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구원, 큰 사명 (창세기 45:1-8)
이산가족상봉 행사뉴스가 가끔씩 들립니다. 이러한 행사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반세기 이상의 긴 세월 속에서 그리워하다가 만난 것은 극적이요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그들은 부부, 부자, 모녀, 형제, 자매, 숙질 등으로 만나서 통한의 해후를 하였습니다. 그들이 만난 후에 한 사람도 지난 과거사 때문에 다투고 싸웠다는 사례는 없습니다. 그들 중에도 과거의 상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아니 문제될 수가 없었습니다.
본문에 요셉과 형들이 만납니다. 어쩌면 그들이 서로 안 만나는 것이 행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중에 만났습니다. 사실 형들이 요셉을 만나는 것은 끝나는 일입니다. 매우 두렵고 불행한 일입니다. 그들은 요셉 앞에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지나간 긴 세월이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아픔과 상처가 있는 그들이 서로 만났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이 펼쳐질 법도 한 상황이지만 요셉은 형들을 수용했습니다.
크게 깨달은 큰 구원
큰 구원, 바울이 받은 구원은 동일합니다. 똑같은 구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구원받은 자가 구원의 은혜를 깨닫는 분량에 따라서 그 구원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도 같은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크게 깨달은 자는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깨닫는 우리 편의 믿음의 분량이 큰 구원으로, 큰 은혜로 규정을 짓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요셉의 이 큰 구원, 큰 사명의 이 메시지 앞에서 우리가 들을 이 시대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큰 구원을 깨달았기 때문에 형들을 용납할 수가 있었습니다. 요셉이 깨달은 큰 구원은 형들의 그 큰 죄보다도 더 위대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큰 구원을 받은 요셉은 그 구원의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고 형들을 용서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외에는 요셉이 형들을 용납할 아무런 이유도 없고 근거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와 같은 요셉의 믿음, 요셉의 역사관, 그가 갖고 있는 이 믿음의 속성을 배우면서 우리도 이 시대에 큰 구원을 받은 자, 큰 사명을 깨달은 자로 살기를 바랍니다.
요즘 친일역사 청산이 정치권의 이슈가 되어 있습니다. 토론도 많이 합니다. 라디오를 틀어도, TV를 틀어도 그 문제가 끊임없이 나오고 여야가 정치문제로 대립합니다. 이제는 야당에서는 또 친북인사까지 조사하자고 합니다. ‘친일’ ‘친북’ 우리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 우리는 아주 불행합니다. 조금만 되돌아보면 너무 상처가 많습니다.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억울한 희생도 많았고, 남북이 대립하는 냉전시대에 희생과 억울함도 많았고, 거슬러 올라가 일제시대를 보아도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그 희생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데 50년, 100년 전의 우리 조상들이 한 일들을 이제 다 조사해서 청산해보자고 하는데 아주 걱정이 많습니다. 토론을 들어봐도 피곤하고 답답한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멀쩡하던 우리 조상 할아버지가 친일인사다, 친북인사다 밝혀질 때 오늘 우리들이 명예롭겠습니까? 아마 집사직, 장로직, 목사직도 사임해야 될 런지도 모를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처럼 큰 인물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너무도 우리는 사사로운 것들이 문제가 됩니다. 사소한 것들이 큰 문제로 대두가 됩니다. 이것은 큰 인물, 큰 가치가 우리 사회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믿는 우리가 요셉이 깨달은 이 큰 구원, 요셉이 깨달은 이 큰 사명, 이것을 붙잡지 않으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도 사사로운 육신의 문제가 큰 문제가 되고 사사로운 인간의 문제가 큰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음
요셉이 형들과의 그 갈등을 극복한 유일한 대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큰 구원을 깨닫고 보니, 하나님 앞에 큰 사명을 붙잡고 보니 형들의 그 악행은 문제가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같은 이런 큰 사람이 그립습니다. 청와대에도 국회에도 내각에도 기업에도 큰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남아공의 만델라는 큰 사람으로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입니다. 그는 큰 지위와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큰 구원과 큰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큰 구원, 이것은 조금 막연합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생각합시다. 큰 구원의 이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요셉이 이런 말을 합니다. 본문에서 세 번이나 거듭거듭 하는 말 중에 8절에 보면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이런 말을 합니다. 요셉이 애굽에 온 것은 형들이 팔았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애굽으로 가는 장사꾼들에게 동생 요셉을 팔았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온 것은 형들이 노예로 팔았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라고 말합니다. 형들이 팔아서 온 것은 분명하지만 요셉은 그것을 그렇게 보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당신들 앞서 보냈다는 이 말을 세 번이나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앞서 보냈다.” 이것이 성경사상 가운데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우리의 신학을 지탱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지금 하나님 손에 붙잡혀서 쓰임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손에 붙잡혀서 쓰임받는 사람으로서 형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형들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인지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잡혀 쓰임받는 사람으로서 역사를 보고 이웃을 보고 형들을 보고 물질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 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이루셨다 하는 것을 확실하게 증거할 수 있는 모습을 갖추어야 됩니다. 정말 하나님이 그를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하게 하신 것을 자기 모습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어느 성도의 간증을 하나 소개합니다. 이 분은 남들에게 당당하게 갖추고 사는 자존심 강한 똑똑한 현대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몸이 아픕니다. 소화가 안 되고 복통이 일어나고 온 몸에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해 보니까 그 의사가 자꾸 난색을 표합니다. “선생님, 바로 말해 주십시오. 몹쓸 병입니까?” “네, 당신은 위암말기입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가만히 생각합니다. ‘내가 이 나이에 벌써 죽는다니 있을 수 없다. 이게 무슨 청천병력 같은 소리냐?’ 그런데 위암말기로 판정을 받고나서 이 사람이 정신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더 아프고 더 몸이 불편해진 것입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한참을 헤매다가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는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원망하다가 결국 이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살아온 것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자기를 위해서 산 것 외에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그리고 남들 앞에 자기가 잘못한 것도 하나, 둘 깨닫게 되었습니다. 두루두루 전화를 했습니다. 돈 거래로 마음 상했던 것들 다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옷장을 열어 보니까 평소에는 옷이 많은 줄 몰랐는데 한번도 안 입은 옷도 수두룩하고, 사다 놓고 아직 안 입은 옷도 있어서 치수 맞는데로 다 이웃과 친척과 교인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평소에 안 하던 고아원을 방문하고 양로원을 방문해서 자선도 했습니다. 치료도 받으면서 그렇게 하는데 어느 날 병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의사가 “죄송합니다” 하는 인사를 하면서 “치료를 해 나가다보니 당신은 악성 위궤양입니다. 우리가 오진을 했습니다.” 반갑기도 하지만 막 분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도가 의사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 아닙니다. 오진 때문에 저는 딴 사람이 되었고 딴 세상을 살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감사합니다.”
주권이 나타나는 삶
여러분, 이 성도의 간증은 우리에게 하나의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오늘 여기 나오신 우리 모두는 평소에 하나님을 저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난 한 주간에 하나님을 향해서 욕을 한마디 하고 살아왔습니까? 우리가 사람들 앞에 하나님을 부인합니까? 그렇게 안 합니다. 우리는 당당히 이 시대에 예수믿는 크리스챤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구분은 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삶의 모습은 하나님 손 밖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손에 잡혀 쓰임을 받느냐?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하나님 손 밖에서 내 맘으로 사느냐? 이것은 구분이 있습니다. 이 성도도 이름난 교회의 훌륭한 성도입니다. 예수 믿고 복 받은 성도입니다. 평소에 이 사람보고 믿음없다고 말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품 안으로 들어가 보니까 자기를 위해서 산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손 안에 잡혀보지 않고는 모릅니다. 하나님의 손 밖에 살면서 영의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인지 우리 하나님의 손 안에 잡혀 쓰임을 받지 않으면 모릅니다. 주님의 주권 밖에서 ‘너는 예수부인 안 한다’ ‘나는 예수 저주 안 한다’는 것으로 방심하면 안됩니다. 오늘 이 시대의 크리스챤들이 모두 하나님 주권 외의 것에 잡혀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돈에 잡혀 살아갑니다. 돈의 주권아래서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사람을 휘두릅니다. 쾌락 때문에 사람을 휘두릅니다. 이념과 사상 때문에 그리고 자기가 추구하는 어떤 예술가적 사상 때문에 그것이 전부인 줄로 압니다. 거기에 인생의 승부를 겁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이 한 그 악행도 하나님의 손길로 알고 그를 의지하고 그와 해석해서 형들이 팔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나를 앞서 보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주권 안에서 볼 때 형들의 악행까지도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요셉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하나님의 사명을 알았습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애굽에 보냈는지 그 사명을 알았습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구원하고, 자기 가족을 구원하고, 애굽을 구원하라고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잡혀 사는 것과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사명을 알고 사는 것, 이것이 바로 큰 구원을 아는 사람입니다.
8절에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여기 세 가지 삼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온 땅의 치리자를 삼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애굽 총리의 직임을 받았다는 말인데 표현이 다 다릅니다. 요셉은 바로의 아비가 될 수 없습니다. 나이도 바로가 많지만 요셉은 히브리인입니다. 바로는 애굽인입니다. 절대로 문자적으로 바로의 아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요셉을 바로의 아비로 삼았다고 말합니까? 이 아비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로 볼 때 상담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바로왕이 요셉을 상담자로 삼았습니다. 흉년이 드는 그 일을 앞두고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라고 요셉에게 상담을 해왔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시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요셉을 애굽의 주로 삼았습니다. 주인으로 삼았습니다. 모든 권리를 다 부여했습니다. 실제로 애굽을 통치하는 치리자로 요셉을 세우고 총리로 직임을 주었습니다. 그 큰 사명 앞에서 요셉은 자기 자신의 사명이 바로 자신과 가족과 애굽을 구원하는 일임을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큰 축복은 큰 사명으로
큰 축복 받았으면 큰 사명에 살아야 됩니다. 요셉은 큰 권력을 가졌습니다. 그는 큰 인물입니다. 그것이 가치가 있는 것은 요셉의 사명이 크기 때문입니다. 큰 지위를 가지고 사명을 잊어버리면 아주 불행해집니다. 나만 불행해지는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불행해집니다. 우리가 높이 되는 것은 중요합니다. 높이 된 자일수록 큰 사명에 살아야 됩니다.
이번에 장로회 여름수양회에 갔는데 저의 모 교회의 친구장로가 왔었습니다. 이 친구는 나와 나이도 같고 한번도 고향을 떠나지 않는 터주대감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자기가 시골교회 장로가 되어 가지고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사실 시골교회 장로님들이 힘든 면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옛날이야기를 했습니다. 네가 집사 때 나한테 장로되고 싶다고 했지? 그랬으면 그 장로가 네게 큰 보람으로, 큰 사명자로 주어졌는데 그렇게 힘든 이야기만 하면 되느냐? 장로로서 보람된 이야기를 좀 해 보라고 하니까 좋은 이야기도 많이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교회의 직분을 받습니다. 이 직분은 사명에 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명에 살지 않으려면 우리는 하나님께 직분을 사양해야 됩니다. 사명에 살기 때문에 직분은 존귀한 것입니다. 이 요셉의 총리직은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이 구원이 어떤 구원이냐 하면 자신과 가족뿐 아니라 이스라엘 구원하는 것이고 애굽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큰 사명을 깨달았기 때문에 요셉의 권력과 지위는 더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조상들이 무엇을 했느냐 보다도 조상이 무슨 벼슬을 했느냐를 너무 따집니다. 고향가면 저의 형님은 족보를 내놓고 자랑합니다. 족보를 만드는데도 큰 공헌을 했습니다. 조상들의 스토리를 비디오까지 제작해서 CD로까지 제작했습니다. 그 비디오에 담긴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명예롭고 영광스럽습니까? 그런데 제가 기독교적으로 볼 때는 형님께는 ‘그래 우리 조상이 무엇을 했습니까?’ 이것을 묻고 싶은데 무엇을 했다는 이야기는 없고 무슨 벼슬했다는 것은 있는데 벼슬해서 무엇을 남겼는지 그 이야기는 없습니다. 조상 중에 영의정, 좌의정을 지낸 것은 명예입니다. 그러나 영의정이 무엇을 남겼느냐는 것을 역사 앞에 말해야 됩니다. 무엇을 했느냐를 말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이 가진 성스러움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손에 잡혀 일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출세와 권력과 그가 받은 모든 은혜를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송두리째 바쳤습니다. 그 사명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형들 때문에 그 사명을 그르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형들도 사랑으로 보복하고, 사랑으로 구원의 길로 이끌었던 것이 요셉의 큰 구원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맺는 말
고린도후서 1장14절에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무거운 현실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육신의 문제, 인간의 영역의 문제가 큰 짐으로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셔야 됩니다. 요셉처럼 큰 구원, 큰 사명을 깨달은 자로서 그 문제를 푸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잡혀서 그 문제를 풀어야지 하나님 손밖에서 몸부림치지 마십시오. 그것은 정답이 안 나옵니다. 모든 결론은 “여호와 하나님이 되게 하셨다. 아멘.” 이렇게 살아져야 됩니다. 요셉이 그 원수 형들을 앞에 놓고도 ‘하나님이 나를 당신들 앞에 보냈소. 근심하지 마십시오. 한탄하지 마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왜 여유가 없습니까? 왜 남의 처지를 품을 여유가 없습니까? 내가 큰 구원을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큰 사명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큰 구원, 큰 사명을 내 가슴에 품으면 상대방의 약점을 품을 여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이 시대를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이용호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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