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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인(마태복음 6장 24절)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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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인(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오늘의 본문말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직선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는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렇게 해석해주신 말씀입니다. 사람이란 재물을 지배하도록 지어진 존재이지 재물을 받들어 섬기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재물의 노예가 되어 재물을 섬기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가 없는 법입니다.

재물이 우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재물에 대한 관계가 이렇듯 잘못되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거짓말이 되고 만다 하심입니다.

본문말씀의 요점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이란 누구나 그 나름으로 어떤 주인을 섬기고 있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스스로 존재하려고 해도 혼자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14 : 7)"-'나를 위하여'라고, '내가 주인이다'라 하고 싶어 그렇게 우기어보기도 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누구 할 것 없이 알게 모르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거나 우상을 섬기고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이렇게 운명지어진 것이 사람입니다.

혹자는 '내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자유할 줄 압니다마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나를 섬기고 나의 지능을 섬기고 나의 능력을 섬깁니다.

이른바 '과학주의'라는 우상을 섬깁니다. 예로부터 있어온 미신 행위, 이를테면 방안에다 무엇을 모셔놓고 절을 한다거나 하는, 그런 것만이 우상숭배이겠습니까? 혹자는 내 기분을 중시합니다. 기분에 매입니다.

혹자는 하찮은 명예나 몇푼어치 못되는 내 인격을 섬깁니다. 그러느라고 하나님을 만홀(漫忽)히 여기게 되어 바로 위하여 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기분'이나 '명예''인격'도 우상인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은 그 대상이 누구이건 무엇이건 저마다 나름대로 섬기는 주인이 있습니다. 나 자신은 목적이 될 수 없고 나 자신은 나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위하고 섬기며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중세 유럽에 기사도(騎士道)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기사도는 기사들이 지켜야 할 윤리강령으로서, 여기에는 용맹경신(敬神)예절충성부녀자 숭배 등이 있습니다. 12, 3세기에 걸쳐 전성기를 이루었던 유럽 무인(武人)을 가리켜서 기사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양가의 자제들로, 영주를 섬기며 드높은 기사정신을 발휘했습니다. 이러한 기사의 무리가 섬겼던 윤리가 기사도인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영주는 물론 부녀자들을 위하여, 사랑을 위하여 불의에 맞서 싸웠던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이란 누구나 무엇인가를 섬기며 살게 마련입니다. 어차피 무엇인가를 섬겨야 한다면 섬길만한 자를 바르게 섬겨야 할 것입니다. 모름지기 사람이란 자기 자신이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목적 없는 사람처럼 한심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반드시 목적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요점입니다.

둘째, 재물이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재물이란 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흔히 "돈 나고 사람 났냐, 사람 나고 돈 났지"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재물을, 돈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어째서 재물이 이렇듯 높은 위치에 올라가게 된 것입니까? 어느 사이에 사람들이 이렇듯 재물을 섬기게 된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이렇듯 재물이라는 것은 엄청난 힘이 있으며, 주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째, 혹자에게는 재물이 하나님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치에까지 올라간 재물과 하나님을 놓고 양자택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실로 엄청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재물 가운데서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재물은 하나님의 위치에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념으로 볼 때에는 이 가운데 하나밖에는 섬기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 가운데 어느 하나는 버려야만 합니다.

여러분, 재물에 매인 사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을 바로 하는 사람이어야만 재물로부터 완전히 자유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기분적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재물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는 금욕주의시대를 사는 것도 아니고, 물질 자체를 죄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 물질을 잘못 사용함으로써 죄가 되는 것입니다. 물질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욕망과 모든 본능은 죄가 아니며, 다만 그 욕망과 본능이 타락함으로써 죄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교부 제롬(Jerome)으로부터 루터(Luther)에 이르기까지 물질 자체를 죄악시하는 신학사조가 팽배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돈을 가진다는 것, 물질을 가진다는 것 자체를 정죄했습니다. 따라서 잘 믿는 사람들은 일부러 가난해져야만 했고, 물질을 가지지 말아야만 했습니다. 물질을 전혀 상대하지 않아야만 참으로 깨끗한 사람이요 잘 믿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시대였습니다. 물질에 대한 이같이 그릇된 이해는 종교개혁 이후에 바로잡히게 됩니다. 비로소 물질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며, 물질에 대한 이해와 물질에 대한 욕망이 잘못된 것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물질 그 자체는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물질에도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 아주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물질이 어떻게 잘못되기 쉬운가, 돈이 가지는 유혹과 돈이 주는 시험은 어떤 것인가, 돈으로 인하여 빠지는 시험과 유혹은 어떤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첫째, 돈이 삶의 중심이 되고, 생의 목적이 되려고 합니다. 이러한 돈의 목적화, 재물의 목적화는 우리에게 큰 시험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새벽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무엇인가를 합니다. 이러한 꿈틀거림은 모두 돈을 벌기 위한 노력입니다. 새벽기도에 나오시는 분 가운데는 혹시 하나님 앞에 경배하면서, 일찍 나온 그만큼 나는 믿음이 아주 굳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교회에 오려고 길을 나섰을 때에 컴컴한 거리를 질주하는 택시를 보았을 것입니다. 택시 기사분들은 여러분보다 훨씬 일찍 일어납니다.

여러분은 간혹 몸이 안 좋다거니 날씨가 흐리다거니 핑계를 대고 새벽기도에 빠지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둡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저는 '오늘 기도회에는 사람들이 좀 적게 오겠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아니나다를까 어김없이 그런 날은 사람수가 적습니다. 그러나 택시기사는 날씨가 흐리다거나 몸이 좀 안 좋다고 해서 쉬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쉬는 일이 없습니다. 매우 부지런합니다. 그렇다면 돈을 벌기 위하여 부지런한 것과 첫 시간을 할애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리고자 부지런한 것을 한번 비교해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리기 위하여 부지런한 것보다 돈을 벌기 위하여 더 부지런하고 얼마나 더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날에도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하여 눈에 불을 켜고 일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직장에 다니는 것도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벌어먹기 위해서 일을 합니다. 심지어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어쩔 수 없이 일을 한다고도 합니다. 먹어야만 살 수 있겠고, 돈이 있어야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겠고, 그러다 보니 일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사람이 살기 위해서 먹느냐, 먹기 위해서 사느냐'라는 문제 사이에서 헤매게 된 것입니다. 어찌 보면 꼭 먹기 위해서 사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것도 이 때문은 아닙니까? 특히, 집에서 일하는 가정주부들이 먹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보십시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음식 준비하고 도시락 싸서 아이들 학교 보내고 집안 청소하고 빨래를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시장바구니를 들고 나가 찬거리를 마련해서 음식을 만들어놓고 가족을 기다립니다. 이렇듯 하루종일의 일이 거의 먹으려고 하는 일입니다. 먹는 것을 위하여 온종일 수고하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듭니다. 물질이 실제적인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먹기 위해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이렇게 허덕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물질이 삶의 중심이요 물질이 삶의 목적이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것이 재물이 우리에게 주는 첫번째 미혹입니다.

둘째로, 물질이 이상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오로지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만 같습니다. 어떤 가난한 집에서 남편이 외출하는데 부인이 필요한 것들을 말합니다. 요샛말로 바가지를 긁습니다. 쌀도 없고 땔나무도 없고 아이들 학비며, 또 무엇이 없고남편은 빙그레 웃으며 말합니다. "그냥 돈 없다고 한마디만 하면 될 것을 왜 그리 복잡하게 말하오?" 가끔은 돈만 있으면 뭐든 다 될 것 같습니다. 입을 옷이나 미장원에 가는 것도 돈만 있으면 해결될 것 같습니다. 병원에 갈 때도 돈이 있어야 갈 수 있습니다. 돈이 만능입니다.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행복과 돈이 정비례하는 것으로 느낍니다.

여러분, 돈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돈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도 돈이면 곧 행복이다, 그렇게 보입니다. 돈이면 모든 것이 능할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깊이 생각해보면 세상에 돈 가지고 하는 것은 몇 가지 안됩니다. 그실은 그것만큼 쉬운 일이 없습니다. 아이에게 공부시킬 때에도 학비는 내줄 수 있지만 머리 속에 지식을 넣어줄 수는 없습니다. 가정교사를 대줄 수는 있어도 실력 넣어주는 것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제가 학교에 있을 때에도 어리석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아이를 입학만 시켜주면 돈은 얼마든지 내겠다고 합니다. 사람이 얼마나한 값어치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렇게 나오는 부모의 심정에는 이해가 갑니다. 불행히도 그 돈이 거기에서는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가끔씩 돈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듯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혹입니다. 시험입니다. 돈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경제의 능력이란 한계가 있는데도 무엇이든 가능한 것처럼 보여질 때, 이것이 시험이라고 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그러한 돈과 물질에 집착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수고가 돈을 벌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모든 것에 근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이 따라가지 않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교회도 때로는 어려움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는 돈 없이 시작하면 티없이 좋겠습니다마는 도심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요즘 예배드릴 초막 하나 만드는 데도 2억이 든다고 합니다. 교회 시작하는 데도 그만큼 돈이 듭니다. 이렇게 돈에 집착하다보면 돈 이외의 것에는 소홀하게 됩니다. 그것만 있으면 무엇이든 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 집착성에 시험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네 번째는 돈에 마음을 쓰게 됩니다. 매번 근심합니다. 정신병자가 되는 데도 많은 이유가 있겠습니다마는 돈 때문에 그런 경우도 많습니다. 심방을 갔다가 정신이 온전찮은 어떤 분을 만났었는데 줄곧 돈만 세고 앉아 있어요. 돈을 빼앗으면 막 웁니다.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돈에 집착했으면 저렇게까지 되었을까 싶더군요.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정신이 나갈 만큼 돈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돈 때문에 마음이 상한 경험을 가진 분이 많을 것입니다.

오래전 대구로 부흥회 인도하러 갔을 때, 어느 장로님 댁에서 사흘동안 투숙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이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장로님이 굳이 자기 집에 모신다고 해서 거기에 머물렀습니다. 근간에 어려운 시련을 당했다가 그 문제가 해결되어 다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면서 이번 부흥회 강사 목사님을 꼭 모시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집에 가니 장로님이 나오시는데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더군요. 이유를 물었더니 사업을 하던 중 부도가 나서 몇 달 동안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부도 전에는 '사장님, 회장님'하며 모시던 사람들이 당장 강도로 변하여 집안 물건 다 가지고 나가면서 욕까지 하더랍니다. 또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져서 그 사람들의 사업도 잘못되고, 그 책임 때문에도 너무 신경을 많이 써서 일주일 내내 식사도 못하고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일주일 뒤에 일어나 거울을 보니 머리가 홀랑 빠지고 말았더랍니다. 여러분도 돈 때문에 마음 많이 써보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마음을 안 써야 되는데 안 쓸 수가 없습니다. 돈이 그토록 무서운 것입니다. 돈 때문에 근심 걱정하다가 어느 사이에 돈을 섬기는 사람이 됩니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게되고 돈이 제일이라는 그런 마음으로 바꾸어지더라는 말입니다.

다섯 번째는 돈이 삶의 태도를 바꾸어놓습니다. 사람을 바꾸어놓기에 문제가 됩니다. 갑자기 돈이 생겨 부자가 되면 곤란합니다. 부유해진 것만큼 인격이 따라가지 못하여 어렵게 됩니다. 얼마전 택시를 타고 먼 거리를 가면서 기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늘 교인들과 대화를 해서인지 남을 무시하는 이야기는 워낙 못합니다. 교양이 높아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기사양반!'하고 좋은 뜻으로 말했더니 그분이 기분이 좋아서 말합니다. "오늘은 덕분에 제가 기분이 좋습니다마는 어떤 손님은 타자마자 다짜고짜 이놈 저놈하며 이리 가라 저리 가라 명령 투로 말합니다. 돈 더 주면 되지 않느냐면서요. 그럴 때에는 아니꼽고 치사해서 있는 대로 욕을 하고 싶지만 그러지도 못하지요." 돈 가질 자격이 없는 사람이 어쩌다 부자가 되면 이렇게 문제가 됩니다.

돈 없을 때에는 좋던 사람이 돈 있음으로 못된 사람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사람이 태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미혹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돈 있는 사람은 사람들을 의심합니다. 전에는 믿던 사람도 이제는 자기 돈을 어찌할까봐 의심하게 됩니다.

돈만 있으면 자식도 그다지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필시 저놈은 내돈을 뺏을 놈'이라고 생각합니다. 친구도 반갑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얻으려고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돈 몇푼 때문에 못돼먹은 사람이 흔합니다. 형제애도 없습니다. 그래서 형제가 찾아오는 것도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특히 가난한 형제와 만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얻으러 온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교만해지고 인색해져서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앙까지도 저버리게 됩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가난해지면 공연히 부자를 시기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잘사는 사람을 이유 없이 욕하고 비방합니다. 부자라고 해서 모두가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잘사는 사람들을 모두 싸잡아 무작정 나쁘게만 보고, 시기와 질투와 반감을 품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돈 때문에 사람이 달라져서는 안됩니다. 돈이 있으나 없으나 사람됨이 한결같아야 합니다. 이렇듯 돈이 있고 없음에 따라서 삶의 자세가 달라지는 것 역시 큰 시험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섯 번째, 돈은 우선권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이 돈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은 결국 자유인임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돈의 노예가 되어 돈을 상전으로 섬기게 됩니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재물에 대한 참된 입장은 어떤 것입니까? 성경은 이에 대하여 몇 가지로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재물을 가짐에 앞서 만족할 줄 아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얼마를 가졌든지 간에 만족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68)."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함입니다. 물질에 대해서부터 지족(知足)한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함입니다.

다음으로 성경은 청지기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비록 이 재물이 지금 나한테 있지마는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재물이란 언제든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며, 왔다가도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재물은 돌고 도는 것이지,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청지기의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내가 당분간 맡아 있는 것이다'하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성경은 재물에 너무 많이 마음을 쓰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돈을 너무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돈이 많음으로 교만해지고 돈이 없음으로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재물에 초연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재물이란 하나님께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재물을 억지로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억지로 빼앗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흔히들 돈도 은혜도 주어지는 것이지 애쓴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욥을 보십시오. 사단의 시험으로 가난하게 되었을 때에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1:21)"-자신이 누리는 재물은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욥의 명철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주심을 감사하고, 없어졌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가져가신 것이라고 생각할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재물이란 노력의 댓가 이상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넘치도록 많이 주십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마음을 비우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가질 자격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바가 더 큼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지금 연년이 5년 동안 풍년이 들었는데 북한은 5년 동안 계속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풍년이라는 것이 우리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풍년은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의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많은 인구가 먹고살라고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노력한 댓가라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물질생활을 하는 것 같지마는 겸손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을 비운 사람, 마음을 낮춘 사람은 어려운 형편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할 줄을 압니다. 그러나 마음이 부한 사람, 욕심이 많은 사람은 가지면 가질수록 불만이 늡니다.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물질생활에 대하여 언제나 노력의 댓가 이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적인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돈이라는 것은 지배하기로 들면 가장 좋은 종이다. 충성된 노예가 된다. 그러나 섬기기로 들면 돈은 가장 무서운 폭군이 된다"-무릇 사람은 돈에 대한 자세가 바로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담긴 격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돈 때문에 신앙적 갈등을 겪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신앙과의 관계에서 돈 때문에 실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먼저, 롯이 있습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애굽에서 나온 뒤, 아브람과 헤어진 롯이 물이 넉넉한 소돔과 고모라를 보고 그 땅을 택합니다. 그 땅의 풍부한 물질에 끌렸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소돔과 고모라로 인하여 큰 피해를 보게 됩니다.

민수기 22장에는 물질에 눈이 어두워져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려고 하다가 벌을 받은 발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는 예수님께서 비유하여 말씀하신 바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6장에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부자는 자신이 가진 물질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만 부했지, 거지 나사로를 전혀 돌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죄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어떤 관원이 예수님께 와서 영생 얻는 것에 대하여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연후에 당신을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관원은 자신이 소유한 부에 대한 집착 때문에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돈 때문에 영생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는 하나님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급사(急死) 이야기가 나옵니다. 땅을 판돈을 하나님께 모두 가져다 바쳤어야 했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돈의 일부를 감춥니다. 그리고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회개의 기회를 주는 베드로의 질문에도 거짓으로 답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들 부부는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물론 이들의 마음속에 처음부터 돈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돈을 보는 순간에 그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들은 모두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영접할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는 물질 욕심으로 해서 급기야는 물질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섬기지 못 하고 물질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우리가 돈을 바로 지배할 수 있겠습니까? 돈을 지배하는 비결을 생각해봅시다. 첫째, 돈을 바로 지배하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려면 건전한 인생관이 필요합니다. 고상한 인생의 목적을 세워야 합니다. 저 높은 곳에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목적을 돈에 두지는 말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귀하다지만 그보다는 인격이 먼저요 사람이 우선 입니다. 돈보다는 도덕과 진리와 자유가 먼저입니다. 고상한 인생관을 세운 연후에야 물질관도 바로 세울 수 있음을 잊지 말 것입니다.

둘째, 올바른 소비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돈을 쓰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잘 쓸 줄 알아야 합니다. 돈을 버는 것에 대해서는 많이 배워왔습니다마는 쓰는 방법에 대해서는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특히 우리네 한국 교인들은 돈을 제대로 쓸 줄을 모릅니다. 우선 유산 처리를 제대로 할 줄 모릅니다. 서양사람들은 어찌 보면 평소 돈을 제대로 못쓰고 흐지부지 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끝에 가서 결론은 잘 맺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마지막에 가서 시시하게 끝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 동안 너무 못살아왔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죽는 순간까지 자기가 가진 재산을 처리하지 못합니다. 기왕 자기가 쓰지 못하고 두고 갈 재산이라면 근사하게 쓸 수는 없습니까? 쓰지도 못하고 그냥 쥐고 있다가 죽고 마니 형제 간에도 재산을 자기고 법정에까지 나서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사돈의 팔촌까지도 와서 자기 몫이라고 우깁니다. 이것이 무슨 짓입니까? 왜 임자 없는 재산을 만듭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기 바로 몇 시간 전이라도 변호인을 불러서 유서 한 장 써두면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 믿는 분들이 유산 처리만 바로 해준다 해도 큰 선교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엄청난 돈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제대로 쓰지 못해서 전부 망치고 있습니다. 쓸데없이 자식에게 물려주려고만 합니다.

그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면 필경은 그 자식을 망치게 됩니다. 자신이 힘들여 번 재산이 아닌데 온전히 쓸 줄 알겠습니까? 왜 이렇듯 유산 처리를 잘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을 바로 배워야 합니다. 지금부터 바로 배우십시오. 그리고 정말로 잘 하시려거든 오늘 당장 집에 가셔서 미리 유서를 써놓으십시오. 언젠가 쓸 것이라면 미리 써놓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그 유서에 '나 죽은 다음에 뜯어보라'고 단서 하나만 붙여놓으면 됩니다.

그리고 도장만 찍어놓으면 내가 죽기 전까지는 휴지에 불과합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효력이 나타납니다. 유서는 일찍 쓸수록 좋습니다. 미리 써놓고 예수 믿으면 더 가벼운 마음으로 더 진실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영국에 구두쇠로 소문난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엄청나게 많은 돈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식들에게 하찮은 푼돈 주는 것도 아낍니다. 자식들은 재산을 그렇듯 움켜쥐고만 있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어서 원망했습니다. 물론 주변 사람들도 그를 흉보고 욕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시신을 옮기려고 보니 베개 밑에서 유서가 한 장 나옵니다. 그 유서에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뮬러에게 돌린다고 씌어 있었습니다.

그제야 자식들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깊이 생각해볼 이야기입니다. 모름지기 바람직한 소비관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적게 쓰고 어디에 많이 씁니까? 어디로 후하고 어디로 인색합니까? 돈은 신앙적으로 소비할 것입니다.

세째, 건전한 인격관이 필요합니다. 재물과 나는 임시적으로 이어져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돈을 모든 것의 가장 아래에 두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격입니다. 돈의 유무에 따라서 인격이 좌우되어서는 안됩니다. 돈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높이 보지 말 것이며 돈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돈이 있다고 해서 교만해질 것이 아니요 돈이 없다고 해서 비굴해질 것도 없습니다. 돈보다는 바른 인격관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른 인격관입니다.

네째, 올바른 헌금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돈을 바치는 일도 훈련입니다. 모름지기 바르게 헌금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장 귀한 헌금은 무명으로 하는 헌금입니다. 간혹 보면 헌금을 하면서도 이름을 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제가 십일조를 어디에 주고 싶은데 그곳에 주면 안되나요."라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내가 낸 십일조니까 내것이지 어떻게 하나님 것이냐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릇된 생각입니다. 십일조는 내 이름으로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바칠 때에 십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앞으로 십일조를 주고 감사패까지 받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돈일 뿐 십일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는 바른 헌금관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십일조법을 만들어놓으신 것입니다. 헌금을 바로할 때에야 물질의 노예가 되는 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24)"-재물을 섬기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길 때에 재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재물이 나를 섬기게 됩니다. 재물이 나를 섬기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재물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지 못함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르게 섬기십시오. 그리함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충만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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