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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붓는 사랑 (마26:6-13)

by 【고동엽】 2022. 9. 21.

아낌없이 붓는 사랑  (마26:6-13)


본문에서마리아는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이 식사를 하시는 중에, 300 데나리온의 매우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는 것이 낫다고 비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여인을 괴롭히지 말라고 하셨고, 이 여인의 행위가 당신의 죽음을 예비한 선한 행동이라고 칭찬했습니다. 본문에 대한 기사는 성경 4복음서에 모두 언급되고 있습니다( 마 26:6-13, 막 14:3-9, 눅 7:36-50, 요 11:2).
본문은 우리들에게 많은 의미와 교훈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과연 실리와 명분에 있어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혹은 '실리를 포기할 만한 명분이 있는가?' 와 같은 것입니다. 간혹 사람들 중에는 '만약에 내가 하나님을 본다면,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믿겠노라'고 장담하는 경우를 듣게 됩니다. 이는 사람이 분명한 명분을 가진다면 모든 실리까지도 포기할 만큼 그것이 가치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실제적으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사물과 현실의 실리성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사실과 진리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 앞에 지금 분명하고 확고한 것이 있다면, 방황하는 세대에서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요 8:32) 진리가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1. 아낌없이 주는 사랑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께서 식사를 하시게 된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그들과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마도 시몬은 우리 주님에 의해 기적으로 자신의 문둥병을 치료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환대함으로서 그에 대한 감사를 나타내려고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편 베다니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던 일로 유명합니다. 마리아는 이 일로 인하여 예수님에 대한 남다른 감사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대한 강렬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는 은혜를 받고, 깊은 사랑을 경험한 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만큼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그 당시 유대 여인들은 값진 향수를 병을 몸에 달고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향유는 매우 값진 것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부은 향유의 액수는 유다의 계산에 의하면 300 데나리온이었습니다. 300 데나리온은 당시 1년 동안 노동자가 벌어들인 임금에 해당됩니다.
하루에 품삯을 5만원으로 잡고 5일 일한다고 가정하면, 한 달에 100만원이 되고, 1년에는 1,200만원이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향유의 양은 한 옥합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5,000명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가격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가진 소유 중에서 가장 귀하고 값진 것을 주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타산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최소한 얼마로 하나님의 기분을 좋게 할 수 있겠는가를 어림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유일한 소망은 최대한 주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죽은 오라버니를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한 옥합도 오히려 부족했을 것이나, 극적이고 감격적인 신앙의 경험이 없는 제자들에게는 이것이 낭비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마 26:8,9)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다툼과 오해는 견해 차이에서 발생합니다. 성경에는 신앙과 불신앙,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얼마나 많은 대립과 갈등을 가지고 있는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다가 관심을 두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자식을 양육하고 부모를 섬기는 일을 경제원칙과 실리적인 방법으로 계산할 수 없음은 가족이란 관계 속에서 형성된 사랑이 그 바탕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명절 때마다 고향을 향한 발길이 민족 대이동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교통지옥 속에서 죽은 부모의 산소를 찾아가 보는 일이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돌아가신 부모가 듣기를 하나 먹기를 하나...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고 고집하면 그를 주위 사람들이 가장 고약한 불효자식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는 믿음과 사랑까지도 돈으로 계산하고 부부와 부자지간에도 물질이 계산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저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만일 부모나 자식 또는 배우자가 위독한 질병에 걸렸을 때에 그를 치료하는데 소요되는 돈을 아까워하거나 인색해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2. 하나님의 사랑
그러나 제자들은 이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행위에 대하여 분하여 했고, 이것을 무슨 의사로 허비하느냐고 질책하였습니다. 일반 상식적인 세계와 사랑의 세계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 상식 세계에는 사리와 분별, 그리고 지식이 따르지만 사랑의 세계는 마음이 지배합니다.
인생살이란 상식으로 된 영역도 있지만 오직 사랑의 낭비를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주고 베풀 수 있는 것은 참된 선물이 아닙니다. 값진 선물, 값진 사랑은 그 배후에 희생이 있고, 우리가 줄 수 있는 능력보다 그것이 훨씬 클 때에 참된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선물은 하나님의 사랑 곧 아가페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우리에게 독생자로 주신 것은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이 선물은 우리를 위하여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의 지혜와 지식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묵묵히 십자가를 지시며 죽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사랑은 상식세계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뛰어 넘는 다른 세계입니다. 우리는 상식의 영역을 때로는 벗어나서 마음의 영역으로 뛰어 들어가는 일에 무관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는 물질적 지식만이 지배하는 것 같아도 우리의 지식을 넘어선 고차원적인 일들이 세계를 움직이고 또한 세계를 지배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나 우리 자신에 의해 주님께 드려진 것을 허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용되는 시간을 허비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경건한 일에 투자되는 물질을 낭비라고 생각하거나 말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비록 물이나 강에 던져버리는 것 같아도 여러 훗날에 그것을 다시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 26:10)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끔 교회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시간이 없느니, 먹고 사는 일이 최우선이니, 집안 형편이 어쩌니, 마음이 안 잡히니 등등의 말은 상식적인 것이고 인간적으로 이해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신앙적 발상이며, 분명히 하나님의 세계에서 말하는 것이 아님에 틀림없습니다. 신앙의 세계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지각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세계, 권능을 주시는 하나님의 차원을 바라보는 신앙적 도약이 요구됩니다.
(전 11:1)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미국에 '4센트 짜리 교회'라는 이름이 붙여진 교회가 있는데, 여기에는 네 살짜리 어린 아이의 솔선적인 봉헌 이야기가 있습니다. 낡은 교회당의 신축을 위해 모든 교인들이 집회시간에 모여 헌금시간을 가졌는데, 모금할 액수가 너무 많아 모두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겨우 네 살 밖에 안된 어린아이가 강단 앞 계단으로 올라가 목사님께 가서는 고사리 만한 손에 쥐고 있었던 1센트 짜리 동전 4개를 목사님 앞에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이 돈은 우리 엄마가 사탕 사먹으라고 주신 돈이지만, 이 돈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목사님께 드리는 거예요"라고 말하고서는 강단을 내려갔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고 헌금하는 어린이에게 큰 감명을 받은 어른들이 자기 차를 구입하려던 돈, 자신이 가장 아끼던 것을 헌금하기 시작했고, 이것으로 인해 4센트 짜리 예배당이 웅장하게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3. 죽음으로 주신 사랑
이 여인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깨달았고, 그 의미를 확인하였습니다. 만일 그의 부활이 이루어지면, 예수님께 기름 붓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식사 중에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와 그 의미를 전혀 몰랐습니다. 또한 그들의 편견과 오해는 마침내 예수님에 관한 것까지 불평하고 시비하는데 까지 이르렀습니다.
어느 집에 아버지가 중환자로 죽음에 임박해 있었습니다. 의사는 수술을 해도 가능성이 희박하고 성공해도 오래 살수 없고 경비가 많이 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수술을 안 하면 곧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아들들은 비용을 생각해서 수술을 반대했고 딸들은 아무리 돈이 들어도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지켜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누가 어머니의 눈물을 염분과 수분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또 부모의 얼굴에 있는 주름살을 흉하다고 하겠습니까?
이처럼 사랑은 물리적 현상으로만 계산될 수 없기 때문에 아까운 것이나 낭비라는 생각으로 실리를 계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죽음으로서 우리에게 주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인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은 자녀가 아니면 그 사랑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는 그 사랑을 입은 성도 외에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주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라도 약한 믿음의 소유자는 어떤 경우에서는 사탄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십자가를 지는 일을 만류하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기독교는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영광 속에서 그의 재림으로 그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여인의 행위는 늘 행할 수 있는 구제에만 관심을 두었던 제자들에 비해 영원히 간직되어야 할 것임을 예수님은 강조하였습니다.
(마 26: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있기 때문에 선을 행하려는 마음을 가지려는 자는 결코 기회가 없다고 불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편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는 매우 드물며 짧으면서도 불확실하여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는 우선 순위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주변적 문제에만 예민성을 보인 제자들은 큰 실수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다 삶의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행위를 변호하시고 극찬하셨던 것은 이 여인의 바른 신앙적 자세와 가치관 때문이었습니다.
(마 26:12,13)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나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진정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실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만약 물질적이고 인간적인 계산으로 하나님께 나아왔다면, 주님의 죽으심과 구속의 주님을 바라보는 참된 신앙의 자세가 요구됩니다.
조류 중 모성애가 가장 뜨거운 것은 펠리컨입니다. 펠리컨은 크게 늘어난 목주머니를 가진 새로서 새끼들에게 줄 먹이가 없으면 자신의 가슴살을 뜯어 먹입니다. 또한 병에 걸려 죽어가는 새끼에게 자신의 핏줄을 터뜨려 그 피를 입에 넣어줍니다. 어미 펠리컨은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새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칩니다. 이 새는 사랑과 희생의 상징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피흘린 예수님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결 론
성도들에게 참된 봉사와 헌신을 일으키게 하는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습니까? 또한 영적 침체와 무기력함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신앙의 행위가 초월적이어서 영적 체험과 경험, 신앙의 신비적 일을 맛보지 않고는 이해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매료되어 그 깊이와 넓이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부가 가치를 극대화시키는 대전환이 요구됩니다.
독일에 '뮌헨 바하 합창 관현악단'이 있습니다. 목사의 아들이며, 올겐 연주자인 칼 리히터씨가 창립한 단체입니다. 여기에 입단할 때 이런 서약을 합니다.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과 돈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몽땅 바하 음악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바친다" 과연 훌륭한 약속입니다. 그들처럼 우리도 이렇게 한마디 고백함으로 나의 인생을 걸고 서약할 수는 없겠습니까? "나의 생명을 우주적인 하나님의 음악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바칩니다."
이 여인 마리아와 같은 사랑의 표현은 영원히 우리들에게 모범이 됩니다. 초월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상식을 넘어선 초월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영적 침체에서 해방시켜 줄 것입니다. 아낌없이 붓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이며, 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출처/안재은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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