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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것이 된 사람(고린도후서 5장 15절~19절)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1989년 새해 새 날이 밝았습니다. 새해에 하나님의 새로운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있습니다. 또한 변하되 빨리 변하며,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우방이 되고 어제의 우방이 오늘의 원수로 바뀌지 않습니까? 특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너무 많은 변화와, 터가 흔들리는 변화를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변화를 자세히 관찰하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썩음의 노예가 되어서 계속 죽어 가는 죽음에로의 변화입니다. 사실 사람은 날 때부터 죽기 시작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어차피 죽는 날이 정해져 있으니 결국 죽음을 향해 계속 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파괴적이요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그런 변화가 있어 계속 썩어가고 소멸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생명에로의 변화가 있습니다. 죽음에로의 변화와는 반대로 생명에로 거슬러 올라가는 변화로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승화하는 것입니다. 거름더미 속에서 장미꽃이 피듯 썩어지는 것 속에서 아름다운 것이 자라는 생명의 변화, 즉 거룩한 변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변화에 대해 세 가지의 다른 이해가 있습니다. 첫째, 진화론적인 변화입니다. 만물을 볼 때에 모든 것을 자연적으로 하나의 진화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속에는 생존 경쟁, 적자 생존, 약육강식 등의 싸움이 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잡아먹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변증법적 변화라고 합니다. 둘째는 인격적인 변화로서 정신적이요 때로는 역설적인 것 같으나 순리적입니다. 가령, 혁명이란 단번에 이루어지는 급한 변화로서 물리적이나, 교육이나 민주화는 느리고 때로는 무력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언제 설득시키고 교육해서 변화되나 하는 걱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약한 것 같으나 강하고 없는 것 같으나 엄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서서히 인격적인 변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가르치고 배우고 깨달아 인간답게 살려는 노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노력을 통해 오늘날 우리는 이만한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셋째는 창조적인 변화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면서부터 오늘까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계속적으로 역사하시어 창조를 지속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재창조로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생겼던 제1의 창조와는 달리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변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이것은 십자가 사건과 그 말씀과 그 능력에 의해서 이루시는 창조의 역사로서, 우리는 이것을 구원, 중생, 또는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이 역사는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로, 많은 사람들을 재창조의 구원의 역사로 이루어 나가고 계십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피조물' 즉 창조는 문자 그대로 "새 것이 되었도다" 하는 선언이요 고백이며 실제입니다. 여기서 창조라는 말의 의미를 좀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창조라고 하는 말은 조성(造成)이라는 말과는 뜻이 다릅니다. 영어에서 크리에이트(create)와 메이크(make)가 서로 다르듯이 말입니다. 창세기 1장을 자세히 보면 창조라는 단어가 네 번이 있는데 의미상으로는 세 번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그 창조는 크리에이션으로 세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것으로 전혀 없던 상태에서 있게 하신 역사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만들어 놓고 창조했다는 말을 쉽게 사용합니다만, 있는 것 가지고 변형을 시킨다든지 편리하게 만든 것은 창조가 아닙니다. 즉 사람들이 하는 것은 만든 것이고, 하나님이 무에서 있게 하신 것은 창조입니다. 둘째는 무기체에서 유기체로의 변화입니다. 무기체는 흙이나 돌 등으로 생명이 없지만 유기체로의 변화는 생명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무기체와 유기체는 전혀 존재의 차원이 다릅니다. 돌은 몇 억만 년을 두어도 여전히 돌이지만, 생명은 신비로운 것으로 성장하고 자율적으로 번창해 가니 얼마나 오묘합니까? 셋째는 인격적인 변화입니다. 사람은 복합체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동시에 몸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흙이 플러스되어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런즉 몸은 분명히 흙으로 되돌아갈 것이나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몸은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썩어져 갑니다만 영은 날로날로 새로워집니다. 여기에 역설적인 생명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재창조(再創造)의 역사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재창조의 역사도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맞아야 합니다. 재창조의 실제를 우선 우리들 자신에서 살펴보면 첫째, 영적으로 무에서 유로의 변화를 느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 내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쉬운 예로 사람 구실을 전혀 못할 것 같은 사람이 말씀과 성령 안에서 사람되게 하시는 역사를 우리는 종종 경험하지 않습니까? 본문 14절에 보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죽음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새롭다는 말의 의미가 옛것의 수정이나 발전 또는 교육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옛것의 근본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적어도 성경이 말하는 새로움의 의미는 옛것의 죽음에서 출발합니다.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죽고, 그리고 새롭게 시작합니다. 이와 같은 무에서 유에의 변화를 여러분은 경험하셨습니까? 사실 우리가 믿는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가끔 성도들 중에서 수십 년 만에 옛 동창들을 교회에서 만나 반가워하면서 그 친구가 예수 믿을 줄은 정말 몰랐다고 감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가 학교 시절에 하는 행동이나 철학으로 보아서는 전혀 믿을 것 같지 않아 전도를 아예 포기했었는데, 이제 보니 자기보다 더 열심이라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기적이요 창조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의 의지, 나의 노력, 나의 선택이 아니라 무에서 유로 변케 하는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의 발로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직도 나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옛 사람이 다 죽지 않아서입니다. 옛날의 나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 완전히 못박아 버리면 거기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쓸데없는 무용지물이 쓸모있는 것으로 바뀌어지는 변화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적 변화입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신 겨자씨 비유처럼 생명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자꾸자꾸 자랍니다. 여러분, 은혜가 자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자라는 것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봉사하는 마음과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인격이 계속 성장하는 것을 체험하셨느냐 말입니다. 내가 억지로 사랑하겠다든지 내가 억지로 용서하겠다든지, 내가 어떤 결심을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에 나도 모르게 어느 사이엔가 놀랄만큼 거룩함의 성숙이 있고 인격의 성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입니다. 생명은 반드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창조입니다. 그러니까 나 닮은 사람으로 자라거나 또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닮은 사람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형상이 완성되는 그런 창조를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은 지금까지 설명한 이러한 창조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목적이 변합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여기서 '위하여'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직업이 변하거나 지위나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부하든 가난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목적이 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창조입니다. 그런데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 중에서 아직도 목적이 달라지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라고 '위하여'를 많이 말하지만 결국은 나 위하여로 본래의 목적지에 돌아옵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여러분의 목적이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고 있습니까? 이것만큼 평안하고 은혜롭고 능력 있는 일은 없습니다. 정말로 우리의 목적을 그리스도에게 두고 살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아직도 고민하는 문제가 있다면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 영광 하면서 속으로는 자기 중심이요 자기가 우상이며 자기가 목적이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영적인 세계관을 갖게 됩니다. 지금까지 육적으로 보던 일을 영적으로 보게 됩니다.
세상적으로 물량적으로 생각하던 것을 이제부터는 영 주도적(靈主導的)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도 얼굴이나 재산이나 지위를 보지 않고 믿음과 진실을 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 지향적으로 봅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그리스도의 날에 너희는 나의 자랑이 되고, 나는 너희 자랑이 되리라" 그 날을 생각합니다. 항상 영적으로 신령한 면으로 생각을 돌려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가치 판단하는 그 기준이 전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셋째는 사랑에 강권되어 삽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 받지 못했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이나 이웃이나 친구들이 자기만 사랑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데, 무엇인가 잘못된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이미 사랑 받은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래서 고맙고 저래서 고마우며, 특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면 미치는 것입니다.
사실 미친다는 것은 남이 보기에는 딱하지만 본인은 행복합니다. 사랑에 미치는 것처럼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특히 그리스도의 사랑에 반해서 그 사랑으로 충전해서 살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이와는 반대로 미움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억울해서 이대로는 죽을 수 없어 복수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가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증오라는 것은 정말 무섭습니다. 수년 전에 월남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군들이 월맹의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어 미국으로 돌아온 사건이 있습니다. 미국의 병사들이 얼마나 혹사를 당했는지 나중에는 뱀이나 쥐까지 잡아먹으면서 허기진 배를 채웠다고 합니다. 기자들이 포로들에게 묻기를 그 어려운 처지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느냐고 하자, 병사들의 대답이 참 무서웠습니다. 자기들을 학대하고 괴롭히는 월맹들을 생각하면 억울해서 이대로는 도저히 죽을 수가 없어서 증오하는 마음으로 "두고보자"하는 복수심 때문에 살았다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미워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받은 사랑으로 삽니다.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취해서 삽니다. 넷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화평케 하는 직책을 맡았습니다.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화목케 하는 자로 산다는 말입니다. 분쟁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화목하자' '화평하자'라고 말한다고 화목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분쟁의 원인이 있으면 거기에는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분쟁의 원인은 자기 우월감입니다. 부부 싸움을 할 때에도 상대방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면 싸울 수 있겠습니까? 싸움은 상대방이 자기만 못하고 틀렸다는 생각, 즉 내가 더 잘났다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겸손합니다. 사실 나 스스로 겸손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자기 교양과 수양으로 겸손해지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그저 겸손할 수밖에 없을 지경이 되어야만 겸손해집니다. 이것은 말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해지라고 아주 내려 앉혀서 겸손해진다는 말입니다. 겸손도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사입니다. 겸손한 인격은 화목케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부정적인 세계관을 가진 자는 화목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단점만 보고 무엇이든지 안 되고 불가능하다고 불평하는 자에게 어찌 화평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구원받은 자는 항상 상대방의 장점을 봅니다. 그의 밝은 면과 좋은 점만을 보며 긍정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도 않고 옳은 길이 아니면 가지도 않습니다. 여기에 화평이 있고 그래야 화평을 만들 수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전체를 봅니다. 분쟁은 나 하나만을 위해서 전체를 죽이겠다는 데서 생깁니다. 사실은 전체를 살려야 나도 사는 그 이치를 아는 자는 자신을 썩어지는 밀알로 기꺼이 내어놓습니다. 여기에 분쟁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큰 뜻을 생각하면서 이 유기적 관계 안에서 자기를 죽이는 사람만이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옛 시대에 살지만 새 사람이 있고 새 시대에 살지만 옛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이 변한다 해도 내가 변하지 않는다면 변화가 주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새해가 와도 내가 변하지 않으면 여전히 묵은 해지 새해가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목적, 내 중심, 내 영혼의 변화가 없으면 그 어떤 변화도 의미가 없단 말입니다. 온세상이 새로워지는 한이 있어도 여전히 나는 옛 사람입니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새로움의 역사는 창조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로운 역사가 있음을 알고 이 창조의 역사에 가담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개선되고 이웃과의 관계가 개선되어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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