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이지 않는 삶 (시55:16-23 요8:32-36)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은 진리를 가져오신 분이요, 진리를 말씀하고 진리에 대하여 증거 하는 분이며, 그 안에 진리가 충만하며, 그 자신이 진리입니다. 그리고 성령 또한 진리의 영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한다고 하셨습니다(요16:13). 결국 진리란 성삼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이 이루시는 완전한 구원 곧 하느님의 나라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선포되었고,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므로 놀라운 은총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진리가 주는 자유의 의미를 알고자 먼저 자유하기 이전인 죄의 종 되었을 때의 상황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 살피고, 다음으로 진리를 알아야 자유하게 되는데 진리를 아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죄의 종'의 의미
오늘 요한복음 본문과 같은 말씀이 갈라디아서 5장1절에도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진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디로부터 자유하게 하셨다는 것일까요? 그 답은 죄와 죽음의 지배로부터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자유함을 받기 전에는 죄와 사망의 종으로 그 멍에를 무겁게 메었습니다. 이 죄와 사망의 멍에는 얼마나 무거운 것일까요?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느님께서 총동원되어 벗기지 않으면 안될 만큼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는 설교를 자주 들으면서 그저 무심히 지나치기 일수입니다. 구체적으로 죄와 죽음의 굴레가 우리를 억압할 때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것들로부터 자유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멍에를 메다보면 그 멍에가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쇼생크의 탈출"이란 영화에 보면, 오랫동안 수감되어 있던 한 수인이 늘그막에 풀려나 자유인이 되지만, 결국 그 사회가 너무 낯설어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습니다. 이 늙은 수인에게는 자유로운 사회보다는 감옥생활이 더 익숙하였기에 결국 주어진 자유가 낯설고 두려워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죄의 멍에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지만 나면서부터 죽기까지 그 멍에를 메다보면 그 멍에는 숙명이 되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처럼 느낍니다.
문제는 죄의 멍에를 메고 죄의 종이 되는 것이 단순히 나의 자유만을 빼앗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하수인(下手人)이 되어 그 죄악을 확대 재생산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당시에 유대의 왕이었던 헤롯은 아주 심한 열등감과 편집적 강박증에 시달리면서 죄의 종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왕권에 대한 강박증 때문에 자기 부인과 아들까지도 죽였고, 메시아가 될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문에 베들레헴에 사는 두 살 이하 아기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끔찍한 짓을 서슴지 않고 행하였습니다. 자기가 행한 이런 끔찍한 행위 때문에 인기 없는 왕임을 스스로 잘 알았지만 그 강박증을 벗어버릴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죽었을 때 애곡할 사람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자기가 죽을 무렵 예루살렘의 유명 인사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애곡(哀哭) 소리로 자기의 장례를 치르려 했던 아주 심한 강박증 환자였습니다.
6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는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나치즘(민족사회주의)이란 이념의 포로가 된 사람입니다. 나치즘의 지지자들은 아리안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인종들을 모두 굴복시켜 자기들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겠다고 하여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히틀러는 유대인을 일종의 우주의 악으로 규정하고 6백만 명에 가까운 유대인들을 학살하였습니다.
저도 동구여행을 하면서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보았습니다. 편안한 관광객으로 박물관이 된 수용소를 둘러보았습니다만 지금 깨끗하게 정돈된 박물관을 보는 것조차 역겨울 정도였습니다. (사진 몇 장을 보여준다) 최근에 성공회대 연구교수로 국내에 머물고 있는 재일 조선인 2세 서경식 교수가 저술한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읽었는데 그 책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이렇게까지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통념, '인간이라면 여기까지 추락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 그것들이 가차없이 배반된 장소가 아우슈비츠였다. 거기는 '인간'이라는 척도가 철저하게 파괴된 역유토피아였다.
쁘리모 레비는 이탈리아계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살아 남아서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증언문학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을 쓴 사람입니다. '아리안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터무니없는 이념의 종이 된 히틀러와 나치독일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인간을 비인간으로 떨어뜨린 악마의 하수인들이었습니다.
인간을 비인간으로 떨어뜨린 역사의 사례는 너무 많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아프리카인들을 잡아 노예로 팔아먹으며 저지른 악행들, 아메리카 신대륙에 상륙한 백인들이 저지른 원주민 학살, 일본이 한국과 대만과 중국 등 아시아 각지에서 저지른 비인간적인 행위들, 그리고 전두환 군부가 저지른 광주학살사건 등도 죄의 종이 된 인간이 얼마나 악랄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으로 죽은 민간인 사망자 수가 최대 4만6318명, 최소 4만1650명으로 집계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군인과 다국적 군의 전사자도 5,575명이나 됩니다. 미국이 이 전쟁을 시작한 원인인 9·11 테러 때 죽은 3030명을 훨씬 넘어서고 있습니다. 테러를 응징하기 위해서 일으킨 전쟁인데 역설적이게도 테러는 더 늘어나 2005년 한 해 동안 세계 각지에서 1만1111건의 테러가 발생하였고, 그 사상자 수는 4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런 전쟁이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수행된다는 데 있습니다. 아니 양심의 가책은커녕 그 전쟁의 정당성을 강변하면서 계속 전쟁비용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2007년도 국방예산은 약 4400억 달러이지만 기타 군사비용을 합하면 약 6000억 달러라고 합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564조원으로 금년 우리나라 예산의 3.5배에 해당합니다. 이런 막대한 비용을 사람을 죽이는 전쟁에 쏟아 부으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청교도의 미국은 아직도 죄의 멍에를 무겁게 멘 나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이라크 전쟁에 파병하였기에 물론 이 전쟁의 사상자에 대해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죄의 멍에를 벗지 못하고 그 종노릇하기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율법주의에 얽매어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빌라도 총독에게 요구한 사건은 참으로 죄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참혹하고 끔직한 일인가를 상기시켜 줍니다.
최근에 개정된 사학법을 다시 개정하라고 삭발 투쟁에 나선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보면서 염려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정된 사학법에 약간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삭발까지 하면서 극단적인 투쟁을 할만한 것은 아닙니다. 순교를 각오하고 투쟁하는 일은 오히려 군사독재정권 시절 했어야 할 일인데, 그 때는 잠잠하고 있었던 교회들이 지금 나서서 투쟁하는 것은 다른 이익집단들의 모습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결국 단순히 학원선교의 자유가 심각하게 위협받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 정권에 대한 투쟁처럼 일반인들 눈에 비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10년 간 개신교인의 숫자가 줄었는데 이번 삭발투쟁으로 사회의 더욱 차가운 눈총을 받게 되므로 오히려 선교에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결국 이번 사학법 재개정을 둘러싼 교회들의 투쟁은 교회성장주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기독교학교들이 100년 동안 아무런 변화 없이 고수해 온 선교방법을 계속 고수하기보다는 보다 건강한 인재를 양성하는데 주력하는 학교로 향상시키는 노력을 기울였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계속 이런 식의 안이한 교회성장주의를 따르면 따를수록 오히려 교회성장은 둔화되고, 이 사회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이 교회자체의 성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역사 속에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는데 있다는 신학을 외면한 채 교회성장주의에 편집적 강박증을 보이는 한국교회에 대해서 성령께서도 외면하실 것입니다.
금년이,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여서 다시 한 번 한국교회의 대부흥운동을 일으키자고 여러 가지 행사를 계획하고 있지만, 그 옛날 평양 대부흥운동이 바로 선교사들의 회개로부터 비롯된 회개운동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가 5·16 군사쿠데타 이후 이어진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예언자적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잘못에 대한 회개 없이 무슨 부흥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최근에 인혁당사건으로 사형에 처하여진 고 도예종씨를 비롯한 7명에 대한 재심 결과 무죄로 판결이 났는데, 사학법 재개정에 목멘 우리 교단이나 한기총에서는 뒤늦게라도 올바른 판결을 잘 내렸다는 그 흔한 성명서 하나 내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교회성장 강박증에서 자유하지 않는 한 역성장(逆成長)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체적인 사례를 통하여 '죄의 종 됨'의 의미를 살필 때 그것이 얼마나 교묘하고도 무서운 악마의 계략인지를 알게 됩니다. 죄의 종이 된 상태에서 풀려나지 않는 한 인간은 비인간화의 길을 면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형상을 향해 자라는 대신 일그러진 인간, 악만을 계속 생산하는 인간, 그래서 마땅히 저주받아 없어져야 할 악마의 꼴을 닮은 인간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비인간화'라고 표현합니다.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런 죄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죄의 노예가 되어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악을 생산하던 자리에서 벗어나 처음 창조의 목적대로 하느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참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됨을 뜻합니다.
진리를 알아야
다음으로 살피고자 하는 것은 "진리를 알찌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진리를 배우고 아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따라 완전히 몸에 배이도록 익혀서 진리 안에 즉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각과 그의 사랑과 그의 능력을 함께 공유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우리 생활에 두 가지 변화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낮아짐이요, 하나는 높아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낮아지심 같이 우리도 낮아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내 주장을 내세워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히 죽기까지 낮아지지 아니하고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죽지 아니하고는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 사실 때에 우리는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나의 편견과 고집과 망상이 꺾이지 아니하고는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높아져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그 높은 안목을 우리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가 가지신 그 큰사랑을 우리도 따라야 하겠습니다. 그가 가지신 넓은 마음을 우리도 지녀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자유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시는 역사의 미래를 우리가 보게 될 때, 오늘의 역사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높아지므로 우리도 그 처음과 나중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고, 자기를 죽이는 무리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예수님의 그 큰사랑을 우리가 배우게 될 때, 우리도 진정 모든 인류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모든 증오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큰 능력을 우리가 알게 될 때, 우리는 모든 두려움에서 자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누리신 부활의 영광에 우리가 참여할 때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자유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참인간'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진리를 올바로 알게 되면 우리는 '비인간'에서 '참인간'으로 변화되어 자라게 됩니다. 우리가 '비인간'일 때에는 온갖 악을 확대 재생산하는 존재였지만, '참인간'으로 변화될 때에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즉 사랑·희락·화평·오래 참음·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를 아름답게 주렁주렁 맺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비인간'일 때는 우리가 잘못된 이념이나 사상, 혹은 신념이나 교리, 제도와 체제 그리고 재물과 권력과 명예에 매이게 되고 거기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참인간'으로 자유함을 누릴 때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됩니다. '참인간'의 중요한 속성은 바로 과거에 꽉 붙잡았던 것을 '내려놓음'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잡고 놓지 않으려는 것들을 과감하게 '내려놓음'이 바로 자유의 특성입니다. 아브라함이 백 살에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내려놓은 것처럼, 우리 신앙생활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까지도 내려놓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매이지 않은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최근 인기 있는 기독교서적 하나가 있는데 "내려놓음"이란 책입니다. 몽골에 파송된 이용규 선교사가 쓴 책입니다. 서울대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 유학하여 역사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자 바로 가족을 동반하고 몽골선교사로 나간 분입니다. 울란바토르에 설립한 '이레교회'를 담임목회하면서 기독교학교인 몽골국제대학교의 교수로 '몽골제국사'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주로 자기 간증을 담아서 담담하게 쓴 책인데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책표지 안쪽에 소개하는 글을 잠깐 인용하겠습니다.
세상 진리는 우리가 내려놓으면 모두 빼앗긴다고 유혹하지만, 하늘 진리는 우리가 내려놓을 때 온전한 우리 것이 된다고 약속한다. 우리 인생에는 '분명한 내 것'처럼 보이지만 남김없이 내려놓아야 할 것이 있다. 힘겹게 쌓아올린 명예, 꼭 움켜쥔 재물, 미래의 불안과 생명의 위험까지 하느님 앞에 온전히 내려놓을 때 진정한 쉼과 참된 평안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진정한 쉼과 참된 평안'을 체험할 뿐 아니라 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맛보게 됩니다. 영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땅에서 내려놓음으로 잃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행복하고 아름답고 귀한 하늘의 선물을 받게 됩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셨던 자유를 얻게 됩니다. 하느님이 의도하셨던 대로 '참인간'으로 완성이 되는 놀라운 은총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한 하나되심 속에 우리가 영접되어, 하느님의 그 영원하게 빛나는 생명을 나누어 받아 사랑이 넘치는 생명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이 빛나는 소망이 아직도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의 삶 안에 자리 잡으면서 우리는 이 땅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에 출석하면서 예수 믿었다고 다 무조건 자유함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알 때 비로소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교회가 행하는 것은 모두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아시는 대로 이단도 많고, 이단이 아니어도 잘못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들로 교회 강단들이 넘쳐나고, 그릇된 신학과 잘못된 신앙관습에 얽매어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는 교회가 수두룩합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만 보고 잘못된 판단을 하는 수많은 엉터리 교인들 때문에 한국교회가 추락하고 있습니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우리가 진리로 알고 잡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하느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본받아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높아지심 안에서 그가 보여주시는 역사의 지평너머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자유를 맛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열린 눈과 마음으로 이 역사를 바로 보면서 진리의 길로 사람들을 이끄는 예언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진리를 알게 하시므로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빛난 생명 속으로 이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 땅의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진정 자유로운 삶을 누리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유경재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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