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버리고 복되게 (창 12:1-4)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오늘 아침에는 이름도 지위도 자격도 아무것도 없었던 아브람을 불러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주셨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조상으로까지 만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열국의 아비’란 뜻이고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란 뜻입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데 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은 인간으로써 감히 누릴 수 없는 가장 고귀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천국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영접하는 천국 영접위원장의 자리까지 차지하게 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천사들에게 받들려 천국에 들어갔는데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떠나게 하는 은혜와 버리게 하는 은혜와 복되게 하는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제가 ‘인생 칠도’를 말하면서 ‘떠남’과 ‘버림’과 ‘나눔’을 말하는데 아브라함이 이 세 가지 은혜와 사랑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랑이란 무조건 받는 것이 아니고 응답하는 것이란 것입니다.
첫째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떠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응답하여 떠났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인간은 본래 집착의 존재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집착으로부터 떠나라고 말씀했습니다. 인간은 본래 자기 자신에 집착하고, 자기 집에 집착하고, 자기 고향에 집착하고, 자기 민족에게 집착하는 존재인데, 그것들로부터 떠나라고 말씀했습니다.
75세 된 노인이 자기가 이루어 놓은 모든 가축들과 모든 재산과 모든 친척들과 모든 이웃들을 등뒤에 두고 미지의 땅을 향해서 떠난다는 것은 어리석어보이는 일이었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분부했을 때 믿음으로 순종하여 아비 집을 떠났고 고향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킬케골은 이 떠남의 사건을 가리켜 ‘지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crucifixion of the understanding)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가능했습니다. 이 떠남이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오랜 후에 스데반은 순교적 설교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아브라함의 떠남의 사건을 언급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그(아브라함)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떠나”(행7:2,3). 스데반은 설교를 마친 후 이 세상을 떠나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하늘 고향을 향해서 걸어간 하늘 지향적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고향과 집을 떠난 집 없는 나그네들이었습니다.
어제 아침 중국교회 지도자들 앞에서 제가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인간 역사의 근본적인 문제들의 하나는 자기의 나라와 자기의 문화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세계의 가장 심각한 문제들 중의 하나도 민족주의와 종교문화적 이데오로기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역주의와 민족주의의 장벽들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은 일부러 멸시를 당하던 지역인 사마리아로 가셨고 심지어는 버림받았던 지역인 두로와 시돈까지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인 요한에게 하늘의 비전을 보여주셨는데 거기에는 큰 무리가 보좌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민족주의도 문화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향해서 전진하고 함께 일하는 비전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오직 예수님을 위하여 손에 손을 잡고 함께 전진하십시다!”
떠남은 불행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떠남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저의 아버지도 고향을 떠났습니다. 법관의 자리도 떠났습니다. 집도 떠났습니다. 일본 시대에는 수년동안 집을 떠나 감옥에 계셨고 공산시대에도 수년동안 집을 떠나 감옥에 계시다가 마지막에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 주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도 고향을 떠났습니다. 아버지 집 어머니 집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슬픈 일 같고 불행한 일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축복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두 문자적으로 고향과 집을 떠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떠남의 사건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자기에 대한 집착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에 대한 집착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향에 대한 집착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민족에 대한 집착에서도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히브리서 11장은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이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응답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어차피 떠날 존재들입니다. 떠나는 연습을 하다가 마지막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중표 목사님은 어제 아침 12번째 별세 단상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사람이 병들면 떠남의 신비를 배운다. 사람 물질 명예 소유도 떠난다. 애인도 떠나고 심지어 가족도 떠난다. 병든 목사에게는 교인도 떠난다. 다 떠나게 된다. 저들이 떠나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면 병든 인간의 비참함을 슬퍼하고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자기가 먼저 떠나면 떠남의 신비를 체험케 된다. 나는 병상에서 사람을 거절했다. 그리고 혼자 떠나는 별세를 체험키로 했다. 혼자 천국으로 향하여 예수님과 그 길을 걷기로 했다. ‘떠나라, 떠나게 하라, 떠나보내게 하라.’ 이 음성이 지금도 내 귓전을 울린다.” 사도 바울도 떠남을 준비하면서 그의 마지막을 살았습니다.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딤후4:6). “내가 담대히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5:8).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떠나게 하시는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하늘 영광을 떠나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둘째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버리게 하셨습니다.
창22:2을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버리라고 명령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응답하여 아들을 버렸습니다. 이것이 가장 높을 차원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떠남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분부였습니다. 아버지의 도리에 어긋나는 분부였고 윤리에 어긋나는 모순된 분부였습니다. 킬케골이 지적한대로 아브라함은 ‘두려움과 떨림’ (fear and trembling)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여러가지 생각이 오고 갔을 것입니다. 신앙의 길 대신 윤리의 길을 택할까 하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신앙의 길 대신 자식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윤리의 길을 택할까 하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떼를 쓰고 싶은 생각을 품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 아들 대신 나를 제물로 드립니다. 물론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장 좋은 제물은 아니지만, 이 늙은 몸이라도 제물로 받으시옵소서. 이것이 아들 다음으로 내가 드릴 수 있는 가장 귀한 제물입니다.” 그리고 칼을 들어 자기의 가슴을 찔러 피를 흘리게 할까 하는 생각을 품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것은 킬케골의 상상입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그는 믿음의 조상은 되지 못했겠지만 모든 인류의 추앙을 받는 위대한 인류의 아버지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번에도 하나님의 분부에 순종을 했습니다. 가장 높은 차원의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을 했습니다. 아들을 잡아 칼로 죽여서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응답했습니다. 그는 아들을 버리고, 윤리를 버리고, 자기의 가치관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택했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께 응답하고 순복하기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상대적인 것을 다 버렸습니다. 킬케골은 이것을 가리켜 ‘윤리의 목적론적 정지’ (a teleological suspension of the ethical)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버리고 아들이 아버지를 버리는 십자가의 버림의 사건과 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버렸습니다. 칼을 들어 아들을 찌르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고 하더니”(창22:9,10).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과 행동을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들을 버리기로 작정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너무나 놀라셨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라고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라고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라고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아들까지 버리려는 아브라함의 지극한 사랑을 보시고 하나님은 너무나 크게 감동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복을 주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회개에도 너무 약하시고 우리의 헌신에도 너무 약하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아들 하나를 버리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하나님은 수를 셀 수 없는 수 많은 아들들을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창22:16,17). 이것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버림은 잃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잃는 것이 아니고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며(버리면) 찾으리라"(마16:25).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버린 사람들입니다. "저희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4:20). "저희가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4:22).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버렸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 저의 아버지는 아들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후손들을 얻었고 자신은 순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저는 아버지도 버리고 아들도 버렸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버리게 하셨지요. 그러나 저는 믿음의 부모 형제 자매 자녀들을 국내외적으로 많이 얻게 되었습니다. 버림이 슬프고 아픈 일같이 보이지만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풍성한 은혜와 사랑과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은 버리는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문자적으로 아들을 다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버림의 사건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아들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손자 손녀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예배에 방해가 되고 전도와 봉사에 방해가 된다면 아들 딸 손자 손녀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지적하시며 말씀했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손자나 손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16:29,30). 이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응답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버리게 하시는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은 믿음의 아들들을 얻었고 천국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셋째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복되게 하셨습니다.
창12:2,3을 읽습니다.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복을 받는 것도 귀하지만 복의 근원이 되고 복의 통로가 되고 복의 원인이 되는 것은 가장 귀합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었고 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사랑과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나를 인하여 누군가가 복을 받을 수 있다면 나는 가장 귀한 존재가 됩니다.
이삭이 우물을 파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을 끼치는 귀한 존재가 되었는데 그 일을 제일 먼저 시작한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창26:18). 요셉이 가는 곳마다 복을 끼치는 복의 근원과 통로가 되었는데 요셉이 그런 복을 끼치게 된 것도 아브라함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39:5). 나를 인하여 누군가가 복을 받을 수 있다면 나는 가장 귀한 존재가 됩니다. 6.25 전쟁 후 저는 3년간 할머니와 두 이모님과 함께 대구에서 살았습니다. 둘째 이모님이 대구에서 천 장사를 했는데 아주 잘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둘째 이모님이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저를 보고 웃으면서 아주 좋아했습니다. 시장에서 점치는 곳에 가서 점을 쳤는데 그 점쟁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모님이 천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게 되는 것은 같이 살고 있는 예수를 잘 믿는 조카때문이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야 너 때문에 우리가 복을 받는다고 그래." 그러면서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점쟁이도 제대로 아는구나 라고 저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제가 중학생이었지만 매일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다녔으니 하나님께서 우리 집에 복을 주시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누군가가 복을 받는 다는 것은 얼마나 흐믓하고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복을 받는데 만 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부끄러운 사람이고 누군가에게 복을 끼치면서 사는 사람은 자랑스러운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가장 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삭개오를 복되게 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아브라함은 십 팔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진 여자를 복되게 했습니다.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눅13:16). 아브라함은 거지 나라로를 복되게 했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눅16:22). 아브라함은 로마 백부장을 복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마8:11). 아브라함은 오늘날 여러분들과 저를 복되게 했습니다.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만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9). 돌들만도 못한 우리들을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만들어주셨고 구원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세가지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떠나게 하는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고, 버리게 하는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고, 복되게 하는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세 가지 은혜와 사랑을 모두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김명혁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전을 지으며 맞는 감사 (학 2:10-19) (0) | 2022.09.17 |
---|---|
삶의 무게 (0) | 2022.09.16 |
싸매시고 고치시고 (사 30:23-26) (0) | 2022.09.16 |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사람의 은혜입니까? (고전 15:9~10) (0) | 2022.09.16 |
감사하는 방법 (0) | 2022.09.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