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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5월 29일] 예수의 표적을 본 사람들(요 6:23~37) - 곽선희 목사

by 【고동엽】 2022. 10. 22.

[2022년 05월 29일] 예수의 표적을 본 사람들(요 6:23~37) - 곽선희 목사
https://www.youtube.com/watch?v=7EnjNj3LyF8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6장 26절로 37절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 26절부터 봉독할 때에 다 함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6장 23절~25절 일부 누락된 내용이 앞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제공된 텍스트는 26절부터 시작하며 내용상 26절을 포함하는 문맥으로 보아 26절이 맞습니다. 시작 성경 구절은 23절로 제시되었으나, 실제 텍스트는 26절부터 해당됩니다.)

[본문]

그러나 디베리아에서 배들이 (원문: 백스 배들이 조끼에서 족사 하신 후)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을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까?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기록된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아멘.

[설교 본문]

미국이나 유럽에 가보신 분들은 위한 교회 (혹은 '미시간 호수'로 추정) 가보면 미시간 호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저도 처음 보고 놀랐습니다. 호수라고 하는데 바다 같습니다. 저 멀리 수평선이 언뜻 보이고요, 끝이 보이질 않는 큰 호수가 있습니다. 이 호수를 건너가는 배 한 척이 있었는데, 급작스러운 풍랑으로 인해서 배가 침몰되게 됩니다. 아주 큰 사건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배와 함께 죽었습니다.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노스웨스턴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한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수영 선수입니다. 수영을 극히 잘합니다. 그래서 사력을 다해서 수고하여 25명을 구출했습니다. 굉장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R.A. 토레이 박사가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설교 중에 그때 그 얘기를 했습니다. "25년 전에 미시간 호수에서 배가 파선할 때 25명을 사력을 다해서 구출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강론하면서 설교를 했는데, 설교 끝에 한 노인이 가까이 와서 토레이 박사를 만났습니다.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25년 전에 제가 25명을 구출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토레이 박사는 그 노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노인은 슬픈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때 한 사람도 저에게 와서 '고맙다'는 말을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싱클레어의 말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인생을 다 바쳐서 일할 만한, 그렇게 확실한 목적과 의미가 있는 일을 위해서 한 평생을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아무 보답도 바라지 않는 사람, 어떤 선한 일을 하고도 아무 보답도 바라지 않는 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왜요? 보답을 바라는 순간 의미가 없어지고 절망하게 되고 낙심하게 되니까요. "내가 지금 뭘 했는가" 하는 허무감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26절에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엄청난 기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계속 예수님을 따라다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니까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배를 타고 따라다니고, 걸어서 따라다니는, 예수님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는데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좀 서글픈 말씀을 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겨우 떡을 먹기 위해, 또 그 기적을 바라고, 또 그 희한한 일을 보기 위해서 이렇게 따라다니는 겨우 이 좀 서글픈 같은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시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귀로도 듣습니다. 마음으로 감동합니다. 눈으로 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큰 사건을 몸으로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는 것만이 아니요,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에요. 아예 몸으로, 온몸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귀중한 진리를 성경은 간단하게 요한복음에서 말합니다. 골로새서 3장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살이 되사' 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그 귀중한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참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 말씀대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듣습니다. 귀가 없는 자는 못 듣습니다.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자는 봅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엄청난 사건 속에 살면서도 못 봅니다. 보아야 할 것을 못 본단 말씀입니다.

이 성경 말씀에 그 기록하는 그 과정에서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그 관계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똑같은 일을 하신 겁니다. 오천 명을 먹이고, 물 위로 걸어가시고, 바다를 고요하게 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이런 사건은 똑같은 건데 그 사건에 대한 기록은 다릅니다. 마태, 마가, 누가를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언제나 표적과 기적을 말합니다. 병든 이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을 보고 기적이라고 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보고 기적이다. 풍랑을 고요하게 하는 것을 보고 기적이다. 왜? 우리 상식 밖의 일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기이한 일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그런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닐까. 그래서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기록이 되었어요. 기적, 기적, 기적, 기적.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참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 편으로 볼 때는 다 평범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볼 때는 놀라운 일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 편에서는 보통 일이지요, 평범한 일이지요. 그러나 우리 이해가 부족한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그 기이해서, 기도에 우리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니까, 우리 상식 밖의 일이니까, 우리를 알 수 없는 세계니까, 그때 하는 말이 '이적이다', '놀랍다', '원더', 그리고 '미라클' 이런 말로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다시 다른 복음에 보면은 간혹 기적을 보고 **'두나미스'**라고 말합니다. '다이나믹',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들은 신앙적으로 보았습니다. 이 사건이 하나님의 일이다. 이 문둥병자를 고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다. 바다를 고요하게 하는 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생각해서 '다이나미' (두나미스) 하나님의 능력이라. 아, 하나님의 능력이 여기 나타났다. 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아주 놀랍게도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아, 기록된 다음에 맨 마지막에 신약성경 중에 맨 마지막에 기록된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다릅니다. 똑같은 사건입니다. 바다를 고요하게 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이 모든 이적, 기사에 대해서 요한복음은 딱 바꿉니다. 표적이라고 합니다. '세메이온', 표적, 영어로 말하면 '사인'. 표적. 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같은 사건입니다. 이것을 기적으로 보느냐, 능력으로 보느냐, 표적으로 보느냐 하는 겁니다.

여기 신학적인,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다시 요한복음에서 건너가서 사도행전으로 넘어갑니다. 사도행전에는 전부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적 아니야, 표적이야. 표적 적인 이해, 신학적인 이해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깊이를 더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믿음의 질적 향상을 말합니다. 성령 받을 때, 성령 안에서 비로소 이 사건을 이해합니다. 그 후라니까 기적이 아니에요, 능력도 아니에요. 아, 표적이에요. 왜요?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세요. 그 속에 설교가 있어요. 내게 향한 확실한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사역하심이 있어요.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손길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건을 통해서, 사건 속에서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보세요. 예수님을 보실까요? 예수님은 꽃을 볼 때 하나님이 입히십니다. 솔로몬의 옷보다도 더 꽃보다도 귀하게 하나님이 입히신다. 이것 얼마나 이쁜 꽃입니까? 하나님이 입히십니다. 꽃을 보고 하나님을 보았어요. 새를 보고 하나님이 먹이십니다. 그래요. 누가 모이를 준 거 아니에요. 저 새들이 날아다니면서 무언가를 먹고 살아요. 나는 그 새를 볼 때마다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어디서 잠을 잘까? 아주 밝은데 어디 가서 자고, 그 강가나 호숫가에 보면 오리들이 왔다 갔다 할 때, 밤에는 어디서 잠을 자냐? 그 묻고 싶어요.

하나님이 먹이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입히신다. 하나님이 먹이신다. 전부 하나님의 손길로 보았어요. 표적으로 보았다는 말이 표적으로 보았어요. 풍랑이 일어날 때 주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가 다가올 때 예수님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십자가를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그 한 은사로 하나님의 표적, 보답으로 받았다 그 말입니다. 그 깊이를 더 하게 됩니다. 이건 성령 안에서 가능합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었다. 그렇습니다. 독생자를 주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읽을 수 있어야 되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여러분, 이처럼 사랑하사? 아마 여러분은 그럴 거예요. 내게 돈을 줘야죠, 내 병이 나야죠. 아니요. 성경은 말합니다. 독생자를 주어서, 저 십자가에 못 박아서, 보아서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해 주십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영원한 표적, 그 속에 엄청난 역사적 사건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그 속에 새겨 있습니다. 이걸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감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헌신할 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사건은 표적입니다. 사건은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믿음을 주십니다. 믿음이 있는 자만은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뭡니까? 사건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말합니다. 믿는 자로 볼 때는 말씀입니다. 그 속에서 말씀이 들려옵니다. 내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음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유명한 칼 바르트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신문.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신문을 보십니까? 성경을 보고 신문을 보세요. 성경을 보고 신문을 보면 신문을 좀 아는 사람입니다. 이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됩니다. 이 사건 하나하나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야 됩니다.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이여, 표적을 아는 사람이 곧 표적을 보는 사람이요, 떡을 먹고 배부르다고 해서 떡만 찾아가고 떡만을 원하는 이런 미련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되죠.

아닙니다. 우리는 떡을 먹는 순간 이것이 영생의 떡이요, 오늘 예수님 누누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둔하고 미련하고 고집스러워서, 죄악에 물들어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합니다. 아예 한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 표적을 읽을 줄 아는 사람, 이 속에 아, 표적이 있습니다. 그런 은혜로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아무 인간들의 뭐 재주가 있고 능력이 있고, 뭐 뭘 이러는 신문을 볼 때마다 한 가지 혼자서 웅얼거리는 이 있어요. 요새 코로나 때문에 복잡하다나요. 그러면 전문가가 뭐래? 전문가나 전문가, 어디 있어요? 전문가나 처럼 맹랑한 사람들이 없어요. 뭐한다고 전문가예요? 생각 보세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런 단 소리가 "뭔가, 뭔가, 전문가가 그래야 모양 아닙니까?" 그는 분명히 하나님이 손길을 보아야, 하나님이 표적을 읽을 줄 아는 영적인 능력이 있어야 됩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새벽녘이 왔는데, 그물이 넘치도록 물고기를 잡을 때 예수님 앞에 가서 꿇어 엎드리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주님이 하시는 그 역사 앞에 자기 자신이 초라한 모습을 거기에서 고백합니다. 풍랑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생각합니다. 풍랑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볼 기회도 없었겠죠. 풍랑이 일어나서 물에 빠져 죽게 될 지경이 돼서 "주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고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을 때 놀랐죠. 예수님이 일어나서 "믿음이 적은 자여, 어찌 의심하느냐?" 말씀하실 때 그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 풍랑이라고 하는 표적을 읽을 줄 알아야 하면 무분별을 통과할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립니다. 귀신아 물러가라 합니다. 이 모든 사건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이적을 능력으로, 능력을 표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성령이 오신 다음에 성령 충만하게 될 때 이제부터는 전부가 표적입니다. 표적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모든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이 돼야 됩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모든 일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였다.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오천 명을 먹이는 엄청난 기적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할 생각은 못하고, 그 한다는 소리가 "또 얻어먹어야겠다. 예수님 곁에 가면 배는 굶지 않겠다." 이건 떡밖에 안 된다는 이해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내가 어떤 어떤 소득을 원하십니까? 어떤 이익을 원하십니까? 그래서 부자가 되고요, 그래서 병이 났고요, 그래서 오래 살고요. 그것을 얻어가려는 얘기입니까?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이 무엇을 행하셨는가와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겁니다. 'What'과 'Who'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역사를 봅니다. 그것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가 누구인가 그쪽으로 생각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표적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요, 하나님의 구속함의 역사요,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됩니다. 이적과 능력 이것이 표적으로 어떤 일을 만나든지 우연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표적을 보고, 하나님의 표적을 읽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하나님의 구속의 능력을 경험해야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표적을 보고 놀라지만 말고, 표적을 통해서 주의 살아있는 음성, 강한 음성, 확실한 음성을 새롭게 듣고 느끼고 감격하고 순종하는 그런 신앙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을 찬송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저희 미련하고 우둔해서 그 많은 날 주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바로 듣지 못했고, 주의 능력을 보면서도 표적을 갖지 못했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시고, 모든 어두운 그림자를 제하시고, 밝은 마음으로 주를 보며 온전한 신앙으로 사건을 보게 하사, 표적으로 말씀하시고 계시하시는 주님의 뜻을 알고 이제 그 크신 은혜에 응답하며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말씀을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시고, 그 은혜의 말씀에 응답하며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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