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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세하지 말라(마 5:33~37)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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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세하지 말라(5:3337)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맹세하지 말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들의 불성실과 위선을 비판하며 또한 깊이 들어있는 인간의 악을 고발하는 말씀입니다. 맹세는 인간 진실의 최종 증거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자기 진실을 맹세로 보증하며 맹세로써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객관적인 증거가 있을 뿐이며, 종교적인 권위를 빌어서 하는 맹세는 하나님께서 보증하시는 마지막 진실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왔다(5:17)고 선언하십니다. 저들 유대인들이 율법을 이미 알고 있고 또 소중히 여기고 있기에 저들이 아는 바로부터 시작해서 복음 진리를 설명하고 계셨고, 저들은 율법을 율법 그대로의 뜻을 순수하게 받고 지키지 아니하고 인간들의 풍속과 문화적 전승에 따라 첨부하기도 하며 때로는 재해석하여서 결국은 율법의 본 뜻에서 멀어진 율법을 지키며 또 가르치며 강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저들의 인간적이고 세속적이며 특히 바리새적인 위선과 외식주의에 뿌리 깊이 젖어서 변형 변질된 율법관과 근본적으로 타락한 율법의 해석 의도를 아주 예리하게 비판하며 심판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들은 자기 편의주의에 의하여 해석하며 나의 유익과 종교적 교만 그리고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인간중심적인 해석의 원리를 숨겨두고 가장 편리한 거룩함을 위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언제나 율법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근본 의도와 율법의 본래적 의미, 그 진정한 법 정신에 근거해 율법을 해석하며 가르치셨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느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느냐?"하는 질문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으며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명백한 선언은, 저들 외식주의적 율법주의자들에게는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이 근본적으로 사람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는 해석은 율법 이해의 뿌리가 되는 명언입니다. 즉 율법을 대할 때 율법이 사람의 자유를 구속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율법이 우리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도록 보장한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사랑으로 우리의 인격적 자유를 위하여 이 율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두려워할 문제가 아니며, 또 율법을 지키는 것을 큰 공로나 선행처럼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말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당연한 마음으로 사랑하며 기쁨으로 지켜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때문에 율법을 형식적인 계율에 따라서 지키며 해석하지 아니하고 그 깊은 곳에 있는 의도를 따라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해석하실 때 미워하는 마음을 품으면 이것으로써 벌써 마음으로 살인한 것이라는 엄격한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살인이라는 행동의 시작은 그 뿌리에서 볼 때 "증오"가 살인에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고 또 삶이라는 외적인 행동보다 그 속에 있는 증오 그 자체가 사실상의 살인죄의 내용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살인이라는 행동을 면하려면 증오심부터 뿌리뽑고 막아야 한다는 것이 실제적인 사실입니다. 역시 간음죄도 그 깊은 곳에는 음욕이 있어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음욕부터 죄로 간주하시면서 간음이라는 죄를 해석하시는 그 깊은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극히 형식주의에 빠져버린 당시의 율법 이해를 그 내용과 깊은 의도에서부터 해석하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바로 읽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맹세하지 말라"는 교훈은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그리스도의 재해석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거짓말은 인격을 침해하는 죄가 되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스스로 진실을 포기하는 자기 인격에 대한 자살 행위이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불신앙이며 하나님의 존재와 심판과 보응을 만홀히 여기는 막중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거짓말 할 때에 인격의 기초인 진실이 무너지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파산되고 겸하여 이웃의 인격을 파괴하는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남을 속일 때는 잘 모르지만, 남에게 속았을 때는 멸시되고 무시된 자기 인격으로 인하여 뼈아픈 배신감과 고통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계명은 거짓말을 죄로 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맹세는 그 진실의 최종 보증인 것입니다.

자기 진실을 맹세로 마감하며 또 종교적 권위를 빌어서 그 진실된 의미를 보증 받고 만일에 거짓일 때는 그가 지적한 대상으로 인하여 어떤 형벌이라도 감수하겠다는 그러한 확증인 것입니다.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지겠다는 엄숙한 선언인 것이며 온 명예와 온 운명을 거는 약속인 것입니다. 이것이 맹세입니다.

유대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를 세상은 세 가지 위에 굳게 서 있다고 믿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첫째가 의()이며, 둘째가 진리이고, 셋째가 평화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의가 가장 중요하며, 의가 없으면 기초 없는 건물같이 세상은 무너진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 나라, 사회, 가정 그 어떤 것도 그 기초를 의에 두고 세워진 것이며 따라서 인격의 기초가 곧 공의라는 것입니다. 거짓은 곧 그 의를 파괴하는 것을 뜻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힘의 원천이 공의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공자와 자공의 대화 중에서도 나라가 튼튼히 서려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서 공자는 군비와 식량이 있어야 하고 공신력이 있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다시 그 중에 제일 근본적인 것은 신의, 즉 공신력이라고 말합니다. 서로 믿을 수 있어야만 나라가 굳게 선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바탕은 곧 의인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의에 대하여 가르치면서 다음 네 가지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합니다. 첫째, 비웃는 사람 즉 빈정대는 사람으로, 진실이 없는 사람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둘째, 거짓말하는 자 셋째, 중상 모략하며 또 그것을 옮기는 자 넷째, 위선자 등입니다. 이 네 가지가 다 의와 진실이 없는 거짓된 자를 지적하는 말들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여러 차례 지옥 불에 떨어질 사람의 특징을 말할 때에 거짓말하는 자를 반드시 지적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옛 사람들의 교훈을 먼저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헛맹세를 하지 말고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는 옛 교훈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 구약의 말씀들(20:7, 30:2, 23:21-22)을 요약하면, 맹세를 쉽게 하지 말 것이며, 깊이 생각하고, 운명을 거는 약속은 신중히 할 것이고, 또 하였으면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지, (설사 해로울지라도) 이를 성실히 하나님 앞에서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 경건과 종교적인 진실을 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헛 맹세와 맹세를 지키지 않는 불성실을 함께 정죄하고 있으며 이 두 경우가 모두 악함에 그 기원이 있고 불의에 그 동기가 있음을 예수께서 심판하십니다. 결국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이것은 맹세 그 자체를 평가하는 말씀이 아니고 그 맹세에 대한 불성실과 이를 행하는 악한 의도와 심층에 있는 죄를 지적하시며 심판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서 헛맹세를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헛맹세란 먼저 천박하고 경솔한 맹세를 뜻합니다. 미성년의 맹세도 지적됩니다. 대체로 깊은 생각이 없이 쉽게 맹세하여 버리는 무책임한 맹세를 지적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이 맹세로 인해서 내게 지워지는 무거운 책임과 또 자신에게 나타날 운명, 그리고 맹세로 인하여 달라지게 될 이웃 관계의 변화 등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쉽게 해 버리는 맹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같은 맹세는 맹세 그 자체가 경솔한 동기로서, 그 자체가 불 신앙에 속하고 벌써 신앙을 떠나는 죄가 됩니다. 이렇게 경솔히 맹세해 놓고서 스스로 그 맹세에 매여서 부자유하며 때로는 스스로 원망하고 자기 생을 스스로 책망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됩니다.

둘째로는 회피적인 맹세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회주의적이며 또 맹세 그 자체를 어떤 다른 유익의 수단으로 삼는 그릇된 동기에서 유발되는 맹세입니다.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빼앗은 후, 그 후환이 두려워서 하란으로 피난 갈 때 벧엘에서 돌 베개하고 누웠는데 몹시도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꿈에 하나님에서 그에게 축복하실 때 그가 꿈에서 깨어나서 맹세합니다. 무사히 돌아오게 해 주시면 여기에 기름을 붓고 제사하며 십일조를 바치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역시 경솔하며 또 우선 위기를 모면하려는 기피적 방책으로 맹세한 것이라 보여집니다. 자기불성실이나 거짓으로 인하여 주어질 그 형벌을 회피하려는 기회주의적 수단으로써 맹세하는 그러한 맹세입니다. 이 같은 맹세는 또 다른 거짓을 범하게 됩니다. 맹세를 통하여 거짓을 진실로 위장하여 당장의 형벌은 우선 면한 듯하나 그 거짓이 계속 지켜지지도 아니할 뿐더러 맹세 그 자체가 지닌 또 다른 거짓의 죄는 더욱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이 같은 회피적인 맹세는 그 동기 자체가 벌써 거짓이며 그 내용 또한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나보다 큰 존재의 이름을 빌어서 그 이름을 빙자한 맹세가 있습니다. 나의 의가 나의 진실을 보증해 주지 아니하면 맹세도 효력이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기에, 나 외의 다른 존재의 이름과 그 권위를 빌어서 내 의를 보증 또는 보충하고 그 진실을 기초로 그 이름을 빌어서 맹세하는 것입니다. 내 진실을 다른 이름에 걸고서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 동기 또한 불성실할 뿐더러 이 빌어오는 권위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함께 지는 것으로써 이 맹세 자체가 비록 성실하다 하더라도 그 맹세의 무게는 더 커지며 책임이 더욱 놀랍게 가중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맹세 형식은, 그 속에 거짓된 동기가 있고, 회피적이거나 자기 세속적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행하여지는 맹세라고 한다면 그 죄는 막중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저들은 하늘, , 예루살렘, 그리고 제단, 제물, 여러 가지 이름들을 들어서 맹세하였습니다. 이른바 불변하며 거룩하며 하나님의 권세가 보증하는 어떤 대상물을 들어서 맹세하여 자기 맹세의 진실성을 굳게 하려한 것입니다. 실은 그 의도 자체가 가증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 지적한 대상물의 성격에 따라서 맹세의 가치가 무거워지며 또 가벼워진다고 평가하기도 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름을 빌어서 자행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하고 또 어떤 이름을 빙자한 맹세는 그 가치가 적어서 지키지 아니해도 된다고 저들은 궤변적인 해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의도들이 무엇을 뜻합니까? 그 깊은 곳에 있는 악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행위의 동기와 의도 그리고 그 불의와 거짓을 환하게 들여다보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다면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여기까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아픈 마음의 심판적인 선언과 그 깊은 뜻을 분명하게 알고 읽어야 할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생각하면 맹세 없이 질서는 세워지지 아니합니다. 모든 약속이 다 맹세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결혼 서약, 임직 서약 그리고 모든 도장을 찍어 만드는 문서와 보증서들, 또한 어음과 수표등이 다 명예와 인격을 거는 약속이며 맹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그 깊은 뜻은 더 높은 차원에서 하시는 경고의 말씀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맹세할 때 신실하며 맹세 지킬 때 성실하고 또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으로 맹세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성실히 지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좀더 확실한 교훈을 들어봅시다. 성실만은 우리 인간들 자신의 것입니다. 큰 업적이나 공로는 없어도 진실 하나만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 자신도 그의 고백 중에서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을 감사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비록 교회를 핍박하였지만 그래도 그것이 하나님께 향한 충성이라 믿고 충성되게 행했습니다. 진실 하나는 기본적 자세로 지켰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우리가 취할 바른 자세인 것입니다. 동시에 신앙적 겸손이 함께 해야 합니다. 바울의 약속을 들어봅시다. "주의 뜻이면 가리라"고 언제나 주의 뜻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기에 겸손히 그의 허락이 있은 후에야 그 허락 안에서만 모든 우리의 뜻이 가능함을 솔직히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수제자 베드로가 자기 나약함을 모르고 경솔히 "죽을지언정 주를 따르겠나이다"라고 맹세하더니 그가 예수를 부인할 때 역시 맹세로 부인하고 만 사실을 우리는 성경에서 분명하게 봅니다. 신앙적 겸손이 있고 신앙적인 맹세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진실은 정조와 같아서 한번 깨어지면 회복이 어려우며 "회개는 왕복거리가 필요하다"는 것같이 진실 회복이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시간과 많은 사건을 통하여 스스로의 성실을 키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전과자가 고달프고 한번 넘어진 자가 일어나기 어려운 것은, 한번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진실이란 탑과 같이 기초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려야 합니다. 여기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 뼈아픈 시련도 뒤따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때문에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yes yes, No No)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죄이며 그 동기가 벌써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말의 결과를 우려하지 말고 "진실하신 하나님"께서 보증하실 것이니 신앙적 진실로써 "네와 아니오"를 직선적으로 분명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 모든 위선과 불순한 동기와 거짓으로부터 온전히 자유 하게 될 것입니다. 진실한 자의 자유를 만끽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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