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고 행하라 (시119:129-136 딤후 3:12-17)
변화를 위한 대가 지불
새해를 맞아 모든 사람들이 한결 같이 하는 말이 ‘새롭게 되자, 변해야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기업인 모 그룹의 회장도 시무식에서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맞아 안팎으로 밀려오는 변화의 파고는 높아지고 그 속에서 영원한 1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정말이지 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절박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결심을 새롭게 합니다.
변화하지 않으면 발전도 없습니다. 변화하지 않으면 현상유지가 최상의 길이고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실제로 변화되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의 무엇 하나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밥먹는 습관 한 가지, 양말 벗어던지는 습관 하나, 말버릇 하나라도 변화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변화를 하기 위해서는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변화는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작심 삼일’이란 말이 있습니다. 결심을 해도 삼일 밖에 못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삼일 마다 결심을 새롭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농담삼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러면 날마다 결심을 새롭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결심을 새롭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열심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새벽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고, 말씀 묵상을 합니다. 날마다 새로워 집니다.
‘CEO 경영우언’이란 책에 나오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솔개는 조류들 중에서 가장 장수하는 새로 알려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솔개의 수명은 40년 정도라고 하는데 그 중 일부는 최고 70년까지도 산다고 합니다. 그러면 40년을 사는 솔개와 70년을 사는 솔개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다시 새로워지느냐 새로워지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회춘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모든 솔개가 회춘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회춘의 과정은 죽고 다시 사는 부활의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보통 솔개가 태어나 40년쯤 지나면 부리도 길게 자라고 깃털도 짙고 두꺼워져서 날개가 무거워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 점점 힘들고 벅차게 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발톱마저 노화해 사냥감을 잡아챌 수가 없게 됩니다.
이 때 일부 솔개는 약 반년에 걸친 힘든 갱생 과정을 선택합니다. 먼저 부리로 바위를 쪼아 새로운 부리가 돋아나게 합니다. 이 부리는 아주 날카롭고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날카로워진 새 부리로 발톱을 하나하나 뽑아냅니다. 새로운 발톱이 돋아나면, 이번에는 낡고 무거운 날개의 깃털을 뜯어냅니다. 그러면 아주 부드럽고 가볍고 섬세한 새 깃털이 돋아납니다. 이렇게 반년의 갱생을 거쳐 부리와 발톱과 날개가 새로워진 솔개는 30년의 수명을 더 누립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 우리는 솔개에게 배워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성숙과 변화를 위해서는 솔개와 같은 몸부림이 필요합니다.
새롭게 시작했다고 하면서 변화의 고통을 겪지 않고 6개월쯤 지나서 ‘주님 올해도 별로 한 것없이 변화없이 반이 지났군요’ 하고 기도합니다. 연말이 되어서 ‘별로 한 것이 없군요’ 이런 고백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심기일전하여 솔개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합니다. 그리고는 고통의 대가 지불을 두려워하지 않는 변화의 몸부림을 시작해야 합니다. 나태해질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드는 주님의 경고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3:16).
올해는 변해야 합니다. 결심하고 변해야 합니다. 고통 속에서 변해야 합니다. 언어습관이 변해야 합니다. 마음이 변해야 합니다. 이제는 긍정적인 입술로 변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변화가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아빠가 새해가 되더니 변했어! 내 아내가 달라졌네!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 같던 내 남편이 변하네요!’ 이런 말들을 들어야 합니다.
변화의 뱡향
우리는 반드시 변화해야 하는데, 변화에는 방향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변화를 해야 합니까? 변화의 매뉴얼이 있어야 합니다. 그 변화의 매뉴얼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모든 변화는 말씀 중심적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119:130).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말씀의 빛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우리 인생길의 방향을 밝게 비춰줍니다.
우리 한국 교회사 가운데 말씀의 중요성이 가장 강조된 사건이 백년전 평양 대부흥 운동입니다.
백 년 전 오늘[1907년 1월 14일]은 평양 장대현 교회의 사경회가 진행되고 있는 시간입니다. 평양 대부흥 운동은 1907년 1월 6일부터 10일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 기간 중에 일어나서 평양 전역,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 전역으로 널리 부흥의 불길이 퍼져 나갔던 부흥 운동을 말합니다.
그로부터 10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복음의 전초기지로서 사명을 감당할 만큼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평양 대부흥운동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하디’ 라고 하는 감리교 선교사의 영적 각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디 선교사는 1890년 9월 30일 캐나다대학 선교회 지원으로 알렌 선교사가 세운 서울 제중원에서 의료 선교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는 후에 본격적으로 원산을 중심으로 하여 선교 활동을 펴게 됩니다.
조선의 위기
당시의 조선은 위기 중의 위기 속에 있었습니다.
평양에서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던 당시의 조선은 위기 중의 위기였습니다. 약소국 조선은 20세기에 들어와서 힘이 다스리는 냉엄한 국제 질서 가운데 비극적인 역사를 맞게 됩니다. 1895년 일제는 한국의 영구 식민화에 거침돌이 된다고 판단한 명성 황후를 침전에서 칼로 난자해 살해하고,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황후를 홑이불에 둘둘 말아 녹원으로 끌고 가 석유를 뿌려 태워 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일제는 인류 역사에 다시 없을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하였습니다. 명성 황후의 시신은 모두 재가 되어 버렸고, 굵은 뼈 몇 개가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을미사변이 지난 10년 후인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일본은 ‘카츠라-태프트메모’ 라는 비밀 협정을 맺었습니다. 이 협정의 내용은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고, 일본은 한국을 점령한다는 내용의 양해 각서였습니다. 이 협정에 따라 일제는 소위 ‘을사보호조약’이라는 치욕적인 늑약을 강압적으로 체결시켰습니다. 이 조약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것으로 독립국으로서의 자격이 상실된 것을 의미합니다.
부홍운동이 일어났던 1907년 정미년(T未年)에 일제는 ‘정미 7조약’을 역시 강압적으로 체결시켜서 한국의 경찰과 군대를 해산하면서 사실상 국권을 장악했습니다.
그해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렸던 만국평화회의에 고종 황제가 밀사를 파견한 것을 트집잡아 일제는 같은 해 7월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마지막 황제인 순종을 세웠습니다.
이때 우리 안동교회 창립자 중 한 사람인 박승봉 장로는 당시 법제국장이었습니다. 박장로는 이준 열사가 황제의 어인이 찍힌 밀서를 가지고 헤이그에 갈 수 있도록 주선을 했습니다. 이 일로 이완용에게 미움을 사서 평북관찰사로 좌천되어 영변에 부임하였습니다.
급기야 1910년 한일병탄이 되고 말아, 500년을 이어 오던 조선왕조는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였습니다.
부흥 운동의 준비기
1907년 한국에서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성경공부와 기도운동에 기인합니다.
함경도 원산 지방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은 영성을 강화 시켜 달라며 간절한 마음으로 합심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지역의 선교사들은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한 주간을 특별기도주간으로 정하고 이 기간에 집중적인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갖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 지방에서 선교하고 있던 남감리회의 소속 하디 선교사는 이 기간동안 3편의 글을 발표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준비하였습니다.
당시 하디는 강원도에서 개척 선교를 하였으나 사역에 별 열매를 맺지 못하고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3년 동안 강원도에 [남감리]교회가 처음 닦은 터인 지경터 지역에서 애써 일 하였으나, 거기서 사역에 실패하였다. 이 실패는 나에게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주었고, 나는 일을 더 할 수 없으리 만큼 기진맥진하였다.”
그의 선교 사역이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하디가 성경 공부 교안 작성을 요청받은 주제는 “나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출석하는 한국 교인들이 진정한 참회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가?” 였습니다. 이 주제로 교안을 준비하다가, 오히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선교사로서의 자격을 갖고 있는가?” 라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성령이 내게 오셨을 때 그의 첫 요구는 나의 선교사 생활의 대부분을 함께 보냈던 선교사들 앞에서 나의 실패와 그 실패의 원인을 시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경험이었다.”
하디는 통절히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고, 사죄의 확신을 얻은 후에 동료 선교사들 앞에서 스스로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실패를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다음 주일 그는 한국교인들 앞에서 “나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는 심정으로 내 자신의 교만함과 신앙없음, 그리고 이렇게 되어 버린 나의 잘못을 고백한다”라고 자백했습니다. 그곳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하디의 적나라한 죄 고백과 성령 충만한 은사를 체험하는 것을 목도하고 그들도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뜨거운 체험 없이, 통절한 참회의 과정 없이 선교를 했던 하디가 이런 성령 체험과 참회의 과정을 겪은 후에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인도하는 모든 집회는 뜨거운 성령의 용광로와 같았습니다.
하디에게 송도, 서울, 제물포, 평양 등 전국 각지로부터 집회 요청이 쇄도하였습니다. 그는 집회를 할 때마다 먼저 죄를 참회하는 것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철저한 죄의 회개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가 3년 동안 계속 전국으로 퍼져 나가다가 드디어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 교회 신년 사경회를 통해서 폭발적인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흥 운동의 기초는 사경회, 즉 말씀 공부였습니다. 그리고 기도운동이었습니다.
성경은 어떤 말씀입니까? 말씀의 3가지 특징을 보겠습니다.
1. 말씀은 사람을 구원합니다.
먼저, 말씀은 사람을 구원합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디모데후서 3:15).
성경은 우리가 구원이 필요함을 밝혀주며 죄인이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을 명백히 밝혀줍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담은 복음입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자신과 듣는 사람을 모두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사람만도 아니고, 배우는 사람만도 아니고,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둘 다 구원을 받습니다.
말씀을 통한 교제
말씀을 통해서 구원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대화하면서도 그 구원이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교제와 친교 속에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들어있지 않은 교제는 죽은 교제입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교제할 때, 말씀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없는 교제는 갈등과 분열만 일으킵니다. 서로 상처만 줍니다. 모든 구역과 선교회와 모든 회의는 말씀 중심적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없는 대화는 지나고 나면 상처만 남게 됩니다. 열 가지 좋은 말하다가 한 가지 부정적인 말 때문에 섭섭한 마음만 남게 됩니다.
우리 입을 우리 혀를 말씀으로 써야 합니다. 우리 혀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뱀처럼 혀가 갈라져 있지 않습니다. 한 번에 한가지 말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이 허를 하나님 말씀 말하는데 써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말을 할 시간이 없어집니다. 우리 혀의 말의 주제가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오래 신앙 생활을 하면 관계에 있어서 새로움이 전혀 없습니다. 존경함이 별로 없습니다. 별로 긴장감이 없습니다. ‘김집사? 그 사람,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알지.’ 김집사가 은혜 받았다고 간증을 해도 전혀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있으면 사람을 다르게 봅니다.
말씀의 교제가 잘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부흥되어야 합니다. 새 교우들이 와서 빨리 적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구역에 5명이 모였는데 한 명이 새로운 사람이면 이 5명 전체의 관계에 변화가 생깁니다. 이 변화를 말씀과 기도 중심으로 잘 이끌어야 합니다. 말씀으로 관계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먼저 말씀을 연구하는 대화를 해야 합니다. 이 성경 구절은 무엇을 뜻합니까? 서로 함께 연구하고 질문과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그냥 밥 먹고 즐겁게 지내다 해어집시다. 학교도 아닌데, 창세기 몇장 몇절, 에베소서 몇장 몇절 찾지 말고, 다 그게 그거 아닙니까? 머리 아프게 좀 하기 마십시오. 귀찮아요. 나는 뱃속에서부터 교회 다녔어요. 나 성경 다 알아요.’ 마음이 병든 증거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사람의 생각만 이야기하다 보면 서로에게 배우기는커녕 서로 자기 주장하다가 마음에 상처만 받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함께 연구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은혜를 끼칩니다. 서로 유익한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말씀대로 사는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한 걱정과 부족함과 보람과 기쁨을 함께 대화하면 이것이 말씀 안에서 친교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각자가 변화되고 모든 관계가 업그레이드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함께 진리를 찾아 나서는 ‘순례자의 공동체’가 되지 않으면 서로에게 끊임없는 요구와 비난과 실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완전하지 않은 사람들끼리 서로 잘못을 지적하고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십니까? ‘누가 이런 말을 했는데 모순이다. 누가 이럴 수가 있는가?’ 하면서 고치기를 원하십니까? 정말로 하고 싶다면 한번 해 보십시오. 하루 24시간이 부족하고 일평생을 해도 끝이 없을 것입니다. 아마 직장 사표내고 전업으로 해도 직장일 보다 훨씬 더 바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쓰고 시간을 쓰지만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남의 잘못을 고치려고 이것만은 고쳐야 된다고 시간 낭비 하지 말고, 남을 향한 분노의 엄청난 에너지를 자기 개발을 위한 에너지로 쓰시기 바랍니다. 남을 향한 분노의 에너지의 10분의 1만 써도 엄청난 자기 발전을 일으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혼자 의로운척 하지 마세요. 엄청난 낭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있는 교회는 평안합니다. 겸손합니다. 서로를 인정합니다. 서로를 격려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관계를 새롭게 정립히야 합니다. 옛날에 코흘리개 박 아무개가 아니고, 이 집사가 아니고, 김장로가 아니고,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새롭게 새 사람으로 발견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2. 말씀은 사람을 교육합니다.
둘째, 말씀은 사람을 교육합니다.
성경은 인생의 교육에 유익한 말씀입니다. 사람은 교육받은 대로 변화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디모데후서 3:16).
법률 교육을 받은 사람이 법률가가 되고, 연기 교육을 받은 사람이 연기자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성경은 ‘옳은 것’ 과 ‘바르게 함’과 ‘옳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유익한 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말씀을 교훈을 받습니까? 말씀으로 책망을 받습니까? 말씀으로 바르게 고침을 받습니까? 의로 교육을 받습니까?
정말로 말씀을 통해서 고치고 교육을 받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가르칩니까?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배우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판단하고 가르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그냥 구원해 주면 되지, 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가?’
그러나 말씀을 통해서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먼저 말씀을 통해서 교육을 받으려면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아, 이 말씀은 맞아! 어? 이건 아닌데?’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말씀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판단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 말씀은 제가 이해가 안됩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깨닫게 해 주세요.’
말씀이 나를 판단하고, 말씀의 빛 아래 내가 있어야 합니다.
위장이 일부만 수용하고 일부를 거부하든지 일부를 그대로 배출한다면 위장이 아주 큰 이상이 생긴 것입니다. 소화 불량에 설사에 복통에 대단한 사고입니다. 만약 제 위장이 탄수 화물만 흡수하고 모든 성분을 그대로 배출한다면, 제 건강이 어떤 상태가 되겠습니까? 제가 화장실을 하루에 몇번이나 가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모든 성분에 대해서 흡수력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음식물의 성분을 잘 흡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우리가 말씀에 대한 수용성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그냥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 들일 수 있어야 교훈을 받으며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스폰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교훈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말씀은 선한 일꾼이 되게 합니다.
세번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군이 되게 합니다.
먼저, 말씀을 배울 때 선한 일군이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봉사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무장시킵니다.
“이는[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디모데후서 3:17).
이 말씀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유능한 일꾼은 성경으로 통해서 준비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빠진 선행은 참으로 공허한 선행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봉사를 하다가 갑자기 허탈해 질 때가 있습니까? 분명히 말씀이 없을 때입니다. 말씀이 살아서 움직일 때는 절대로 공허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섭섭할 때가 있습니까? 분명히 내 안에 영적인 에너지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밥을 먹어서 힘을 내듯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받아들여야 영적인 힘이 나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분노가 일어날 때가 있습니까? 남을 정죄할 때가 있습니까? 자신이 엄청나게 의롭고 온 세상이 죄인인 것처럼 생각이 듭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탄의 노리개감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힘을 말씀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사람으로부터 받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배우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해지며 자주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계속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다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성경을 가르칠 때 일꾼이 됩니다.
“그대가 이런 교훈으로 형제 자매를 깨우치면, 그대는, 믿음의 말씀과 그대가 지금까지 좇아온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될 것입니다.”(새번역, 딤전 4:6).
여기서 예수님의 일꾼이 되는 두 가지 조건이 나와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교훈을 따르면 예수님의 좋은 일꾼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일꾼이 되려면 반드시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두 번째 남에게 말씀을 잘 가르치는 것이 또한 일꾼의 역할입니다.
세상의 교훈을 따르면 세상의 일꾼이 됩니다. 칼 마르크스의 교훈을 따르면 마르크스의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이 교훈을 따라야 예수님의 일꾼이 됩니다.
2007년 말씀을 따라 교육 받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안동 교회의 교육 체계가 일 이년에 완성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분이 아닙니다. 감정이 아닙니다. 내가 말씀을 따라 변화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앞으로 100년을 나갈 것입니까? 98년 동안 쌓인 것들을 묵은 먼지 털어버리듯 털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40년 된 솔개가 자기의 부리를 뽑고, 발톱을 뽑고, 깃털을 뽑을 때, 새로워 져서 30년을 더 살 수 있듯이, 솔개가 몸을 가볍게 하여 공중으로 힘차게 날아 오르듯이, 새로운 상황에서 힘차게 날아 오르려면 말씀의 능력을 새롭게 받는 길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은 시간을 내어서 노력을 해서 훈련을 통해서 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인생과 가정과 모든 관계가 새로워 지길 축복합니다.
부정적인 관계가 아니라, 만나는 영혼에게 힘을 주는 관계, 영적인 생명을 살리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입술에서 생명의 능력이 불처럼 나오고, 평화가 선포되고, 화해를 선포해야 합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말씀 속에서 교육받고, 축복 받고, 진정한 변화를 이루시기를 바랍니다.여러분 모두가 선한 일군이 되어 하나님께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칭찬 받는 한 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출처/박병욱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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