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축복기회를 잡으세요
2002-01-21 10:52:08 read : 940
로마서 8장 18-25절 // 20020120 주일 낮예배//
< 사방에 탄식소리로 가득합니다 >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공존하며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평화는 깨지고 인간은 다른 피조물을 종처럼 무자비하게 다루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곳곳에 피조물의 탄식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1968년, 최초의 우주인으로서 달을 밟은 암스트롱이 우주에서 보낸 첫 주일 아침에
지상으로 보낸 첫 메시지가 시편 8편 1절 말씀이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그는 달에서 지구를 바라보니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아폴로 호가 달에서 찍어 보내온 사진을 보면 지구의 색깔은 청록색이었는데
30여 년이 지난 지금 지구의 모습은 회색 빛을 띈 죽은 별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대기오염으로 산성비가 오고, 오존층이 파괴되어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고 있습니다.
삼림은 급속히 줄고 있고, 지구 전체 물의 1%밖에 안되는 강물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피조물의 탄식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땅을 정복하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하신 것은
자연을 파괴하라는 말이 아니라 "자연을 문화인답게 경작하라(cultivate)"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 말씀을 오해하고 자연을 맘대로 훼손해 환경의 탄식은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처럼 환경의 탄식소리뿐만 아니라 우리 이웃의 탄식소리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일전에 가난에 지친 19세 소녀가장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침에 신문배달하고, 낮에 약국 점원으로 일하면서 6식구를 부양하던 소녀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탄식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 탄식을 들을 때 우리는 "에바다!(열려라!)" 하신 주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왜 이 19세 소녀가 자살이라는 가장 절망적인 길을 택해야 했을까요?
단순히 "가난하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자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자기의 탄식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자살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격려와 도움이 있었다면 이런 소녀의 자살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을 살펴 더욱 서로의 격려자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하고,
항상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의 세미한 탄식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 주위의 탄식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
사도 바울이 깊은 영성을 가졌던 이유는 그 탄식소리를 듣는 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지금 자연도 탄식하고, 믿는 사람들도 탄식합니다. 계속해서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믿는 사람도 겉으로 보면 안 그런 것 같지만 속으로는 탄식할 일이 많다는 말입니다.
어느 날, 미국의 어떤 목사님에게 한 젊은 여자 분이 와서 남편 자랑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의 남편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 빼고는 정말 나무랄 데 없이 좋아요."
그 말을 분석해보니까 남편이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것에 대한 탄식이 배여 있어서
목사님이 슬쩍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자매님! 실제로는 마음이 힘들죠."
그러자 그분이 곧 울먹이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정말 힘들 때가 많아요."
거듭 난 사람과 거듭 나지 않은 사람은 사는 세계가 다른데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성격이 다르고, 의견이 다르면 함께 고쳐 가면 되지만 신앙이 다르면 참 힘듭니다.
신앙이 달라도 마음의 고통이 없다면 내 신앙의 진실성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보면 믿는 사람들에게도 곳곳에서 탄식소리가 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탄식소리를 듣고 같이 기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탄식소리를 들을 귀를 예비할 때 신기하게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오게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지 않고 삽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정신적 여백이 없이 너무 바삐 살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 소음은 얼마나 큽니까? 그 소음 때문에 정작 들어야 할 소리를 못 듣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루의 얼마 시간만이라도 내 귀를 소음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합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심장 소리라도 들으려 하다 보면 하나님 음성도 듣게 될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들었거든 이제 침묵을 끝내고 세상에 사랑과 위로를 전하려고 해야 합니다.
어느 날 꾀꼬리가 풀이 죽어 있어 현자가 "너 왜 요새 노래가 없지?"하고 물었습니다.
꾀꼬리가 불평하며 "개구리 소리가 하도 커서 제 소리가 소용없잖아요?"라고 하니까
현자가 말했다고 합니다. "네가 조용히 있으니까 개구리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거야."
세상이 악하다고 침묵만 하는 것도 안되고, 불평만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가장 소중한 일은 탄식소리가 나는 곳에 가서 내가 희망찬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떠하든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성도란 겨울과 같은 상황에서도 봄을 노래하면서 봄을 준비하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때로 큰 것에 길들여진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작아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작아 보여도 그 은혜가 세상의 탄식을 잠재우게 될 것입니다.
그런 꿈을 꾸십시오. 그리고 헌신하십시오. 길거리에 떨어진 종이라도 주우십시오.
꿈은 꿈꾸는 자들의 헌신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작은 몸짓의 중요성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작은 몸짓으로라도 꾸준히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리고 그런 노력들이 하나의 흐름이 되어 탄식은 곧 생명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
그런데 주변의 탄식소리들을 잘 들어보십시오. 그 속에서 어떤 음성을 듣게 됩니까?
"예수님이 필요합니다"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본문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 즉 우주만물들이 지금 무엇을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들, 즉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는 것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이 피조물의 기다림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자연과 사람이 한 형제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자연과 우리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사실상 하나라고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강물에 죽은 고기떼가 보이면 그 강이 죽은 것이고, 결국 우리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죽은 강을 안타깝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자연이 힘들면 하나님의 아들들, 참된 믿음의 사람들을 애타게 기다리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졌다는 징표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쓰레기를 슬쩍 버리지 않고 자연을 최대한 존중할 것입니다.
또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고대한다는 말은 모두 주님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주만물이 다 주님을 필요로 합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에도 주님이 필요합니다.
미국에서 여자 3명이 모이면 이런 이야기를 한답니다. "얘, 너 아직도 그 사람과 사니?"
그 정도로 많은 가정들이 신음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세상에 누가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필요하고, 또한 가정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필요합니다.
가정도 사람 사는 곳이기에 부부관계, 부자관계에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는 절대 이런 문제는 없을 거야!"라고 하는 미신을 믿으면 불행해집니다.
문제는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가정에 과연 예수님이 계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있고, 예수님을 소망하며 살면 우리의 삶은 빛깔이 나게 됩니다.
"음식을 만들 때도, 화장을 할 때도 남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아주 틀렸다"고 하는
한 이혼녀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아마 거의 모든 이혼녀가 비슷한 고백을 할 것입니다.
옷을 입을 때도, 어디를 갈 때도, 차 사고가 났을 때도 남편이 있으면 확실히 틀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예수님이 있다"는 이 한가지 사실이 얼마나 의미가 큰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있기에 때로 현재의 모습이 참담해도 소망을 가지고 넉넉하게 살 수 있습니다.
< 장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선언합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먼저 "생각건대."라고 말합니다. 이제 좀 생각하면서 믿으라는 말 아닐까요?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을 비판할 때 주로 '말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비판합니다.
우리는 말을 줄이고 침묵을 통해서 항상 말씀과 진리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처럼 사도 바울은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결론을 얻고 말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는 침착하기 어렵습니다. 정말 내 고난이 크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한 차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해 현재의 고난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돈과 명예보다 굳건한 내일의 소망입니다.
이웃과 다른 비교는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한 가지 비교할 믿음의 비교가 있습니다.
믿음의 비교란 '현재의 고난'과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비교해보는 것입니다.
"현재 내가 고난 중에 있다"라고 느끼면 분명히 그 고난은 작은 것이 아닐 것이지만
고난 중에서도 동시에 재빠르게 장래의 영광을 생각해보는 민첩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비교하며 살면 소망도 없고 삶이 참 불안해집니다.
그러나 미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며 살면 죽음 같은 고난 중에도 여유가 생깁니다.
캘빈은 죽을 때 이 18절 말씀을 25번이나 외우면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정말 크다면 오히려 현재의 고난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기독교의 생명은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 믿는 사람답게 사는 것에 있지 않습니까?
캄캄한 밤에 별이 더욱 빛나듯이 성도들의 신앙도 어려움 속에서 더욱 빛이 납니다.
잘 믿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어려움을 잘 이겨내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어려움을 잘 이겨낼수록 우리의 믿음은 소중해지고, 내일의 영광은 찬란해집니다.
서울에서 새벽기도로 유명한 큰 교회를 담임하시는 K 목사님의 경험담입니다.
그분은 청년 때부터 목회를 했는데 어느 날 아이가 첫돌 지나면서 병들게 되었습니다.
그때 진찰비가 70원이었는데 70원이 없어서 아이를 1년 동안 병원에 못 데려갔습니다.
어떤 분은 "그 70원 어디서 빌리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돈 때문에 사람에게 구차한 손을 벌리는 것처럼 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돈 빌리는 것이 자존심 상하고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주의 종 되더니..."라고 하면서
예수님 부끄럽게 하는 말을 할 수도 있는데 목사가 어찌 그런 말을 듣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없어도 있는 척, 굶어도 먹은 척'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세미한 탄식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도 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목회자는 좀 낫습니다. 선교지에 있는 선교사님의 아픔은 3배는 더할 것입니다.
선교지에서 꼭 필요한 것이 있지만 마치 구걸하는 것 같아 후원요청도 제대로 못합니다.
저도 몽고에서 김재호 선교사님이 3개의 교회와 신학교를 돌보는데 차가 없어서
아주 고생한다는 것을 선교사님 본인이 아닌 다른 목사님을 통해서 자세히 알았습니다.
꼭 필요하지만 제대로 후원요청도 못할 때 우리는 그 내밀한 탄식을 얼마나 듣습니까?
이제 축복의 말씀에만 열린 귀를 구하지 말고 이웃의 탄식에도 열린 귀를 구해야 합니다.
며칠 전 김재호 선교사님이 두 달 전에 몽고에서 당했던 일을 지금에야 공개했습니다.
몽고의 수도 울란 바타르 시내 버스 안에서 술 취한 두 몽고 사람에게 발길질을 당해
선교사님은 가슴을 맞고 입술이 터져 두 달간 앓았고, 사모님은 어금니 두 개를 빼고서
몽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열매맺기도 전에 고향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사연입니다.
저는 그 소식을 접하고 그 동안 모은 차량헌금을 하루라도 빨리 전달하기 위해
온누리 교회 선교협력 목사로 계신 김사무엘 목사님을 통해 선교사님에게 전달했습니다.
우리는 영적 싸움의 최전방에서 수고하는 선교사님의 탄식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선교사님의 탄식이 바로 병원비 70원이 없어 애끓던 K목사님의 탄식 아니겠습니까?
<선교사님 후원하실 분 연락주세요. 국민은행 284-21-0264-873 이한규(요삼일육선교회)>
그때 K목사님도 걱정은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데려 가실까?" 하는 마음으로 있다가
1년이 지난 후에 아이가 너무 아파해서 할 수 없이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말했습니다.
"정말 미련합니다. 아이가 이런데 1년만에 병원에 데려오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말을 듣고 "당신은 내 사정을 너무 모른다!"고 한 마디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차비가 없어 아이를 자전거에 싣고 올 정도였는데 어찌 병원에 갈 엄두가 나겠습니까?
결국 아이는 죽었고, 죽은 후에 아이 시신을 찾는 것도 돈이 없어 힘들었다고 합니다.
너무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그 아픔이 더욱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때로 우리에게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찾아오지만 주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너무 억울해서 "주님! 억울합니다"라고 하면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억울하니? 나는 죄가 없이 인류 죄를 다 덮어써도 한 마디 하지 않았단다."
우리가 "너무 힘듭니다" 하면 주님은 "나도 십자가에서 힘들었단다"고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움이 있다고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때 믿음을 나타내야 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에게 어려움은 기득권의 상실이지만 믿는 사람에게 어려움은 산고의 진통입니다.
산고의 진통은 극심한 고통이지만 사실상 고통으로 여겨지지 않는 기쁜 고통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주어진 고난의 체험은 오히려 '희망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보다 실천을 앞세워야 합니다. 작은 실천을 통한 '희망의 체험'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달라고 한 달 수입의 30분의 1을 따로 떼어 보냅니다.
그 돈은 큰 금액은 아니어도 남을 위해 내 것을 도려내는 그러한 작은 실천을 통해서
우리가 체험하는 희망의 체험은 곧 하나님의 축복을 예비하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
그처럼 고통이 축복의 통로라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24-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인간에게 소망은 산소 같이 중요하지만 소망의 근거는 눈에 보이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이기에 항상 참고 기다리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가끔 우리는 이런 말을 듣습니다. "저 사람은 싹수가 노래. 저 사람은 가망이 없어."
그러나 우리는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자녀에게도 해서는 안됩니다.
그 말은 내가 짜증이 많고, 조급하고, 정서 불안이라는 또 다른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원래 죄인이었기에 어느 누구도 싹수가 노랗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파란 싹이 돋게 된 존재들입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눈에 보이는 것이 조금 실망스럽다고 정말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보이는 것에 소망을 두거나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면 얼마나 잘못이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 아내가 교회가 나오지 못하게 하는 사람에게 "왜 못 나오게 하느냐?"고 물으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들끼리 너무 어울려 다녀서 걱정스럽다는 것입니다.
정말 걱정도 팔자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어울려 무슨 나쁜 행동을 하겠습니까?
조금 주책없는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애교로 충분히 봐 줄 수 있는 행동입니다.
때로 한참 남편 헐뜯다가도 "그래도 내 남편! 잘해줘야지!" 하는 소리밖에 더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아내가 옛 동창들만 만나도 전혀 다른 소리를 듣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소리 하나 하나 들으면 곧 가정 깨지는 일이 날 정도의 말들도 서슴없이 주고받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아내가 집안에만 있으면 안심이 된다는 남편은 정말 한참 모릅니다.
요새는 집안에서 더 큰 일이 일어나는 것도 모르는가 봅니다. 너무 안이한 생각입니다.
집안에서 컴퓨터만 켜도 금방 채팅으로 들어가 훨씬 더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많은 것을
마치 혼자만 모르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교회 열심히 나가는 것이 훨씬 더 낫지요.
그래서 "나는 안 나가도 당신만이라도 교회에 나가주세요"라고 하소연해야 할 시대인데
아직도 아내를 집에 꼼짝 못하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으니 얼마나 불행한 생각입니까?
이제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그것만 붙들며 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생각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소망이 확대됩니다.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우리가 가져야 할 꼭 필요한 자세가 바로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요새 사람들이 불행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무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새 사람들은 인터넷이 조금만 늦게 나와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가끔 의식적으로라도 삶의 속도를 늦추려고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이 중요하고, 주일 예배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욕망을 절제하고 삶의 속도를 가끔 늦춰야 살아있음의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고
그러한 고요함 중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웃음 띈 얼굴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낙심하지 말고 더욱 분발하십시오 >
믿음의 길이란 삼각형의 꼭지점을 향해 가듯 올라가는 길이기에 올라갈수록 힘듭니다.
그래도 올라가야 합니다. 쉽고 편한 길로 들어서려고 하면 영혼은 내리막길이 됩니다.
그러므로 좋은 뜻을 품고 주님의 일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했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런 어려움도 겪으면서 기뻐할 때 우리의 삶은 생동감이 넘치고 영혼이 소생합니다.
시련은 나약한 사람에게는 절망의 조건이지만, 믿음의 사람에게는 생명샘터가 됩니다.
믿음생활을 볼 때마다 가장 안타까운 모습은 선한 결심을 했다가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을 행하려면 지속적인 열정을 가지고 꾸준히 선을 결심해야 합니다.
한 두 번 해보고 그만 두면 선한 열매는 결코 맺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두 번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분은 가끔 아내 설거지를 재밌게 도와줍니다. 그러나 계속 하라면 다 도망갑니다.
아기 잠깐 안아주는 것은 기쁘지만 종일 안아주라고 하면 대개 다 도망가 버립니다.
지속적인 열정이 없는 선한 일은 거품입니다. 순간적인 열정은 오히려 문제만 만듭니다.
사과나무도 네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야 비로소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인내와 기다림이 있어야 비로소 탐스런 열매를 얻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깐의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본문 바로 뒤 28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면 실패는 있어도 실망은 없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가 실패해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좋은 계획은 절대 실패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는 일어나 하나님께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입니다.
그 발걸음만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새로운 축복의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때로 어려움이 있어도 장래의 영광을 생각하며 더욱 '믿음의 분발'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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