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4월 24일] 더디 믿는 사람들(눅 24:13~27) - 곽선희 목사
https://www.youtube.com/watch?v=M6e0U0gdw7I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3절입니다. 누가복음 24장 13절 신약성경 140면 되겠습니다. 신약성경 140면 누가복음 24장 13절부터 주신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봉독할 때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날에 그들 중에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떨어진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되어진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하매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의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은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 사람이 클레오파라 하는 제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거류하면서 거기서 된 일을 혼자서만 알지 못하느냐?"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라.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에게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이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의 환상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있던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그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이에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쓰여진 자기에게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옛날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서 풍랑을 만나서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가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 놀라운 기적입니다. 아직 묻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남겨두고 저들만 배를 타고 건너갔을까? 그 점을 알기 어렵고요. 또 예수님께서 홀로 계시다가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면서 풍랑을 만나서 시달리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그리고 예수님은 배를 타고 가시는 제자들을
물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까이 갑니다. 그 장면을 상상을 해보세요. 이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많습니다. 아주 풍랑 속에서 예수님이 서 계시고,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씀을 듣고 물로 걸어 나오는 그런 장면을 상상해서 그림을 그린 아름다운 그림을 볼 때 한 폭의 그림이지만 참 그 장엄한 장면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베드로가 말합니다. "정말로 당신이 나의 사랑하는 예수님이시거든 나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 아, 참 대단한 생각입니다. 믿음이기도 합니다. 그때 예수님 말씀이 "걸어오라." 하여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갑니다. 가다가 거센 바람이 일고 풍랑이 있는 것을 그 물결을 바라보는 동안에 그만 물속으로 잠겨 들어갑니다. 큰일 날 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곧 베드로의 손을 잡아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믿음이 작은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나를 보고 왔으면 나만 보면 되지 왜 풍랑을 보았느냐? 나만 보고 내게로 초점을 맞추고 왔으면 될 것을 어찌하여 바람과 풍랑을 보고 물에 빠져들었느냐? 믿음이 작은 자여, 어찌 의심하느냐?" 여러분, 믿음이 뭡니까? 또 가나안 여인을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크다." "네 믿음이 위대하다." 믿음이 작다, 믿음이 크다. 믿음의 분량을 이렇게 분석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디까지 왔습니까? 신학자 폴 틸리히는 **'다이내믹스 오브 페이스'**라고 하는 유명한 그의 저서에서 말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무한함이 유한한 한계를 넘어서 존재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믿음은 신비한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경험은 확실한 것이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이성에서는 불확실한 것이다. 경험은 확실한데 이성으로서는 불확실한 것이다.
그래서 이 불확실성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유명한 말을 합니다.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엘리멘트 인 페이스'(Element in Faith), 믿음의 요소는 거기에 있고 바로 불확실성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그것이 바로 신앙적 용기라 이렇게 신학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경험 속에서 믿음이 얻어집니다. 여러분, 질병 당한 경험, 그리고 실패 혹은 전쟁, 재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경험 속에서 무엇인가 하나님을 의지해야겠다고 하는 믿음이 얻어집니다만, 그 믿음은 여기서 머물러서 안 됩니다. 이제는 그 뒷받침하는 이성적 이해가 있어야 됩니다. 이성적으로 납득이 가야 믿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뿐 아니라
가슴이 따라가야 됩니다. 내 가슴을 열어서 이 사건을 느낌으로 받아들이게 돼야 되고요. 그리고 다시 경험을 반복하는 동안에 확실한 믿음을 얻게 됩니다. 믿음의 확증을 찾아가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 생활의 순환 생활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 믿음 있는 사람. 오늘 본문에서는 이 두 사람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예수님 부활에 이것을 얼핏 들었습니다만은 회의에 빠지고, 낙심한 신앙을 가지고 낙심하고, 그러면서 엠마오로 갑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합니다. 왜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잘못된 기대감 때문입니다. 세속적인 욕망. 구도로는 21절에 있습니다만,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회복할 자라고 믿었노라." 쉽게 말하면 이스라엘 왕이 될 거라고 믿었노라. 그래서 로마 군인들을 다 내보내고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을 회복할 것이라고 믿었노라. 그런데 그것이 무너졌다. 십자가에 죽으셨다. **'우리가 이스라엘 회복할 자라고 믿었노라'**는 세속적인 욕망 때문에
예수님을 바로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신앙 속에는 고난 없는 영생을 바라고 있습니다. 죽음 없는 영생. 그 힘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고난과 죽음은 생각하오. 거기서 말미암지 않고 영생으로 직행하는 그러한 영생을 기대했습니다. 고난 없는 영생, 세상의 연장선에서 영생을 기대했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고통 없는 세상을 만들어주는 것. 능력이란 무엇입니까? 십자가 없이 영광을 누리는 것. 가는 것을 바랬어요. 그러나 여러분, 성경대로 성경은 말합니다. 성경은 계속 말합니다.
고난의 구속사적 의미. 고난, 여러분 인정해야 합니다. 고난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아도 어떻습니까? 언제 겸손히 했습니까? 언제 진실했습니까? 언제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갔습니까? 고난이 미안 하지만 감기가 걸려야 믿음을 드높이고 한다고 하지만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고난은 교회의 기도입니다. 고난 중에 주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주님을 사모하게 됩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구원도 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러한 사람들로 재창조해 나가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변화시키심의 수단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방편입니다.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은사입니다. 고난을 은혜로 받아들이면서만 그리스도를 바로 알 수가 믿는 것이 올바르다. 그리스도가 당연히 고난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마음에 고난 없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바랐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가 당연히 고난 받아야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 역사가 이루어진다. 이 필수 구속 사건을 왜 모르느냐? 왜 믿지 못했느냐? 다시 말하면 그 마음속에 세속적인 욕망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예수님을 바로 볼 수가 없었고, 특별히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 예수님도 이해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인 것은 분명한데 그 마음은 이 시간 실망하고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성경 속에는 많은 고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굳이 욥기를 말할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아닙니다. 모든 성경의 내용은 고난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말씀하시고, 고난 속에서 예언하시고, 고난 속에서 구원하시고, 고난 속에서 정복하시고, 고난 속에서 선교하시고, 하나님의 선교가 고난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전쟁 하면 생경하게 생각합니다만은 여러분, 전쟁이라고 하는 큰 사건을 통하지 않고 선교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역사가 없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전쟁을 통해서 문명도 이루어지고, 질서도 이루어지고, 평화도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의도 이루어지고, 정의와 평강도 다 이루어지나요? 고난이 곧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지. 성경을 읽어보면 고난의 역사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아, 성경을 똑바로 보아라. 너희가 성경을 모르니까 십자가의 예수에 대하여 실망한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과 예수를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 돌릴 자에게 그렇지 못하고 낙심하고 실망한 이유는 성경을 똑바로 몰랐기 때문이라. 성경을 봐야 합니다. 성경을 바로 이해한다면 고난을 통해서 내리시는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시나를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이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내가 볼 때는 좀 더 찜찜한 얘기가 있어요. 이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할 자라고 믿었는데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실망했는데 좀 이상한 것은 아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부활했다는
겁니다. 이런 말이 있구요. 여인들이 그렇게 말했고, 천사를 만났다고 그러고, 베드로와 요한도 가서 빈 무덤을 보고 왔다고 말하더라. 소문이 나온 거예요. 이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런 소문을 들었으면 자기들도 가봐야 될 거 아니야. "빈 무덤이라고? 내가 가보겠다. 내 눈으로 확인하겠다." 왜 그런 적극성이 없습니까? 적극성이 없어요. 이 본문 보면 아주 맘에 안 들어. 이 사람들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했다고 하더라', '천사를 만났다고 하더라', '두어 사람까지 갔다가 빈 무덤밖에는 못 봤다고 말하더라.' 이런 소극적인 자세가 바로 예수님을 바라봐야 바로 알 수 없는 이유란 말입니다. 좀 더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신학에 보면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유명한 신학자 **'르낭'**은 본래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이에요. 아, 많은 사람들이 "예수 부활이요, 예수님 믿고 능력이고, 뭐, 온 세상이 어떻고" 하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 결심했어요. "내가 연구를 많이 해가지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못 믿게 하겠다. 예수님의 역사가 허상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 생각을 하고 **'예수 생애'**라고 하는 책을 씁니다. 예수님의 생애라는 책을 자기를 구애 하면서 그 책은 명저가 된 이유가 첫 부분에서는 예수님을 휴머니스트로, 예수님을 인도주의자로 이렇게 써 갑니다. 쓰다가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돌변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말로 결론을 맺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 못 믿게 하기 위해서 성경 연구하다가 자기도 믿게 되어 버렸어요.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어요. "저 마누라 교회 다닌다는 데 영 마음에 안 들어. 아닐, 어리석은 사람들 하는 짓이 아닌가?" 그래서 "마누라 따라서 내가 교회를 가봐야 도무지 못 가게 하든지 뭐라고 해야 될까?" 해서 마누라 따라서 몰래몰래 교회를 다녔어요. 몇 번 다니다가 등록을 했지 뭡니까? 교회 안 나오고 어쩌고저쩌고. 이것은 좋잖아요. 반대했던 경우인데 구원돼요. 모든 사람이 사람이 되더라도 성경을 알고 탐구하고 그런 종류가 필요합니다. 적극적인 자세.
오늘 이 사람 마음에 안 들어요.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신 거 실망했고, 부활했다고 하더라. 제자들이 갔다가 빈 무덤을 봤다. 아니, 자기도 가보면 될 거 아니야. 왜 안 가 가지고 이런 생각하고 있느냐? 그러므로 저는 엠마오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바쳐서 좀 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 마지막에 본문이 요구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을 하세요. 성령의 감동해서 눈을 뜨게 해 줄 때 예수를 알아보게 됩니다. 모든 노력, 모든 수고가 있겠지만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십자가의 뜻을 알 수 있고, 대속의 의미를 알 수 있고, 십자가를
통하여 나에게 시사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성령을 통해야 성경도 알게 되고, 성령을 통하여 사건을 근본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단 말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안 돼요. 성령이 아주 드라마틱하잖아요. 성령이 임해서 눈이 열리니까 "아, 지금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구나!"를 알아보게 됩니다. 성령이 눈을 열어주었다. 성령이 마음의 문을, 눈을 열어줘야 신앙도 알 수가 있고, 현실도 이해할 수 있고, 역사를 바로 볼 수 있고, 내 운명의 미래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예수님 말씀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더디 믿는 자요!" 그래요. "더디 믿는 자요!" 헬라어로 '슬로길리버'(slow-gleaner)라고 하는 말입니다.
영어로 'slow believer' (슬로우 빌리버). 믿기는 믿는데 속도가 느려. 믿기는 믿는데 피상적이야. 믿기는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깊이가 약해. 나도 좀 더 생각을 다시 해서 적극적이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내게 향하신 계시를 바로 이해하고 교훈을 견고하게 지키는 자가 되어야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들은 믿음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속적 욕망에 매여서 내가 곧 십자가에 매일 수 없었습니다. 따라오고 싶은데 따라올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떠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제자가 되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나를 온전히 부인하지 못하면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예수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세상 가운데 살면서도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 것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꼭 잊지 말아야 한다. "더디 믿는 자요!" '슬로우 빌리버' 되지 말고 좀 더 가까이, 좀 더 적극적으로, 좀 더 철저히, 좀 더 권세를 가지고 확실하게 믿음으로 나갈 수 있고, 주님의 음성은 바로 들어야 할 것이다. 엠마오로 가던 이 두 제자들, 예수님의 얼굴을 알아보는 순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시 예수님을 만나는 그 순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이 아름다운 결말을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 내 믿음의 현주소는 어디까지 왔는지 생각하며 새로운 믿음을 회복하는 은총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의 음성을 듣고 주 앞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에게는 안개처럼 쌓여 있는 세속적인 욕망, 또한 인간적인 생각, 또한 스스로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로 인해서 성경을 읽어도 바로 알 수 없고, 기도해도 응답을 얻지 못하고, 말씀을 들어도 확실한 감격을 체험하지 못하는 가운데 있사오니,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이 시간
안개처럼 우리를 쌓여 있는 이 세속적인 시각과 영광을 해체해 버리고, 깨끗하고 온전한 심령으로 주님의 은혜를 배우며, 십자가의 은총을 보며, 하나님의 그 구원에 응답하는 귀하고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말씀 본문 요약 (누가복음 24장 13절 이하 및 설교 내용)
제공해주신 내용은 누가복음 24장 13절 이하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를 본문으로 하여, 참된 믿음의 자세와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 설교의 내용입니다.
1.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 (누가복음 24:13-35)
- 상황: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두 제자(한 명은 글레오파)가 예루살렘에서 25리 떨어진 엠마오 마을로 걸어가며 일어난 일들에 대해 슬픔에 잠겨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 예수님의 동행: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들과 동행하셨으나,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 제자들의 이야기:
- 예수님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에게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였음을 인정했습니다.
- 그들이 믿었던 것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이스라엘 왕/회복자)**라는 세속적인 기대였습니다.
-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예수님을 사형 판결에 넘겨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바람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 여인들이 무덤에 갔다가 시신은 못 보고 천사의 환상을 보았으며,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전했다는 소문과, 다른 제자들도 무덤에 가보았으나 예수님은 보지 못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 예수님의 책망과 가르침:
- 예수님은 제자들을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책망하셨습니다.
-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성경의 예언임을 설명하셨습니다.
-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쓰인 자기(예수님)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2.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믿음 (신앙의 크기)
- 기적의 장면: 예수님께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에게 물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 베드로의 요구와 실패: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요청했고, 예수님의 허락에 따라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과 풍랑을 보고 두려워하는 순간 물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 예수님의 교훈: 예수님은 베드로의 손을 잡아주시며 "믿음이 작은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나만 보면 되지 왜 풍랑을 보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믿음의 분량: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작다", 가나안 여인에게는 "네 믿음이 크다"라고 하시며 믿음의 분량을 분석하여 말씀하셨습니다.
3. 참된 믿음의 본질과 방해 요소
💡 신학적 정의 (폴 틸리히 인용)
- 폴 틸리히의 **'다이내믹스 오브 페이스(Dynamics of Faith)'**에 따르면, 믿음은 무한함이 유한한 한계를 넘어 존재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 믿음은 경험은 확실하지만 이성으로는 불확실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 불확실성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적 용기입니다.
❌ 엠마오 제자들이 바른 믿음을 갖지 못한 이유 (더디 믿는 자의 특징)
- 잘못된 기대감 (세속적 욕망):
-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할 왕이 되리라는 세속적인 욕망을 가졌습니다.
- 고난 없는 영생과 십자가 없는 영광을 기대했습니다.
- 예수님은 고난이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수단이자 은사이며, 그리스도가 당연히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통해 구원 역사를 이루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함:
- 성경 전체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역사하시고, 구원하시고, 선교를 이루시는 고난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 성경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십자가의 예수를 보고 실망하지 않고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축복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 소극적인 자세 (빈 무덤 소식에 대한 반응):
-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문(여인들의 증언, 빈 무덤)을 듣고도 "직접 가서 확인하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부족했습니다.
- 르낭의 예시처럼, 반대하려 성경을 연구하다가 오히려 예수님을 믿게 되는 적극적인 탐구 자세가 필요합니다.
- 성령의 감동이 없음:
-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고, 십자가의 대속 의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며, 성경과 현실을 근본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올바른 믿음의 결론
- 예수님은 그들을 '슬로우 빌리버(slow believer)'- 더디 믿는 자라고 하셨는데, 이는 믿기는 믿으나 속도가 느리고, 피상적이며, 깊이가 약한 상태를 말합니다.
- 진정한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세속적 욕망에 매여 온전히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바로 볼 수 없습니다.
- 엠마오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는 순간(성령의 역사)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결말을 맺었습니다.
'◑Comprehensive◑ > Seonhee'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22년 05월 15일] 한 사역자 의식(고전 3:1~9) - 곽선희 목사 (0) | 2022.10.22 |
|---|---|
| -[2022년 05월 01일] 내가 내 아버지 집에(눅 2:40~52) - 곽선희 목사(어린이주일) (0) | 2022.10.22 |
| -[2022년 04월 17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17~27) - 곽선희 목사(부활주일) (0) | 2022.10.22 |
| -[2022년 04월 10일] 예수 승리의 비밀 - 곽선희 목사(종려주일) (0) | 2022.10.22 |
| -[2022년 04월 03일] 예루살렘을 향한 굳은 결심(눅 9:51~56) - 곽선희 목사 (0) | 2022.10.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