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을 따라 사는 삶// 20010314
2001-12-08 17:47:25 read : 503
수요일 저녁예배// 사도행전 20장 17-24절
< 존재에의 감사 >
우리가 이제까지 살면서 겪었던 인생 최대의 사건은 무엇일까요?
우리 자신에게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사건이 가장 큰 사건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신비로운 사실은 우리가 지금 살아있다는 사실입니다.
생일이 되면 무엇을 합니까? 주로 생일파티를 하고 사람들로부터 축하 받습니다.
그러나 다음부터는 생일이 되면 다음의 두 가지를 한번 꼭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 생명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헌금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 존재하게 된 것에 대한 감사는 가장 기초적으로 해야 할 감사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나를 낳아주신 어머님에게 꼭 감사표현을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는 과정에서 사실상 우리가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나의 생일이 있게 하기 위해서 고생하신 어머님이 축하 받아야 합니다.
이런 생일에 대한 의미 변화가 있을 때 또 다른 의미의 철이 든 삶이 될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게 된 사실을 항상 소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 하나님 의식 >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의식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우리가 의식해야 할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항상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의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인생은 그때부터 참으로 가치 있는 인생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내 인생을 만드시고 내 의식 속에 하나님을 중심에 두면
인생의 목적이 이전보다 더욱 뚜렷해지고 인생의 차원이 아주 깊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물질이나 환경이나 다른 시시한 것으로 자기 인생을 저울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의 인생에 대한 고귀한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 소명의식 >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되고 그 다음으로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 사명적 삶이 없으면 그 믿음은 결코 정상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사명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 사명감에 충실해야 힘과 능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사명감이 없으면 눈이 흐릿해지고, 사명감이 충실하면 눈동자가 빛납니다.
그처럼 사람이 사명감을 가질 때 확실히 사물을 보는 자세와 사는 자세가 달라지고,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자신을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에게서 착한 일, 귀한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끝없이 발견하십시오.
사람은 크게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1) 자신을 저주하고, 부정하고, 열등의식에 사는 사람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자기 자신을 사명을 가진 존재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끝없는 가능성을 보고 노력하면서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합니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존경 받을만한 사람이 되고 사명을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누가 네로를 존경하고 네로의 삶을 사명을 다한 삶이라고 부러워하겠습니까?
그러나 네로 당시에 주님 때문에 순교한 분들의 삶은 대부분 존경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선하고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적 존재가 되면 자기가 기대하는 거룩한 소원대로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자기의 삶의 질은 대개 자기의 사명에 땀을 흘리는 대로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잘못 되는 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를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나의 사명대로 충실하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살피는 것입니다.
자기의 사명을 발견하고 자기의 가능성을 찾아내어 시간을 착하게 쓰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우리의 삶에 꿈과 같은 일이 이루어지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위인들은 대개 이런 질문을 스스로 했습니다. "얼마나 필요한 사람으로 살다 갈 것인가?"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우리를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 사명을 따라 사는 삶 >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삶을 보면 사명적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도 바울은 밀레도라는 항구 도시에서 근처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초청합니다.
그 장로들에게 사도 바울은 고별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의 일부분이 본문입니다.
어떤 설교입니까?
18-21절까지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그 동안 목숨 바쳐 헌신했던 것을 설교하고,
앞으로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겠다는 단호한 모습을 피력합니다.
22-24절 말씀을 보십시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죽음이 예상된다고 할지라도 사명을 위해 달려가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그 일은 바로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사명이라면 목숨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사명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생각하면 하면 최대의 축복이 됩니다.
그러나 사명이 없이 일을 하면 그것은 열매도 없을뿐더러 그저 노동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모든 것은 사실상 사명감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주일학교 선생, 성가대원, 집사, 구역장도 하나님께서 맡기셨으면 사명이 됩니다.
사명감으로 펄펄 끓어야 하는 사역자뿐만 아니라 평신도도 사명감으로 살아야 합니다.
카터 대통령이 바쁜 대통령의 일정 중에서도
매주 교회에 출석해서 주일학교 6학년 반을 가르쳤던 이유는 사명감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개 평신도들은 "목사나 전도사는 사명자이지만 나는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자기의 일이 주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곧 사명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주 예수께 받은 사명으로 알고 임해야 합니다.
사명은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 일을 고귀하게 여기게 합니다.
자녀를 기를 때 "하나님을 위한 자녀로 키워야지!"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사명입니다.
식사를 준비할 때 거룩한 일을 위한 에너지를 공급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사명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면 그 사업이 사명이 됩니다.
<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 >
그런 차원에서 나에게 맡겨진 교회 일도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큰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맡은 자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충성입니다(고전 4:1-2).
그처럼 사명감에 붙들려서 충성할 때 그 충성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열심히 하면 누가 옆에서 조금만 자극해도 금방 넘어가 버립니다.
오늘날 그처럼 충성의 가치가 너무 빈약한 안타까운 모습을 많이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지 교회에서 일을 할 때 좋은 일을 하면 시험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물론 자신을 돌아보되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면 시험에 좌우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이 한 신학대학에 2억을 도서관기금으로 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그 장로님을 어용이사라고 몰아붙이면서 데모를 벌였습니다.
만약 인간적인 생각으로 기부하는 것이라면 조금도 기부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학생들을 위해 기부금을 내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오해하면 누가 기부하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본인이 정말 순수한 뜻으로 기여하는 것이라면 그런 소리에 흔들리지 말아야 하고,
물론 순수한 뜻이 아닌 어떤 의도가 있었다면 자기 반성의 기회로 삼으면 될 것입니다.
그처럼 어려운 상황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고 충성하는 마음이 훌륭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중한 일을 할 때 사람을 위해 그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인정을 받아 좋을 수 있지만 사람 때문에 실망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가끔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지나치게 기대를 하고 실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많은 부모들이 "내가 자녀들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그런 생각이 조금 지나치면 그것은 교만한 생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자녀를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다"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 전에 "이 일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꼭 해야 할 일이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이기 때문에 한다고 하는 자세가 소중한 자세입니다.
교회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불쌍히 여겨 적선하듯이 일을 하면 안됩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하면 열매가 없을 때에는 낙심과 원망과 불평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책임적인 일원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명적인 존재로서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 일을 할 때 그 자세가 축복 받는 자세입니다.
그런 자세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일하면 열매가 커 보이지 않아도 그것이 큰 열매입니다.
사도 바울이 일생동안 주를 위해서 헌신하고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물질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명예를 얻은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를 얻었다.
그래서 사명 때문에 고난도 많았지만 그럴수록 예수님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왜 옛날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부모를 소중히 여기고 섬겼을까요?
지금보다는 옛날 부모들이 고생하면서 낳았고 고생하면서 길렀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믿을 때 값싸게 믿으려고 하면 예수님이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생하고 헌신하면서 믿으면 그때는 예수님이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가난 가운데, 집안의 핍박 속에서, 시험을 당하면서도 잘 믿는 분들 보십시오.
그분들은 얼마나 예수님을 소중하게 생각합니까?
믿음도 좋아서이긴 하지만 주님을 위해서 비싼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헌신을 모르고 믿는다고 하는 분은 예수님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에 가든지 사명적인 존재로서 충성하고 헌신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 사랑과 헌신을 아는 삶 >
어디를 가든지, 어떻게 살든지 하나님을 위해 사는 목적을 분명히 하시고,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이 없이 하나님을 위해 그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나를 보내셨다는 의식을 가지고 사십시오.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면 나태할 수도 없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장벽을 만날 때에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 다시 한 번 자신의 존재와 사명에 대해서 새롭게 해석을 하십시오.
나는 하늘로부터 보냄 받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내셨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신성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존심을 가지고 항상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인천에서 목회할 때 어떤 청년에 한동안 교회를 다니다가 그만 두더니
1년만에 찾아와서 하는 말이 급히 돈이 필요한데 저한테 80만원을 빌려달라고 합니다.
당시 한참 문제가 되었던 자석요 파는 문제 때문에 빚을 진 것 같았습니다.
무슨 급한 개인적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른 경우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경우에 목회자에게 돈을 빌리러 온다면 목회자가 얼마나 난처하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사실상 돈이 없어서 그 청년에게 빌려주지 못했는데 그 청년은
목회자의 사랑을 의심한다는 표정으로 돌아가더니 교회에 발길을 완전히 끊었습니다.
어떤 분은 그처럼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자기 생각대로 그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때에는
가장 정의로운 분처럼 "교회가 사랑도 없어! 교인이 사랑도 없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사랑도 없어!"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사랑하라!"고 합니다.
진정 사랑과 정의를 아는 사람은 "교회가 사랑도 없어!"라는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다 연약하기 때문이고 누구보다 내가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남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나서 실망했다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인천에서 목회할 때 어떤 분에게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받아들이지를 않고 너무 완고해서 더 이상 전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얼마간 전도를 하지 않았더니 뒤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제는 목사님이 나에게 전도도 안 하던데요"라고 하면서 뒤에서 수군거립니다.
사람은 그처럼 많은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적인 시야, 넓은 시야, 큰 시야, 사랑하는 시야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 어떤 공동체로부터 관심이 멀어지게 된다면
우선적으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나의 태도 진단>이지 <상대방 정죄>가 아닙니다.
그런 원리가 너무 중요해서 마태복음 7장 12절을 우리는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한 마디로 딱 종합을 한다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남에게 어떻게 대접을 받고자 하면 너희도 남을 그렇게 대접하라."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가 사랑도 없어!>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말은 대개의 경우에 <나는 사랑이 없어!>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사랑과 헌신을 아는 성스러운 의식으로 차원 높게 살아야 합니다.
< 가능성 사고에서 사명감 의식으로 >
가끔 기도할 때 겸손이 지나쳐서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닙니다. 연약하고 부족해도 자신을 하나님의 사명적 존재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사명적 존재로 생각하면 우리는 정말 사명적 존재가 될 것입니다.
환경이나 다른 사람이 자기 인생을 결정하지 않고 내가 내 인생을 결정합니다.
우리가 착한 사람처럼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면 반드시 착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위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면 위인이 되고 신사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면 신사가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사명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에 청소년 문제가 거의 없다고 하는데 왜 그럴까요?
부모가 어렸을 때부터 자녀들에게 "너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고,
너는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는 존재이다."라는 의식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눈동자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자기 삶이 얼마나 존엄한가를 알게 됩니다.
부모나 주일학교 교사는 이것을 우리 자녀들에게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최대의 교육은 바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일깨워주고 사명적 존재로 만드는 데에 있습니다.
역사의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사명적 삶의 가치를 자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처럼 사명 가운데 자기 인격이 바로 세워진 사람은 헛된 일에 몰두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짧고 할 일은 많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그냥 낭비하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우리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산다면 우리는 충분히 소중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이제는 해야 된다는 사명감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목표로 삼고 능히 그 목표를 성취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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