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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죽기를 구한 사람(요나 4장 1절~4절)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仁愛)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음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랴
인간을 그가 지닌 관점과 세계관으로 볼 때에 크게 세 유형으로 분류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피상적 낙관주의자입니다.
유치해서, 때로는 몰라서, 혹은 어리석어서 낙관주의자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어린 시절에 그러합니다. 매사가 마냥 즐겁기만 하고, 모든 일이 다 잘될 것만 같고,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같고, 지금은 비록 내 뜻대로 안되는 것이 있어도 장차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될 것같이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에는 누구나 다 낙천주의자입니다.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사람들이 그렇게 칭찬도 하고 기대도 해줍니다. 이렇듯 모든 것이 즐겁고 마냥 흥미롭기만 했던 때가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염세주의자입니다. 좀 성장하고 보면 세상에는 뜻대로 안 되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실패하게 되고, 사랑을 거절당하기도 하고, 배신당하기도 하고, 소외당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여러 차례 좌절되기도 하고 뜻대로 안 되는 것이 많으니까 앞으로도 안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부를 해도 안될 것이요, 애를 써도 일이 안될 것이요, 수고를 해도 보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현재에 안되었는데 앞으로는 더 안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레 염세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특별히 유감스러운 것은, 요사이 젊은 사람들이나 학생들까지도 무엇이 좀 뜻대로 안 된다 해서 '모든 것이 끝났다'며 철저한 염세주의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참 마음 아픈 일입니다. 하지만 이와 비교해보면 피상적 낙관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치합니다. 염세주의자가 인생이라는 앞에서 보다 더 진실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철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염세주의자는 인생의 문제에 진실은 있어도 소망은 없습니다. 절망적입니다. 그래서 낙심합니다. 이 절망감이 역작용을 할 때에 그것이 범죄가 됩니다. 또한 그는 아주 완악한 사람이 되거나 포악한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망이 없기 때문에 다 끝난 일인데도 막상 그렇게 되면 아주 무서운 인간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 앞의 모든 범죄가 전부 이 염세적 철학에서 비롯되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낙관주의자입니다. 'real optimist' --진짜 낙관주의자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서 신앙 안에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지난날에도 내 뜻으로 산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이제껏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내가 살아온 것을 확실히 인정합니다. 이럴 때에 앞으로의 세계도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리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신앙 안에서 그는 낙천주의자가 됩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이런 의미에서 낙관주의자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위탁하고 나는 그 안에서 자유 합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단 한 번 있는 일이지만 사람들은 이 죽음을 두고 많은 생각을 합니다. 모든 것의 해결이 죽음에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의 종결도 죽음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좀 고통스러우면 '죽으면 되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러시아에 가보았다가 그곳의 모스크바 주교실에서 들은 말이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을 다스릴 때에 일 년에 백만 명을 숙청했다고 합니다. 해마다 무려 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여가면서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질서를 유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독재자들은 가차없이 '저 사람들을 죽이면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생각입니까? 이것이 소극적으로 작용할 때에는 '나 하나 죽으면 된다'하게 됩니다. 참으로 무서운 생각이라고 봅니다.
본디 사람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본능이 있습니다. 하나는 살고자 하는 것이요, 하나는 죽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실 죽고자 하는 마음은 살고자 하는 마음의 이면이라고도 합니다. 아무튼 사람들은 죽는다는 말을 잘합니다. 고통스러워 죽겠다, 우스워 죽겠다, 졸음이 와서 죽겠다…… '죽겠다'라는 말을 참 입버릇처럼 합니다. 저는 우리나라사람만 그런가보다 했는데 보자하니 온 세계 사람이 다 그래요. 극단적인 말을 하기 좋아합니다. 죽는다 죽는다 하지 않아도 어차피 죽을 것인데 말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 표현이 좋지 않습니다.
성경에도 여러 번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대표적으로 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죽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께 '나를 죽여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가 욥입니다. 욥이라는 사람은 동방의 의인이요 큰 부자였는데 하루아침에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재산이 다 없어졌지요, 열 남매가 있었는데 그 아이들까지 다 죽어버렸지요, 하나밖에 없는 아내는 자기를 저주하고 집을 나가버렸지요, 설상가상으로 몸에는 악창이 나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 찾아와 위로한답시고 뭐라고들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마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친구의 위로가 조롱처럼 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끝난 때입니다. 어쨌든 욥은 이런저런 이유로 괴로워합니다. 욥기 3장에 보면, 욥은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아예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면 좋았을 것을, 태어났으면 일찍 죽는 것이 좋고, 살았으면 빨리 죽는 것이 좋을 것을'하고 생각합니다. 또한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6)"라고 말합니다. 이제 살 소망을 다 잃어버리고 그저 빨리 죽었으면 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 괴로워서, 차라리 죽기를 소원하는 욥의 한탄과 부르짖음을 우리는 욥기 곳곳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엘리야입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 신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아주 극적인 대결을 합니다. 누가 참 하나님이신지 알고 그 하나님을 섬기자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백성 앞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왕상 18 : 21)" 그리고 갈멜 산에 두 제단을 만들어놓게 합니다. 먼저 450명의 바알 신 선지자들이 자기네 신의 제단 앞에서 하루종일 "바알이여, 바알이여"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렇지만 응답이 없습니다. 이제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니 그 한 번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불태웁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 대한 확실한 증거를 얻게 될 때에 그가 승리한 것입니다. 갈멜 산 대결에서 대승리를 한 엘리야는 백성으로 하여금 보기 싫은 바알 신의 선지자 전부를 끌어내다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그야말로 대승리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써 무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는 불안에 떨게 되고 허탈감에 빠져듭니다. 왕후 이세벨은 더 악해져서 마침내 죽이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보세요. 이 큰 승리를 보고도 엘리야는 좌절합니다. 로뎀나무 그늘에 앉아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왕상 19:4)"---'나를 좀 죽여주세요'라는 말입니다.
가만히 보면 죽고자 하는 이유가 무슨 큰 고통도 아니고 배고픔도 아닙니다. 이것은 허탈감입니다. 고독입니다. '너무 고독하고 외롭습니다. 나 홀로 남았습니다. 그러니 죽여주십시오'하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고 광야에 있을 때, 모세 홀로 40일 동안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교통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동안을 참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이 산밑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경배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 32:9,10)"----'이 교만하고 못된 백성들 못쓰겠다. 이들을 다 진멸하고 너와 네 후손을 번창케 하여 가나안에 들어가게 해주마'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때에 모세는 너 하나는 살려주겠다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합의(合意)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출 32:32)" ----여기에 따로 해석을 붙이자면 이렇습니다. '이 백성이 망하는 것을 나는 볼 수 없습니다. 비록 이 백성이 죄 때문에 망하지만, 이들이 망해야 된다면 나도 함께 죽여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 중보적 기도는 대단히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세는 자기의 생명을 취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고하고 있습니다. 욥, 엘리야, 모세, 이렇게 세 사람이 각기 저렇듯 하나님께 죽음을 고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는 요나는 어찌 생각하면 가장 사치스럽고 유치한 말로 하나님 앞에 죽음을 고하고 있습니다.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 성이 범죄하여 죄로 가득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진멸하시고자 작정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선지자를 보내시어 복음을 전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 요나에게 네가 가서 전하라고 이르셨습니다. 그 때에 요나는 생각합니다.
'이거, 내가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면 혹시라도 그들이 회개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실 테지? 안되겠다, 어차피 원수의 나라인데 망하는 게 당연하지. 저희 죄로 말미암아 저희가 망하는 것인데 구경이나 하지 내가 왜 거기를 가? 안가, 안가겠다고.' 그는 다시스로 도망을 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는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직행으로 니느웨 성에 떨어집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요나서 3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니느웨 성에 가 있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말씀하심입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욘 3:2)." 할 수 없이 요나는 니느웨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 뭐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 라고만 말씀합니다. 모르기는 해도 아마 몇 마디밖에는 안했을 것입니다. 하고 싶지 않은 말이니 많이 했을 리가 없지요. 어쨌든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 성이 망하리라고 억지로 복음을 전한 후에, 요나는 지금 니느웨 성이 망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필연코 망할 것이다'하고 기다리는데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니느웨 백성이 요나의 말을 듣고,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온백성이 회개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를 긍휼히 여기시사, 진노하시고 진멸하시기로 하신 것을 거두셨습니다. 그러니 망할 리가 없지요.
오늘의 본문을 보니, 참 난센스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1절)"--요나는 되게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듭니다. '내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내가 크시사 뜻을 돌이키시는 분인 줄 진작에 알았기 때문에 제가 다시스로 도망갔던 것이 아닙니까? 차라리 이런 꼴을 볼 바에는 죽여주십시오'하고 나옵니다. 죽겠다는 말도 여러 가지입니다. 아, 남이 살 수 있게 된 것은 잘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원수가 잘되는 것을 보고는 못살겠다, 차라리 이렇게 살 바에는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불만과 원망이 여기에서 터집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요나서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수기 이후에 기록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요나는 포로생활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바벨론이라는 강한 나라 때문에 조그마한 이스라엘나라는 많은 고생을 합니다. 그래서인지 피해의식이 있습니다. 과거지향적인 생각에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원수 같은 나라, 즉 강자가 마음에 거슬립니다. 약자가 강자에 대하여 가지는 분노와 열등감이 여기서 표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은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약한 사람에게도 도덕은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윤리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약하고 가난하니까 도둑질해도 된다, 나는 욕을 해도 된다, 나는 나쁜 마음을 가져도 된다----안됩니다. 약자에게도 윤리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벨론 포로로 있었고, 엄청난 사건이 있었고, 피해가 있었다 하더라도 요나와 이스라엘민족은 저들대로 저들의 길을 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요나는 협소한 마음을 가집니다. 폐쇄적인 생각을 합니다. 왜곡되고 전형적인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되는 것은 좋지만 이스라엘 외에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잘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폐쇄적인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됩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생각이요,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요, 집단적인 이기주의요, 신학적인 이기주의입니다. 나만이 옳고 내 생각이 옳고, 하나님의 생각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내 생각만이 옳다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 나머지 요나가 이 같은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동시에 자학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이기주의가 관철되지 않을 때, 시기 질투하는 마음이 극에 달할 때에는 '차라리 죽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나이 많은 성자가 홀로 외롭게 광야 길을 가고 있는데 도중에 뜻밖에도 두 젊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세 사람이 동행하여 길을 갑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두 젊은 친구 중 한 사람은 욕심이 너무 많고, 한 사람은 시기 질투가 마음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어느덧 해질녘이 되자 성자는 두 사람이 자기와 동행해준 것이 고맙기도 하여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자네들의 소원을 들어주겠네. 그런데 딱 한 가지만 말해야 하네. 한 사람이 소원을 말하면 그 다음 사람은 자기가 구하지 않아도 자연히 먼저 소원을 구한 사람의 두 배의 것을 가지게 되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처음 말한 사람은 하나를 받고 그 다음 사람은 배를 받게 된다니까 이 사람들이 말을 안 합니다. 그럴 수밖에요. 욕심 많은 사람은 더 받아야겠으니 말을 안하고, 시기 질투가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받는다고 하니 말을 안 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윽고 성자와 헤어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제 더는 소원을 미룰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욕심 많은 사람이 시기 질투 많은 사람에게 협박을 합니다. "이 녀석아, 네가 먼저 말해. 안 하면 죽여버리겠어!" 그랬더니 이 시기 질투 많은 사람이 뭐라고 소원한지 아십니까? "내 눈을 하나 빼주세요." 정말 눈 하나가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 두 배를 받을 사람은 눈이 둘 다 빠졌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간입니다. 시기 질투하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중국사람들의 말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종록자 불견산(縱鹿者 不見山)'--'사슴을 따라가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한다'라는 말입니다.
사슴 한 마리를 잡으려고 막 쫓아가는 사람에게 산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 눈에 보이겠습니까? 마지막까지 저 죽는 것도 몰라요. 자기가 죽을 지역에 들어가는 것도 모릅니다. 욕심, 그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요나가 지금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잘살아야겠고, 우리는 잘살아야겠고, 나는 잘살아야겠고, 그 밖의 이방사람들은 다 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사람이 구원을 받다니, 이것 못 보겠다는 것입니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요나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3절)"---그 꼴을 볼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참 못된 마음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거기에 생명을 거는 극단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가끔 우리는 '결사 반대'라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여러분, 결사(決死)가 무엇입니까? 정말로 죽을 것입니까? 왜 쓸데없는 말을 합니까? 이런 극단적인 용어는 좋지 않습니다. 아이들 공부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 "대학 입학을 못할 바에는 차라리 나가 죽어라"라고 호되게 야단을 쳤습니다. 그랬더니 자식이 "효도하는 마음으로 죽겠습니다"하더랍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디에다가 생명을 겁니까? 생명은 도박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도 말조심하세요. 이것이 다 기도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좀더 읽어나가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부아가 나서 이제 산에 올라가 니느웨 성읍이 어떻게 될까 하고 내려다보는데, 햇볕이 너무 뜨거웠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하나 준비하셔서 서늘하게 해주셨습니다. 성경에 보니 요나가 참 좋아합니다. 아주 좋아하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박넝쿨이 그만 말라버렸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까 요나는 또다시 하나님께 역정을 냅니다. 성경은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8절)"라고 말씀합니다. 변덕도 심합니다. 이렇게 사는 법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현대인에게는 정신적 질병이 있다고 합니다. 그 근본적인 치유방법은 사랑을 회복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떠나면 인간이 아닙니다. 사람답지도 않습니다. 살아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세요.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욘 4:9)"----네가 왜 역정을 내고 있느냐 하심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민합니까? 욕망과 이기심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요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詩)가 하나 있습니다. 기독 시인 윤동주의 「서시 (序詩)」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여러분, 내가 얼마를 살든지 간에 죽어 가는 자를 사랑하고 사세요.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협소한 생각, 질투, 시기는 다 버립시다. 깨끗한 마음으로, 마음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자를 내가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자를 내가 용서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바를 내가 기뻐합시다. 그 마음으로 돌아갈 때에 진정 인간다운 생, 아름다운 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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