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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됨을 지키라 (창3:1-7 전12:12-21)

by 【고동엽】 2022. 9. 7.

하나됨을 지키라    (창3:1-7  전12:12-21)  


1. 장점과 단점

설교를 시작하면서 먼저 여러분의 IQ와 카드에 대한 이해를 먼저 테스트하겠습니다.

[카드 재시 -> 3, 6, 1, 4/ 실제 카드 제시]

제가 여러분에게 분명히 같은 카드의 앞 뒤를 보여드렸는데도 저의 손가락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그 카드의 숫자를 다르게 예상했습니다. 제 손가락이 카드의 부족한 부분을 가려주면 숫자가 실제보다 더 많은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그러나 제 손가락이 카드의 무늬를 하나 가리면 실제보다 적은 숫자가 예상됩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사람도 어떤 입장에 서서 사람을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객관적인 능력이란 것은 증명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태도와 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법이 상대방의 평가를 결정하게 됩니다.

같은 사람도 ‘너는 부족하다’ 하고 비판하는 입장에 서면 그 사람의 능력보다도 훨씬 낮게 평가됩니다. 한 사람이 부족하여도 그 부족을 감추어 주면 이 사람은 훨씬 더 큰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사람은 약점을 덮어주면 훨씬 더 큰 능력을 발휘합니다. 단순히 약점을 감추어 주기만 하였는데도 마치 장점을 하나 더 더해 준 것 같이 됩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감추면 가지고 있는 다른 장점까지 없어집니다.

이 법칙은 공동체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사람이 불완전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보여드렸던 카드는 이런 모양입니다. 하지만 원래 이런 모양의 카드는 없습니다. 제대로된 카드는 이와 같습니다[정상적인 카드 제시]. 불완전합니다.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인류는 처음부터 실패한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창세기에는 인간의 첫 번째 경험을 죄악의 경험으로 시작을 합니다.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나친 기대로 인한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는 감싸줌과 칭찬이 필요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감싸줌과 칭찬이 필요합니다. 너에게뿐만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도 해당되는 진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공동체를 이루은 첫째 원리입니다. 공동체의 첫째 원리는 서로 단점을 가리고, 장점을 드러내라는 원리입니다.



2. 다양성의 조화

그런데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렇게 하는 것이 잘 되지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와 다른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입니까? 나와 다른 생각을 어떻게 이해할 것입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은 퍼즐 게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퍼즐의 한 조각 한 조각은 그 색깔도 각각 다르고, 그 모양도 각각 다릅니다. 같은 색깔과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퍼즐은 한 조각도 잃어버리지 않고, 맞추어야만 그 가치가 있게 됩니다. 우리는 다른 것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와 성도의 관계를 몸과 지체의 관계로 비유합니다. 우리 몸은 각각 다른 지체들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같은 지체가 없습니다. 심지어 같은 눈도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이 다릅니다. 팔과 다리도 양쪽이 서로 다르며 양쪽이 모두 함께 있고 조화를 이루어야 팔다리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고전 12:14-16).

지체가 서로 다르다고 해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각 지체는 그 기능도 각각 다릅니다. 한 지체의 기능을 다른 지체가 대신 감당하지 못합니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고전 12:17)하고 바울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몸은 다른 지체들의 연합으로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서 각 성도는 몸의 지체와 같습니다. 각각 서로 다른 성도들이 연합해서 한 몸을 이룹니다. 단 한 사람도 서로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서 공동체를 이루는 두번째 원리가 나옵니다.

공동체를 이루는 두번째 원리는 다른 것의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3. 서로 귀히 여기라.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 것입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고전 12: 21-23).

이처럼 성도들은 서로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약한 성도들을 더 돌보아야 하며, 추한 모습을 덮어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더 아름답게 높여주어야 합니다.

제가 이비인후과에서 이 연고를 처방을 받았는데, 제가 일부러 질문을 했습니다. “이 연고를 어떻게 바를까요? 면봉으로 바르나요?” 의사 선생님의 대답은 “아닙니다. 면봉으로 바르시면 위험하지요. 손가락으로 바르세요.”

독일의 한 이비인후과 의사가 손가락으로 코를 파는 사람이 코 속을 훨씬 더 잘 청소할 수 있으므로 건강한 코를 가진다는 논문을 발표했을 때, 그 내용이 전 세계어로 번역이 되어서 각 국에 소개되었습니다. 이런 사소한 내용이 전세계로 발표된다는 것이 인터넷 시대의 코미디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엄지손가락으로 코를 파는 사람있습니까? 가운데 손가락으로요? 여러분은 이 연고를 어떻게 바르겠습니까?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새끼 손가락을 이용합니다. 이 작고 제일 힘이 없는 손가락도 바로 작고 힘이 없다는 그 이유 때문에 가장 유용하게 쓰이는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손가락 중에서 가장 작고 힘이 없는 새끼 손가락도 귀하게 여겨야 하듯이 우리는 모든 지체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세번째 원리입니다.

공동체의 세번째 원리는 세번째 원리는 서로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4. 고통의 인내

공동체를 이루는 네번째 원리는 용납의 고통을 참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된다는 것의 고통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이 고통을 잘 겪어야 진정한 공동체가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를 그리워하고, 언제든지 함께 있고 싶어하고, 조금도 떨어지기를 싫어해서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함께 살면서 서로의 가꾸어지지 않은 모습들,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 누추한 모습들을 자세히 보게 됩니다. 이것을 본 고통을 감수하고, 고통을 잘 견뎌야 결혼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친구 사이의 우정도 친구의 단점을 잘 이해해야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친구의 단점을 수용하는 마음이 없으면 단절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오랜 장맛과 같은 우정은 싹틀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여러분 교회에 와서 진정한 천국을 경험하길 원하십니까? 천국을 경험하지 못해서 실망하고, 분노하십니까?

교회란 상처 받은 사람들이 서로 상처를 치유하고자 모인 모임입니다. 서로 조금만 닿아도 상처가 다시 도져서 고통을 느낍니다. 교회에서 사랑 받고자 하는 사람은 넘쳐 나는데 사랑할 사람은 적습니다. 인정 받고자 하는데 인정해줄 사람은 적습니다. 상대방을 향하여 서로 높은 도덕적 요구는 하는데 자기는 별로 상대방의 요구 수준에 맞추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지금 있는 상태 그대로 인정 받기를 원합니다.

공동체에서의 분노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욕구 충족의 좌절입니다. 그래서 분노의 대상은 역설적이게도 대부분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랑의 상처는 사랑과 은혜를 배풀었던 사람에게서 옵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의 이기적인 욕망이 끝간데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사람의 욕구를 마지막까지 채울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입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 대단한 고통을 줍니다. 하지만 이런 고통을 넘어서야 진정으로 서로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수용의 고통이 없는 사랑과 존중은 그저 허상일 따름입니다. 상대방의 단점을 수용하지 못하고 그 단점을 멀리하는 사랑은 그저 이기적인 욕망일 따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를 원하십니까? 상대방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 단점이 있기에 도리어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과거에 고착되어 있습니다. 모든 신경을 부정적인 데 모아서 자신과 상대방을 파괴시킵니다. 공동체의 에너지를 부정적인 데 모으게 만듭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데 에너지를 쏟는 사람이 언제나 발전합니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5. 분쟁을 막으라

공동체를 이루는 다섯째 원리는 지체들 간의 분쟁을 막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유머를 던집니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고전 12:17).

참 재미있는 말입니다.

여러분, 온 몸이 눈인 사람, 온 몸이 귀인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귀가 코를 향하여 말합니다. ‘너는 어째 이상한 냄새만 맡느냐? 나처럼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온 몸에 귀가 주렁주렁 달리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제는 눈이 귀를 향해서 말합니다. ‘듣기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보기만 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온 몸이 눈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야, 잘보인다. 앞 뒤 좌우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잘 보인다’하고 감탄을 하게 될 것입니다. 미술 작품을 잘 감상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경치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앞 뒤의 도로 교통을 잘 볼 수 있어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문제가 많습니다. 문제는 가스가 새도, 음식이 타도 냄새를 미리 맡아서 알 수가 없습니다. 배가 고파도 입이 없어서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 모습은 참 우스운데 실제로 그렇다면 굉장한 고통이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지체가 고유의 기능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전 12:25)

건강의 최대의 적은 지체들 간의 분쟁입니다. 만약 몸에서 심한 항원 항체 반응이 일어나면 우리는 즉시 죽게 됩니다. 한 장기가 몸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면 그 장기뿐만이 아니라 전체 몸의 생명이 위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몸의 분쟁을 막아야 합니다.

인간의 최고의 죄악은 분쟁입니다. 관계의 단절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인간의 최초의 죄악이 왜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이 되었을까요? 선과 악을 아는 것이 근본적인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을 아는 것은 분열된 마음입니다. 사고의 이원론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사건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분열시켰습니다. 선악과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선악과 열매는 자신과 세계를 선과 악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나는 선하고 너는 악하다.’ 선악과의 결과로 죽음이 세상에 왔습니다. 협력과 조화는 건강으로 이끌고 분리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6. 하나됨을 지키라.

공동체의 여섯째 원리는 하나됨을 지키는 것입니다.

모든 지체는 하나 됨으로써 생명을 유지 할 수 있습니다.

어느날 심장이 혼자 생각을 하는데 굉장히 억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장 자기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생긴 이래로 단 한번도 쉬지 못했는데 다른 기관들은 휴식을 하는 것이 많습니다. 이빨도 밥을 씹을 때만 움직이고, 위도 가끔 쉬고 장도 가끔 쉬는데 심장만 쉬지 않고 죽어야 하고 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뭐 맛있는 음식을 주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심장이 대접이 시원찮다면서 몸 밖으로 나와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심장만 죽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이 함께 죽는 것입니다.

지체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지체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각 지체는 유기체적인 통일성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하).

포도나무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을 때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공동체 안에 붙어 있을 때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될 것이 하나 됨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됨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 막혔던 담이 허물어져서 하나되게 하시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됨은 구원입니다. 하나됨은 생명입니다.



7. 성령을 받으라

공동체를 이루는 마지막 원리는 한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는 길은 영으로 하나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영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성령을 받아 한 신앙고백을 드립니다. 그래서 한 몸을 이룹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하).

군대에서 한 지휘관의 명령으로 온 부대가 하나가 되듯이,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마음에서만 하나되는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종이 주인에게 절대 순종하듯이 순종해야 합니다.

두번째,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래서 한 몸을 이룹니다.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았으므로 한 몸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3).

세번째,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성찬식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몸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고전 10:16).

성찬식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한 몸에 참여함으로 하나가 되는 은혜입니다.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합니다. 우리를 향한 삶과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여러분, 우리는 모두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옆에 있는 사람을 위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로 만드시는 영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지체중 한 사람이 고통을 받으면 성령님께서는 모든 지체가 함께 기도하게 만드십니다. 중보기도를 하게 하시고, 고통을 함께 나누게 하십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나라가 고통 받을 때 나라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지도자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지체가 고통을 당할 때 차라리 자신이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저 사람을 사랑하게 해 주세요. 저 지도자를 변화시켜 주세요. 저 사람의 무거운 짐을 차라리 내가 지게 해 주세요. 저 사람 마음에 완악한 것이 있으면 완악한 것이 부드러운 마음을 품게 해 주세요. 저 사람 마음의 상처를 싸메어 주세요.”

누가 우리의 마음속에 그런 것을 주는 것입니까?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교회를 연결하셨습니다. 성령님은 교회가 이 세상에 고통 받는 사람을 위해서 어떻게 주의 사랑을 드러내야 할 것인가를 마음속에 품게 합니다. 성령님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의 모습을 갖게 만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갖고 있는 차별성을 없애 주고 함께 다양한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한 분 한 분이 아주 다른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개성을 좋아하십니다. 다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잊으시면 안됩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는 법, 남을 위로해 주는 법, 남을 격려해 주는 법, 남을 위해서 기도하는 법, 남보다 더 낮아져서 섬기는 법, 사랑의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을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각각 다른 우리들이 전혀 일치하는 것이 없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사랑은 가꾸어야 합니다. 지체에 대한 사랑도 가꾸어야 합니다. 공동체에 사랑도 가꾸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사랑도 가꾸어야 합니다. 공동체의 사랑을 바꾸어 나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출처/박병욱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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