직도 먹는문제에 얽매어서 부활하신 위대하신 주님이 자신들의 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함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왜 먹는문제를 먼저 언급하지 않고 이렇게 뒷부분에 와서 말씀하고 계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먹는 문제가 우리의 삶에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것은 우리 개개인의 영혼입니다, 하나님과 바른관계를 가지는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여러분중에 먹는문제에 얽매어 주님과 관계를 바르게 하지 못하거나 여러분의 영혼이 병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분은 없으십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더 중요합니다. 먹는 문제보다 여러분의 영혼이 훨씬 더 소중합니다, 부족하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남들보다 넓은 집에 살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문제는 여러분의 영혼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먹는문제보다 우리의 영혼에 훨씬더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에서 편리하게 살아도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잃어버린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부유하게 살아도 주님을 망각하고 산다면 그 영혼은 불쌍한 영혼입니다.
혹 살아계신 주님은 주님이고, 먹는 문제는 아직도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한번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베드로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먹는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드로는 배에 올랐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갈릴리 바다의 날씨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고기떼의 흐름도 잘압니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과 노력으로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의 풍부한 경험과 노력도 별로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날이 새어갈 무렵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물으셨습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그래 그렇게 노력해 보았는데 과연 고기를 몇마리 잡았느냐?”는 말씀입니다,
대답할 것도 없습니다, 베드로는 아직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고기잡으러 갈때와는 대조적으로 이 당시에 매우 위축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물음에 대답을 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없나이다”였습니다, 아마도 기가 죽어 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하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님없이 사는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주님을 빼놓고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보아도 결과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베드로가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먹는 것을 누가 주셨습니까? 베드로의 경험과 노력의 결과로 얻은 것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주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이 주셨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께서 안주시면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얻을 수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아무리 밤에 늦게 자고 새벽같이 나가서 사업을 해도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시면 헛수고일뿐입니다. 예수 없이 살때는 노력하면서 살면 됩니다. 예수 없이 세상과 더불어 살때는 열심히 일하면 무언가 얻을 수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주님이 하십니다, 오늘 주기도문에서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무슨말입니까? 누가준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이 주십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베드로에게 고기를 주신 분이 주님이듯이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먹는문제에 관심이 없으신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이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삶의 우선순위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관계를 통해서만이 우리가 먹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원하십니다.
여러분!
필요한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바른관계를 세우지 않고 구하는 것을 주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왜 사업이 안되느냐구요? 주님이 하시면 됩니다, 왜 건강이 회복되지 않느냐구요? 주님이 하시면 됩니다, 왜 인생의 짐이 무겁냐구요? 주님이 하시면 가벼워질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주님이 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셔야만 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번 한주간동안도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며 그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실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마태복음 6장12-15절
제목: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③
이단으로 불리우는 ‘구원파’의 주장에 의하면 한번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죄에 대해 회개하거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한번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두 번 다시 죄에 대해서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요?
이들의 주장은 크게 두가지가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는 우리 인간들에게 있는 근본적인 죄의 문제와 살아가면서 범하는 죄의 문제를 구별하지 못했다는 것과 또 하나는 주님께서 죄에 대해서 가르치신 그 모든 것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는 그 두가지입니다,
죄에 대한 교훈을 우리는 요한복음 13장에서 찾아볼수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저녁을 드시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는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차례가 돌아왔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께서 어찌하여 제 발을 씻기시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신을 씻기지 아니하면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에 깜짝 놀라 “그러면 자신의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미 목욕한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저녁을 드시던 중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아도 사람들이 손을 씻고, 발을 씻는 것은 저녁을 먹기 전일까요? 먹고난 후일까요? 당연히 먹기 전에 손이나 발을 씻습니다, 아마 이때도 이미 그들은 저녁을 먹기 전에 손과 발을 다 씻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발을 씻기시는 것은 발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무엇인가를 교훈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신 행동이었음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발을 씻기시면서 베드로에게 “목욕은 되풀이 할필요가 없다”고 하신 말씀은 무슨 말씀이며, “발은 조금 전에 씻었는데도 또 씻어야 한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따지고 보면 목욕 한번 했다고 두 번 다시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마 지금이 아주 못살았던 60년대쯤이었으면 그래도 이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일년에 딱 두 번만 목욕을 했기 때문입니다, 언젭니까? 설 전날 목욕하고, 추석 전날 목욕했습니다, 그러니 한번 목욕한 사람은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이해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도 이렇게 목욕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얼마전에 노숙자 한사람이 저에게 찾아와서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 돈으로 뭐하려고 하느냐?하고 물었더니 목욕을 해야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밥을 사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차비해서 고향으로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목욕을 해야겠다고 했습니다. 먹을 것도 없는데 무슨 배부른 소리냐? 하실지 모르겠지만 아뭏튼 그분은 “한끼 굶고 차라리 그 돈으로 목욕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요즘은 거리의 노숙자들도 자주 목욕합니다, 아니 목욕을 못하면 공중 화장실을 이용해서 샤워라도 하려고 합니다, 과거처럼 지저분하게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몸을 깨끗하게 씻는 문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어떤 의도입니까? 그것은 곧 거듭남, 중생에 관한 문제입니다. 중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는 순간 단 한번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면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습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의 자리에서 이제는 생명의 자리로 옮김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데 필요한 죄사함은 한번으로 족합니다, 또 다시 구원받기 위한 죄의 용서는 필요치 않습니다. 단 한번만으로도 모든 것을 만족시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목욕한 사람은 또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발을 씻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요즘 저희집아이가밖에 나가서 노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틈만 있으면 밖에 나가자고 때를 씁니다, 얼마전에도 깨끗하게 목욕한후에 또 다시 밖에 놀러가자고 자꾸 졸라대었습니다, 그래서 데리고 바로 앞에 있는 공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앞에 공원이 공사를 해서 블록도 있고, 나무도 심겨져 있고, 또 잔디도 깔려 있지만 공사하기 전에는 전부 모래뿐이었습니다.
그날따라 아이가 샌들을 신었는데 그 곳에 발을 내딛는 순간 샌들 사이로 모래가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아마 샌들사이에 비집고 들어온 모래가 아이의 발을 자극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저에게 안겨서 자꾸 샌들안에 있는 모래를 끄집어 내달라고 졸라댔습니다, 그날 그 모래사건 때문에 결국은 얼마 놀지 못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돌아와서 보니 여전히 아이의 발에는 모래가 붙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가서 모래가 붙어 있는 발을 씻겨주었습니다. 여러분! 조금전에 저의집 아이가 목욕했는데 발에 붙은 모래 몇알을 털어내기 위해서 다시 목욕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냥 발만 씻으면 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모래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샌들을 신고 다녔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운동화나 구두를 신고 다녔다면 덜하겠지만 샌들을 신고 다녔기 때문에 그 샌들사이로 모래가 자연히 비집고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깨끗하게 목욕을 해도 샌들사이로 모래가 들어와서 발을 더럽게 하는 것은 어쩔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발을 씻을 물을 준비해 두었다가 밖에서 돌아오면 제일먼저 발을 씻곤 했습니다.
조금전에 목욕한 한 사람은 발이 더러워졌다고 또 다시 목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더러워진 발을 그냥 두면 어떻게 됩니까? 발의 건강에 이상이 생깁니다, 그러니 외출후에 집에 돌아오면 더러워진 발을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저는 ‘발’에 대한 사연이 많습니다. 경건한 예배시간에 무슨 소리냐? 하실지 모르겠지만 이해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근무했던 부대는 일년에 한번 혹한기 훈련을 했습니다. 제일 추운 겨울에, 그것도 밖에 나가서 텐트를 치고 일주일간 그곳에서 잠을 자면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등병을 달고 얼마되지 않아 혹한기 훈련을 갔는데 그 추운 겨울에 고참들이 눈을 비벼서 발을 씻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추운 겨울에 무엇 때문에 발을 씻을까? 차라리 일주일 참고 부대가서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면 피로도 풀리고 얼마나 좋은데…
물론 졸병이라 발을 씻을 시간도 없었지만 추워서 발을 씻을 시간이 있어도 씻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아뭏튼 5일동안 발을 씻지 않고, 군화를 신고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부대로 돌아왔습니다, 다행히 그 추운겨울에 동상에 걸리지 않아 참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뒤부터 발이 가렵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봤더니 발을 청결하게 하지 않은 까닭에 결국은 병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좋은말로 하면 ‘곰팡이 균’이고 흔히 하는 말로는 ‘무좀’입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 같은 발이라도 청결하지 않으면 병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사람은 또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죄용서함을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치 목욕후에도 발은 여전히 더러워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속에서 짓는 죄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그냥 두면 우리는 건강한 삶을 살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건강해 질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발을 씻듯이 말끔하게 청소해야 합니다, 어떻게 청소합니까? 주님앞에 그 죄를 자백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9절에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발을 씻는 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앞에 우리의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계속해서 순결하게, 깨끗하게 보존해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제자들에게 죄의 용서에 대해 기도하도록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렇게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다른사람의 죄를 용서해 줄 때, 주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다”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죄용서의 근거가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 남을 시기하고, 헐뜯는 마음이 많지 너그럽게 용서해 주려는 마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마태복음 18장을 보면 어떤 임금에게 일만달란트의 빚을 진 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만달란트를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IMF전과 IMF후가 많이 다르겠지만 IMF전이면 약4조원이되고, 지금처럼 IMF시대에는 약2조원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빚을 진 종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빚을 갚으라고 독촉했습니다. 종이 어떻게 2조원에 해당하는 빚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인은 “종의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갚아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종이 절을 하면서 다 갚을테니 조금만 참아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주인은 일만달란트의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빚을 탕감받고 기분좋게 길을 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을 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백데라니온은 300만원정도 됩니다, 그런데 그는 빚진동관을 보자마자 멱살을 잡고 자기 빚을 갚으라고 고래 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고 싶으시겠지만 이게 우리들의 원래의 모습입니다,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려는 마음이 우리에게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잘못은 안보이고 남의 잘못만 잔득보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남이 저지른 죄는 어떻게 해서든지 들추어 내어서 시시비비를 가려야 속이 후련해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것같이 우리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란 말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여준 것이 근거가 되어서 우리죄를 사하여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의 속에는 남을 용서하려는 마음보다 험잡고, 미워하는 마음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 “우리가 주님께 죄의 용서함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 할수 있는 십자가의 마음을 달라”는 뜻입니다. 용서는 성경의 한결같은 핵심주제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용서입니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용서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문제를 그냥 덮어두면 용서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문제를 덮어두고 끄집어 내지 않는다고 해서 진정한 용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었다고 칩시다, 누군가가 와서 저에게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목사님! 그 일 때문에 힘드시지요, 많이 괴로우셨지요” 그때 제가 “아뇨! 괜찮습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마음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는 것일까요?
아무리 말로는 “괜찮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고 해도 마음속에 여전히 그 일이 짐이 되고, 부담이 된다면 그것은 아직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상대방에게 입은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용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조건 잊어버리면 용서한 것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잊어버린다고 해서 진정으로 용서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합니다. 잊어버리기로 작정했던 것도 자신이 불리해 질때면 불쑥 생각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부부간에 싸움을 할 때가 그런 경우입니다, 살아가면서 남편이나 아내의 잘못이 보여도 며칠지나면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다 잊어버린 것 같은데 막상 부부싸움을 하다보면 과거의 일까지 모두 끄집어내서 공격합니다. 신혼여행 갔을 때, 서운하게 여겨졌던 것부터 시작해서, 첫아이 임신했을 때, 순대가 먹고 싶어서 어디가서 순대 좀 사달라고 했더니 많고 많은 음식중에 하필이면 냄새나는 순대냐?라고 지나가면서 무심코 던진말도 생각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또 몸이 아파서 누워있는데 “어떻게 당신은 매일 아프냐?”고 말했던 것도 기가 막히게 기억을 해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용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의지로는 불가능합니다, 주님은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일곱 번도 아니고 일흔번씩 일곱 번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속에는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훨씬 더 많은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의지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도우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돕지 아니하시면 일곱 번 용서하는 것도 우리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할 수 있도록 십자가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4절과 15절에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씀도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근거가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경험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은 받은자라면 용서받은 것에 머물것이 아니라 이제는 남을 용서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참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5:8)
주님은 죽음의 희생을 통해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과연 남을 용서하기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하는 결단이 있습니까? 어느날 아내가 저에게 야구에서 희생번트와 스퀴즈번트의 차이가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희생번트는 루상의 주자를 진루시키기 위해 번트를 대는 것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신은 죽는 것이고 스퀴즈 번트는 루상의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번트를 대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주자도 불러들이고 자기도 진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인생을 야구게임에서 스퀴즈번트를 대는 선수와 같이 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도 살고 주자도 홈으로 불러들이는 일거양득의 법칙으로 살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야구게임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스퀴즈번트는 결국 나도 죽고 상대방도 죽이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스퀴즈번트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번트를 원하고 계십니다.
따지고 보면 야구에서도 스퀴즈번트를 잘 대는 팀보다 희생번트와 희생플라이를 잘 날리는 팀이 이깁니다, 용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자신을 십자가에서 희생시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이시간에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는 그 무엇인가를 마음에 담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아직도 미워서 얼굴도 쳐다보기 싫은 사람을 가슴에 묻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같이 우리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주님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저와 여러분에게 나타났습니다, 용서하는 삶, 이것을 우리 주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의지로는 용서하는 삶을 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이 기도가 필요합니다, “주님! 주께서 십자가에 쏟으신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용서함을 받았듯이 나에게도 용서할 수 있는 십자가의 마음을 허락하소서”
오늘도 여러분의 삶과 인생에 이런 기도가 넘쳐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마태복음 6장 13절
제목: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④
이제 고3학생들의 수능시험이 보름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17일 후면 수능시험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올해부터는 수능시험을 치르는 수험생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남지 않은 이 기간동안에 특별히 여러분들의 기도가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시험을 앞둔 학생들의 마음은 초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럴때일수록 그 마음을 편안하게 가질 수 있도록 가족들의 따뜻한 격려와 배려가 있어야 할 줄 압니다.
며칠전에, 폐지를 모아둔 곳을 지나다가 학생들의 시험지가 이리 저리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사방에 흩어져 있는 학생들의 시험지를 보았습니다. 수학시험지였는데 어떤 학생이 90점을 받았습니다. 제가 보아도 잘 모르는 문제를 잘 풀어서 정답을 적었습니다,
두 문제를 틀렸는데 제가 보기에는 몰라서 틀렸다기 보다는 좀더 신중하게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틀린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시험지를 보니까 시험성적이 20점이었습니다, 너무 점수가 형편 없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해서 어떻게 고등학교에 진학하겠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장을 더 넘겨 보았더니 이번엔 5점 받은 학생이 있었습니다. 참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고, “어떻게 이렇게까지 못할 수가 있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났습니다. 제가 보니까 4지선다형 문제도 정답만 요리조리 피해갔습니다, 사실 그렇게 하기도 쉽지 않았을텐데…, 정 모르면 3번만 쭉 적어도 20점 정도 받을 수 있을텐데, 그렇게 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는지 2번 적어야 하는 곳에 3번 적고, 3번 적어야 하는 곳에 4번 적고 해서, 정답을 전부 다 피해갔습니다.
아뭏튼 시험점수는 5점이었지만 정답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실력은 95점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거의 천재수준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아마 그 반에서 정답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점수를 95점씩이나 받은 학생은 그 학생 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험점수를 5점밖에 맞지 못한 당사자를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학생 당사자는 어떠했겠습니까? 본인이 더 안타깝고 괴로웠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학교에 다닐 때 이와같은 시험을 다 쳤습니다, 여러분중에 어떤 분은 90점 아니 100점을 받은 분도 계실 것이고, 또 여러분들 중에는 조금전에 웃었지만 그 학생수준 비슷한 점수를 맞아본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학교를 다니는 동안 무수히 많은 시험을 치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들은 왜 우리들에게 시험을 치게 하신 것일까요? 선생님이 학생들을 상대로 스트레스를 풀어 볼 양으로 시험을 치게 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화장실 청소 누가 할것인가? 정하려고 시험을 치게 하신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저 창피를 주려고 시험을 치게 하신 것입니까?
제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저희 학교에는 두 부류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한 부류의 선생님은 시험치는 날짜와 시험범위를 미리 일러 주어서 학생들이 충분히 대비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그리고 시험문제도 그렇게 어렵게 내지 않았습니다, 시험을 위해서 준비한 학생이라면 충분히 정답을 적을 수 있게 해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시험을 통해 어느정도 자신감을 갖게 하고,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는 선생님입니다. 이런 경우 학생들은 그 과목에 대해 흥미를 가질뿐 아니라 성적이 대체로 좋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선생님은 불시에 시험을 치릅니다, 그것도 학생들이 말을 안듣거나 학생들 때문에 기분이 몹씨 상할때만 골라서 느닷없이 교실에 들어와 아주 엄하신 모습으로 “모두 책집어 넣어! 지금부터 시험을 칠테니 평소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그렇게 말씀하시고는 16절지 답안지 한 장 나눠주고 칠판에 문제를 내 주시고는 정답을 적으라고 합니다,
이런 경우 시험문제도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면 반에서 특별히 공부 잘하는 몇몇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대개가 선생님이 원하시는 수준의 점수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너 이리 나와! 점수가 왜 이렇게 형편없어, 너 도대체 평소에 공부 하는거야 마는거야”하면서 트집을 잡아 때립니다. 이때는 정말 선생님의 스트레스 해소용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중에는 이런 이유로 인해서 그 과목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에도 두 종류의 시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과 사단이 주는 시험입니다. 똑같은 시험인 것 같지만 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란 일종의 연단이며 훈련입니다.
운동선수들이 고된 훈련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훈련과정을 거치고 나면 그 다음해 좋은 성적을 낼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운동선수들은 시즌이 마감되면 그때부터 다시 훈련에 들어갑니다. 훈련에 참여하지 않은 선수들은 대부분 그 다음해에 좋은 성적을 낼수 없습니다.
가끔 올해는 성적이 좋았던 선수가 그 다음해에는 성적이 형편없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런 선수들은 대개 연봉협상 때문에 구단측과 협상을 벌이다가 동계훈련을 소홀히 한 선수들입니다. 훈련을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좋은 성적을 낼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도 운동선수에게 있어서 훈련과 같은 것입니다, 훈련이 때로는 힘들기도 하지만 그 훈련은 그 다음해에 그 선수로 하여금 좋은 성적을 낼수 있게 하는 기초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시험을 만납니다, 그 시험이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라면 우리는 그 시험을 통과하면서 더욱 성숙된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매우 유익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도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고 했습니다.
프로야구에 장종훈이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이 선수는 남들처럼 경력이 화려했던 선수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야구의 명문으로 불리워지는 대학을 졸업한 것도 아니고, 국가대표로 활약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프로야구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당시 그는 단지 연습생에 불과했습니다. 때로는 선배들의 옷을 챙겨주고, 주전자를 날라다 주고, 그러다가 시간이 있으면 2군선수들과 함께 운동을 했던 무명선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몇 년후에 프로야구에 홈런왕으로 등극을 합니다. 물론 이번에 외국에서 용병으로 들여온 ‘타이론 우즈’라는 선수에 의해 그 기록이 깨어지긴 했지만 한시즌 42개의 홈런이란 기록은 수년동안 아무도 깨지 못했던 대기록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구단에서 부동의 4번타자로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이름도 없고, 경력도 없고 경험도 없는 그가 처음부터 큰 경기에 뛰었다면 아마도 주눅이 들어서 경기를 잘 치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홈런은 고사하고 번번히 삼진아웃 당해서 그만 야구를 포기해야 하는 인생이 되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연습생으로서 차근차근 훈련에 임했습니다, 그때 그때 자기에게 알맞는 훈련을 성실하게 수행함으로 마침내 그 누구도 깨기 힘든 홈런왕의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
박찬호선수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그가 잘던진다고 처음부터 바로 메이저리그에 투입되었다가 그는 영락없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메이저 리그에서 신인선수가 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너무도 형편없는 성적 때문에 그는 마이너리그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2년동안 투구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메이저리그에 다시 섰을 때, 그는 15승을 거두는 선수로 우뚝 설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방법도 이와같습니다, 처음부터 어려운 시험을 주시지 않습니다. 마이너 리그에서 뛰어야 할 우리들을 메이저 리그에 투입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만한 시험만 주십니다, 그리고 그 시험과정을 통과하는 동안 우리를 더욱 성숙되게 하고, 우리를 더욱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나오자 마자 하나님께서 아들을 바치라는 시험을 주셨다면 아브라함은 아마 그 시험을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 당시에는 아들이 없었지만 설령 있었다 해도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는 자리에 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오랜세월이 지나는 동안 하나님의 훈련을 잘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을 더욱 성숙시키셨습니다, 그래서 능히 이겨낼만한 믿음이 생겼을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기꺼히 순종을 했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합격증을 받았습니다.
야고보선생은 이런 사실을 두고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1:12)하셨습니다.
우리가 시험과정을 잘 통과하면 심지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마치 공장에서 만들어 지는 제품이 여러단계의 공정을 거쳐서 그 품질이 인정되면 정부에서 K.S마크를 붙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이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의미에서 본다면 오늘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왜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성숙한 삶을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말씀인가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상 받는 것이 싫으시다는 뜻일까요? 물론 그런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시험은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해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시험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기 위해 사단이 미끼로 던지는 유혹을 의미합니다.
낚시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 말씀을 너무도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고기를 잡기 위해서 미끼를 던집니다. 저는 잘 알지 못하지만 옛날에는 지렁이 하나면 고기를 잡는데 있어서 만사 O.K였는데 요즘은 지렁이 하나만으로는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미끼도 아주 다양하게 나와서 어떤 물고기를 잡으려 하느냐?에 따라 미끼도 달라집니다,
그러나 미끼의 종류는 다 다르지만 그 미끼 속에 감취어진 것은 똑같습니다, 무엇이 감취어져 있습니까? 그 속에는 물고기의 입을 낚아챌 무서운 바늘이 감취어져 있습니다, 미끼에 현혹이 되어 그것을 무는 날에는 그날로 끝입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던지는 유혹이라는 미끼도 그와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참 좋습니다, 사람들마다 다 다른 방법으로 유혹이라는 미끼를 던집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독소가 들어 있습니다, 겉보기에 좋아서 따라갔다가는 우리의 영혼이 병들고, 파괴되고 맙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런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일까요?
야고보 선생은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욕심 때문에 우리가 유혹에 빠진다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참 그렇습니다. 우리가 유혹에 빠지는 것은 다른 이유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욕심 때문입니다, 겉보기에 좋은 것을 쫓고자 하는 우리의 허왕된 마음 때문에 유혹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요즘 새벽시간에 예레미야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시대때 유다 백성들의 모습이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예레미야 시대때에도 두 종류의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한 종류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선포하는 예레미야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유다백성들에게 전했던 말은 얼마 있지 않으면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멸망당할 것이라는 것과 그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이었습니다, 민족적으로 보면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에 반해 하나냐를 비롯한 다른 선지자들은 유다는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유다에 있는 한 아무도 유다를 넘보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안전하다 평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설령 바벨론이 쳐들어 온다할지라도 우리가 맞서서 싸우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두 해가 차기전에 포로로 잡혀 갔던 자들은 다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대단히 소망적인 말이었습니다.
결국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고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거짓선지자들의 말이 훨씬 듣기 좋았습니다, 민족적인 자긍심을 세우는 말이었기 때문에 그 말을 모두 듣고 따랐습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유다는 망할 것이라는 말보다 훨씬 더 듣기 좋은 말이었습니다. 자신들이 평소에 듣고 싶어했던 말을 선지자들이 했으니 이것 저것 생각할 필요도 없이 자신들의 욕심에 이끌려 그들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그들을 파멸케 하는 독소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욕심을 자극하는 많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에 대한 욕심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에 대한 강한 집착일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식에 대한 강한 기대감 일수도 있습니다. 사단은 그것을 미끼로 우리에게 던져 놓았습니다. 그 미끼는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마침내 파멸케 하는 미끼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지 못하도록 하는 여러 가지 미끼가 던져져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건전하게 하지 못하도록 비판의식만 자꾸 쌓이게 합니다. 교회의 좋은 점이나 장점은 보이지 않고 자꾸 잘못된 점만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신앙을 떠나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떠나지 않는다면 적어도 열심을 내지 못하도록 속삭입니다. 그것은 다 우리들에게 던져진 미끼이며 유혹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가르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유혹에 이끌려 넘어지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관한 말씀과 더불어 예수님은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말씀을 덧붙히셨습니다.
여러분!
악한 세력이 우리들에게 돈도 주고, 명예도 주고, 성공도 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세상말로 키워서 잡아먹으려는 속셈 때문입니다, 쉬운 예로 시골에서 닭을 키우는 분들이 그 닭에게 모이를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잡아 먹기 위해서입니다.
농촌프로그램을 보면 간혹 아주 특이한 사료를 먹이는 농가가 방영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힘들여 특이한 사료를 개발해서 닭이나 돼지에게 먹이는 이유도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말하기를 “이 사료를 먹였더니 육질이 좋더라”라든가 아니면 “고기가 아주 연하고 맛있더라”입니다, 결론은 모두가 잡아 먹으려고 모이는 주는 것일뿐니다.
만약 여러분들 가운데 계획 했던 일들이 척척 잘됨으로 인해, 과거보다 신앙생활에 소홀함이 생겼다면 좋아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사단이 여러분에게 던지는 유혹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돈 많아서 좋은 것이 아니라, 내 생활이 과거보다 나아져서 좋은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내 영혼은 병들어가고 있고, 내 심령은 황폐화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잡아 먹기 위한 사단의 계략이며, 유혹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유혹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악을 이기는 삶을 살수 있겠습니까? 우리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방법은 기도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기도외에는 없습니다. 기도가 이런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이기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때 다른 제자들은 그 곳에 남아있게 하시고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좀더 앞으로 나아가셔서 그들에게는 “그곳에 머물러 깨어 있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 자신은 그들보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한참 기도하시다가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깨어 있지 못하고 잠을 잤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와 함께 한시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는 방법으로 기도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참 그렇습니다,사단의 유혹으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깨어서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시시각각으로 찾아오는 악의 유혹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습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내일 새벽부터 시작되는 새벽기도 총진군이 우리들에게는 더할나위없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승리를 이끌어 낼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더욱 믿음을 견고하게 세우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돌이켜보면 우리의 인생이 시험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은 아닌 듯 합니다. 학교만 졸업하면 시험에서 해방될 줄 알았는데 우리 주위에는 온통 시험뿐입니다. IMF시대를 맞이해서 각종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학원에 다니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고 합니다. 하루에 운전면허를 취득하기 위해 시험을 치르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수많은 시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험을 통해 우리를 성숙시키실 것이지만 사단은 그 시험을 통해 우리를 파멸시키려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깨어서 기도하는 일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우리 자신을 구해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고 기도함으로 여러분의 인생에 승리의 삶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마태복음 6:13절
제목: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⑤
며칠전, 교육부에서 교사의 정년을 현재 65세에서 60세로 낮추겠다고 발표를 해서 많은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학부모측에서는 이를 적극 환영하고 나섰고, 일선 교직에 몸을 담고 있는 분들, 특히 나이드신 분들은 강력히 반발을 하고 있습니다. 마침 금요일 신문에 보니까 교육부 장관이 정년의 나이를 다시 조정하겠다고 발표를 했지만 모든 것이 석연치 않습니다.
학부모들은 컴퓨터 세대의 아이들, 힙합을 입고, 머리에 물들이고, 귀걸이를 하고, 따라부르기조차 힘든 랩송을 거침없이 불러 대는 오늘의 아이들 현실을 감안할때, 나이드신 교사들이 감당하기엔 사실상 역부족이라는 주장입니다.
그에 비해 학생들의 교육은 경륜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교사들의 주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둘 다 학생들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주장은 아닌 듯합니다. 교육이란 아이들이 컴퓨터를 다루기 때문에 교사도 반드시 컴퓨터를 다룰줄 알아야 가능하다는 것은 전인교육의 측면에서는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어쩌면 젊은 교사를 원하는 그 마음에는 자녀들에게 좀 더 나은 실력을 쌓게 하고자 하는 학부모들의 자기 중심적 사고가 작용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나이 많으신 교사도 이런 주장에 대해 반성을 해야 합니다. 대부분 학교에서 수십년동안 타성에 젖은채, 연구하지 않고 학생들을 지도하는 분들중에는 나이 많으신 분들이 실상은 많습니다. 그러므로 경륜이란 측면에서 잘못된 처사라고 말하기 이전에 학생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반대하는 분들의 경우도 실상은 학생들 편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익을 주장하는 자기 중심적 사고가 강합니다.
그런데 이런 자기 중심적 사고는 성도들의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어떤분은 “예수를 왜 믿느냐?”는 질문에 대해 “외로워서”라든가 “몸이 몹씨 아픈데 예수를 믿으면 몸이 나을까 해서”라고 대답합니다. 더러는 “세상이 불안해서 믿는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경우는 아직 신앙이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긴 하지만 아뭏튼 이런 경우도 자기 중심적 신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앙의 초보에서 벗어난 사람들도 기도할때는 영락없이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치 초보운전때 다른 주변 상황을 신경쓰지 못하고 자기만 생각하고 운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운전이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주변상황에 잘 대처를 해야 합니다. 신호등도 봐야하고 앞에, 옆에, 뒤에 있는 차의 흐름도 파악해야 하고, 보행자도 볼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초보는 그런데 신경을 못 씁니다. 오직 자신이 몰고 가는 차에만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그렇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키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이 이런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으니 그 일에 하나님께서 사인을 해달라”는 식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기도하실때 무엇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십니까? 아마도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면 제일 많이 반복되는 말이 ‘주시고’ ‘주시옵소서’ ‘주시사’ 이런 말들 일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거의 ‘내게 필요한 것을 달라’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즉 내 중심적인 기도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 말에 동의를 하기 어렵다 하시는 분은 오늘 여러분이 기도하는 중에 ‘주시옵소서’라는 말을 몇번이나 사용하는지 잘 관찰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주님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는 그 중심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도의 제일 마지막이 누구에게로 향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주기도문을 처음 시작 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면서 그 기도가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음을 우리는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기도문의 제일 마지막도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하면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렇듯 기도의 시작과 끝, 모두가 하나님께로 향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인생의 시작과 끝은 초점이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맞추어져 있습니까? 어느날 우리주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의 시작이며, 역사의 끝이십니다. 즉 모든 역사가 그분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1장 36절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고백대로 이 세상의 역사가 그분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마침내 그분에 의해 종결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도 그분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분에 의해 종결되어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기도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끝을 맺어야 합니다. 즉 내 기도의 관심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라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끝을 맺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이시간에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기독교가 지극히 ‘내세지향적’이어서 사회에 무관심하다는 주장을 합니다. 물론 이러한 비판에 대해 우리는 겸허히 수용할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동안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암울했던 시기 즉, 일제의 식민지시대를 거치고, 6.25동란과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후반까지 경제적인 빈곤을 거쳐오는동안 희망을 잃은 우리민족에게 소망을 심어주기 위해 내세지향적인 면을 무척 강조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사회에 대해서는 자연히 무관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독교의 본질을 희석시키거나 바꿀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이땅에 오신 이유가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서였더라면 주님은 이스라엘을 먼저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는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롯유다와 같은 열심당원을 제자로 두시고도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위해 예비하시는 처소는 이스라엘의 독립이 아니라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빌라도 앞에 섰을때에도 자신의 나라는 “이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삶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천년만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100년 남짓 살고 인생을 마감합니다. 우리주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고작 100년 밖에 되지 않은 삶을 보장하는 것일까요? 온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주님의 능력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삶에 국한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의 100년의 삶을 준비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살 천국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자신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 나라를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때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확신해야 합니다.
저는 저희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사경을 헤매시는 와중에도 신앙고백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으신후 6개월가량 폐암으로 고통스러워 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심지어는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진통제를 한꺼번에 10알 이상 드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통스러워 하시더니 돌아가시기 전날, 신앙고백을 하셨고 다음날 마치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두 눈을 감으셨습니다.
두 주전, 박집사님도 그러하셨습니다.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댁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거의 며칠째 아무 말씀도 못하시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숨을 몰아쉬고 계셨습니다. 심방대원들이 함께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신앙고백이 끝났을 때, 집사님은 있는 힘을 다해 모두에게 들리는 똑똑한 목소리로 ‘아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참 편안히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주님이 예비해 놓으신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번 아니 만번을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인양 사는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있습니다. 천국이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때마다 하나님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계시는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밀알의 박목사님과 지난주에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말씀중에 이런 말씀이 생각납니다. “목사님! 장애인을 위한 복지는 한계가 있습니다. 복지를 위해 노력하면 장애인에게 편리함은 제공하겠지만 생명을 살릴수는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장애인들에게도 복음이 필요합니다. 복음이 그들에게 진정한 생명입니다. 복음만이 장애인을 진실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저도 그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진실로 우리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영생’입니다. ‘하나님나라’입니다.
두 번째는 ‘권세’입니다. 즉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나라를 통치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세상의 권세는 정말 보잘것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권세는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세는 온 우주만물을 통치하시는 권세일뿐 아니라 그 권세는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계속되는 권세입니다.
역사적으로보면 세상의 권세가 하나님의 권세를 누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릅니다. 초대교회때 네로황제는 로마를 불지르고는 기독교인들이 불을 질렀다고 거짓소문을 퍼트렸습니다. 그리고 그 거짓된 소문으로 기독교인의 씨를 말려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세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왕성하게 뻗어갔습니다.
중국의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하에 자신의 세력에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하고 자신의 개인숭배를 강요하기위해 종교말살정책을 펼쳤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중국정부는 정부가 정식으로 인정하고 있는 삼자교회외에 그 어떤 기독교인들의 집회행위를 규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그렇게 하면 교회가, 하나님의 권세가 꺽일 줄로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지금 중국에 삼자교회외에 수많은 지하교회가 있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얘기입니다.
굳이 남의 나라 예를 들 것없이 북한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공산화 된 이후,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워졌던 평양에 교회가 사라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종교는 아편’이라는 그들의 논리에 의해 철저하게 탄압받았습니다. 북한에도 정부가 인정하는 봉수교회, 칠골교회, 최근에 세워진 반석교회를 제외하고는 그 어디에도 지상위에 세워진 교회는 찾아볼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다 사라졌습니까? 하나님의 권세가 세상의 권세에 굴복했습니까? 지금 북한에 통일을 기다리며, 통일이 오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수많은 지하성도가 있다는 것도 이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권세는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감히 세상의 권세가 어떻게 하나님의 권세를 당할 수 있습니까? 세상의 권세가 하나님의 권세에 도전을 했다가 자신들이 오히려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무수히 보아왔습니다. 성도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모두가 하나님의 권세였습니다.
우리주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놀라운 권세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권세는 우리의 삶의 전영역에 미쳐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풍랑을 만나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시는 권세를 보여 주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도 인생의 풍랑을 만나 두려움이 있을 때, 그 인생의 풍랑을 잠잠케 해 주실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병든자도 낫게 하셨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던 맹인과 38년동안 꼼짝도 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던 병자와 심지어 이미 죽었던 나인성과부의 아들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살리셨고,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실 권세가 있으십니다. 그 질병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하시면 가능합니다. 그 놀라운 권세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길르앗에는 유항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렘8:22)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참된 치료자가 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가서 치료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까막케 잊어 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사실을 잊어버린 유다 백성들을 생각하면서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께는 질병을 치유하실 권세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세번째는 ‘영광’입니다. 물론 이 영광은 두말할 필요없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한분,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외에 그 어떤 것도 영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우상에게 돌렸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 절하면서 그 헛된 것에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도 헛된 것에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
그 사실을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우리의 생각이 허망합니다. 마음도 어두워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에게 돌리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광을 금수와 버러지 형상에 돌리고 있다는 말은 어떤 형상을 만들어서 그 앞에 절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헛된 것에 다 빼앗겨 버렸다는 말입니다.
우리주위를 돌아보면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도 마음을 세상의 것에 다 빼앗겨 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빨리 예배마치고 결혼식장에 가야할텐데… 오늘따라 목사님의 설교가 왜 이렇게 길지”, “내일 아주 중요한 계약이 있는데 과연 성사가 될까?”, “이사가려고 집을 내 놓았는데 도대체 사람들이 왜 집을 보러오지 않는 것일까?” 등등, 예배드리는 이 순간에도 우리의 마음이 엉뚱한 것에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 모두를 빼앗겨야 할텐데 엉뚱한 것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고백하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6:3). 이사야 선지자는 이처럼 온땅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멘’입니다.
아멘이란 단어에는 크게 4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확인과 기원과 충성과 헌신입니다. 이 네가지 의미중 우리는 흔히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라는 기원의 의미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한 것, 그 모든 것이 그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멘’입니다. 오늘 주기도문의 제일 마지막이 ‘아멘’으로 끝나고 있는데, 놀라운 것은 사도요한이 역사의 종말을 고하는 계시록 제일 마지막에도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 주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게22:20-21)으로 끝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인생 마지막도 ‘아멘’으로 끝나길 소원합니다. 역사의 종말에 ‘아멘’이라고 요한이 말한 것처럼, 기도의 마지막에 ‘아멘’이라고 말한 것처럼 저와 여러분이 이땅에서의 삶을 다 살고 마지막 눈을 감을 때에도 ‘아멘’이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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