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에 붙들려 사는 축복// 20010819
2001-12-07 23:38:21 read : 566
주일 낮예배// 마태복음 28장 16-20절
< 낮은 자리는 의미 있는 자리입니다 >
신학 공부 마치고 귀국 비행기를 탔을 때 약간의 기대가 있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폼 나는 좋은 자리 마련해 주셨을 거야!"
그러나 하나님은 폼 나는 좋은 자리는 주지 않으시고,
아주 밑바닥에서 개척하는 자리로 저를 이끄셨습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후원자도 하나도 없었고, 동역자도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교회 개척은 거의 무모한 일이었는데도 개척을 했으니 저도 모를 일입니다.
결국 높은 자리에서 폼은 하나도 못 잡고 낮은 자리에서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지금 그 당시의 상황에서 개척하라면 못할 것 같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젊은 목사의 패기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뒤 정신없이 5년을 힘써 달렸습니다. 여러 가지 캐리어가 붙었습니다.
책도 여러 권 저술했고, 신학교 강의도 여러 곳에서 했고,
몇 해 동안 MBC 신우회 지도 목사도 지냈고, 목회 경험도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5년만에 분당으로 목회지를 옮기면서 고생은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 캐리어도 많이 생겼으니 하나님께서 폼 나는 자리를 마련해 주시겠지."
그런데 하나님은 또 다시 밑바닥에서 저를 개척하는 자리로 이끄셨습니다.
그러자 폼 나는 자리에 대한 환상은 다시 안개 같이 사라졌습니다.
저도 한번쯤은 폼 나는 자리에 있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인데
하나님께서는 저는 아직 젊다고 생각하셨는지 계속 낮은 자리로 이끄셨습니다.
그래도 저는 만족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쓸만하다"고 보신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강한 사람이 아닌데 하나님은 비교적 저를 강하게 보신 것 같았습니다.
요즘 몸이 부쩍 약해진 느낌이 드는데 아직도 건강하다고 보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낮은 자리를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은혜 받는 자리는 항상 낮은 자리이기 때문에 더 많은 은혜가 있지 않겠습니까?
요즘 강대상에 올라가서 성경을 보면 가끔 성경구절이 안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눈을 한번 감고 보면 다시 초점이 살아납니다. 아직 건강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제 말씀을 준비하면서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작정했습니다.
"하나님! 낮은 자리도 좋습니다. 저의 삶을 통해서 복음만 전파되게 하시고,
저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큰 인물을 키우고 죽는다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 사명에 붙들려 사는 축복 >
사람이 사명에 붙들려 산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된 일입니다.
그 축복을 위해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 명령은 가장 중요한 명령이라고 해서 흔히 <지상명령>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명령을 주셨습니까?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이 명령은 아군 총 사령관이 적진에 포로로 붙잡힌 포로를 구해오라는 명령입니다.
그 명령에 절대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 큰 은혜와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동화 속 청개구리도 마지막 엄마 개구리의 마지막 부탁에는 순종을 합니다.
일생 청개구리처럼 살았던 우리이지만 주님의 지상 명령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 명령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중요한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신앙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시는구나!'라는 것을 느끼면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신앙은 성숙해져야 합니다.
그 신앙성숙은 '하나님을 위해 내가 존재하는구나!'라고 깨달을 때 주어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내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 현장으로 가십시오 >
주님은 사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확신을 주십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권세와 축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내포된 말씀입니다.
그러면 축복을 받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혼자 즐기면서 잘 살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계속해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라고 명령하십니다.
축복 받았으면 그 축복을 가지고 전도와 선교의 현장으로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전도와 선교가 없으면 무슨 맛이 나고 무슨 멋이 있을까요?
또한 그러한 목적이 없다면 믿는 사람에게 무슨 돈 버는 재미가 있을까요?
믿는 사람들이 자주 오해하는 것은 충만해야 전도하러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만을 기다리다가 소중한 시간 다 보내고 현장에는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현장에 가야 충만함이 있지 안방에는 충만함이 없습니다.
핍박받는 그 현장에 가서 예수님을 증거할 때 거기에 충만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가서 주려고 하는 사람에게 풍성함과 충만함을 주십니다.
자기 아들을 지극히 사랑했던 한 부모가 있었습니다. 그 부모가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이가 뭇 사람의 사랑 받는 아이가 되게 해주세요."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정말 아이가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랑 받기만 하고 사랑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 심령이 황폐해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어느 날부터 이 부모는 아들을 위한 기도제목을 바꿨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이가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할 줄 아는 자녀가 되게 해주세요."
정말 풍성한 은총을 얻기 원한다면 사랑 받기보다 사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공 목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목표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공의 의미는 '축복을 받고 가서 축복을 주는 것'입니다.
나의 축복으로 이웃에게 가서 그를 섬기는 것이 믿는 사람의 참된 성공입니다.
가끔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공부하라고 이렇게 다그칩니다. "배워서 남 주냐!"
배움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자기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도 배우는 것입니다.
치부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공헌하기 위해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버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과시하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입니까?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은 무엇입니까? 쓸 줄 아는 부자가 적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경건한 부자들은 돈을 벌면 재단(foundation)을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재산을 공익을 위해 쓰다가 죽을 때에는 재단이나 자선 단체에 바칩니다.
그처럼 나의 부를 이웃을 위해서 쓸 줄 아는 사람이 진정 성공한 사람이고.
나의 축복을 이웃에게 가서 나눠줄 수 있어야 그 축복이 진정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축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 축복을 가지고 이웃에게 가십시오.
오늘 우리는 광고 시간에 김재호 선교사님에 관한 몽고 사역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몽고 달항 지역에서 개척한 3개의 몽고 교회에 있는 2백명의 영혼을 돌보고
27명의 신학생을 돌보면서 차가 없어 너무 힘들어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듣고도 무심하게 지나친다면 우리 교회는 왜 이 땅에 존재해야 합니까?
우리 가족, 우리 교회가 중요한 줄 안다면 선교지의 영혼도 중요한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요, 선교하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선교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고귀한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갈 수 없어서 우리 대신 선교사들이 가서 수고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와 상관없다는 투로 무심하게 지내야 합니까?
우리는 그들의 수고를 잊지 말아야 하고, 그들의 눈물에 같이 동참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진정 의미 있는 축복이 되지 않겠습니까?
< 대화의 문을 여십시오 >
그런데 여기서 "가라!"는 명령은 몸만 현장으로 가라는 명령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저는 이 명령을 대화가 막힌 곳으로 가서 대화의 문을 열라는 뜻으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것도 훌륭한 선교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곳곳에서는 너무 대화가 막혀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많은 노인들은 무엇보다도 대화를 그리워한다고 합니다.
그분들에게 찾아가서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선교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대화를 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독처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돕는 배필로 하와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돕는 배필로 창조된 하와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가장 필요한 것은 대화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사람이 사랑의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먼저 대화를 요청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갈등이 생기면 항상 대화를 먼저 열려는 분이 축복의 손잡이를 잡게 됩니다.
그리고 대화할 때는 항상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가장 소중한 태도는 바로 잘 듣는 태도입니다.
조심 있게, 그리고 주의 깊게 듣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사람을 얻습니다.
대화가 안되는 경우는 말을 못해서가 아니라 서로 듣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영어 단어에 '듣는다'라는 말에는 hear 와 listen이라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hear는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을 말하고 listen은 귀를 기울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귀로 듣지 말고 귀를 기울여 듣고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오늘날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생기는 수많은 아픔의 신음소리는
말하는 기술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듣는 기술의 부족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먼저 주님 말씀 잘 듣고 선교하는 마음으로 사람이 사는 현장으로 가서
잘 들어줌으로 대화를 열어야 합니다. 그것도 오늘날의 중요한 선교입니다.
<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십시오 >
계속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우리는 이 주님의 명령을 들을 때마다 피가 끓는 정열이 있어야 합니다.
피가 끓어야 세계를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으로 정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피가 끓지 않으면 세계는커녕 내 이웃에게도 영향력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은 피가 끓어야 영향력과 감화력을 미치고 헌신하게 할 수 있습니다.
피가 끓는 사람 12명만 있으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역사는 증명합니다.
주님에게는 피가 끓는 12명이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혁명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사실이 우리에게 희망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유명한 연예인들은 수천 명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나 선교사들 그리고 평신도 지도자들은 몇 명과 씨름하면서
그들을 제자로 만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럴지 모릅니다.
그러나 숫자가 적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주먹을 불끈 쥐시고, 힘을 내십시오.
역사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상 몇 명의 제자와 씨름하는 사람들입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세계 50개 대형교회 중에 한국 교회가 23개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큰 덩치가 비계살이 되지 않고 근육살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힘을 더욱 효과적으로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씨름 선수들은 덩치도 크지만 근육살이 많기 때문에 큰 힘을 쓸 수 있습니다.
한국 대형 교회들은 씨름 선수와 같이 선교하는 근육살이 많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고 빛과 소금을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선교하려고 할 때 선교할 수 있는 축복도 주십니다.
그래서 나중에 보면 선교는 교회 재정의 낭비가 아니라 축복의 산실입니다.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을 얻고 가장 번성했을 때는 언제였습니까?
바로 선교사를 가장 많이 보냈던 빅토리아 여왕 때였다고 합니다.
지금 미국은 전세계에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가장 선교를 많이 합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미국이 당장 망할 것 같아도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교하는 교회가 될 때 하나님은 그 교회가 선교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 먼저 제자이기를 힘쓰십시오 >
그런데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먼저 주님의 참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해서 자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저는 직장을 포기했습니다. 저는 가족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포기한 분 중에도 제자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다른 많은 것은 포기했지만 자기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승리를 가장 방해하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환경'이 아니라 '자기'입니다.
어떤 분은 많은 것을 바칩니다. 그러나 자기를 죽이고 바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인간적인 꿈이 죽어야 하나님이 거룩한 비전이 살아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왜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까? 시간이 없고,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내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위기는 무엇입니까? 참 제자가 적은 것이 위기입니다.
십지가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제자가 아니라 어깨로 지는 제자가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없는 곳에 필연적으로 무엇이 나타납니까? 그것은 싸움입니다.
반대로 십자가의 능력이 있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무엇이 나타납니까? 화해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선교를 열심히 해도 이웃을 미워하며 싸우면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나오는 '모든 족속'은 인종적인 개념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모든 족속으로'라는 말은 모든 계층, 모든 부류의 사람에게 가야 한다는 말이고,
심지어는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가서 손을 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에게도 열린 마음을 가져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특히 교회는 어떤 경우에서도 가난한 자와 부자를 구분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명분으로도 사람이 사람을 얕보는 태도는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보면서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기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백인이게도, 흑인에게도, 황인에게도 다 똑같은 빨간 피가 나옵니다.
조금 무엇이 있다고 해서 자신이 흰 피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어떤 차별의식도 멀리하고 모든 이웃과 함께 하려고 해야 합니다.
왜 사람들을 차별하게 됩니까? 없는 사람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고,
있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남에게서 나의 부족함을 채우려 하지 말고,
내가 남의 부족함을 채우려고 할 때 그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처럼 남의 부족함을 채우려고 할 때 나의 부족함은 어떻게 채우겠습니까?
나의 부족함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영역이, 여러분의 고민의 영역이, 여러분의 기도의 영역이
나와 내 가족 중심에서 공동체 중심으로, 공동체 중심에서 나라와 민족 중심으로,
나라와 민족 중심에서 세계로 점점 넓혀져 갈 때 그것이 참된 선교일 것입니다.
< 제자 훈련의 중요성 >
그리고 주님께서 마지막 구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가르친 것을 지키게 하는 명령에서 우리는 제자 훈련의 중요성을 느낍니다.
제자 훈련은 삶의 훈련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구원받은 우리가 계속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 어떤 큰 교회 목사님의 안타까운 글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겨울 날, 눈이 교회 앞에서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행렬이 길었습니다.
맨 앞에서는 어떤 젊은 여자 집사가 아이들 둘을 데리고 오들오들 떨면서
교회의 셔틀버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버스가 행렬 중간쯤에 서니까 갑자기 뒤에 있는 사람들이 마구 올라탔습니다.
그날은 성찬식이 있던 날이었는데, 그날 교회 앞마당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목사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목사님은 서재에서 통곡을 했습니다.
초등학생들도 새치기를 하지 않는 세상에서 같은 교인끼리 그러면 되겠습니까?
인간의 연약성을 생각하면 이해는 되지만 이것이 우리의 슬픈 자화상은 아닙니까?
어떤 분은 교회의 안내 위원이 안 자리로 들어가 달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신앙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예배 중에 열심히 말씀을 받아 적고 있었습니다.
그처럼 설교는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 그렇게 행동을 하면 얼마나 착잡한 일입니까?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결승선을 통과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출발선을 출발한 것입니다.
이제 구원받은 자의 나머지 장구한 세월은 구원받은 자의 삶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았다고 끝나면 안됩니다. 그것으로 신앙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예배를 잘 드렸고, 설교를 잘 들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들은 후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판명될 것입니다.
설교의 은혜가 예배당 앞마당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정말 난처한 신앙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신앙생활의 핵심도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을 위한 힘의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연약한 사람을 돌보는 것,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
그처럼 따뜻한 손을 벌릴 줄 알고, 자상한 모습으로 사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있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구원을 천국자격증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항상 성도답게 살려고 힘써야 합니다.
<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그처럼 성도답게 살면 주님은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본문은 말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누구와 함께 있겠다고 하십니까?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특히 전도하고 선교하는 사람의 어려움을 알아주고 함께 있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끝날'은 시간적으로 죽음의 날만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고통스런 순간도 '끝날'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그때에도 말씀을 붙들고 영혼을 구하려는 사람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 주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은 이 세상의 어떤 축복보다 더 소중한 축복입니다.
여러분! 너무 문제 해결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주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심의 축복, 그리고 지속적 사랑의 관계는
일회성 문제 해결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고, 기도응답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일회성 문제 해결보다 주님의 함께 하심을 진짜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무속인들에게 갈 때 무속인들이 섬기는 귀신과 관계를 맺기 원해서 갑니까?
그때에는 단지 한가지 목적 때문에 갑니다. 그 목적이란 오직 문제 해결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일회성 문제 해결을 약속하지 않고 주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고,
그 다음에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문제 해결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깊이 하십시오.
물론 문제도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인격적 관계가 더 큰 축복입니다.
그 축복이 있다면 어려움이 있어도 이 세상은 살만한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세상 살기가 두렵고, 지겹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느끼지 못합니까?
그렇다면 주님과의 관계에 지금 적신호가 들어온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반대로 주님과의 관계가 견고하면 세상은 즐거운 안식처로 여겨질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구원받은 자로서 풍성한 삶이라는 보너스를 챙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풍성한 삶을 누리며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힘으로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어렵고 힘들지 몰라도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라면 세상은 그리 어려운 곳이 아니며,
세상이 주는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은 우리의 즐거움을 위한 준비과정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항상 사명적인 존재로서 주님과 함께 세상 끝날까지 승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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