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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김복남 전도사가, 재활병동 환우들에게 물어 봅니다.
“당신이 옛날에 건강했을 때, 사고 당하지 않았을 때,
이렇게 일어서고, 자기 발로 걸을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
내손으로 밥 떠먹을 수 있는 것, 화장실 갈수 있는 것..
예전에는 쉽게 할 수 있었던 것들.. 그 때 여러분은 행복했습니까?”
자기 발로 걸어서 화장실 가지 못하는 환자들이 많잖아요.
용변을 봐도, 남이 닦아주어거나, 더 심하면 긁어내는 환자들도 있잖아요.
그럼 하나같이 이렇게 말해요.
“전도사님, 그건 당연하게 여겼지요.
그 때는 돈 없다고, 직장에서 승진에 탈락 했다고,
아이 공부 못한다고, 대학 떨어졌다고..
그런 일로 불평하고 걱정하기 바빠서,
제 발로 일어서고 걸어 다니는 것에는, 제가 감사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때가 그립습니다.
아무리 가난하다 하더라도, 또 직장이 없다 하더라도,
자녀가 공부를 못한다 할지라도.. 그때로 (건강할 때로) 다시 돌아 갈수만 있다면
더 이상 불평하지 않고 살아 갈수 있겠는데요.”
그러면서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기적이 일어 날수 있도록
제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상실의 아픔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뒤돌아보면서 후회하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어찌 환우들뿐이겠습니까.
◑김복남 전도사의 개인 간증
▲여기 서 있는 저, 김복남 전도사 역시, 상실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부끄럽지만 제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들려 드릴까 합니다.
저는 예수 안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저희 병원 원목실 목회자들 대부분 다 목회자의 자녀들입니다.
아니면 아버님이 장로님이시라고, 어머님이 권사님이시라고 자랑 하는데요..
저는 그런 자랑거리가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가장 큰 축복이 있다면, 부모가 돈이 많은 것도,
부모가 많이 배운 것도 아닙니다. 부모가 예수 믿는 것입니다.
부모가 예수 믿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어릴 적에 믿음 생활을 할 수가 없었어요.
친구들이 거의 목사님 딸들이었어요. 그래서 친구를 따라 교회를 갔지만
저희 부모님의 반대 때문에,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결국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제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제 남편은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용모도 뛰어나게 좋았고, 실력도 있었고요. 좋은 직장에서 빨리 승진도 했고요.
그래서 그 남편을 택했는데, 저희 시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아들과 결혼 할 것 같으면, 나랑 약속을 하나 해야 한다.
절대로 교회 다녀서는 안 되고, 나를 따라서 절에 다녀야 한다.’
여러분, 저는 예수를 깊이 알지를 못했기 때문에, 저는 예수님 대신 남편을 택했습니다.
‘시어머니께서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저는 결혼을 했어요.
결혼해서 저희는 제주도로 갔습니다.
남편이 성산포의 농협지점장으로 발령이 나서,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 가서 신혼살림 살게 되었는데,
그곳은 우상의 도시였어요. 남편은 토속 종교를 연구 한답시고
별의별 우상섬기는 곳에 저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한번 택한 영혼을 결코 버리지 아니 하신다!’
저는 그 말이 맞다는 것을, 병원에서 목격하고 있습니다.
어릴 적에 교회 다녔던 환자들은,
그 후에 오래동안 신앙을 떠나 살았지만,
병원에 입원하고 나면, 금방 어릴 적 신앙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봅니다.
한번은요 제가 특실에 들어갔는데, 침대에 이렇게 염주가 걸려있어요.
병실에 들어가서, 그곳에 무엇이 걸려 있나를 보면, 그의 종교를 알 수 있습니다.
성모마리아 상이 있거나, 예수님이 달려있는 십자가가 있으면.. 그분은 천주교 신자입니다.
그리고 염주이나 불경이 있으면, 불교신자입니다.
기독교 신자는, 보통 성경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좀 낡았으면, 오래된 신자들이고, 성경이 새것이면 새신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분 병실에 들어갔더니 염주가 걸려있었어요.
그리고 ‘법화경’이라는 불경책이 옆에 있었어요.
환자의 부인은, 늘 불경을 읽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김복남 전도사입니다’라고 하면,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우리는 불교입니다.” 하면서, 아예 제 발을 들여놓지도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자존심도 상하고 해서, 몇 번 갔다가 포기를 했는데요.
한번은 목요일 날 병원예배를 드리는데, 간병인이 그 할아버지를 휠체어를 밀고 왔어요.
그 분은 전직 은행장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깜짝 놀라면서 “선생님, 웬일이세요?” 했더니
자기가 누워있는데 ♬예수사랑 하심은♪ 찬송 소리가 들려 왔는데
어린 시절에 엄마를 따라서, 천막 교회에 가서, 가마니 위에 앉아서 들었던
바로 그 찬송소리를 듣고, 다시 주님께 돌아온 것입니다.
그 분은, 팔순 넘은 노인네가 되어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택한 영혼은,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고요.
▲제주도에서 서울로 발령 나다!
하나님은, 저를 그곳 제주도에 오래 두었다가, 우상의 밥이 되겠다고 생각하셨던지
1980년 6월 달에 저희 남편이 서울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때 남편은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불교 신자이니까, 절이 많은 불광동 가서 살자”
은평구 불광동에 절이 많아서, 불광동의 ‘불’자는, 부처 ‘佛’자 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불광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불광동에서, 하나님이 저희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저희 남편의 친한 친구가, 우리 결혼식 때 사회를 보았는데
그분이 우리에게 선물로 성경책을 주었어요.
남편이 ‘이것 봐라. 친구가 군대 가서 예수 믿고, 부산 동성교회 장로 딸 하고 결혼 하더니
친구가 예수 믿는다고 나에게 성경을 선물로 주었구나!’
청년들은 장가를 잘 가야 합니다.
그 신랑 친구가, 결혼 하고 나더니, 사람이 달라졌어요.
술 담배 다 끊고 입만 열면 ‘예수’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제 남편은, 그 선물 받은 성경책을, 부정 탄다고 갖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부산에 살았는데, 우리가 제주도 살 때부터 전도편지를 늘 보내왔어요.
처음에는 남편이 읽었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읽더니 ‘보나마나 예수 소리겠지’
그 다음 부터는 읽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편지를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그 친구의 전도 편지를, 쓰레기통에 내버렸지만
하나님은 그 친구의 기도는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여러분도 태신자를 품고 기도 하시기 바랍니다.
▲전도자 친구도 서울로 발령 받다!
그 친구 부부의 기도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하기 위해서,
그 남편 친구도, 부산에서 서울로 발령을 받아서,
(우리는 제주도에서 발령받았지요)
그래서 같은 불광동에 살게 되었어요.
참으로 우연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우연은 결코 없거든요.
그들의 기도에 응답되어서, 우리가 그들 앞에 밥상으로 차려진 것입니다.
이제는 그들 부부가, 본격적으로 우리 부부를 전도하기 시작했어요.
얼마나 열심히 전도 했던지, 남편이 넌더리가 난다고 했어요.
“세만이(친구, 나중에 CCC간사)가 나랑 눈만 마주치면 예수 소리를 하는데
내가 그 소리 듣기 싫어서 이리저리 피해 다녀야 하는데
세상에 찰거머리가 어디까지 좇아와서 예수 소리 하는 줄 알아?
내가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까지 와서 예수 소리 하는데
오줌 눌 때는 도망도 못 가고 그 예수소리를 들어야 하니까.. 아주 괴로워죽겠어!”
그렇게 끈질기니까 저희 남편이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저는 저희 남편은, 절대로 예수 안 믿을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남편이 교회를 못 가는 이유
제가 남편과 결혼한 후에, 몇 차례 교회가자고 하면은요, 남편은 이렇게 말했어요.
자기는 교회를 다닐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데요.
뭐냐고 했더니
첫째, 자기는 조상들에게 부모에게 불효할 수 없어서 제사 문제 때문에 교회 못 간다고 했어요.
그 다음에는, 자기는 일요일 날 실컷 자야 되는데 교회 다니면 잠이 부족해서 안 된다.
그 다음은, 자기는 술 담배 좋아하고, 그래서 친구들이 많아서 좋은데
내가 술 담배 끊게 되면 친구들마저 잃어버리니까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런 다음에 또 이유가 있데요. 뭐냐고 하니까
교회 열심히 다니면 헌금도 하고 십일조도 해야 하는데, 돈 아까워서 안 된데요.
그래서 저희 남편은, 절대 교회 안 다닐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에 교회 안다닐 사람, 예수 안 믿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끈질긴 전도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끈질긴 전도에 설득당해, 마침내 교회에 나가다
그들의 그 전도 덕분에, 우리는 1980년 6월 15일,
그 친구가 다니는 불광동 은광교회에 총동원 주일날 끌려가다시피 해서
마침내 교회에 나갔어요.
딱 한번만 따라 가달라고 해서, 남편이 친구의 체면 세워 주기위해서 한번 가주자
그런데 여러분 그 한번이, 저희 남편이 예수 믿게 된 동기가 되었고
제가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 올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날 억지로 등록을 시켰어요. 그리고 그다음 주일날 또 우리를 데리러 왔습니다.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 한번만 너의 체면보아서 따라 가주면 된다고 했는데,
또 왜 데리러 왔느냐?’
그런데 그들은 그 다음 주일날도 또 데리러 왔어요. 계속 또 데리러 왔습니다.
나중에는 남편이 화가 났어요.
‘제발 좀 그러지 말아라. 네가 우리를 데려가면 교회에서 무슨 프리미엄이 있느냐?
네가 장로가 되려고 그러느냐, 네가 돈을 받느냐?’ 그랬더니
그 친구가 ‘내가 돈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내 돈이 들어간다.’
우리 집에 그냥 오는 게 아니잖아요. 무엇을 사가지고 와야 되잖아요.
그래서 남편보고 가자가자 하니까, 나중에는 ‘도대체 뭐냐, 그이유만 말해주면 내가 가겠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이렇게 말했어요.
‘친구야, 나는 네가 예수 믿고, 천국 영생을 얻었으면 정말 좋겠구나!’
▲남편, 원단금식기도회에 참석하고, 병고침 받다.
1981년 연초에 <CCC 원단 금식기도회>가 있었어요.
그 친구는, 저희 남편보고 그 금식기도회에 가자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화를 냈습니다. 왜 화를 냈냐하면
저희 남편은 대학 다닐 때부터 간이 나빴어요. 그래서 만성 간염으로 힘들어 하는데,
그래서 매달 서대문의 고려병원(현. 강북 삼성병원)에 가서 체크를 받으면서
간 상태가 더 좋아지나 나빠지나.. 이런 상태를 체크하면서
약을 타다 먹고 하는 그런 상태였거든요.
그 당시 우리 남편은 연말이라서 일이 많다 보니까, 간 상태가 나빠진 상태라서
의사 선생님께서 이번 연휴기간은 입원해서 좀 치료를 제대로 받자고 했어요.
그런데 그 연휴기간에 기도회를 가는데, 그것도 금식기도회를 간다고 했어요.
간은 우리의 영양소를 저장하는 곳이기 때문에, 간이 나쁜 사람들은 허기를 자주 느껴서
세끼만 먹는 것이 아니라, 다섯 끼를 먹는 남편이었는데
그런 남편을 데리고 금식기도를 간다고 하길래,
‘그렇게 무모한 짓하면 안 된다, 예수 믿어도 그렇게 무식하게 믿어선 안 된다’면서
제가 극구 반대를 했습니다.
그랬는데 저희 남편이, 그 친구가 얼마나 열심히 기도 했던지
저희 남편이 금식 기도가 뭔지 모르겠지만, 정초에 기도 한다고 하니까
엄마가 절에 기도 다니는 거 보니까, 정초에는 불공을 드리던데
나도 내년부터 예수를 믿으려면, 제대로 한번 믿으려하면
정초에 기도해야 될 거 아니냐..
그래서 제가 ‘금식 기도 할 수 있겠느냐?’ 했더니
금식기도는 못할 것 같다면서, 음식을 숨겨가서 몰래 먹으면서 기도하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 친구를 따라서 CCC에서 하는 ‘원단금식기도회’를 갔는데
놀랍게도 삼일간 남편이 금식을 하고 돌아 왔어요.
금식을 하고 돌아온 남편이, 제게 물었습니다.
‘너는 어릴 적에 교회를 다녔다고 했는데 예수 믿는 감격이 있느냐?’고.
그러면서 남편이 이렇게 말했어요.
자기는 처음엔 그 금식기도회 가서요. 사람들이 막 울면서 기도하는데, 이해가 안 되더래요
‘무슨 죄를 저리 많이 지어서 울면서 기도할까?’
예쁜 여자가 울면서 기도하는거 보면 ‘저 사람, 남편 몰래 바람피웠나?’ 그러면서요.
자기는 회개할 만큼 죄지은 일이 없으니까, 울 일이 없다고 그러면서
남들 기도 하는 거, 그저 쳐다만 보았데요.
그런데 김준곤 목사님이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의인은 하나도 없나니 우리는 다 죄인인데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의인이라 칭함을 받게 되었다’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요.
바람피운 것도 죄고, 도둑질한 것도 죄가 맞지만,
그런 것만이 죄가 아니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더 큰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리고는 남편이 복음의 진리를 깨달고 나니까
배고픈 줄도 모르고, 삼일이 지났다고 합니다.
원단 금식기도가 끝나고 집에 온 후에, 남편이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가 ‘아니 그동안 입원하라고 했더니, 입원 안 하고
얼굴이 그 모양이 되도록 왜 집에 있었느냐?’고 그래서
우리 남편이 금식 기도를 갔다 왔다고 했더니, 우리를 쳐다 보더니요.
‘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하느냐. 다시 검사 하자’고 했습니다.
다시 검사 했습니다. 의사들이 모여서 수근 거렸어요.
더 나빠졌는가 간이 완전히 굳어져 갔는가 걱정했더니
의사가운데 예수 믿는 분이 한 분 계셨던가 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당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때 저는 “아멘” 안 했어요.
남편을 꼬집으면서 ‘할렐루야는 무슨 할렐루야냐고,
종합병원은 오진이 많은데, 옆에 있는 적십자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합시다.’
고려병원 바로 옆이, 적십자 병원이죠. 거기 가서 다시 검사 했더니
그 곳에서도 간이 정상이래요.
남편은 ‘진짜 나았나보다’ 하는데
여러분, 저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삼세번 아니냐 한번만 더하자’ 다시 성심병원에 갔습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남편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내가 금식기도가서 병 낮게 해달라고 하지 않았지만
내가 구원의 진리에 감격하고 기뻐했더니, 복음의 진리를 깨달았더니
하나님께서 보너스로 내 병을 고쳐 주셨다”
그런데 제가 손으로 남편 입을 막았어요.
“여보. 나는 교회 다니면서 병 나았다, 교회 다니면서 축복받았다 그러면서
떠들고 다니는 사람 보면.. 무식해 보이던데,
우리는 예수 믿어도 교양 있게, 점잔케 예수를 믿읍시다.”
저희 남편은 참 점잖은 사람이었어요.
비록 제주도였지만, 그래도 나이 삼십도 안 돼서 농협 지점장을 했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어른스러웠습니다.
▲남편, 전도를 시작하다.
그런데 제가 그 입을 막으면서 점잔케 예수 믿자고 했더니
여러분,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지 아니하면,
그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다’고 했던 것처럼
남편은 전도를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다고 했어요.
그렇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있는 사람들은
전도를 하지 말라고 하더라도, 전도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병원에서 보면요, 환자들이 어려운 병들을 고치게 되면요.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자기 아는 이웃에
자기와 같은 병 걸린 사람 있으면 데리고 옵니다.
‘저 의사 선생님이 내 병을 고쳐 주셨다’고요.
그런데 그 병 낫고 난 뒤에, 5년~10년 뒤에 재발하거나
아니면 20년 후에, 30년 후에 재발해서,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생명, 이 땅에 사는 육체도 고쳐주시면 고맙다고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데요. 자랑 하는데요
오늘 영원히 살게 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자랑하지 않는다면, 전하지 않는 다면,
이미 우리 마음속에 구원의 감격이 사라진 것입니다.
저희 남편이 전도를 하기 시작했는데, 누구를 닮아 가나 했더니
우리를 전도한 친구(세만씨)를 닮아갔어요.
이제는 둘이가 짝을 이루어, 사영리를 들고 다니면서 전도를 하기 시작했어요.
한번은 이제 고향인 대구까지 갔는데, 새마을호를 타고 갔어요.
그 당시에는 새마을호가 제일 좋은 열차였는데
얼마나 점잔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까.
그런데 저희 남편이 객차 안에서 ‘예수 믿으세요’ 사영리를 들고 전도를 하는데
옆에 있는 제가 창피했어요.
그래서 ‘열차 안에서 뭐하느냐?’ 그랬더니
‘자기가 막 가슴이 뜨거워져서, 저사람 교회 안다닐 것 같은데 전도하면 될 거다’
그러면서 객차 복도에 쭈구리고 앉아서, 의자에 앉은 사람에게 전도를 하더라고요.
▲새신자 때부터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남편은 열심히 교회를 다니기 시작 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교회에 열심히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를 빠지지 않았어요.
나더러, 두 아이를 하나씩 등에 업고, 새벽기도를 가자고 했어요.
동네 사람들이 ‘늦게 배운 도둑질이 밤 가는 줄 모른다’고 핀잔할 정도로,
저희 부부는 아이들을 업고, 열심히 새벽기도를 다녔습니다.
물론 우리를 전도한 친구도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았어요. 철야 기도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새신자 때부터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새신자는 전도한 사람의 믿음만큼 자랍니다.
여러분이 전도한 새신자가 신앙에 잘 뿌리를 내리길 바란다면
여러분들이 먼저 본을 보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남편은 집사가 되고, 남선교회 임원이 되고, 주일학교 교사가 되고,
성가대원이 되었어요.
이어서 저도 집사가 되고, 여선교회 임원이 되고, 구역장이 되고,
주일학교 교사가 되었습니다.
▲남편, 일본 선교사로 부름 받다. 그리고 암이 재발하다.
하루는 남편이, 자신이 직장을 그만두고 CCC에 들어가서 훈련 받고
일본에 선교사로 가겠다고, 동의해 달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당신이 미쳐 버렸구나.
나는 예수를 믿어도 당신처럼 그렇게 무모하게 믿는 거 싫다.
당신이 언제 신학교 나왔느냐, 무엇 때문에 CCC 자비량 선교사를 가려고 하느냐?
좋은 직장은 왜 팽개치려 하느냐,
나는 자존심 상해서, 이사람 저사람에게 선교후원 받기 싫다’고 그러면서
저는 안 된다고 반대했어요. 이혼 하자고 했습니다.
난 선교사 아내 되기 싫으니까 선교사 가고 싶거든, 이혼하고 혼자 가라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저를 얼마나 축복해 주셨습니까.
안 믿는 남편을 만났는데, 그 남편이 신앙생활 잘하면서 선교사로 가겠다고 까지 하는
그런 믿음의 사람으로 축복하여 주셨는데요.
부끄럽게도 저는 세상 욕심이 많으면서 언제나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어요.
남편은 고민 고민 하다가, 선교사 가는 것을 포기하겠다고 했어요.
그러고 얼마 후에 남편이 배가 아프다고 했습니다. 세브란스 병원 갔더니 암이었습니다.
지금은 암, 우리병원에서 무섭게 안 여깁니다. 고칠 수 있는 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20몇 년 전입니다. 암 걸리면 많은 사람들이 절망 하고 죽었습니다.
암 재발하면 더 더구나 소망이 없다고 했어요. 남편은 수술을 세 번 했습니다.
장을 옆구리로 끄집어내서 인공 항문을 만들어서, 비닐봉지를 붙여서 대변을 받아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사회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남편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요.
학생들 옆을 지나갈 때, 학생들이 혹시 수군거리면, 내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인가 그래서
의사 선생님한테 간청을 했어요.
‘이 장을 집어넣어 달라’고 그랬더니 의사선생님께서
‘그러면 재발할 확률이 많다’고 했어요.
그래도 어떻든 제발 집어넣어 달라고 요구해서, 집어넣었더니 그게 화근이 되었습니다.
다시 암이 재발하고 말았습니다.
방사선 치료를 사십 번을 받았습니다.
저희 남편 방사선 치료 40회 받을 동안, 저는 복도에 꿇어 안아
남편이 치료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 했는데요.
그렇게 열심히 투병했지만, 4년을 남편과 저는 암과 싸웠지만,
여러분 저희 남편은 그 약들이 소용이 없더라고요.
그렇게 4년 동안 고통당하는 가운데
저는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갔습니다.
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만
여러분처럼 지혜로운 사람들은 고난당하기 전에 평안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 바랍니다.
▲건강해서 제 발로 교회 가서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게.. 큰 복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섬기는 교회에 와서 사랑하는 성도들과 한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존경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수 있다는 것.. 이건 축복입니다.)
남편이 아파서 교회에 갈수 없게 되었을 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면, 그래도 병원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다른 병원에 가거나 집에 있으면, 우리는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창문을 열어놓고 예루살렘을 향해 보며 기도 했던 것처럼
예배 시간이 되면, 우리 부부는 불광동 은광교회를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빨리 병이 나아서, 섬기는 교회로 다시 돌아가게 해달라고요.
그때 했던 그 기도, 지금 저희 병원 환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저희 세브란스 병원은, 전국에서 제일 예배 많이 드리는 병원입니다.
주일날도 1부, 2부, 3부, 오후 예배, 저녁예배 까지 드립니다.
주중에도 매일 11시가 되면 방송이 나옵니다. 환자와 보호자를 위한 기도회가 있다고요.
전체 병원마다 11시가 되면 기도회를 갖습니다.
수요예배, 금요예배도 있습니다. 그렇게 예배 많이 드립니다.
찬송가가 스피커를 통해 복도마다 병원마당에도 울려 퍼지고 있고
엘리베이터 마다 성경 구절이 붙여져 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예배드리고 열심히 기도회 하는데도
환자들은 하나 같이 섬기는 모교회로 가고 싶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더 갈수 있다면요, 얼마나 좋을까요?’
‘내가 앉던 (교회) 자리에, 지금은 누가 앉아 있을까요?’
그러면서 그리워하고 있는데
여러분, 지금 하나님이 건강 주셨을 때, 이 자리를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교회에 가고 싶어도, 늙고 병들어 갈 수 없는 날이,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올 것입니다.
▲또 남편과 투병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직분>
우리가 열심이 있어서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줄 알았어요.
걸핏하면 안 한다고 해서, 연말만 되면 여전도 임원 안 하겠다, 구역장 안 하겠다.
하며 건방을 떨었습니다.
제가 남편보고 주일학교, 성가대 둘 중에 하나만 택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열심히 있어서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거였습니다.
저는 작년 9월달에 유럽 10개국 집회가 잡혀 있었어요.
‘내가 미국을 다니고, 호주를 다니고 하다가, 이제는 드디어 유럽까지 진출하게 되었구나!’
10개국 나라의, 10개국 교회들을 이름을 제가 벽에 붙여놓고 기도했습니다.
내 친구 전도사들이 저를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유럽 출발 두 달 전인 7월에, 뇌수술을 하고, 심장 건드리고 그러니까
8월 30일 날 비행기를 탈수가 없다고 했어요.
‘간증집회도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하면 못 간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러고 난 뒤, 지난해에 약속해 둔 국내의 집회도,
또 금년 1월에, 제가 수술하는 동안에
여러분 9군데 약속이 잡혀 있었는데, 두 군데는 응급실에 가는 바람에 못하고,
7군데는, 제가 주사바늘 꼽고 머리에 붕대를 매고 가서 했습니다.
교회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닙니다.
나 같은 자 없어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주의 일을 하시게끔 하십니다.
우리가 너무 교만을 떨지 말게 되기를 바랍니다.
▲남편과 투병하며 또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물질>이 내 것인 줄 알았어요.
안 먹고 안 쓰고 모았습니다.
남편이 십일조 내는 거, 선교헌금 내는 거, 제가 중간에서 뺐었습니다.
적당하게 헌금하고, 빨리 큰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그런데 남편이 아프니까, 그 모았던 돈이 다 없어지게 되었어요.
집안에 가장이 아프면 집안 망하는 거 시간문제입니다.
중환자실에 몇 달만 누워있으면, 전세보증금 날라 가고요,
중병으로 몇 년 병원 생활하면, 아파트 한 채 날라 가는 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이번에 방사선 치료 받는데, 저는 병원직원이니까 감액을 받았어요.
그러나 토마트로핀 한번 맞는데 오백만원입니다.
저는 35번을 주사 맞았는데
여러분 이 뇌 수술 몇 번 받으면요, 고생도 말 못할 고생이지만
아파트 하나 날라 간다고 합니다.
여러분 물질도 내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필요 하시다고 할 때 드려야 합니다.
걷어 가시면 한 순간입니다.
저는 병원에서 수천억 아니 몇 조를 따지는 그런 재벌 회장도 제가 만났습니다.
떠날 때 아무것도 못가지고 떠나갔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지금 먹고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물질도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떠났습니다. <목숨>도 <배우자>도, 우리 것이 아닌 것을 깨달았어요.
4년동안 열심히 투병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40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께 갔습니다.
남편 떠나고 난 다음에, 그 남편이 내 남편이 아닌 것을 깨달았어요.
하나님이 제게 잠시주신 선물인 것을 깨달았어요.
‘하나님이 당신을 필요로 하신다 하더라도, 제가 허락하지 않으면,
당신은 선교사로 갈 수 없다’고, 제가 말했는데요.
그게 얼마나 오만스럽고 건방진 말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남편을 데려 가셨어요.
떠난 뒤에 그 남편이, 내게 너무나 좋은 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참으로 융통성이 없어서, 어디 가서 자기 밥그릇도 못 챙길 사람이라고 욕 했는데요,
그 융통성 없는 사람이 너무나 그리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살면서 남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그렇게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을, 또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요.
저는 못된 아내였습니다. 잔소리 많았고요.
시댁이 가난하다고, 제가 남편에게 비수를 꽂았습니다.
저희 남편은 그럴 때마다, 가난한 부모를 둔 것이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남편이 떠난 뒤에, 제가 비로소 남편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는데요.
남편이 있어서 누렸던 거, 남편이 떠나니까 아무것도 누릴 수가 없었어요.
사모님 소릴 듣다가, 과부 소리를 듣게 되었어요.
제가 30대 중반에 혼자되었을 때, 제가 얼마나 마흔이 되길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마흔만 넘어도 과부소리 들어도 괜찮겠지..’
사십이 넘어도 아직 젊었다고 하길래, 빨리 오십이 되기를 기다렸어요.
이제는 제가 일년만 있으면 육십이 됩니다.
사람들은 빨리 늙는 것을 싫어하지만, 그런데도 저는 얼마나 빨리 늙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저처럼 젊은 날 혼자되어서 살아온 사람만이,
제가 빨리 늙고 싶었다는 그 이유를 이해 할 것입니다. (과부 소리 듣기 싫어서요)
▲하나님이 가장이 되어주셨습니다.
남편이 떠난 뒤에, 두 남매가 제겐 맡겨졌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 두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살아갈까 막막했습니다.
아이들이 아빠를 그리워했습니다.
딸애가 사춘기를 보내며 이런 얘기를 했어요.
‘엄마 나는 병든 아빠라도, 돈 못 버는 아빠라도,
나는 가정환경 조사서에 아빠 칸을 비워두지 않는 아이들이 부러워.’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가정환경조사서를 가져왔지만, 아빠 칸을 비워 두어야 했어요.
얼마나 우리아이가 자존심 상했겠습니까.
아들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빠를 잃었습니다.
목욕탕 갈 때마다, 아빠랑 같이 목욕 오는 친구들이 부럽다고 했어요.
자기는 늘 혼자 다녀야 했으니까요.
그런 아이들 끌어안고, 저는 늘 이렇게 기도 했습니다.
‘아빠는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주신 선물 이었단다.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너희들 아빠가 되어 주실거란다.
아빠라고 부르고 싶거들랑 ‘하나님 아버지’라고 많이 불러라.’
이렇게 위로 했는데요.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었고
직업도 잘 찾고, 결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늘 외로울 때마다, ‘신랑 되신 예수님!’ 이렇게 기도 했는데
저도 이제는 그 신랑 되신 예수님이 저를 잘 도와주시고 보살펴 주셨습니다.
▲남편 대신, 제가 선교사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일본 선교사 가는 것을 제가 반대해서 못 갔는데,
남편이 떠나자, 이제 선교의 사명을, 제가 이어 받아 감당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일년에 보통 세 번 정도는 미국에 가서 집회를 다닙니다.
그리고 지금도
남편이 아파서 입원했던 세브란스 병원에, 제가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왜 내가 병원 전도사가 되었는가 하면요
사실 저는 남편 목숨을 담보로 하고, 하나님께 협박을 했어요.
‘남편을 살려 주셔야만 저는 예수 믿을 것이고, 데려가시면 절대 예수 안 믿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만 남편을 하나님께서 데려 가셨어요.
그래서 저는 예수 안 믿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구급차 밖에서 엄마의 비명소리를 듣던 딸아이가 구급차로 뛰어올라왔어요
딸아이는 저보다 침착했습니다.
아빠 눈을 감기면서,
‘엄마, 아빠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야
부활 때 우리는 다시 아빠를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러면서 제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어요.
‘엄마, 아빠는 죽었지만, 엄마는 아빠처럼, 병든 자들을 위해서 평생을 바치겠다고 약속해줘.’
그러자 구급차에 같이 탔던 담임목사님이,
‘이건 아이 음성이 아니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여기고
빨리 죽은 남편 앞에서, 또한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아이에게 물었어요.
‘왜 하필이면 그런 약속을 하자고 했니?’
그랬더니 딸이 이렇게 말했어요.
‘엄마 우리가 보았지 않았느냐고,
아빠가 병든 몸을 이끌고 전도하는 거, 보았지 않았느냐고’
맞습니다. 저희 남편은 죽어가면서 전도했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전도하고 죽어야 한다고요, 전도하다 죽으면 순교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어디 가서 전도 할 거냐?’ 했더니
남편은 ‘병원 가서 전도 하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나중에 병원 갈 기운이 없다면서, 전단지를 만들어서
우리아이들과 함께 이 골목 저 골목, 이집 저집을 두들기면서 전도 했습니다.
1988년 5월 29일 저희 은광교회가 믿지 않는 사람들 초청하는 ‘총동원 초청주일’에,
저희 남편은 귀저기 차고 비틀거리면서, 마흔 여섯 명을 전도 해왔습니다.
교인들은 일어서서 박수를 쳤습니다.
그날 우리 남편은 크리스털로 만든 전도 상패를 받았습니다.
우리 집에서 가장 값나가는 가보가 되어서, 자자손손 물려 줄 것입니다.
▲남편 전도의 열매
남편이 전도한 사람이, 이제는 또 다른 열매를 맺어 가고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삼일간 집회를 해달라고 해서 간증집회를 갔는데요.
첫날 저녁에 제게 저녁식사를 대접하신 분이
그 교회 안수집사인 유형민 집사님이었는데,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제가 전도사님 남편과 친구이었잖아요?
저한테 전도하기 위해서, 제게 자장면을 많이 사주었습니다.
제가 전도사님한테 오늘 저녁 대접하는 거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했습니다.
“전도사님 우리식구 다 예수 믿고, 우리 집안에 목사도 나왔습니다.”
남편은 떠났지만, 남편이 전도한 사람들 곳곳에서 많은 열매가 맺혀져 가고 있습니다.
남편이 전도했던 어린아이가 자라서 주일학교 교사가 되었고,
남편이 전도했던 아주머니가 권사님이 되셨어요.
남편은 떠났지만, 열매는 맺혀져 가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저도,
남편이 아팠던 세브란스 병원에서 지금까지 일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남편의 열매인 것입니다.
▲마치는 말
병원에서 일하면서, 저는 많은 아픈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다.
낙심하고 절망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픔이 아픔으로 끝나면 우리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는 예수 믿고, 이 아픔이 새로운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제목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나 같은 과부를 통해서, 당신 같은 장애인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도 영광 받으실 날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환자들 가운데, 휠체어를 탄 검사가 나왔습니다.
우리 환자들 가운데, 한국체대에서 휠체어를 탄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우리 환자들 가운데, 처음으로 놀라운 사람들이
강한 자를, 건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사람들이 지금 많이 나오는데
앞으로도 더 많이 나올 것으로 저는 믿고 있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울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는 것을 배웠다’고 하는 것처럼
발이 없으면, 발이 없는 대로
손이 없으면, 손이 없는 대로
다리가 없으면, 다리가 없는 대로
우리는 이제 주어진 형편에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 능력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할 때, 이 아픔이 새로운 시작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희처럼 잃어버리고 난 뒤에 깨닫지 마시고
여러분들은 많은 것을 누리고 있을 때, 더 열심히 더 최선을 다하신다면
더 복된 삶을 살아가실 것이고, 하나님께 더 많은 영광을 돌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초라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제가 몸으로 체험하고 나니까
듣고 보았던 것 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전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내 육신은 초라해지고 있지만, 내 영혼이 더욱더 강건해 지고 있어서
이 복음을 전할 수 있어서 감사 합니다.
전한 저나, 전해들은 성도님들이나, 흘려듣지 않게 하시옵고,
이것이 도전이 되고, 결단이 되고,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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