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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축제로 만드십시오//사도행전 2장 43-47

by 【고동엽】 2022. 8. 29.

삶을 축제로 만드십시오// 20010715

2001-12-08 17:29:56 read : 238

 

주일 낮예배// 사도행전 243-47

 

저는 결혼할 때 사람들이 흔히 쓰는 신부 입장곡을 쓰지 않았습니다.

제가 강의를 나가던 신학교 학생들이 "축하해요"라는 노래를 은은하게 해 주었는데

그 음악에 맞추어 신부 입장을 했습니다.

"Celebrate. 축하해요. Celebrate. 축하해요. 당신의 결혼을 축하해요."

 

신부가 좋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저는 이제까지 그렇게 감동적인 신부 입장곡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결혼식에서 가장 기억나는 순간이 그 곡과 함께 신부가 입장할 때입니다.

그 음악을 들으면서 저는 영화 속 축제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결혼식은 가장 기쁜 축제입니다. 성도의 삶도 그런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축제 속에 무슨 원한이 있고, 미움이 있고, 슬픔이 있고, 우울함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생활은 기본적으로 축제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교인은 축제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는 축제의 연회장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의 축제를 개최합니다. 축제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으십시오.

교회생활이 결혼식 축제와 같은 생활이 될 때 얼마나 기쁨이 넘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 옆에 있는 교인을 나의 신랑, 나의 신부로 소중하게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며 교회생활을 할 때 우리의 삶은 진정 축제가 될 것입니다.

 

목회자가 가장 목회를 아름답게 잘 할 때도 교인을 신부처럼 생각할 때입니다.

그래서 이 근처에서 목회하시는 어떤 목사님은 항상 이렇게 외치고 다닙니다.

"목사는 교인을 그저 양으로 생각하지 말고 신부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분은 목회자가 교인을 양으로 생각하면 자칫 삯꾼 목자가 되기 쉽다고 합니다.

 

그분은 한때 교인을 양으로 생각하고 우유가 적게 나오면 양을 자주 때렸습니다.

털이 적게 나와서 깎을 것이 없는 양을 보면 목사님은 교인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끔 말로 교인을 때리는데 매에 맞아 신음하는 양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리고 상황도 더 나빠졌는데, 교인을 신부로 보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풀렸다고 합니다.

교회에서는 서로 분리하면 죽고, 서로 사랑하면 사는 것임을 고백하는 관계여야 합니다.

 

교인을 양으로 여기면 염소도 나오지만 신부로 삼으면 그런 일은 없다고 합니다.

교인을 신부처럼 생각하면 서로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 그 관계가 견고해집니다.

 

가끔 교인들끼리 갈등하면 둘 다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다른 것을 몰라도 그 일만을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목회합니다.

그처럼 교인들은 목사 때문에 행복하고, 목사는 교인 때문에 행복하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를 '나의 신랑, 나의 신부'로 생각하며 섬겨주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교회생활이고, 교회생활은 축제생활입니다.

교회는 축제가 넘치는 교회, 성도는 기쁨이 넘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초대교회 교인들은 축제가 넘치는 교회생활을 했습니다.

그러한 축제가 넘치는 삶이 있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본문은 통해서 4가지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들에게는 경건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43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이 두려움은 옷깃을 여미는 경건한 두려움을 말합니다.

즉 그들에게는 겸손한 삶이 있었고, 순종하는 삶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계속해서 43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언제 우리의 삶에 가장 기적이 많이 일어납니까?

대체적으로 보면 겸손한 믿음을 가지고 순종할 때 가장 많이 일어납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자아가 강했다면 주님의 제자들에게 순종하고 싶겠습니까?

지금은 사도라고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가 갈릴리 어부 출신이었습니다. 그래도 순종합니다.

아무리 오순절의 놀라운 성령 체험을 해도 그들은 겸손히 배우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제자는 배우는 자입니다. 성령 충만할수록 겸손히 배우려고 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배우는 것을 불편해하는 분들이 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기도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는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실력이 있다고 배우지 않으려고 하면 축복과 영광이 없을 것입니다.

 

수학능력고사를 치면 대부분의 교사들이 학생들보다 점수가 적게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교사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그 과정이 있어야 사람이 됩니다.

사람은 실력으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세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는 과정을 생략하고 배우는 자세를 잃으면 안됩니다.

 

2. 그들은 모이기를 힘썼기 때문입니다.

 

44절 말씀을 보십시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46절 말씀을 보십시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어떤 분은 성령 충만하면 열심히 모이게 된다고 합니다.

반면에 어떤 분은 열심히 모이면 성령 충만하게 된다고 합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열심히 모이다 보면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게 됩니다.

 

어떤 분은 너무 바빠서 모이기 힘들다고 합니다. 여건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을 모일 때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래도 모입니다. 그처럼 목숨 걸고 모일 때 능력 있는 삶이 펼쳐지게 됩니다.

 

성경은 말세의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이기를 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2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 시대의 가장 무서운 적은 경제악화도 아니고, 주가폭락도 아니고,

내게 손해를 주는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는 게으른 마음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성도들과 함께 모이는 시간이 가장 유익된 시간인 줄 알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그 시간이 가장 기억되는 시간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이기에 힘쓰고, 적극적으로 교회의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사람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성공으로 가는 길이 험해서가 아닙니다.

힘을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장벽을 만났다고 쉽게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인생의 힘도 집중해야 하지만, 교인들도 모여 집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바로 그러한 집중된 힘에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는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북쪽 갈릴리 출신이었습니다.

큰 뜻을 품고 주님 따라 예루살렘에 왔는데 그곳에서 주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고향 갈릴리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자 곧 성령이 찾아오셨고 마침내 폭발적인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만약 그들이 자기 기분에 따라 흩어졌다면 오순절의 역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장벽이 있어도 모이는 소중한 자리를 지키기 위해 힘쓰십시오.

반드시 하나님께서 크게 일으켜 세우시는 놀라운 부흥의 때가 오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모여 찬송하고, 울적하고 답답해도 더욱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떳떳할 때에도 모이고, 죄를 지었을 때에도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와야 합니다.

이사야 55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교회에 와서 같이 모여 예배드리고, 밥도 같이 먹고, 같이 사랑의 교제를 하고,

성도들끼리 그런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을 보면 얼마나 흡족한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수시로 교회에 나오고, 하여튼 교회행사라면 항상 끼고,

주일에도 제일 늦게까지 모든 행사에 다 참여하고 심지어 저녁밥까지 먹고 돌아갑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저도 마음이 풍성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반면에 어떤 분은 너무 신사적이어서 부담이 된다고 식사도 하지 않고 갑니다.

처음에는 다 그렇게 부담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교회에서 먹고 가는 것은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신사적이어서 그런 모임을 회피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십시오. 그러나 교제할 때 잘 교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교제하면 희망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깁니다. 용기가 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교제하면서 믿음이 떨어지고 자꾸 의욕이 저하됩니다.

그러므로 교제도 중요하지만 기쁨과 사랑과 믿음이 넘치는 교제를 해야 합니다.

 

요새 멘토 얘기를 많이 합니다. 나의 인생을 잘 이끌어줄 멘토를 잘 택해야 합니다.

좋은 멘토가 있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복 중의 하나입니다.

아름다운 교제 태도를 가지고 서로가 좋은 멘토가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3. 그들에게는 사랑의 나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44-45절 말씀을 보십시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뚜렷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는 내 필요에만 주로 관심을 기울이지만

은혜를 받으면 다른 사람의 필요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 보입니다.

 

재물을 쌓아놓고 나 혼자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축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나의 것을 나누어 서로에게 줄 수 있을 때 진정 삶은 축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고받는 재미를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주고받는 것이 전혀 없다면 그 삶은 얼마나 밋밋하고 재미없는 삶입니까?

 

우리는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을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고, 상대방의 처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마음을 나누는 것은 가장 소중한 그리스도인의 삶일 것입니다.

 

미국 인디애나 주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떤 학생이 뇌종양에 걸렸는데

병원에 입원해 방사선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머리가 다 빠졌습니다.

다행히 치료 경과가 좋아서 퇴원하게 되어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선생님이 종례 시간에 같은 반 학생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얘들아! 내일 짐(Jim)이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많이 위로해주길 바란다."

 

수업이 끝났습니다. 다른 때 같은 우르르 몰려나갔을 텐데 조용했습니다.

조금 후에 학생들 사이에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어떻게 짐을 위로할까?"

한 학생이 "우리도 모두 짐처럼 내일까지 머리를 깎고 오자!"고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짐이 등교했습니다. 보니까 모든 남학생들이 빡빡머리였습니다.

다 서로 보고 웃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곧 그곳은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짐도 울었고, 선생님도 울었고, 반의 모든 학생들이 서로 감동 받아 엉엉 울었습니다.

 

마음을 나누지 않고 어떻게 행복이 있겠으며 어떻게 삶의 감동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누기를 싫어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바라겠습니까?

이번 주 중에 이은경 자매가 6개월간의 백혈병 투병을 끝내고 퇴원합니다.

여러분들의 머리를 다 깎으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나누십시오.

그리고 자매의 필요를 생각하며 힘써 나누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누면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6:38)

 

지난 6개월 동안 우리 교회에서는 최선을 다해 이은경 자매님과 나눴습니다.

교회의 규모에 비하면 큰 교회에 못지 않게 상당한 정도의 물질을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저와 재정부에서는 교회 재정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난 6개월 동안 교회재정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오늘 재정보고를 보십시오. 주면 받는다는 원리가 그대로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욕심 없이 나누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풍성하게 되돌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너무 받는 데에만 익숙한 것은 아닌지요?

기도하는 것을 봐도 너무 자기 중심적인 기도가 많은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치맛바람이 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인 살로메가 주님께 로비를 했습니다.

"주님 나라에 임하실 때에 주님 좌우 편에 우리 아들을 앉혀 주십시오."

 

오늘날 그런 기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제 우리의 기도는 이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주님! 저의 두 아들도 사용하시고 나머지 10명의 제자도 사용해 주옵소서!"

우리가 그런 식으로 나눔의 기도를 하지 않으면 기도응답은 허무한 것이 될 것입니다.

나누려는 마음을 가져야 축복이 진정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축복이 될 것입니다.

 

4. 그들에게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46절 말씀을 보십시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초대교회 교인들에게는 행복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바람 나게 교회생활을 했습니다. 교회생활에 이런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인간적으로 기뻐할 수 없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기쁨을 권할 때 여러 곳에서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왜 명령을 합니까? 기뻐할 수 없을 때에도 기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뻐할 일이 있어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해야 기뻐할 일이 생깁니다.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기쁨을 강조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서입니다. 그래서 그 책의 별명이 '기쁨의 서신'입니다.

그런데 누가 어디에서 이 서신을 보냈습니까?

로마의 차디찬 감옥에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감옥에서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기쁨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만 어려운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더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 기쁨을 찾아보십시오. 그러면 정말 기쁜 일이 생깁니다.

 

어떤 목사님이 평소에 늘 목회가 힘들다고 불평하며 목회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기회가 생겨서 성지순례를 하는데, 그곳에 있는 광야에 가보고 나서

모세의 40년 목회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했다고 합니다.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추워지는 광야생활은 정말 힘든 생활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보면 해가 떨어지기 전에 겉옷을 돌려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수시로 불평하는 백성들을 인도했던 모세의 심정을 생각하며

오히려 자기의 목회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부터 그의 목회는 힘이 넘치고 축복이 넘쳐 크게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삶을 축제로 만드는 사람을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해주십니다.

초대교회에도 어려움 중에서도 찬송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의 칭송을 받게 되었고 구원받은 사람의 수가 날마다 더해졌습니다.

아마 교회에서 사람들이 삶을 축제로 만드는 모습을 보고 궁금해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런 기쁨이 있게 되었을까?"

우리가 이런 도전을 주지 못한다면 지금 생명력을 잃은 것이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어떤 지역에서는 교회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고, 데모까지 합니다.

믿음은 있는데 믿는 자의 삶은 보여주지 못한 우리들의 책임이 정말 큽니다.

왜 그런 일이 생겼습니까? 너무 자기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열심히 믿는 것 같지만 자기의 영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심오한 비법을 찾아서 심오한 가르침만 찾아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모습은 잘 믿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은 미숙한 모습입니다.

얼마 후에 곧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속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실 전도하러 나가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우리가 보여주는 삶의 모습입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사는 모습이 칭송할만한 모습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사랑과 화목이 넘쳐 남 보기에 부러운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 교회가 정말 사랑과 축제가 넘치는 칭송 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쁨을 주는 새벽 이슬과 같은 분들이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조그만 새벽이슬도 뭉치면 작은 물방울이 되어 식물을 살지게 하지 않습니까?

새벽이슬처럼 축제의 삶을 살고 주변에 축제의 삶을 전해주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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