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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의 빛이라 (요한복음 8:12-30)

by 【고동엽】 2022. 9. 7.

나는 세상의 빛이라   (요한복음 8:12-30)


미국의 정치가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자기가 사는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선한 일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고 좋은 등을 하나 준비해서 집 앞에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집안에 두어야 할 등불을 집 밖에 두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뭔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집 밖에 등불을 두니까 밤에 지나가는 사람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멀리서도 방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좋게 생각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 밖에 등불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가 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로등의 시작이었답니다. 만약 밤길을 걸을 때 가로등이 없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아마 옛날에 손에 등을 들고 다녔듯이 우리도 손에 손전등을 들고 다녀야 할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한 시골로 여름수련회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야외활동을 마치고 시골교회로 돌아오는데 그만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시골에 가로등도 없고 마침 달도 전혀 없는 날이라 앞을 전혀 분간할 수 없이 깜깜했습니다. 그래서 앞사람의 허리춤을 잡고 논길을 걸어가는데, 앞 사람이 발을 헛디뎌 기우뚱하면서 논바닥에 넘어졌습니다. 그러니 허리춤을 붙잡고 따라오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나중에 교회에 돌아와서 보니까 저는 옷뿐만 아니라 얼굴과 머리도 다 진흙투성이였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는 빛이 필요합니다. 빛이 있어야 실족하지 않습니다. 빛은 어두움을 밝혀 주어 어디가 함정이고, 어디에 오물이 있고, 어디로 가야 안전한가를 보여줍니다. 빛은 갈 길을 인도합니다. 몇 년전 캄보디아에 가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가는 데 유난이 짙은 안개가 끼었습니다. 비행기가 안전하게 뜨고 내릴까 생각했는데, 공항 활주로의 유도등 빛이 강렬하게 비추는 것을 보며 안심했었습니다. 저 정도의 빛이라면 하늘에서도 충분히 보이겠다! 빛은 또한 경고의 목적으로 사용됩니다. 포로수용소를 환하게 비추는 불빛은 탈출하려는 마음에 경고를 줍니다. 빛은 또한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줍니다. 어두운 바다를 헤맬 때 등대의 불빛을 발견한 선장의 마음이 얼마나 기쁠까요? 야~ 빛이다! 살았다! 저 빛만 보고 가면 된다! 이처럼 빛이야 말고 생명을 주고, 평안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막절 행사 때도 빛의 축제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여인의 뜰에는 4개의 황금 촛대가 있었습니다. 초막절에는 젊은 제사장이 사다리에 올라 황금 촛대에 불을 밝혔는데, 그러면 레위인들이 음악을 연주했고 사람들은 등불 가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이 빛은 온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빛으로 밝힌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할 때 밤마다 불기둥으로 밝혀 주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사 60:1)는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과 같이, 메시야가 오셔서 이스라엘에 구원의 빛을 발하여 주실 것을 기대하는 소망도 담겨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런 상황 가운데서 주신 것입니다. 빛을 잃어 어두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참빛이 비춰지기를 갈망하며 축제의 빛은 밝혔지만, 여전히 물러가지 않는 어두움의 권세에 좌절하고 낙망할 때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어두움이 있습니까? 좌절과 낙망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이 말씀으로 어둡고 죄악된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이 비추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오늘 예수님의 첫 마디가 무엇입니까? 12절.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내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이다’가 아니라, 나는 빛이고 나는 진리라고 당당하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내가 빛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누구도 빛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빛이라고 우겨도 진짜 빛이 오면 가짜 빛은 물러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내가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요한일서 1:5절은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창조하신 것도 바로 ‘빛’입니다. 하나님은 이 빛을 통해 어두움을 물리치시고,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생명의 빛으로써 이 세상에 와서 각 사람을 비춰주시는 빛이십니다. 요한복음 1: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빛은 각 사람을 찾아가서 그 어두운 심령을 빛으로 밝혀 주시고 새로운 삶을 주시는 빛이라는 뜻입니다.
한밤 중에 방황하며 진리를 찾아나온 니고데모에게, 뜨거운 뙤약볕에 목말라하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를 찾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기 위해 끌려나온 여인에게 예수님은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빛이 되어 주셨습니까?
첫째는 진리를 가르쳐 주심으로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까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들이 무엇입니까?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심을 통해 예수님이야 말로 변화의 능력자이심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님이 광야의 놋뱀과 같이 십자가에 달림을 통해서 영생을 얻는 길을 주실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인생의 목마름은 남편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를 만날 때 해결되는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베데스다의 38년된 병자를 통해서 우리 인생은 예수님 앞에서 일어나 절망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야 할 존재인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지려는 무리들에게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심으로 죄의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용서의 은혜로 해결될 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믿어 예수님을 영접하면, 생명의 빛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생명의 말씀이며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참빛이시기 때문입니다. 거짓 빛을 따라가면 결국 거짓 빛에 물들어 어두움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내가 내 인생을 통제하고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빛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박에 빠지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나 도박에 빠질거다 이렇게 작정하고 하지 않습니다. 나는 충분히 내 자신을 컨트롤할 자신이 있다! 도박이 어떤 건지 조금만 해보고, 재미만 보고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 설 연휴에도 집에 가지 못하고 PC방, 도박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터넷 게임, 도박, 술, 음란함, 육신의 정욕... 내가 다스릴 수 없습니다. 나는 빛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 이런 문제로 고민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빠져나오고 싶은데 내 뜻대로 안되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께 가십시오! 예수님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내가 범죄했음을 시인하십시오. 진리를 받아들이십시오. 나는 빛이 아니다. 나는 예수님이 필요하다.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십시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우리도 빛 가운데로 나와야 합니다. 어두움에서 나오십시오. 빛과 교제하십시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가정에서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 안에 미움이 있고 다툼이 있으면 마치 집이 캄캄한 동굴 같습니다. 들어가기 싫습니다. 사는 게 괴롭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하나, 자꾸만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 수 있습니까? 남편의 마음을 바꿀 수 있습니까? 아내의 마음을 바꿀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먼저 빛되신 예수님을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교제하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내 인생을 다스릴 수 없음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인도를 받으십시오. 빛의 인도를 비추십시오. 여러분의 가슴 속에 어두움을 비춰보십시오. 분노가 보이십니까? 그 분노를 예수님께 맡기십시오.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두려움이 있습니까? 그 두려움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의 빛이 그 두려움을 몰아낼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생명의 빛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3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의 모습이 또 다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세 가지 근거를 들어 자신의 증거가 참 되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첫째는 14절에, 예수님만이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15절에, 예수님은 아무도 판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아버지께서 친히 증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16-18).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어두움에 깊이 빠져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아버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은 초막절 후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공개적으로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을 잡지 못했습니다. 아직 그의 때가 곧, 십자가의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20).

십자가의 사랑
이제 21절부터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어두움에 사로잡힌 우리 인생에 빛이 되어주시는 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진리를 가르쳐주심으로 빛이 되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십자가의 희생의 사랑을 통해서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인생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심을 통해 빛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는 우리 인간의 실존의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21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과연 어디로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아버지께로 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열성적으로 메시야를 찾아 헤맸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메시야를 찾는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그릇된 동기로 메시야를 찾는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을 눈 앞에서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귀로 들었지만,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국 자기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가시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는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잘못된 동기로 예수님을 찾는 자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종교적인 감정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신앙 안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사람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 가운데서 죽게 될 것이라는 심판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그들은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4:3절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믿은 제자들에게는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 죄의 문제를 해결받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죽음과 심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구세주로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 죄 가운데서 죽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아래에서 났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세상에 속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바로 하나님과 분리된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지 못합니다. 죄와 함께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 실체를 분명히 바라보아야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소망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인간의 실체를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엉뚱한 욕심과 이기심만을 쫓아다니다 결국 죄 가운데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정치나 교육은 모두 부패한 인간만을 양산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때문에 죽고, 죄 때문에 심판 받는다는 인간의 한계를, 인간의 실존을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옥이 있으면 ‘까짓 지옥 가면 되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10원보다 못한 구원, 금총보다 못한 은총이라며 하나님의 영생의 선물을 무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과 심판 앞에서는 감히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이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합니까? 24b.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반대로 말하면 “예수님이 빛이시고, 예수님이 메시야란 사실을 믿으면 죄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다”란 말씀입니다. 또한 28절에는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인자를 든다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문제, 사망의 문제, 심판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심을 통해 우리에게 죄 용서의 새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며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요 1:12). 누구든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나를 나의 죄에서 구원하여주시는 메시야란 사실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게 되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즉시 옮겨지게 될 것입니다(요 5:24).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사랑을 믿지 않으면 누구든지 자기 죄 가운데서 죽고 말 것입니다.


결  론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우리는 빛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운명이니 팔자니 하면서 허무와 슬픔과 상처를 끌어안고 살다가 그 가운데 죽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는 빛이 필요합니다. 진리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여러분의 삶 속에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진리의 빛으로 내가 죄인인 것을 밝히 보여주시고, 십자가 밑에서 죄를 고백함으로 용서받기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회개와 구원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과 더불어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그 교제는 말씀의 교제입니다. 30절에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라고 했습니다. 이제 이들의 믿음이 표적에 근거한 믿음에서 말씀에 근거한 믿음으로 한 단계 성장한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자라가야 합니다. 무엇이 믿음을 자라게 합니까? 말씀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빛, 진리의 빛과의 깊은 사귐을 통해 인생의 죄와 사망의 문제로부터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출처/김성기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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