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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한 가지 (요 9:24-3)

by 【고동엽】 2022. 9. 17.

내가 아는 한 가지   (요 9:24-3)


원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신체 장애가 된 이들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장애자들을 놀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근자에는 그래도 많은 인식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장애자는 슬픕니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괴롭습니다.  힘듭니다.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 대우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비참함을 느끼게 됩니다.  장애자중에 시각장애자는 참으로 딱합니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볼 수도 없습니다.  음식을 먹어도 보지 못하고 먹어야 합니다.  신체 장애자가 삶에 있어서 불편함을 느끼게 되겠지만 그 가운데 시각장애자는 더욱 불편합니다.  예전에 시각장애자가 길을 가는데 자기 보다 앞서가면 침을 뱉는 일도 있었답니다.  지금도 장애자는 많습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잘사는 나라가 장애자가 더 많다고 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장애자가 10% 정도는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 같은 나라는19%라고 합니다.

본문을 보면 시각 장애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묻습니다.  저 사람이 시각 장애자가 된 것이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의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 우리는 잘못되는 게 있으면 먼저 죄 값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부모의 잘못으로 생기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임신되었는데 담배 태우고 마약을 복용하였다든지 심한 충격을 입은 경우에 장애자로 태어날 수도 있답니다.

후천적 요인으로 장애자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통사고를 만났던지 몸이 아플 때 잘못 관리해서 생기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연세가 높아지면 기능이 약화되어 장애자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건강하고 신체에 이상이 없다고 장애자를 대하는 태도가 잘못되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현재 신체 장애자들은 낙심하거나 부끄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먼저 장애자가 된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영적 장애자입니다.  장애자가 되면 모든 일에 불편한 것 같이 영적 장애자도 그러합니다.

본문을 깊이 생각해봅니다.  나면서 소경 된 자라고 하였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신앙생활에 답답합니다.  그런데 시각장애자가 경험을 하였습니다.  한 가지 아는 게 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는 성도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1.  전에 보지 못하다가 지금은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익숙해지면 덜 불편합니다.  캄캄한 밤중에도 물건을 찾아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불빛이 없어도 잘 찾습니다.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빛이 있는데 볼 수 있다는 것보다는 볼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밝은 빛 아래서 영안이 밝아지는 역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말할 때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입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3:13-35절을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은 주님과 분명히 동행하시는데 예수님을 몰라보았습니다.  눈이 안보인 게 아니라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요즈음은 모두 소경들만 사는 것 같습니다.  부모를 몰라봅니다.  그러니까 부모를 죽입니다.  자녀들을 몰라봅니다.  그들을 껴안고 자살합니다.  선생님을 몰라봅니다.  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들이 국민을 몰라봅니다.  

공부하여야 합니다.  눈이 열리는 공부를 하라는 것입니다.  공부 못하는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1) 이들은 시험발표가 나야 공부하는 이들입니다.  실력 있는 이들은 평소에 준비하였습니다.  신앙생활도 시험이 와야 하나님 그러고 기도합니다.  예수 잘못 믿는 사람과 공부 못하는 사람이 비슷합니다.  2) 계획만 잘 세웁니다.  예수 잘못 믿는 사람들은 말만 잘합니다.  일이 안되면 불평만 합니다.  원인을 모르고 핑계만 합니다.  3) 공부 못하는 학생은 항상 바쁩니다.  책상 정리하기에 바쁘다는 말입니다.  예수 잘못 믿는 사람들은 정작 할 것 때문에 분주한 게 아닙니다.  안 해도 될 일에 대하여 바쁩니다.  사회참여, 정치활동이라는 명목으로 분주합니다.  4) 공부 못하는 학생은 잠깐 잤는데 눈을 떠보면 해가 중천에 떠있더랍니다.  잠자는 시간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 잘못 믿는 사람은 게으르다는 말입니다.  5) 기적을 믿는다고 합니다.  어떻게 잘되겠지.  내가 아는 것이 시험에 나오겠지 그럽니다.  예수 잘못 믿는 사람도 그러합니다.  6) 공부는 못해도 인간성만큼은 누구보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잘못 믿는 사람도 자신은 마음만은 누구보다 열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목사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세요.  그런 말을 계속 되풀이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을 모르는데 어떻게 합니까? 영 안이 열려야 합니다.  전에 보지 못하던 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본다는 것은 안다는 말입니다.

먼저 전에 보지 못하던 하나님이 도우시는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출 14:13)  선민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꿈에 그리던 가나안을 향해 갑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고 진행하는 귀한 일에 문제가 생깁니다.  바로의 변질된 마음 때문에 애굽의 병사들을 동원해서 추격해 옵니다.  전쟁하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이길 도리가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전체 백성들이 포로가 되거나 죽음을 당해야 하는 절박한 사태에 직면했습니다.  백성들은 불안에 떨고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비참한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통곡합니다.  이들의 통곡은 후회와 불안에 의한 심리 작용입니다.  그때  민족적인 지도자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라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 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시각 장애자 였습니다.  능력의 하나님을 모세만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이 열리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전에 보지 못한 것을 체험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건이 전에 보지 못하였는데 이제는 새로운 일들을 체험하는 역사가 많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은총을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보호의 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열왕기하 6:17~을 보면 엘리사 가 도단에 있을 때 일입니다.  아람 사람들이 엘리사를 완전 포위하였습니다.  이제는 엘리사도 붙잡히고 도저히 승리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엘리사의 시종 사환이 밖에 나갔다가 그 사실을 보았습니다.  살 여망이 없습니다.  아하 죽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어찌 하오리까? 그때 엘리사가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종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각 장애자의 눈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불말과 불병거가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장애자들은 적인 아람 나라 군대만 보였지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은 보지 못했습니다.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본문에서 시각장애자가 말하기를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전에 보지 못하였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체험하였다는 말입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닙니다.  체험이어야 합니다.  안다는 것도 이론으로 아는 것과 체험으로 아는 것은 다릅니다.  기도하자고 합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누가 부인합니까? 그럼에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요? 기도해서 응답 받아 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여 응답 받아 본 이들은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기도합니다.  체험한 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체험적인 신앙인이 힘있습니다.  병으로 고생하다가 고침을 받아본 체험이 있는 사람은 병만 생기면 기도해달라고 찾아옵니다.  체험하여 아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체험하여야 합니다.  중생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여야 합니다.  축복도 체험하여야 합니다.  내가 한 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라고 간증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2.  한 가지 아는 것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나면서 소경 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시각장애자를 볼 때 먼저 무엇을 생각하였습니까? 저 사람이 너무 불편하겠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이렇게 생각하였다면 이는 인도주의자입니다.  어떤 이들은 율법적인 독선에서 하는 말이 누구의 죄 값 일까? 얼마나 죄가 많으면 소경이 되었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은 의로운 사람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죄 값으로 받는 저주라고 단정하였습니다.  관점이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좋은 관점에서 보면 다 좋게 보입니다.  이와 같이 첫 인상이 중요합니다.  결혼하고 시집살이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첫 인상이 고상하게 보이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선입관념이 결정적입니다.  자격 없다.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아니한다 라는 선입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웬만큼 잘 해도 잘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처음 볼 때  저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한다.  무슨 죄 값으로 그런 일이 있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부터 한 것입니다.  첫 만남에서부터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어야 성공한다고 말합니다.  

대안이 있습니다.  1) 옷을 만남의 시간과 장소에 맞게 입으라고 합니다.  옷이 날개이기 때문입니다.  2)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상대방의 눈을 보면서 대화하라.  3) 만날 때에와 헤어질 때 자신 있게 악수하라는 것입니다.  힘없이 악수하면 친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3초 정도잡고 있으라고 합니다.  4) 악수하거나 대화할 때에 친절하게 미소를 지으라고 권면 합니다.  5) 말하기보다 많이 들으라고 합니다.  말은 많이 하면 가볍게 보입니다.  주책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맞장쳐주기만 하면 많은 점수를 땁니다.  시각장애자가 길가에 앉았으니 무슨 죄인 같이 보였습니다.  사실은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나게 하는 거였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의식 중에 자기에게 어려움이 오면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무슨 잘못이 있어서 나에게만 고난이 오는가? 몰론 죄 값으로 오는 시련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질병도 죄 값으로 생기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고난이 옵니다.  왜 고난이 왔을까? 시편기자가 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을 통하여 유익을 주신다는 고백입니다.  농사짓는 분이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 비와 햇빛을 주시어서 풍년을 맞이하게 해주세요.  농부의 소원대로 비도 적당하게 햇빛도 충분하게 주셨습니다.  태풍이 불지 않았습니다.  농부의 아내가 곡식 밭에 들어가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잘 자란 곡식 밭에 곡식을 보니 알맹이가 없습니다.  쭉정이 뿐이었습니다.  바람이 불어야 곡식이 알맹이가 되는 것을 몰랐습니다.  태풍이 불어야 바다의 해초들이 잘된다고 합니다.  고난이 옴으로 믿음이 성장하는 이들이 얼마입니까? 고난은 내게 유익입니다.  고난 이후에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옵니다.  축복은 고난이나 시련의 터널을 통과한 이후에 도착되는 지점입니다.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라는 글에서 고난의 선물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죄를 씻어 준다.  고난은 인생을 씻어 깨끗하게 한다.  고난은 인생을 깊게 만든다.  이마 위에 깊은 주름살이 갈 때 마음속에 깊은 지혜가 생기고 살을 뚫는 상처가 깊을 때 영혼에서 솟아오르는 향기가 높다.  고난을 견디어 냄으로써 생명은 한  단계식 진화한다.  핍박을 받음으로써 오히려 상대방을 포용하는 관대함이 생기고 궁지와 형벌을 참음으로써 자유와 고귀함을 얻을 수 있다.  개인에게나 민족에게나 위대한 성격은 고난의 선물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육체도 그러합니다.  감기에 걸리면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래 살고 싶으면 감기에 걸려라. 감기에 걸리는 것은 몸 어딘가에 좋지 않은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졌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부분을 보완하면 더욱더 건강해질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에 시련이 있습니까? 고난이 왔습니까? 삶을 건강하게 하기 위한 감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어느 것이 안되었습니까? 현실적으로 어려운 때입니다.  80% 이상의 기업들이 10년 안에 문을 닫으며 신제품 10개중 8개는 실패로 막을 내린다고 합니다.  지금 당하는 어려운 일들은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오는 시련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분명하게 한 가지 아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온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하려고 해야 합니다.  사람의 가치를 어디에다가 두고 살아야 잘 사는 것입니까? 미모입니까? 지성입니까? 아니면 재물이나 권력입니까? 그보다는 내가 하는 사업이나 계획된 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의 철학입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고 반대할지라도 나를 비난하고 중상모략 할지라도 나는 변함없이 주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리라.  이렇게 다짐하여야 합니다.  “주여 나를 주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3.  한 가지 아는 것은 주님의 능력이 무한하시다는 것입니다.

  시각장애자의 부모는 자기 아들이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는데 밝은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데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침을 뱉어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그 말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였는데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도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이란 육체적인 힘보다는 정신적인 힘입니다. 우리나라는 잘사는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  아직도 먹을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게으르고 무능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때 지도자가 새마을 운동 잘살기 운동을 하였습니다.  지붕을 개량하고 다리를 놓았습니다.  고속도로를 깔았습니다.  이 운동이 우리나라를 변화 시켰습니다.  새마을운동이 싱가포르도 대만에 건너가서 그 나라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이 운동이 교회에서부터 받은 것입니다.  새벽종이 울리는 것을 기억하면서 시작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지금 정신적인 무장이 필요합니다.  정신적인 무장을 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소위 IT 산업으로 수출을 해서 이만큼이라도 명맥을 유지하는데 중국이 우리나라를 추격하여 옵니다.  기술력 격차가 3, 8년이라고 산업은행에서 발표한 이후에 과학기술부가 99개 핵심기술의 한중 격차가 2, 1년에 불과하다는 보고서를 내놓았습니다.  1-2년 후에는 한국과 중국이 역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방대한 노동력과 규모의 경제에 밀리고 있는데 기술력의 우위마저 잃게 되었다면 우리나라 경제는 비참해진다는 것입니다.  정신력을 강하게 하여야 합니다.  이런 때 능력이 있어도 되는 것이 없다는 이가 있습니다.  정신력이 문제입니다.  모든 일에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열등의식은 패배의식으로 이어집니다.

힘이 없는 이유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솝의 우화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귀가 혼자 목장에서 풀을 뜯고 있는데 늑대가 자기를 보고 뛰어오는 것입니다.  나귀는 갑자가 발을 절름거리면서 걸었습니다.  늑대는 나귀에게 가까이 가서 다리를 저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나귀는 발에 가시가 들어갔다면서 나야 이제 곧 죽으면 그만이지만 늑대 어른께서 목에 가시가 걸리면 큰일이니까 가까이 와서 내 발의 가시를 뺀 후에 잡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늑대가 나귀 발굽을 열심히 들여다보면서 가시를 찾고 있는데 나귀는 이때에 있는 힘을 다하여 늑대의 주둥이를 찼습니다.  그러자 늑대의 이빨이 모두 나가버렸습니다.  나귀는 물론 도망쳤습니다.  늑대는 억울하다며 혼잣말로 중얼거립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야.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요리하는 방법만 가르쳐주었는데 나는 지금 의사가 하는 일에 손을 댔으니 당연한 일이야.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함을 후회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삶을 집중 시켜야 합니다.  그분에게 목적을 두세요.  내 힘으로 하려고 할 게 아니라 예수의 능력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순간마다 주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아실 것입니다.  광야에서 남자만 5천명이 모였습니다.  그들에게 떡을 주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때 안드레는 어린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가져 왔습니다.  예수님께 가져오는 데까지 인간이 할 일입니다.  그 뒤 우리 주님은 다 배불리 먹고도 남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지금도 얼마든지 나타납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고칠 수 없는 시각장애자가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아는 것은 바로 주님의 능력에는 불가능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체험하고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연약합니다.  못하는 게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의 능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세요.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능력을 받고 힘있게 사역하고 살아간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시각장애자는 놀라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1.  보지 못하는 이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2.  한 가지 아는 것은 모든 시련과 어려움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3.  한 가지 아는 것은 우리 주님은 못하실 일 없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간증과 체험거리가 있는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아멘 ~


출처/백장흠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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