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신앙 (잠4: 23, 히3: 1)
수염을 길게 기르신 할아버지 한 분에게 꼬마 아이가 묻습니다. "할아버지는 밤에 주무실 때 그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세요? 아니면 밖에 내 놓고 주무세요?" “오늘밤에 한번 자 보고 대답 해주마" 하고는 밤새 수염하고 씨름을 했습니다. 30년 동안 달고 다닌 수염이지만 그 수염이 잘 때 이불 속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미처 생각을 못했다가 이제 그것을 의식하니까 그렇게 불편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별 생각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풍자한 것입니다. 이어령 씨가 쓴 「아들이여 이 산하를」이라는 책에 나오는 글입니다.
1. 신앙생활은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신앙의 좌소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잘 다스려야 신앙생활을 잘 합니다. 잠언 16:32에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말씀했고 본문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마음’ 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심장을 의미합니다. 심장과 마음은 유사성이 있습니다. 심장은 펌프작용을 통해 온 신체기관에 피를 뿜어내어 생명활동을 유지합니다. 심장은 유기적 생명체의 중심부입니다. 심장이 생명의 샘이듯이, 정신적인 심장인 마음은 영적 생명력이 흘러나는 샘입니다.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육신의 생명의 근원인 것처럼 마음은 영적 생명의 근원입니다. 이 마음의 샘에서 원기 왕성한 생명력이 흘러 넘치도록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마음을 얼마나 잘 다스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믿음의 시금석입니다. 신앙생활은 두 마음의 싸움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날마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의 싸움, 성령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과의 싸움,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과의 싸움, 나와 주님과의 주도권의 싸움, 매 순간 전개되는 이 두 생각과의 싸움에서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느냐에 바로 신앙생활의 승패가 달려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감동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감동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어떻게 감동을 줍니까? 우리의 착한 마음, 깨끗한 마음, 사랑의 마음, 공의로운 마음을 통해, 그 마음이 표현된 행동을 통해서 입니다. 신앙생활은 마음을 지키는 과정입니다. 내 마음이 주님 마음으로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이 신앙여정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소중한 생각과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사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너무 정신 없이, 생각 없이 급하게 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찾는 것, 매 순간 내 생각의 중심에 주님이 자리잡게 하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2. 신앙생활은 우리 눈을 지키는 과정입니다.
흔히 비전의 사람이 되란 말을 듣습니다. 비전은 보는 것입니다. 볼 수 있는 힘이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통찰력입니다. 비전의 사람이란 눈의 사람, 좋은 시각의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 순수하고 아름다운 비전을 소유했던 사람들의 그 순백한 눈을 흐리게 하는 게 있습니다. 세상입니다. 세상은 우리 곁에서 눈을 유혹합니다. 눈을 통해 죄악의 물결이 마음의 세계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중심에 왕으로 모시고 살아야 할 예수님을 마음 한 구석에 몰아넣고 그 자리에 대신 세상과 세상에 눈을 뺏긴 내가 있습니다. 마음의 창인 눈을 통해 마음이 변질 된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세월이 가면서 첫 이상과 비전을 상실하고 세상과 타협하게 됩니까? 순수성이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순수성이 상실되었습니까? 그들의 눈, 곧 마음이 세속화되었기 때문입니다.
San Diego ‘All Souls 감독교회’의 교구목사인 Michael Russell은 16세기 ‘조화주의’를 가르친 옥스포드 교수 Richard Hooker의 말을 빌려 “우리가 처한 시대는 과거 후크 교수가 말한 것과 같은 싸움을 하고 있는데 이는 ‘어떤 것들이 불변의 규칙이냐’ 라는 질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동성연애를 여러 미국교단에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얻는다는 명목아래 눈이 뒤집어 진 것입니다. 불변의 절대적 진리가 가변의 상대적 진리로 약화되었습니다. 사단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입니다. 사단은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사는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여 절대주의 믿음을 상실케 하여 그 마음을 공허하게 만듭니다. 눈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순수한 눈이 세상을 좆는 초점 흐린 눈이 되어 버립니다. 하늘을 향하던 마음이 땅을 바라봅니다. 사단이 우리 눈에 꺼풀을 씌우면 상이 흐려집니다. 신앙생활은 시선과 시각, 즉 안목에 달려있습니다.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입니다. 신앙생활은 세상을 향한 시선으로부터 주님을 향하는 시선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시선과 안목을 가진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날마다 육신의 눈이 영적인 눈으로 성화되는 과정 이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주께로 향한 시선을 세상에 빼앗기지 않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초점의 문제입니다. 주님을 향한 단일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가리켜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의 속임과 미끼가 없는 한 마음, 깨끗한 마음, 겉과 속이 같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 가능성이 있는 마음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의 눈을 보면 티없이 순수한 것처럼 주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는 마음은 그 눈을 가진 어린아이의 마음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능력이나 은사나 거창한 프로그램보다 좋은 마음, 한 마음, 진실한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전도운동보다 더 급한 것이 성한 눈 갖기 운동, 나쁜 눈 고치기 운동, 개안수술 운동, 개심수술 운동, 선한 마음, 순결한 마음, 의로운 마음, 넓은 마음, 베푸는 마음 갖기 운동입니다. 우리는 착함과 의로움의 가치가 상실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내 마음을 개조하여 주님 마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마음 개조 작업입니다. 신앙생활은 나로 건설된 내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리모델링하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오늘 내가 그리스도를 잘 신앙하고 있는가는 알 수 있는 시금석은 지금 나의 마음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고 사느냐에 따라서 그의 삶과 가치관이 결정됩니다. 골로새서 3장 1절은 말씀합니다. “위 엣 것을 찾으라, 위 엣 것을 생각하고 땅 엣 것을 생각지 말라.” 세상이 어두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눈이 아직 어둡기 때문입니다. 눈이 어두운 것은 곧 마음이 어두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땅 엣 것에 마음을 쏟는 한 세상은 결코 밝아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너무 같은 것이 문제입니다. 차별과 구별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사울이 바울 되기 전 세상을 향했던 눈, 그리스도에 대해 가졌던 편견의 눈, 잘못된 열심으로 이글이글 타올랐던 유대주의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져 그 눈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 그리스도를 흠모하는 눈,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눈,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십자가를 자랑하는 눈,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난 눈으로 바뀐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눈의 초점이, 그리스도인의 눈의 방향각이 세상으로부터 위에 계신 그리스도에게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바뀌어진 눈으로 주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의 영혼을 선교의 대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통 눈이 빼앗긴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시선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역사를 뒤 흔들었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시각이 바뀐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눈을 가진 사람들, 소위 그리스도의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는 세계 선교, 영혼 구원, 이 예수님의 비전으로 세상을 품고 그 품은 세상에 그리스도를 심은 사람들이었습니다.
3. 신앙생활은 자기를 찾는 작업입니다.
현대인은 정신 없이 바쁘게 삽니다. 바쁘다는 말은 생각 없이, 나 없이 사는 것입니다. 생각 혹은 마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삶을 상실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의 부재, 존재 의미의 상실 이것이 현대인의 문제입니다. 바삐 살면 결국 나를 잃어버리고 나가선 내가 누구인지 다음 단계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존재인지를 망각하고 사는 소위 정체성 상실자, 사명 상실자가 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자기가 한번 사는 인생의 무대 위에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 존재인지를 모르고 사는 인생이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인생입니다. 늘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던 어린 감자가 하루는 엄마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엄마, 나 감자 맞아?” “당근이지, 앤 갑자기 엉뚱하긴” 엄마의 핀잔어린 답을 들은 감자는 그 날 엉엉 울면서 집을 나갔습니다. 몇 달을 자신이 감자가 아닌 당근이라는 사실 앞에서 혼미한 가운데 고통하며 방황하던 어린 감자는 그래도 난 감자야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할머니 감자에게 또 질문 했습니다. “할머니 나 감자 맞지요?” “오이야 하무 그렇고 말고” 할머니의 답을 듣고 어린 감자는 “내가 오이래” 엉엉 울면서 다시 가출해 지금까지 안 들어오고 있다는 얘깁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모르고 사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교훈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한번 옆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축복해 주세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요, 당신은 엄청난 사람이라고요, 당신은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사십니까?” 라고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노래하세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세계보건기구의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인구의 10%에 해당하는 5억 명이 각종 정신질환을 앓고 있으며 중증인 경우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자기 상실 증세를 보인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분명 여러분과 저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났고 “그 사랑 전하기 위해” 주께서 택하시고 이 땅에 심으셔서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는 그 나무, 그 그루터기들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이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나 자신의 내면 세계는 믿음의 선진들에 비해 너무 초라합니다. 그들보다 생각하는 시간이 적기 때문입니다. 즉 생각하고 인생을 깊이 관조하며 그 관조가 기도로 승화되는 엎드림, 나 자신을 조사하는 내적 성찰, 그리고 위를 바라보는 신앙의 과정이 훨씬 적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나를 보지 못하니 섬김과 봉사와 구제의 대상으로서의 세상이 아닌 쾌락을 즐기는 놀이터로서의 세상으로 잘 못 보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너무 세상에 치여 삽니다. 생각 없이 그냥 바쁘게 삽니다. 속도전에 묻혀 삽니다. 세상 일에 바빠 마음을 잃고 ‘나’ 라는 존재와 삶의 의미를 망각한 채,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놓친 채 그냥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조금은 느리게 살아야 합니다. 신앙은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그리스도와 그 앞에 서있는 자신을 늘 깊이 있게 생각하는 데서 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우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하십니다(히3: 1).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생각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라” 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우리의 눈과 마음을 고정시키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눈길을 향하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한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 생을 쏟아 붓는 사람입니다. 지친 인생, 정신 없이 바쁜 인생의 숨을 곳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되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무지와 불신앙과 죄의 유혹에 요동하기 쉬운 연약한 우리 마음을 강하게 하기 위해 여호와를 기다려야 합니다.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27: 14). 신앙은 하나님께 대해 마음을 몰두하는 것입니다. 챨스 피니의 말과도 같이 신앙은 때로 준엄한 심판대 앞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얼굴의 찬란한 영광의 빛 가운데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빈 마음에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사는 것입니다. 신앙은 눈을 주께로 향하고 그 향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높이 들어 보좌에 앉으신 우리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결국 생각과 마음을 모두어 주께 드리는 것이지만 내 힘으로 할 수 없어 “성령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 충만히 역사하시도록 내 마음을 바꾸어 주시옵소서! 내 눈과 내 생각과 내 마음을 주께로만 향하도록 나를 고쳐주시옵소서!” 하고 통회 자복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시선과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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