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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피를 뿌리는 사람 (시편 126:1-6 딤후 4:1-8)

by 【고동엽】 2022. 9. 7.

 말씀과 피를 뿌리는 사람  (시편 126:1-6 딤후 4:1-8)  

토마스의 순교

1866년 9월 5일 (140년 전) 평양 대동강에서는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수천 명의 군중들이 대동강에서 벌어지는 작은 전쟁을 관심있게 보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제너럴셔먼호 사건입니다.

제너럴 셔먼호는 서해안에서 대동강을 거슬러올라 가다가 평양 인근에 정박했습니다. 당시의 쇄국 정책을 따르는 조선 관리의 저지와 경고를 무시한 채 무역을 요구하면서 대포를 쏘는 등 난폭한 행동을 하다가 좌초하게 됩니다. 평양 감사 박규수는 작은 배를 여러척 묶어서 그 위에 잡목을 잔뜩 싣고, 유황까지 뿌려서 불을 붙혀서 떠 내려보냅니다. 좌초하여서 꼼짝 못하는 배에 불이 옮겨 붙습니다.

제너럴셔먼 호가 불길에 휩싸였을 때, 선원들은 불에 타 죽기도 하고, 배에서 뛰어내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헤엄쳐 나온 선원들은 결국 강변에 정렬해 있던 군인들의 곤봉에 맞아 죽거나 창에 찔려죽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목사는 혼자 배 안에 남아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 다음, 그는 아주 침착한 태도로 큰 상자를 갑판 위로 끌어 올렸습니다. 그 속에는 한국인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가지고 온 성경책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책을 한권 한권 강 언덕을 향하여 힘껏 내던졌습니다. 그는 던지고 또 던졌습니다.

그는 조선인에게는 낯설기만 한 한 단어를 거듭해서 외쳤습니다. 야소! 야소! 야소! (예수! 예수! 예수!)

이것은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강가에 서서 사태를 지켜본 수천 명의 평양 시민들의 목격담인 것입니다.

이제 토마스 목사의 옷에도 불이 붙고 그의 머리칼도 타기 시작하자 견디다 못한 토마스 목사는 마지막으로 남은 성경 한권을 가슴에 품고 배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관원들에 의해서 거칠게 물가로 끌려나온 그는 대동강 백사장에 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기도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래투성이의 흠뻑 젖은 머리를 든 청년은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슴을 더듬어 품안에 있던 성경을 꺼내어 바로 앞에 선 병사에게 건네었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서양인의 행동에 그 병사는 잠시 주춤했으나 이내 그의 칼은 무릎을 꿇고 있어도 껑충한 청년의 가슴을 꿰뚫고 말았습니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그는 이렇게 해서 자신의 스물 일곱번째 생일을 이틀 앞둔 날(1866년 9월 5일) 대동강 쑥섬 모래사장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토마스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들은 그가 이 땅을 전혀 밟아 보지 못하고 죽은 선교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제국주의의 앞잡이이지 순교자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에게 어떻게 해서라고 강대국의 힘을 빌려서라도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당시 서양 선교사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고 그도 역시 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토머스 목사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토머스는 1839년 웨일스에서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14살에 명문 옥스포드 대학교 지저스 칼리지 최우수 학생이 되어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나이가 어려서 입학이 보류된 수재였습니다.

토머스 선교사는 고등학교를 마친 후 잠시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8세에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 입학하여 2년 만에 학사 학위를 마쳤습니다.

그는 주일학교 교사로서도 영향력을 발휘하여 성인이 70명 출석하는 교회에서 주일학교 학생 200명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1세(1860) 때 신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이미 담임 목사 청빙을 받은 명설교자였습니다.

그는 어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모국어 영어와 웨일즈어 외에 프랑스어. 독일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러시아를 말하고 쓸 줄 알고, 고전어인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북경어와 상하이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선어를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자 지체하지 않고 런던선교회 회원이 되어 중국선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그해 캐롤라인 고드페리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시무하는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신혼의 꿈도 뒤로 한 채 결혼한지 2달도 채 안되어 선교사로서 중국행 배를 타게 됩니다.

중국에 와서 바쁜 일정을 보내는 동안 임신한 아내는 열악한 중국 환경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토마스는 사랑하는 아내가 출산을 하고 몸조리를 잘 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는 상하이보다 더 위생적이고 날씨가 좋은 한커우에서 아내가 출산할 수 있도록 준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집을 구하러 간 사이에 아내가 갑자기 유산을 하고 그 후유증으로 죽어버렸습니다.

결혼 10개월 신혼의 꿈에 아직도 젖어있어야 할 한 젊은이에게 온 천지가 무너지는 소식이었습니다.

신혼의 꿈 대신 선교의 꿈을 꾸며, 신혼 여행 대신 선교 여행을 떠났던 젊은이들의 꿈을 죽음이 파괴한 것입니다. 이국 땅에서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와 태의 아이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청년의 마음이 어떻했겠습니까? 임종의 자리에도 함께하지 못했던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태 속의 아이의 죽음을 혼자서 담당하며 자신의 죽음을 대면해야 했던 한 여인의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요?

그의 아내 캐롤라인은 웨일즈 최고 부자 집 딸로서 과거 영주가 쓰던 궁전 같은 집을 저택으로 사용하고 있는 집이었습니다. 마치 동화 속의 공주처럼 살고 있는 소녀를 주일학교에서 10년 이상을 바라보며 연모하다가 결혼을 했던 것입니다.

영국에만 있었어도 하녀가 딸린 집에서 걱정없이 살 수 있었던 아내를 먼 이국 땅에서 아무도 돌보아 주는 사람 없이, 손 한번 잡아주지 못하고, 작별인사 한번 못하고, 쓸쓸하게 저 세상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선교지에서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실의와 충격, 거기에다가 선임 선교사의 독단을 견디지 못한 토머스 선교사는 런던선교회에 사표를 제출하고 청나라 해상세관의 통역관으로 일하게 됩니다.

토머스는 이 무렵 한국 천주교인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 선교의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던 아내를 잃고 방황하던 그에게 조선을 향한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목숨을 바쳐 아내를 사랑하듯이, 못다한 사랑을 다시 불태우듯이 조선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순교하기 일년 전(1865년)에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윌리엄슨 선교사로부터 물려받은 상당량의 한문 성경을 가지고 조선 땅 황해도 자라리 해안에 도착해서 2개월반 동안 한문 성경을 나누어주는 선교활동을 벌리면서 한국어를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한양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했으나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북경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그는 북경에서 한순간도 한국 선교에의 꿈을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토마스목사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파견원 자격으로 조선을 향해 떠나면서 글을 썼습니다.

"나는 많은 성서 책들을 가지고 떠납니다. 나는 조선 사람들이 반드시 나를 반겨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떠납니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남겨 놓은 마지막 글입니다. 그는 오고, 그리고 다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그의 아내와 함께 아시아의 한 모퉁이에 한 줌의 흙으로 사라져간 것입니다.

누가 그의 죽음을 어리석은 죽음이라고 평가절하할 수 있습니까? 그의 죽음은 조선에 대한 집요한 사랑이었습니다.

토마스의 피를 받은 대동강이여 슬피 울지어다.

아들을 가진 아버지들이여 이 한 젊은이의 죽음을 애곡할지어다.

세상의 어머니들이여, 이 젊은 아들의 죽음을 통곡할지어다.

한국의 젊은이들이여, 그의 이루지 못한 꿈과 비전을 위하여 함께 울지어다.

그가 27살만 아니었어도, 그가 사랑하는 아내를 이국 땅에서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처량한 젊은이만 아니었어도,

그가 21세에 담임 목사 청빙을 받은 유망한 설교자가 아니었어도,

10개 국어 이상을 능통하게 하는 재능과 노력만 없었어도,

14살에 명문 옥스포드 최고 장학생으로 입학 자격을 받은 영재만 아니었더라도,

그가 은둔의 나라 조선을 이토록 사랑하지만 않았어도,

우리 마음이 이토록 슬프지는 않았을 것을…

그는 조선을 사랑해서 그의 피를 조선에서 흘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조선 사람의 칼에 죽은 것입니다.



토마스 기념패

지금 그가 어릴 때 다니던 하노버 교회당 안에는 조그만 순교 기념패(記念牌)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이렇습니다.

“그는 이 교회 로버트와 매리 로이드 토마스 목사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조선에 두 번째 선교하러 갔다가 1866년, 그 곳 백성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나이 스물 일곱이었다.”

예수님은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에 왔으나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하는 배반의 죽음입니다.

조선을 사랑하여 온 젊은이의 피를 흘렸던 잔인한 민족이여, 하나님 앞에 그 피 값을 치를 지어다. 그 피 값을 우리의 피 값으로 치루어야 할 것입니다. 순교의 피를 흘린 민족은 스스로 순교하며 그 값을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순교의 피는 단 한 방울도 그냥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순교의 피는 교회의 터전이 됩니다.



순교의 피의 열매

초대교부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우연이 아니고, 실수가 아니고, 실패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삼으신 희생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심으신 한 알의 밀알이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얼마 후 토마스가 전해 준 성경을 읽고 기독교인이 되는 사람이 하나 둘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평양 신학교 1회 졸업생으로, 안동교회 제 1대 목사 한석진 목사는 오문환 장로[당시 토마스 전기 작가]에게 다음과 같은 펀지를 보냈습니다.

“제가 평양에 온 것은…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지 26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이 때 성경을 팔며 전도하러 다니면서 소문을 들었는데, 토마스목사의 순교를 목격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제너럴셔먼 호가 불에 탈 때 바깥으로 성경을 던지면서 ‘야소!’ 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제가 전도하는 내용과 팔러 다니는 책자가 당시에 그 서양인이 배에서 던진 것과 같은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또한 당시 듣고 본 것들을 제 전도 활동을 통해 지금에서야 깨닫게 되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토마스가 전한 성경은 단순히 종이로 묶여진 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친히 쓰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도장을 찍으신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능력을 전하는 가장 유용한 도구는 순교자의 피인 것입니다. 토마스의 피 한 방울 한 방울은 그가 전달한 성경 속에 배어들어갔습니다. 성경이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순교의 피가 묻은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순교의 피 한 방울 한 방울은 한 생명 한 생명의 거듭남의 능력으로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형장에서 칼을 들어 토마스 목사의 목을 친 박춘권은 30년 후 마펫(Samuel A. Moffet)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회개하고 신앙 생활을 시작해서 안주 교회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영수라는 직분은 오늘날 장로와 전도사를 합한 직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조카 이영태도 예수를 믿어 오늘 우리가 읽는 성경의 3분의 2를 번역하게 됩니다.

제너럴셔먼 호 당시 11세였던 최치량이란 사람은 구경하러 갔다가 토마스 선교사가 뿌린 성경 3권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제너럴셔먼 호에서 받은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체포하라는 관령이 내려왔습니다. 그 책을 소지하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태워버리든지 강에 던지든지 하였으나 영문주사로 있던 박영식(朴永植)은 사람들이 버린 성경을 수집하여 평양 대동문 안에 있던 자기 집의 벽지로 사용하였습니다.

당시는 요즘처럼 책을 접착제를 붙여서 제본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묶어서 제본했으므로 실만 풀면 아주 좋은 벽지가 나오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번 상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후 좌우 상하 어디를 둘러 보아도 말씀 밖에 보이지 않는 집을 한번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집이야 말로 인류 최초의 ‘말씀의 집’이 아니겠습니까? 그 집에서 살면 하루 종일 성경을 읽게 될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자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 후에 앞서 언급했던 최치량이 박영식의 그 집을 사서 여관으로 경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여관에 묵게 되면 사면 벽과 천장과 바닥에 가득 도배된 하나님의 말씀을 밤새도록 읽었을 것입니다. 그 집 주인만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이 여관을 이용하는 모든 사람이 읽었던 것입니다. 우리 양반들이 글에 대한 호기심이 얼마나 많습니까? 호기심에 한번씩만 읽어보아도 말씀은 능력 가운데 역사하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처음 평양을 방문한 마펫(Samuel A. Moffet)즉 마포삼열 선교사와 한석진 목사가 이 여관에 투숙하게 됩니다.

마포삼열 목사가 대동강변의 어떤 마을을 지나다가 주막집에 앉아 쉬는데, 그 벽지가 수상하였습니다. 자세하게 들여다 보니 한문으로 된 성서였습니다.

마펫은 벌떡 일어나 다른 벽지를 살 돈을 흠뻑 줄 터이니 그 벽지를 칼로 도려내어 팔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주인이 그 제안을 마다할 까닭이 없었습니다. 마펫은 그것을 가슴에 안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이들의 전도로 여관주인 최치량과 박영식은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의 집은 훗날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이름이 널다리골 교회. 그런데 이 교회가 나중에 장대현 교회가 됩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의 불씨가 되었던 바로 그 교회 장대현 교회말입니다. 토마스의 순교의 피가 이렇게 장대현 교회, 평양대부흥, 전국의 부흥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평양은 그 뒤에 한국의 예루살렘이 되었습니다. 토마스 목사의 순교의 피가 흐른 대동강 물을 마시는 많은 사람들이 그후 오래지 아니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인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복음이 우리의 행복한 인생 설계를 위한 가르침입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복음 때문에 도리어 불운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바울, 베드로, 요한, 그리고 토마스 선교사는 죽어야 했습니다.

복음이 윤택한 인생을 위한 것입니까? 생의 의미를 줍니까? 복음이 우리를 부유하게 살게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우리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고, 위로를 받으며, 불운을 딛고 일어서게 됩니까?

복음은 우리에게 고상한 삶의 방식을 선물합니까? 우리로 하여금 교양있는 생활, 도덕적인 삶으로 인도합니까?

그렇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게 해주며, 고상하고 교양있는 삶을 선물로 주며, 새로운 삶의 양식을 줍니다. 때로는 부유하게도 해 줍니다.



생명의 능력

그러나 복음과 함께 고난이 올 때 이 고난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복음이 왜 우리를 고난으로 몰아 넣고, 왜 우리를 죽음으로 몹니까?

복음의 더 중요한 근본적인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근본적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은 생명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생명의 껍질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를 우리에게 줍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신 생명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이 얼마나 부차적인 문제에 고착되어 있습니까? 마치 죽고 사는 문제와 전혀 관계 없이 수천 만년 살 사람들처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시간과 관심과 정열을 쏟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은 때때로 건강한 몸을 원하지 않고 병든 몸을 가릴 수 있는 좋은 옷을 원합니다. 사람들은 건강한 피부를 원하지 않고 병든 피부를 가릴 수 있는 좋은 화장품을 원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생명의 껍질이 아니라, 생명 자체를 원해야 합니다. 복음은 존재의 의미를 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 자체를 우리에게 선물로 줍니다.

예수의 피로 말미암는 생명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의 피를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 순교입니다. 사람들이 이 피의 복음을 알 때 말씀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말씀이 생명의 문제, 삶 자체의 문제, 살고 죽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다시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

여기서 전제란 제사의 마지막에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것입니다. 제사의 마지막 순서입니다. 그의 충성스런 생애가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끝까지 충성한 자의 고백입니다.

바울이 생명을 바친 ‘선한 싸움’과 ‘달려갈 길’이 무엇입니까?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것, 생명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근본적인 것에 목숨을 걸고, 죽을 때까지, 생명을 다해 바칠 꿈이 있어야 합니다. 피를 쏟을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부흥을 꿈꾸십시오. 진정한 부흥은 생명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 식의 부흥을 꿈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과거보다 더 큰 부흥을 꿈꾸면서, 좀 흥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감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산 사람입니다.

우리는 병든 사람이 죽으면 어떤 수의를 입힐까로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병자를 어떻게 살릴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살려야 할 대상, 부흥시켜야 할 그 대상이 바로 나 자신입니다. 바로 우리 교회입니다. 바로 우리 민족입니다. 내가 어떻게 복음의 생명력을 회복할까?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하면 부흥할까? 이기적이고 분열된 이 나라에 어떻게 하면 생명을 불어넣을까? 사람들의 황폐하고 마르고 공격적인 마음을 어떻게 온전한 인간의 마음으로 만들까?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고민을 하되 문제점을 찾아내고, 희생양을 만들어 내는 부정적인 사고, 죽음의 질서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위대한 일에 밑거름이 될까? 내가 내 시간을 어떻게 헌신하면 될까? 내가 내 지식을 어떻게 사용하면 될까? 내 재물을 어떻게 이용하면 될까? 내가 내 시신을 기증하면 의학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내 장기를 기증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건지지 않을까? 내 재산을 헌납해서 이런 사업을 하도록 하면 어떨까? 하는 방향으로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세상의 환경은 나를 절망시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생명력이 있어야 합니다. 생명력은 환경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죽음을 이기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있는 사람은 도전할 수 있습니다. 생명력이 있는 사람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생명력이 있는 사람은 순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순교의 피를 받은 신앙인의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생명력 넘치는 약동함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환경도 이기는 거룩한 야성이 있어야 합니다. 온실 속에서 환경 마련되어야 피는 꽃이 아니라, 비가오고 눈이 내려도, 얼음을 뚫고라도 싹을 튀워서 꽃을 피우는 생명의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반드시 부흥을 이루리라는 거룩한 고집이 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오기가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이기겠다는 거룩한 승부 근성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부흥하리라. 나는 부흥하고야 말리라.

우리 안동 교회가 도시 한 가운데 있어서 부흥이 안됩니까? 아닙니다. 중심에 있으므로 한번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면 끌 자가 없습니다.

안동교회 부흥하리라. 안동교회 부흥시키고야 말리라.

한국교회 어떻습니까? 온 교회의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 진정한 헌신을 통해서 부흥하고야 말것입니다.

한국교회 부흥하리라. 한국교회 부흥시키고야 말리라.

물질적 가치에 흠뻑 젖어서 혼란 가운데 있는 이 민족을 복음으로 부흥시켜야 합니다.

우리 민족 부흥하리라. 우리 민족 부흥시키고 말리라.

복음의 생명력으로 충만한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박병욱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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