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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평화 (누가복음 12:49-56)

by 【고동엽】 2022. 8. 29.

하늘의 평화  (누가복음 12:49-56)

북아일랜드는 현재 영국에 소속되어 있는데, 그대로 영국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개신교도들과 남 아일랜드 공화국과 합병하려는 가톨릭 교도 사이에 17년 간이나 전쟁을 해왔습니다. "아일랜드에는 개신교 교도들도 많고 가톨릭 교도들도 많으나 참 크리스챤은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예수를 믿는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 오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 벨파스트 감리교회(Belpast Methodist Church)의 캘라한 (Sydney Callaghan) 목사는 달랐습니다. 그는 개신교나 가톨릭이나 똑같이 예수를 믿는데, 어찌 서로 물고 뜯느냐며 종교적인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의 교회는 그 지역과 사회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수고하고 봉사하였습니다. 한 번은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캘라한 목사가 자기교회의 찬양대원들과 함께 가톨릭 신도들이 많이 사는 빈민가에 가서 새벽송을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 소식을 접한 경찰당국은 캄캄한 이른 새벽에 개신교도 찬양대가 가톨릭 촌에 들어가면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사고가 나지 않을까 하여, 즉각 중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캘라한 목사는 계획대로 찬양대원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새벽에 가톨릭 신자들이 많이 사는 빈민가에 들어가 캐롤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원수로 지냈던 가톨릭 교도들의 집에 하나씩 둘씩 창문이 열리기 시작하더니 대문을 열고 촛불을 밝히고 밖으로 나와 크리스마스 캐롤을 함께 부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많은 사람들도 놀라고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경찰들도 놀랐습니다.
그때 캘라한 목사는 "나와 다르다고 하여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크리스찬이 아닙니다. 함께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는 사람과 어찌 싸울 수 있습니까?" 캘라한 목사와 그 교회 찬양대원들은 이렇게 하늘의 평화를 전해 주었고, 그 이후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는 화해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참된 크리스찬이 들어가는 곳에는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이 땅에 평화를 선포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화해를 이루는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고후 5:18)
전에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줄 수도, 알 수도 없는 평안을 주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화목하게 하는 사명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이와는 정 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며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49절).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51절)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라며 찬양을 했습니다. 즉 예수께서 평화를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니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불'은 '심판의 불'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궁극적으로는 평화를 위한 것이지만(눅 2:14, 사 9: 6), 그 평화는 선과 악을 분리하는 심판을 전제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오심은 선과 악, 참과 거짓, 진리와 비진리간의 갈등과 분열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가 "화평이 아니라 검(劒)을 주기 위해 오셨다"(마 10:34)는 것은 참된 평화를 이루기 위해, 많은 고난과 수고를 감수해야 할 것임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진정한 평화의 의미를 깨닫고,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과 교회와 이 나라가 하늘의 평화를 얻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1. 하늘의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를 믿게 될 때, 우리에게 주시는 첫 번째 선물은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그런데 그 평화를 주시기 위해 우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면, 거기에는 놀랄만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의 타락이후 인간은 '죄'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에 빠진 인간 사이의 거리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낙원에서 쫓겨난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이 죽음을 극복하고, 하나님과 멀어진 관계를 회복하고자 부단히 애쓰고 노력했지만, 그 모든 것이 부질 없는 일이었습니다. 인간의 편에서는 무슨 방법을 동원해도 그 간격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저 잠깐 살다가 덧없는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보잘것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그냥 두고 보시지를 못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7-18)
이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화해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거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화해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흘리심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 위에,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가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획기적인 기원을 이룬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1944년 6월 6일에 이루어졌습니다. 그후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노르망디 상륙작전 40주년을 맞이하기 위해 오마하 해안부지에서 전사한 9,000 여 명에 대한 추모예배가 있었습니다. 이 작전에 뉴스 해설가인 워터 크롱가이드가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의 인터뷰 내용을 녹음한 것을 들려 주었습니다.
"지옥 같은 상륙작전을 명령할 때의 기분이 어떠했습니까?
"물론 수 많은 군인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려는 미국 청년들이 그 자리에 많다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런 생명을 내건 미군들 때문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대 성공을 거두어 미군이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그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그의 희생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고,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2. 하늘의 평화는 우리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실천해 나갈 때 이뤄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 자신을 내어주면서까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구원을 얻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도 그와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만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만일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요 21:15-17). 그것은 또한 우리를 향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는 같은 질문으로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치고, 내 양을 먹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강조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의 사역의 방향과 비전을 제시한 '산상수훈'의 핵심은 마 6:33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고,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사모하는 자라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주님의 양을 치고 먹이는 '주님의 일'을 감당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오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눅 12:22)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살면서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먹고 사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경제 문제를 꼽을 것입니다. "자살사망률, 경제상황과 같이 간다"(내일신문 2004. 7. 27일자)는 신문 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경제 문제는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집권자가 되더라도 경제 문제만 해결하면 아마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제 문제, 돈 문제만 해결되면 우리 삶에 평화가 찾아올까요? 얼마 전, 신문에 난 기사는 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한국경제신문> 2004. 7. 25일자에 보면, 서로 사랑하는 예비부부가 돈이 없어 아직 식을 올리지 못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복권을 사라고 돈 10,000원을 주었는데, 그 부인이 산 복권이 자그마치 34억에 당첨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제 결혼식도 올리고 행복하게 사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가지고 여자가 잠적을 해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남자는 변호사를 선임해서 소송절차를 밟고 있다고 합니다. 돈이 집안을 갈라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데 있어서 돈은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주님은 그보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필요한 '그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물질이 우리 가정과 사회에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나 힘이 진정한 평화를 주지 못합니다.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 곧 진리를 구할 때, 하늘의 평화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3. 하늘의 평화는 복음 전파로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진실과 거짓,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의 거짓을 선택합니다. 욕심과 무지와 교만이 앞을 가려 거짓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진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물론 진리를 선택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희생을 각오해야 될 때도 있습니다. 자리에 연연하고 물질적 손실을 염려하고 몸을 도사리는 사람은 한 평생 진실을 외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욕심과 무지와 교만으로 인해 거짓이 만연한 이 혼탁한 세상에 맑은 샘물이 솟아나도록 해야 하는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제가 부임한지 25년이 지났습니다. 이곳에서 저의 목회의 황금기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그 동안 하나님의 돌보심과 좋은 성도들을 만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부임할 당시 우리 교회는 어린이 중고등학생 장년 성도들 소수가 모여서 예배드리는 미약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과 성도들의 전도활동으로 이제는 3,000여명의 성도로 성장한 중대형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외적 성장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으로 우리들만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이만큼 성장시켜 주신 것은 그에 합당한 사명을 새롭게 부여해 주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사명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이 구원을 얻는 것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같이, 다른 사람도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내 생명이 귀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생명도 귀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이 지역에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큰 교회를 다닌다는 자부심보다, 이러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애타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면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하면 나의 중심이 불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처서 답답할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라고 했고, 바울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20)라고 고백했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바로 여러분이 그러한 고백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하여 보내고자 하는 일꾼 또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필요한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전도자는 자신의 말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 복음은 상대방의 영혼을 울리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은 또한 그를 위해서도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는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그도 나와같은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고 끝까지 인내하고 존중해 주어야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사람이 구원받은 후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가 받은 구원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하는 모습이야말로 감격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가 변화되어 하나님이 큰 일꾼으로 쓰임 받을 때, 주님은 우리를 칭찬하시고 고맙게 여길 것입니다. '장하다. 네가 정말 큰 일을 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저 큰 일꾼을 잃어버릴 뻔했으니, 네가 더 큰 일을 해냈다'는 말씀을 듣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의 평화를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은 세상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땅의 평화'를 갈구하고 있지만, 그것은 온전한 평화가 아니라, 약자의 평화를 빼앗고 희생을 강요하는, 거짓된 평화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평화는 분열과 다툼이 있는 곳에 화해를 전하며 상생하게 하는 '하늘의 평화'요, 참된 평화입니다. 그 평화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그리고 생명다해 복음을 전할 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여러분 모두, 세상이 알지도 못하고, 줄 수도 없는 '하늘의 평화'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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