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웃 (누가복음 10:30-37)
본문은 예수님이 영생에 관하여 질문한 율법사에게 비유로 대답하신 내용입니다.
(눅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거리가 약 35km가 됩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2m나 되는 고원에 위치하고, 여리고는 해면 보다 250m나(사해는 400m) 낮은 곳이므로 그 길은 급경사 길입니다. 또 굴곡이 심하고 길옆에는 암석들이 많아 도둑들이 자주 출몰하였습니다.
여기에 한 사람이 여행을 하다가 가장 악질적인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 사람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유대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길을 가던 이 여행자는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심지어 강도들은 그의 옷을 빼앗았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심한 폭행을 가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된 상태에서 내버려두고 떠나갔습니다.
1. 지나가는 제사장과 레위인
(눅 10:31,32)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이 때에 우연히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들은 강도만난 사람을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신분으로 볼 때, 이것은 상식 밖의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제사장은 강도 만난 자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결국 이 제사장은 절실히 도움이 요청되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행동은 백성들에게 봉사할 직무를 맡은 제사장으로서(민 18:1-32) 뿐 아니라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도 용납될 수 없는 과오였습니다.
생각해 보건데, 제사장이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은 자기가 가는 길에서 자기도 강도 떼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거나 아니면 사람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시체를 만져 자기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율법 준수의 정신(레 21:1-3)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한편 레위인도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성별된 지파였습니다(민 18:1-32). 레위인들은 제사장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유대의 종교적 특권층에 속한 사람들인 만큼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 레위인은 앞서 지나간 제사장과는 달리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보기는 했지만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한 웨슬레는 " 아무리 회개했다고 해도 돈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회개를 믿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2. 선한 사마리아 사람
(눅 10:33-35)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그들 뒤로 또 한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유대인들이 짐승같이 여기고 경멸하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의 포로기에 남은 백성과 그 곳에 이주해 온 이방인과 결혼한 혼혈 자손으로 유대인이 멸시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도 올라가지 못하여 그리심산에 별도로 신단을 설치하고 경배하였습니다(요 4:4-9).
그런데 그들이 업신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그에게 깊은 동정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는 기름과 포도주를 그 사람의 상처에 붓고 싸매고 먼저 응급 조치를 취했습니다. 당시 기름과 포도주는 상처의 치료제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대개 기름은 상처의 통증을 완화시켜주고, 포도주는 살균 역할을 합니다(Robertson). 그는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바른 후 싸매어 주었습니다. 그 여행자가 비상시를 대비해 붕대를 가지고 다녔다면 다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그의 옷이라도 찢어서 상처를 싸매어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탈진한 환자를 자신의 나귀에 태워 여관까지 데려온 사마리아인은 그 주인에게 그를 부탁함으로 계속해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여기서 '돌보다'는 단어는 딤전 3:5에서 교회를 돌보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는 사마리아인이 환자를 '책임짐으로' 끝까지 돌보아 주었음을 시사합니다.
'주막'( )은 성경에서 이 곳에만 나타나는 낱말로서 "누구나( ), 받는( )" 장소로 서민적이며 넓고 큰 여인숙인데, 오늘날의 교회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지금도 예루살렘과 여리고의 중간 지점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주막"이라는 유적이 있어 이 비유의 아름다운 정신을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시내산 역본에는 '이튿날' 대신 "그 날 새벽에"로 되어 있어 더 정확한 시점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그는 새벽에 일찍 떠나야 할 만큼 바쁜 사람이었으나, 도움이 절실히 요청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바쁜 시간과 물질을 희생했던 것입니다.
그는 두 데나리온을 주막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면서 돈이 더 들면 돌아와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역사가 폴리비우스(Polybius)에 의하면 이 금액은 약 2개월 동안의 숙박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완전한 이웃 사랑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돌보아 주되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책임을 지려고 하는 태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A. 칼마이클은 "사랑없이는 줄 수 없지만, 주는 것 없이 사랑할 수는 없다"고 했고, R.G 잉거솔은 "남을 도와주는 손은 기도하는 입술보다 성스럽다"고 했습니다. 또한 옛 속담에 "구제할 것은 없어도 도둑맞을 것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남을 도와주고 구제할 만한 것은 아까워서 하나도 없지만, 막상 도둑맞을 만큼 값나가는 것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이웃 사랑을 이 사마리아인과 비교해보면 너무나도 큰 대조를 이룹니다. 이웃 사랑에는 마음과 물질, 수고와 노력, 시간과 관심이 요구됩니다. 우리가 남의 것, 공공의 소유를 가지고 선한 일을 하자고는 외쳐도 막상 내 것 가지고 무엇을 하자는 것에 관하여는 인색한 경우를 봅니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일시적이며 충동적인 동기에 의해서 행해져서는 안되며 끝까지 완전하게 책임 의식(責任意識)을 가지고 행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성도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온전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고대 유대의 성전에는 구제를 하고 싶으나 부끄러움을 타서 구제할 수 없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특별한 장소가 있었습니다. 또 가난하지만 구걸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은 그 곳에 가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가져갔는데, 그 곳 이름은 '침묵'이었습니다. 그 곳에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고, 다만 아무도 모르게 곤핍한 자들의 필요가 충족될 뿐이었습니다.
3. 참 이웃
(눅 10:36,37)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결국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참된 이웃이란 그 대상을 외형적인 모습에 국한하지 않고, 언제든지 필요하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그리고 실제로 희생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강도 만난 자의 국적이나 신분 등을 밝히지 않고 단지 '어떤 사람'이라고 언급하신 것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는 율법사의 질문을 통해 유대인은 이웃의 개념에 이방인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이웃은 유대인간의 친족이나 인근 사람에 한했던 것입니다. 그런 정의에서 그 율법사는 이웃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사람들을 차별하며 골라서 사랑하는 방식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사가 생각하고 있는 이웃의 개념 속에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이 제외된다는 것을 아셨으므로 이 사람의 질문에 대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말씀하시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의 의도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로 관심을 돌리는 것입니다. 전자(前者)는 '나' 중심적이고 나에 대해 사람들이 지고 있는 빚에 집중하지만, 후자(後者)는 '다른 사람들' 중심적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지고 있는 빚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답하지 않고 모든 이웃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逆說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개념은 자신의 이웃이 누군가를 미리 설정해 두기보다는 스스로 이웃이 되어 가는 자세가 은혜 받은 자들의 바른 태도임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에게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답하였습니다. 율법사는 당연히 '사마리아인 이니이다'로 대답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푼 자'라고 표현함으로써 질문의 핵심을 피해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민족적, 인종적 제한을 두고 있는 유대인들의 이웃 개념을 타파하고 그들이 원수처럼 여기는 사마리아인도 이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려 하셨습니다.
율법사는 이런 유대인의 선입감에 사로잡혀 고정적 이웃을 확인하려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적 담장을 넘어서 누구든지 이웃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천금의 무게를 가진 교훈을 전해 주신 것입니다. 율법사는 이미 스스로 결론적 회답을 얻은 교훈에 하등의 이의를 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권위 있는 명령은 율법사의 교만과 위선을 꺾어 버리는 위엄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율법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율법에 대한 전문적이고도 해박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영육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당장 자비를 베푸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이기적이고 한계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며 무조건적인 것입니다.
어느 날 랍비 아키바에게 어떤 철학자가 물었습니다. "만일 그대의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사랑하신다면, 어째서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돌보시지 않는가?" 아키바는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할 기회를 우리에게 베푸시기 위하여 가난한 자들이 항상 우리 곁에 있게 하셨다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결 론
세계에서 제일 많이 주고 사는 나라는 미국입니다. 아마 미국의 도움을 안 받은 나라는 세계에서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미국의 도움을 안 받았다면, 6·25 사변 때 전쟁에도 실패하고 심지어는 모두가 굶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열심히 주기를 좋아하는 미국나라가 세계 제일의 부강국이 된 것을 보면 '주면 부하게 되는 진리'가 참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참된 이웃'이란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필요할 때는 언제라도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랑을 지닌 자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나와 전혀 이해 관계가 없는 자에 대해선 그의 불행을 보고서도 지나치기 일쑤이며, 오히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이익이 미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해 하는 오늘날의 세태를 보면서, 예수님의 이와같은 교훈은 누구나 선뜻 실천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못 됩니다.
현대 사회도 마치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처럼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그들의 참 이웃이 되어서 그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싸매 주어야 하겠고, 그들을 강도 만난 자에게 안식처가 된 주막과 같은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로 데려와서 그들이 편히 쉬고 깨끗이 나을 때까지 돌봐 주어야 할 것입니다.
(눅 10:36,37)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출처/안재은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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