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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손님 P2 마27:46, 욥 42:5,
출처 : 도서 <그리스도만 남을 때까지> 허운석 저 PP.60~81.
◑은혜보다 진리를 구하는 신앙
우리는 수고하고 헌신하면 주님한테 상응하는 복을 바라 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복 대신 그리스도를 주시려고
자꾸 엉뚱한 데로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날마다 삐치고 시험에 들고
신경질 부리고 주님께 반항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괴로움으로 가득 찹니다.
왜 내가 원하는 기도 제목을 안 들어 주시는지 의심합니다.
이런 모습들이 전부 주님께 대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원망하는 가인입니다.
우리 속에 이런 패역한 마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참는 게 아니라 율법 때문에 참는 경우가 많습니다.
체면 때문에 소리 지르지 못하고 참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의가 더 높아집니다.
율법적으로 선의 열매를 너무 따먹다 보 면 율법적인 의에 젖어들게 되고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되어 남을 판단하게 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제 안의 의를 부수기 위해
주님은 죽음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나는 아마존에서 선한 일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위 사람들이 저를 존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무서운 징조입니다.
저도 모르게 내가 한 일로 인해 기뻐하고,
자기 의와 교만이 점점 커져 갔습니다.
그게 무시무시한 독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우리는 은혜와 진리의 세계를 구분해야 합니다.
은혜는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님, 저 좀 잘되게 해주세요”라고
은혜를 구하고 받기를 원합니다.
은혜를 받을 때까지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집니다.
진리를 구하지 않고, 은혜에만 매달리다가 지쳐 서 나가떨어집니다.
주님이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것 같으니
스스로 주님 곁을 떠납니다.
우리 안에는 착하게 행동해야 된다는 윤리의식이 있습니다.
또 남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할까를 늘 고민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사실 나를 보호하고 나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전도만 해도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유익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사랑으로 그 사람을 전도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중심적이라 전도를 하지 못합니다.
상대방이 부담 느끼고 나를 피할까 봐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진리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거짓된 내가 참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진리 로 돌아선다는 것은, 내가 변화되어야 하고 깨어져야 되고
내 속 에 있는 모든 더러움이 해결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진리를 향해 간다는 것은, 내가 어떤 고난을 받더라도
그 고난이 그리스도께 영광이고,
내가 버림을 받더라도 그것이 주님께 영광이며,
남들에게 조롱과 핍박을 받는 것 또한
그분의 거룩하심에 마땅히 돌려드려야 할
영광과 자존심을 세워 드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이제는 장성한 자로 우리는 돌아서야 됩니다.
주께서 내 소원의 기도를 전혀 안 들어 주실 때는
내가 주님의 거룩하심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부활로 가는 것입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
한 알의 씨가 싹을 틔우려면 어두운 땅속에 묻혀야 합니다.
찝찝하고, 캄캄한 땅속에서 씨앗이 싹을 틔워야만 햇빛을 볼 수 있습니다.
소망이 없는 어둠의 땅속을 거치지 않으면, 부활을 경험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앗이 어둠 속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그 속이 깨어지고 갈라집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싹이 나 옵니다.
어둠 속에 있을 때 내가 얼마나 약하고 추하고 악한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문제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문제 속에 들어가야만, 내가 어떤 인간이고, 얼마나 주님께 속해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즉 문제와 고난 속에서
억울하고 분하고 외로운 상황을 만날 때에만
‘아, 내가 아직까지도 주님을 소망하지 않고, 세상에 속해 있구나.
내 속에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경험을 제대로 하지 못했구나’를 느끼게 됩니다.
여전히 내 입술에서는 변명하고, 변호하고 싶고, 싸우고 싶어 합니다.
이런 정욕이 내 안에서 우글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그냥 기도한다고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문제 속에서 우리는 완전히 깨지고 나 자신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씨앗이 쪼개지고 싹이 트면 땅 위로 나오게 됩니다.
작은 새싹은 햇볕을 보기 위해 흙을 뚫고 올라옵니다.
이 싹이 땅속 흙을 뚫기 위해 몇 번이나 부딪힐까요?
무려 1만 번이라고 합니다.
햇빛을 보기 위해 단단한 흙을 계속 두드리고 부딪혀 깨부수는 것입니다.
여린 새싹이 땅속에서 썩지 않으려면 땅 위로 올라와야 합니다.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이런 작은 새싹도 햇빛을 보기 위해 1만 번의 수고를 하는데,
하물며 우리의 구원자 되시 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그만한 수고를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 갈 바를 모르는 우리에게
그 문제를 통해 길을 보여 주시고 계시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문제를 주셔서 우리의 민낯을 탄로나게 하십니다.
우리의 본 모습을 인정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율법에게로 달려가 그 뒤에 싹 숨어 버립니다.
‘내가 더 노력하면 돼’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의지적으로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성경적 원리로 볼 때 우리는 하 나님의 은혜의 길로 가야 합니다.
우리의 본 모습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내가 이 꼬라지입니다. 아직도 한참 멀었습니다.
주님, 나는 싸우고 싶고, 들이받고 싶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주님, 나에게 새로운 성품을 허락해 주십시오.
당신이 아니면 나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주님, 나는 인정합니다.
주님, 나는 인정합니다.’ 날마다 이렇게 되뇌어야 합니다.
▲저 역시 연약한 인간인지라
수십 년 동안 율법과 은혜 사이 를 왔다갔다 하면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삶을 묵상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것이었습니다.
왜 요셉은 믿음을 잘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갇혔을까요?
내가 만약 요셉이라면 그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손과 발이 쇠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힌 요셉은 어 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이 오면 신앙을 저 버립니다.
아플 때 욥기 외에도 본 회퍼와 워치만 니의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숨이 헐떡거릴 때, 가장 묵상했던 것이 그 두 사람이었습니다.
워치만 니는 20년 동안 공산 치하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감옥에서 죽습니다.
그 충성스러운 종이 감옥에 갇혀 지내다니!
본 회퍼도 유능한 영성가이자 신학자였는데,
그 역시 나치 정권이 무너지기 전에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내가 본 회퍼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그의 책을 보면,
“우리가 따르고자 하는 그분이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그분은 무시 받던 목수가 아니었더냐?
그럼 우리는 무엇을 결심해야 되겠느냐?”
우리에게 가난과 멸시와 천대를 각오 하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멋진 도전입니까!
모두 감옥에서 풀려나는 기적을 경험해도 부족함이 없는 분들이었는데,
하나님은 그런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두 사람 역시 하나님께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거절감은 정말 치욕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어두운 밤입니다.
주님이 우리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침묵하는 시간 말입니다.
이 시간이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의 심정은 굉장히 다릅니다.
저도 죽음 앞에 선 사람입니다.
매일 죽음에 대한 압박감에 헐떡거리고 사는 사람입니다.
생명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 두려운 것이 무엇이냐면, 그건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심판받은 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사실 죽음처럼 무서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죽음처럼 고독하고, 슬프고, 외롭고, 가족과 헤어져야 되고,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야 되는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죽음은 가장 끔찍한 고통이며, 아픔이며, 슬픔입니다.
아직 젊은이들은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갖지 못하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지 못하면, 남의 아픈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남의 마음과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고 정죄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전하 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구원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내 마음이 함께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투병으로 헐떡거리고 있을 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이 무엇인지 아느냐?
내 심장을 너희들이 갖지 못한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많지만, 내 마음을 가진 자는 적다.
내 마음을 품을 때 너희는 그 사람의 입장이 될 수 있는 능력이 생겨
그 사람이 나를 느낄 것이며, 나의 사랑을 받고 회복될 것이다.”
저도 그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죽음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나는 감히 주님한테 살려 달라는 말도 못했습니다. ←설교제목
왜냐하면 내가 살아야 주님한테 유익한지,
아니면 내가 죽어야 주님한테 유익한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가 살아서 주님께 폐를 끼치는 행동을 하고 다니면 어쩝니까?
그러면 주님은 또 얼마나 괴로우실까요?
그래서 나는 살려 달라는 기도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속 제 모습은 사기꾼이고 도둑놈이었습니다.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눈치가 빨라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
헤브론에는 예수님의 생명의 씨인 아브라함과 사라의 무덤이 있습니다.
메시아가 누구를 통해서 오셨습니까?
믿음의 조 상 아브라함을 통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갈렙이 용기를 내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담대히 외칠 수 있었습니다.
생명의 계보를 읽는 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창 23:19
◑거절감과 모욕감을 통해 들어가는 부활의 길
▲나는 성경 속 인물처럼 산다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자이고, 나는 그냥 평범한 인생인데,
그들과 감히 비교가 되겠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생각해 보니
‘나도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조차 거절감을 느낄 때
하나님의 진정한 거룩하심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야곱과 제 삶이 닮아 있습니다.
나는 야곱처럼 환도뼈가 부러진 상태입니다.
불구자로 절고 있는 것입니다.
‘산지를 얻는 것’이란, 신약적으로 해석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어 부활의 신앙으로 가는 모습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내 속에 있는 가나안의 장대한 아낙 자손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께 나의 모든 추한 모습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문제를 통해서 나 됨의 실상을 보여 주실 때
이 잔을 피하지 말게 하시고, 인정하게 하소서.
나의 악랄함, 세상에 속 한 욕심,
그리고 당신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야망들,
이 모든 것을 내가 인정합니다. 그리고 회개합니다. 저를 변화시켜 주소서!”
이렇게 나 자신의 죄성을 인정할 때 주님이 내 안에 임재하십니다.
▲레아는 자기 동생 라헬을 사랑하는 남편을 보며
늘 그의 사랑을 갈구했습니다.
그래서 셋째 아들을 낳았을 때 그의 이름을 ‘이제 남편이 나와 연합하리라’
하는 의미로 ‘레위’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녀는 예수님의 조상 유다를 낳고 진정한 자유함을 비로소 누립니다.
유다의 이름은 ‘여호와를 찬양하리라’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구주가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 에 대해 알고
그가 이미 하나님의 영과 연합되어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남편의 사랑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자식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만으로 충분한 자리에 올라간 것입니다.
다말, 룻, 에스더 같은 여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죽음을 드렸던 여인들입니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가 불에 태워서 죽이라고 말했습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민족을 위기에서 구해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을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부활’로 이끄시기 위해
자아의 죽음을 통과하게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활’은 정말로 내가 원하지 않는 모욕과 거절감을 통 해서,
이 땅에 있을 때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속한 권세가 내게 오며, 예수님과 연합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옛사람을 소멸시키시고,
그 옛사람을 처리하시기 위 해 나를 어둠 속에 넣으시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컴컴한 땅 속에 묻혀져 쪼개짐을 통해 새싹이 땅 위로 올라오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무응답과 거절을 통해 깊은 좌절을 경험하면서
세상 것들을 점점 다 버리고, 부활, 즉 보다 깊은 차원의 주님과의 연합,
‘생명의 계보’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레아, 룻, 에스더 모두 자기 죽음을 통해서
그 자리로 나아갔으며, 저 또한 그 길을 걷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심을 때입니다. 거두려고 욕심을 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 주님 때문에 가난하고 힘들기로 작정한 사람들 입니다.
우리가 따르고자 했던 그분은 멸시받던 목수였습니다.
우리도 멸시받을 것을 각오하고,
그것이 우리의 양식이요, 음료임을 받아들이십시오.
내가 아마존에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위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혈기도 황성하고, 성질도 급하고,
아주 못된 것투성이인 사람입니다.
이 세상 사람 어느 누구도 저를 감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정말 주님이 아니시고는 감당할 수 없어 서, 주님이 저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천방지축인 저를 훈련시키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를 괴롭히거나 슬프게 하거나 낙심시킬 때마다
저 자신의 모습 을 돌아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저를 괴롭히는 사람 때문에 못 살 겠다고 투정을 부리고 짜증을 내면
하나님은 “네가 그처럼 나를 괴롭히는 걸 생각하지는 못하느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 람이 바로 제 모습이었습니다.
저를 꿰뚫어 보시는 주님 앞에 나 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도저히 주님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분해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다가도
금세 풀이 죽어 잘못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나를 괴롭히는 이들을 볼 때마다
나도 나을 것이 없다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아마존 선교에서 만난 믿음의 아들 인디오 목사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한번은 도난 사건으로, 우리 신학교가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습니다.
인디오 목사가 그랬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나는 고민에 휩싸였습니다.
그는 솔직히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나는 만날 낙심을 합니다.
그는 신학교에서 돈을 훔치는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를 내쫓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는 사람을 어떻게 내쫓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저를 보게 하셨습니다.
“긍휼이 많으신 주님이 나를 그토록 오래 참아 주셨구나”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누구에게나 돈을 보면 훔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인디오 목사는 그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돈을 훔쳤습니다.
물론 그는 큰 잘못을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우리 역시 그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는 행동으로 옮겼고, 우리는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는 그 차이뿐입니다.
우리 모두 회개하고, 인디오 목사를 위해 기도합시다.”
모인 이들은 모두 회개와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제게 감동을 주셔서,
메시지를 전하고 도난 사건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지독하게 싫은 사람,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를 볼 때 그가 바로 나임을 생각하십시오. 그와 내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를 변화시켜 달라고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이 우리를 기쁘게 여기시고,
우리에게 겸손의 지혜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가 남을 섬기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성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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