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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짜증을 이기는 방법//예레미야 애가 3장 5-12절

by 【고동엽】 2022. 8. 29.

삶의 짜증을 이기는 방법// 20010729

2001-12-08 17:31:14 read : 291

 

주일 낮예배// 예레미야 애가 35-12

 

지난 목요일에 가까이 지내는 목사님이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주 소중한 집회를 준비했는데 그 집회에 한번 참석해보라는 전화였습니다.

바쁘신 그분이 직접 전화까지 해주셨으니 도저히 거절하기가 힘들었습니다.

 

특히 요새 100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하기 때문에 더 갈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그런데 좋은 집회라고 직접 전화까지 해준 성의를 생각해볼 때

거절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참석해보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는데 그 다음부터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속에는 "가고 싶지 않다!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왜 그 목사님이 나에게까지 전화했을까?"를 생각하면 가야 했습니다.

집회 성공을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걸 어찌 외면합니까?

그래서 형편이 되지 않았지만 늦게라도 그곳에 잠깐 갔다 새벽 1시에 왔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할 때에 내가 내 형편만을 생각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시간이 없을 때에도 힘써 시간을 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을 위해 "건강과 체력이 얼마나 소중한가"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건강해야 기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건강해야 대체적으로 마음도 건강하게 됩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면 상당한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여러 사람을 챙겨가면서 살려면 건강은 필수적입니다.

 

왜 사람이 자주 짜증을 낼까요? 인격이 다듬어지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람이 자주 짜증을 내는 이유는 영육간에 건강이 부족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처럼 건강이 부족할 때 무엇이 필요할까요? 무엇보다 쉼이 필요합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쉬고, 생각도 쉬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가 소중합니다.

 

요즘 과로사 얘기가 많이 되고 있습니다.

과로사는 많은 경우에 증상이 없어서 예상하지 못하고 방비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당하는 일이니까 그 충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지난 10년 동안 과로사 때문에 약 30여만 명의 3-40대 과부가 생겼다고 합니다.

 

과로사의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가 간경화 때문이라고 하는데

간은 10%만 기능해도 아무 탈없이 정상적으로 기능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간에 이상이 발견되면 이미 간의 기능이 10% 이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까지 되었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 몸을 아주 혹사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생명을 잃게 되니까 남은 가족들은 얼마나 큰 고통을 받습니까?

 

어떻게 이 과로사를 막을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의사 선생님들의 말에 의하면 적절한 휴식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합니다.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해도 너무 달리지 마십시오. 잠깐 멈추십시오.

그리고 교회에 나와 모든 시름을 내려놓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마음과 생각과 육체에 안식과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목표가 무리했다면 합리적인 목표가 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승진을 하는 것이 소중하긴 하지만 너무 무리해서 건강을 잃으면 되겠습니까?

자신의 건강조차 다스릴 수 없는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기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지나치게 과속으로 몰지 않도록 자기 관리를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매주일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삶은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그 시간은 결코 낭비된 시간이 아닙니다. 나의 내일이 있게 하는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일할 때에는 최선을 다해 일하시고, 쉴 때는 확실히 쉬십시오.

쉴 때에는 낮잠만 자지 마시고, 주님 앞에 나와 잠잠히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런 삶이 삶의 짜증을 극복하게 하는 최선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날씨가 더워지면서 사람이 짜증이 날 수 있는 환경이 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짜증을 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짜증을 이길까요?

오늘 본문은 짜증을 극복하는 몇 가지 성경적 원리를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1.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짜증스런 삶을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희망을 가지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극심한 어려움 중에서도 소망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19-2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 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내 영혼의 중심을 분명히 하고, 든든히 서서 과거의 삶을 회상해보십시오.

그러면 얼마나 감사할 것이 많은지 나 자신도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감사는 <발견>입니다. 척박한 땅에서 보물을 발굴하는 작업이 감사입니다.

그렇게 과거의 삶에서 감사를 발견하면 어느새 절망은 희망으로 변합니다.

 

과거의 삶뿐만 아니라 현재의 삶도 겉으로만 보지 말고 진지하게 보십시오.

순간적으로는 짜증이 날만한 일에도 자세히 보면 감사할 것이 많습니다.

 

지금 얼마나 덥습니까? 정말 짜증이 나는 계절입니다.

그렇다고 밥을 먹고살면서 덥다고 불평하고 짜증을 내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농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한 주간만 더 더워도 큰 풍년이 듭니다.

심지어는 한시간만 더 뜨거워도 곡식의 수확량이 더 많아지게 됩니다.

그런 사실을 생각하면 덥고 짜증스런 날씨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삶의 중심을 확실히 하시고 모든 상황을 믿음으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반드시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도들은 아무리 쓰러지고 굴러도 곧추 서게 하는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어렵다고 느낄수록 희망을 가지십시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절망의 순간에 희망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어느 날 옥스포드 대학에 다니는 한 학생의 몸에 이상한 증세가 생겼습니다.

구두끈을 매기도 힘들 정도로 손이 떨렸고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근육무력증이라는 병이었습니다. 의사들은 2년 이상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2년 동안 최선을 다해 살기로 각오했습니다.

그렇게 죽음을 초월한 각오를 하면서부터 그의 영감과 창의력은 극대화되었습니다.

그 뒤 2년이 지났지만 그는 죽지 않았고, 30년이 지나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가 현존하는 최대의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입니다.

 

강한 의지도 생명을 지탱시켜줍니다. 하물며 믿음의 힘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사람의 눈으로 보면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하나님 편에 서서 내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환경을 바라보거나 연약한 자신을 바라보고 탄식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희망을 가지고 도전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길이 열릴 것입니다.

 

2. 희망을 전해야 합니다

 

사람은 마음 쓰기에 따라 삶의 질이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대개 긍정적인 생각과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렵더라도 희망을 예견하고 희망을 말하고, "한번 해 보자!"고 하는 자세!

그러한 긍정적인 자세 속에서 공동체의 분위기가 얼마나 좋아지는지 모릅니다.

 

상황에 어려워도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말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얼마나 듣는 사람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말씀입니까?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입술이 되어 사랑과 격려의 말을 통해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개 누가 희망을 줍니까? 대개 보면 겸손한 사람이 희망을 줍니다.

겸손한 사람은 나의 죄를 크게 생각하고 남의 죄를 관대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을 세워주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주변에 희망이 전해집니다.

 

여러분! 진정 존경을 받고 싶으시면 먼저 겸손히 존경하는 삶을 사십시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첫 번째로 말씀하신 복도 바로 이 겸손의 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5:3)

겸손함은 축복의 최대의 조건이자 가장 앞세워야 하는 조건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가끔 고민합니다. "왜 축복이 적을까? 왜 교제가 잘 끊어질까?"

혹시 그런 고민이 있다면 "더욱 겸손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잠잠하고 회개하는 겸허한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이제 내 중심적인 삶을 벗어나 보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항상 남의 입장을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과는 대화가 통합니다. 그러나 회개가 없는 사람은 대화가 막힙니다.

그래서 사소한 일에 시험이 드는 영적 미숙함을 종종 드러내곤 합니다.

 

사오정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오정은 자기만 생각하니까 대화가 안됩니다.

이 사오정은 이기주의에 빠진 현대인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사오정 집에 강도가 침입했습니다. 그리고 위협합니다. "돈 어디 있어?"

그러니까 사오정이 말합니다. "저는 사오정이란 말이예요." 엉뚱한 대답입니다.

사오정에게는 "나는 사오정이다!"라는 자기 생각밖에 없습니다.

다른 말은 듣지 않습니다. 그처럼 자기만 생각하니까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이 시간 "나는 혼자만 생각하는 사오정은 아닌가?"하고 반문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에도 그런 사오정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누가 시험 들었다는 것을 보면 "무엇이 옳은가?" 여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그것이 타당한가? 손해가 되었는가?" 여부로 시험 들었다고 합니다.

그처럼 자기 중심적으로 살다가 진짜 자기를 망치고, 자기 인생을 망칩니다.

 

어떤 분은 "이 교회에 비전이 없다!"고 하며 교회를 떠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자기가 장로가 될 비전이 없다!"는 말인 경우가 많고,

"아니면 장로가 되어도 건질 떡고물이 없다!"는 말의 변용인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 사실을 모릅니까? 사람들은 그 사람이 둘러댄다는 것을 대략 압니다.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상대는 도구일 뿐입니다.

교회까지 내 사랑과 섬김의 대상이 되지 않고 욕심의 도구가 되면 어찌합니까?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가 속한 공동체는 반드시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 새로 오자마자 이것저것 판단부터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게 판단하면서 앞선 직분자들을 하나씩 판단하며 처단하기 시작합니다.

"누구는 기도에 진심이 없다. 누구는 신앙이 어린아이다."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 기도만 진실하고, 자기 영성이 높다는 말입니다.

그런 말은 바리새인조차 따르지 못할 정도로 자기를 높이는 말입니다.

교인으로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판단하는 마음을 버리시길 바랍니다.

어떤 분은 자기가 어떤 체험을 했다는 것이 최고의 진리인 줄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독단주의, 소위 도그마티즘(dogmatism)이 아니겠습니까?

 

신앙체험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좋은 신앙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체험한 다음에 자신의 신앙체험을 절대화시키는 잘못은 없어야 합니다.

나에게 맞는 어떤 종교의식, 자기가 잘하는 신앙스타일만을 주장하면 안됩니다.

자기가 잘하는 어떤 신앙스타일이 최고인 줄 아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새벽기도 얼마나 축복입니까? 그러나 새벽기도가 신앙의 절대 기준은 아닙니다.

철야기도도 좋습니다. 그러나 철야기도 안하는 사람을 한 수 아래로 보면 안됩니다.

큐티 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래도 큐티 안하는 사람을 우습게 보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이 큐티는 기본인데 그것을 안하면 되겠느냐?"고 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집사가 주일 예배에 빠집니까? 집사입니까, 잡사입니까?"고 하지 마십시오.

 

어떤 경우든지 자기가 잘 하는 것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면 주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집사님이 주일에 빠지면 "집사님! 지난 주일에 보고 싶었어요"라고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가시 돋친 말, 자기를 높이는 말로 남에게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항상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남을 세워주는 말, 배려하는 말, 격려하는 말을 하면 얼마나 듣는 사람이 힘이 됩니까?

 

3. 이타주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하게 이타주의로 사는 삶입니다.

부자이지만, 높은 명예를 가졌지만 겸손하게 티내지 않고 사는 모습을 보면

정말 마음이 넉넉해지는 느낌을 받고 삶의 짜증이 사라지는 시원함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사람에 내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런 분을 많이 만드십시오. 그런 분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런 분이 되십시오.

 

인간관계를 하다 보면 우리를 짜증나게 하는 사람이 있고,

우리를 쿨(cool)하게 하는 사람,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일까요? 충성하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충성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부족한 면이 보이면 돕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옵니다.

그러나 짜증나게 하는 사람은 부족한 면이 보이면 자꾸 판단을 하려고 합니다.

 

살다보면 우리 가정과 교회에 부족한 부분이 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왜 내가 속한 공동체에 그러한 부족한 것이 있게 되었을까요?

그 부족한 부분을 내가 채워보라고 하신 하나님의 섭리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여기는 사람을 볼 때 마음이 얼마나 시원함을 느끼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돕고 채우려고는 하지 않고 말만 하고 말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어느 누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 태도라 하겠습니까? 반대이겠지요.

 

그리고 충성은 순종하는 삶을 만들어내고, 순종은 행복의 산실입니다.

반대로 순종이 없는 이기심은 항상 삶에 짜증과 불행을 동반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랑의 보금자리가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입니다.

이 소중한 장소가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장소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행복과 사랑이 넘치는 한 가정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딸만 6명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친구로부터 예쁜 장난감 인형을 하나 선물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누구에게 줍니까?

아이는 6명이고 장난감을 하나이니까 엄마가 궁여지책으로 말합니다.

"오늘 제일 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 이 장난감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여섯 명의 딸이 하나같이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면 아빠 거잖아."

아이들 보기에 아빠가 엄마 말을 가장 잘 듣는 사람으로 보인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그렇게 보일 정도이면 그 가정의 행복은 맡아 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 말을 잘 듣는 남편에게 공처가라고 비하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지혜롭게 남편에게 사랑의 요구를 할 때 그 말을 듣는 남편은

사랑의 순종을 하는 남편이지 절대로 공처가의 모습이 아닙니다.

남편에게 "설거지 해! 커피 타! 라면 끓여!"라고 하면 공처가 만드는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남편을 존중해서 그런 일을 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몸이 피곤할 때 "여보! 당신이 타 주는 커피 한번 먹고 싶다!"고 할 때

커피를 타 주는 것은 아내의 사랑의 요구에 순종하는 충성스런 태도입니다.

 

이렇게 남편이 아내의 사랑의 요구에 순종하고, 아내도 그렇게 할 때

그 가정은 행복해지고, 그런 가정에 하나님은 축복의 미래를 펼쳐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기본적으로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십시오. 그래야 행복합니다.

순종이 무엇입니까? 은혜를 알고, 겸손을 아는 행동은 사실상 순종입니다.

그렇게 순종하며 사십시오. 그러면 결코 후회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충성을 알고 순종을 아는 사람은 대체적으로 남을 섬길 줄 압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항상 섬김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보십시오.

섬기는 삶에 불평과 짜증에 어찌 있겠습니까? 오직 행복과 평화뿐입니다.

진정한 섬김의 정신이 있는 인격에 결코 짜증과 불평의 체질화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실직했을 때 처음에는 너무 막막했습니다.

그래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퇴직금을 모아 시장에 야채가게를 냈습니다.

매일 새벽 남편은 농수산물 시장에 트럭을 몰고 가 싱싱한 야채를 사다 와서

9시쯤 되어서야 가게문을 닫고 들어오는 생활이 반복되었습니다.

 

어느 날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는 딸아이가 가게에 찾아와 봉투 하나를 내밉니다.

"은혜야! 뭔데?" 딸아이가 가면서 말합니다. "아빠! 조금 후에 뜯어보세요."

봉투를 뜯어보니 편지지가 보였습니다.

"아빠! 생일 축하해요. 저희를 위해 고생하는 거 저희도 다 알아요.

아빠에게 해 드릴 것은 별로 없고 이 쿠폰을 사용하면 정성껏 모실게요."

 

편지지 안에는 여러 개의 종이 쿠폰이 있었습니다.

아빠 구두 닦아주는 쿠폰, 30분 안마해드리는 쿠폰, 흰머리 50개 뽑아드리는 쿠폰,

아빠에게 뽀뽀해 드리는 쿠폰....

그것을 보니까 세상에서 자기처럼 행복한 사람이 없는 것 같아 아내에게 말합니다.

"여보! 나는 많은 것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나야말로 정말 부자인 걸."

 

받으려고만 하면 삶의 짜증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불행한 삶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지 간에 주려고 해보십시오. 섬기려고 해보십시오.

바로 그러한 삶에 행복이 있고, 짜증스런 삶이 시원한 삶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 그리고 가정생활은 어떻습니까?

혹시 받는 생각에만 익숙한 것은 아닙니까? 이제는 주려고 해야 합니다.

받는 것이 사랑의 느낌을 주긴 하지만 진정한 사랑의 증거의 주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보십시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고,

삶의 불평과 짜증과 섭섭함은 어느새 새벽 안개처럼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나눠줌으로 어디든지 기쁨을 주는 진정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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