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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야의 나라 (사 9:1-7)

by 【고동엽】 2022. 9. 21.

메시야의 나라  (사 9:1-7)

성도가 가진 가장 큰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행복과 축복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당하는 외부로부터의 핍박과 어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은 유대 백성을 적대하던 앗수르와 북방 민족의 공격으로부터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남은 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메시야 왕국(The Kingdom of God)을 이룰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기록된 이사야의 예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야와 그가 세울 왕국이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을 것인지를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울 메시야의 왕국은 어떤 모습의 나라가 될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즐거움이 충만한 나라
메시야의 왕국은 무엇보다 즐거움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 이유는 거기에 큰 구원의 빛이 비춰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메시야이신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을 정복하시기 이전에 인간은 흑암과 고통 가운데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 9: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흑암( , 호쉐크)은 구약에서 '죄', '무지', '고통'을 상징하고, '빛'( , 오르)은 '생명', '여호와의 진리'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유기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며 죄를 지음으로 고통 가운데 있게 될 선민이 참 진리 되시며 빛과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회복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한편 고통과 흑암 속에 있던 자들은 바로 사단에게 얽매여 종노릇하고 있던 우리 죄인들의 불쌍한 모습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일상의 '삶'속에서 때로는 멸시와 수치 속에서 죽음과 같은 고통의 나날을 보내기도 하며, 희망의 빛이라곤 전혀 없이 오직 절망만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은 메시야의 도래야말로 사망의 그늘진 땅에 큰 빛으로 비춰진 것입니다. 그 빛은 구원의 빛이요, 기쁨의 빛이었습니다.
(시 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 80:1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마치 기드온과 300용사가 메뚜기떼 같이 무수한 미디안 군대와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함으로 얻어낸 것과 같은 큰 구원입니다. 또한 이 구원은 풍성한 수확물을 추수한 농부가 누리는 것과 같은 한없는 기쁨이며, 군인이 큰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전리품을 나누는 것과 같은 즐거움이었습니다.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처럼 예수님의 탄생은 죽음과 사망의 그늘진 곳에서 신음하는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요 구원의 빛인 것입니다. 실로 메시야 왕국은 큰 구원이 있는 곳이며, 또한 그 구원으로 인한 즐거움이 충만한 곳입니다.
스펄젼은 "빛은 우리들의 가장 좋은 친구이다. 그러므로 그 빛에 순종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며, 그것에 대항한다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유익을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2. 공평과 정의가 충만한 나라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다윗의 위(位)에 앉으사 영원토록 그 백성을 다스릴 것으로 일찍부터 성경에 예언되었던 왕이십니다(삼하 7:8-16). 그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바로 메시야 왕국입니다.
무릇 모든 왕국에는 반드시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통치 규범이 있는 법인데, 메시야 왕국의 법의 원리는 공평과 정의인 것입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그들의 이익을 위하여 억압과 착취, 불의와 공평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선거 유세 때는 공평과 정의를 약속하지만, 일단 당선되고 권력을 잡고 나면 죄와 욕심이 싹터 부정과 부패의 종이 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메시야 왕국의 통치는 거짓과 술수와 사기, 그리고 그러한 악행을 통한 압제 등 모든 불의한 일들이 추호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가 정의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사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그러나 메시야가 오시기 전, 거짓의 아비인 사단이 권세를 쥐고 이 세상을 다스릴 동안 온갖 불공평과 불의가 이 땅에 난무하게 될 것인데, 그 때에 사람들은 악을 선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야가 통치하는 왕국에서는 불의와 거짓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자들은 모두 정죄받아 멸절당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메시야 왕국에는 오직 참되고 올바르며 진실된 것, 곧 공평과 정의만이 하수같이 넘쳐흘러 온 땅에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암 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
잘사는 선진 복지국가는 대체적으로 정의와 진리가 그 뿌리를 든든히 내리고 있으며, 부패한 나라는 일반적으로 관리로부터 시작하여 온 백성들이 불의와 불공평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평강(샬롬)의 나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나라의 특징은 평강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평강(샬롬)'이란 말은 성경의 많은 곳에서 발견되는 친숙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인사'(삿 19:2), '하나님과 그의 대리자 사이의 평화의 언약'(민 25:12; 사 54:10; 말 2:5)을 나타내는 의미 등 여러 가지 용례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사용된 '평강'은 분쟁이 없음을 나타내는 강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평화'는 단순한 전쟁이 없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단순히 외적인 다툼이 없는 상태 뿐 아니라 내적인 마찰이나 분쟁, 손상이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메시야가 가져올 평강이란 어떤 평강일까요?
첫째, 하나님과의 평강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이후로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인류 시조의 범죄로 인간은 하나님께 정죄를 받아 늘 심판의 공포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된 상태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계속되었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강의 왕'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 이름 안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오랜 시간 동안 있었던 불화를 해결할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평화의 다리를 놓은 것입니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이제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평화스런 관계를 갖게 됩니다. 이것이 이사야가 말한 기독교적 평화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과의 평화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평화요, 모든 평화의 근거가 됩니다.
둘째, 영적인 평강입니다. 죄란 혼란과 혼미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죄는 사람의 마음속에 계속 불화를 조성합니다. 또한 죄는 가장 고상한 것, 즉 양심, 지혜와 분별력, 거룩한 열심 등을 없애 버리고 빗나간 감정, 이기주의, 이간질, 불의함 등으로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화는 사람의 마음을 회복시켜 참된 질서를 재정립하도록 합니다. 이것은 사람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재창조합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창조하셨을 때의 영적 본성이 다시 제자리를 찾고 모든 의의 능력이 제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고 인간의 영적 본성이 제능력을 발휘할 때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과 참된 평화를 누리게 되며, 진정한 마음의 쉼을 얻게 됩니다. 기독교적 평화의 의미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셋째, 사회적 평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왕'으로 오신다고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사회적 평화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의미에 있어서 사회적 평화는 단순히 직접적으로 눈에 나타나는 평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나타난 기독교적 사랑(요 13:34, 35), 화해(마 5:25), 관용(마 5:43-48), 인내(살전 5:14) 등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이웃간의 바른 관계와 사회의 평화를 만들어 내는 조건이요, 근원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아 우리 이웃과 직장에 평화의 사신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평화의 메신저가 되어야 하고 성탄의 축복을 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평강의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결 론
(눅 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분이십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으며 또한 사단의 왕국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나라 곧 메시야 왕국을 이 땅 위에 세우셨습니다.
그는 우리 성도들에게 큰 구원의 빛으로 소망 가운데 살도록 큰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모신 곳에는 더 이상 불의와 죄악이 통하지 않는 공평과 정의가 충만한 나라로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평강이 가득한 나라로 이룩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메시야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순수히 받아 드리고 하나님을 통해서만 참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을 찾는 자들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고로 우리 성도는 이 땅에 주님께서 오실 그 날을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물론, 불의와 온갖 악한 일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현세를 살아갈 때에도 메시야 왕국의 백성답게 구원받은 기쁨을 가지고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출처/안재은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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