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 (요한복음 13:1-11)
오늘부터 나오는 요한복음 13장부터 16장까지 말씀은 다락방 강화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직전에, 우리가 최후의 만찬으로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밤에 제자들에게만 해주신 비밀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밤에 예수님은 ‘나를 먹고 나를 마시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몸이 나를 위해 씻기셨고, 그 피가 내 죄를 대속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정말 예수님 믿는 사람 맞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 맞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발을 씻어주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변화되었습니까? 아니라면 가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입만 그리스도인이지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 사건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시고 명령하시는지, 가슴 깊이 깨닫고 순종하는 믿음이 있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1)
먼저 1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때는 예수님께서 보내신 마지막 유월절 전이고, 예수님은 곧 자신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것을 아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이제 코 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때가 시시각각 내 코 앞에 다가오고 있다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사람들은 죽음을 앞에 두면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됩니다. 여러분, 모래시계의 최민수가 사형집행을 눈앞에 두고 두려움에 떨면서 했던 말이 “나 떨고 있니?” 이런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돌봐주고 섬겨준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 그들을 사랑하시되 어떻게 사랑하셨다? “끝까지!”
여기서 ‘끝까지’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시간적인 끝(to the end)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십자가의 순간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한계의 끝(to the utmost)을 말합니다. 최대한으로, the full extent(NIV)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자기 목숨을 대신 내어주실 정도까지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서로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팔아서 돈을 좀 벌 수 있을까? 그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면서도 신실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형편이 좋거나 나쁘거나, 제자들의 마음과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변함없는 사랑(everlasting love)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첫째, 우리는 이 사랑에 감사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를 사랑하셨습니까? 제자들! 그러면 지금은 누구를 사랑하고 계십니까? 바로 나! 내가 바로 이 변함없고 무한한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 즉 예수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그 무엇도 나를 예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습니다. 누가 나를 협박하고 공격한다 할지라도, 또는 내가 어떤 죄를 지었을지라도, 진심으로 주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며,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는 한, 주님이 끝까지 나의 주님이 되어주시는 한, 그 어떤 것도 나의 구원을 무너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도 이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다음 말씀에서 보겠지만, 34절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도 우리에게 너희도 ‘끝까지’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랑을 하실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것보다 원수를 맺고, 그냥 원수로 지내는게 더 낫겠다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집어넣은 마귀(2)
이렇게 예수님은 끝없는 사랑을 하실 때, 마귀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2절에 보면 가룟 유다에게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집어넣고 있었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서 가룟 유다는 죄없다. 분명히 사탄이 가룟 유다에게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집어넣었으니까 사탄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냐? 마찬가지로 나도 죄없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사탄이 문제다! 여러분, 그렇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꼬신 뱀이 문제지 하와는 죄없다! 맞습니까? 아닙니다. 사탄이 더러운 죄의 생각을 집어넣어도 우리는 거부하고 거절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사탄과 인간의 합작품이지, 결코 사탄만의 단독범행이 아닙니다. 모든 범죄한 인간은 죄의 책임, 죄의 형벌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유다일까요? 첫째로 유다는 몸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마음의 중심은 예수님께 있지 않았던 제자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유다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지, 한번도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주님 앞에 신앙을 고백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자신을 위해 예수님을 수단과 도구로 삼을 뿐이었습니다. 둘째는 돈에 대한 욕심입니다. 유다는 예수님 일행의 돈 궤를 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안에 든 돈을 훔쳐가는 도적이었습니다. 회개할 일이 많은 회계였습니다. 셋째로, 사단이 유다를 택한 이유는 결국 세상에 대한 욕심이었습니다. 예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지저분한 곳에 병균들이 꼬이듯이, 이렇게 지저분한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사단은 예수님을 팔 생각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속을 온전한 믿음의 고백으로 채우고, 몸과 마음과 물질을 드려 주님을 사랑하고, 세상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도대체 저 사람이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고,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면, 사단의 먹이감이 되기 딱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인식(3-5)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자기 인식’을 새롭게 하십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또 새 마음가짐으로 인식하셨다는 것입니다. 3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무엇을 아셨습니까? 첫째,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을 아셨습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으신 절대 주권자이심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권세와 권한을 말하며, 심지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권한을 말씀하십니다. 둘째,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께로 오셨다는 것은 성육신을 말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본체가 하나님이라는 자기인식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실상은 모든 인생에게 존귀와 영광과 섬김을 받기에 마땅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너희는 내 앞에 무릎 꿇고 나만 섬기라’라고 외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흔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합니다. 처음 낮은 자리에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을 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점점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되면 나중에는 허리를 굽히지 못하고 목에 기브스를 한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아셨다면, 예수님도 섬김과 경배를 요구하실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렇게 하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4절.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절.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예수님은 이러한 자기 인식 후에 사람으로서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을 하셨습니다. 마치 종처럼,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닦아주신 것입니다.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고, 노예가 섬기기 위해 준비하는 태도로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도 종들에게 요구하지 않는 가장 비천하고 낮은 자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창조주께서 낮아지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모습!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날 수 없습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 밑까지 낮아진 종이 되신 것입니다. 중동 지방의 풍속을 보면, 종이 아니면 나이 어린 사람이 상전이나 연장자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발도 씻어 드리지 않았고, 연장자의 발도 씻어주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자기 발도 씻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누가 냄새나는 내 발을 씻어 준다면? 제자들은 아마 어쩔 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제자들은 서로 섬기지 않았을까요? 왜 예수님의 발도 씻어 드리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낮아지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섬김을 받고 싶고, 내가 높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상대방의 발을 씻겨 주면 내가 그 사람보다 못한 사람, 낮은 사람이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허리를 굽히면, 그 사람보다 낮아진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자존심과 교만이 제자들의 마음을 꽁꽁 묶어 두었고, 그 결과 최후의 만찬 석상은 발냄새가 진동하는, 인간의 썩은 자존심 냄새가 진동하는 만찬 자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발냄새를 맡고 말지 내가 낮아지지는 않겠다는 세상의 가치관이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런 모습이 없습니까? 낮아지기 싫어하고, 자존심을 앞세우고, 체면을 앞세우고... 그런데 그게 다 교만이고 사실은 인간 갈등의 대부분의 원인이 이 교만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의 이 잘못된 가치관을 바꾸어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정말 높은 자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책망이나 훈련을 통해서 주시지 않았습니다. “너희들 전부 집합! 이것들이 빠져가지고 선생님 발도 안씻어주고 말이야! 예루살렘 연병장 100바퀴! 오리 걸음! 아직도 섬기는 자가 높은 자란 사실을 모르나!” 이런 식으로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친히 낮아지셔서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본을 보여주심으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게 감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발을 씻져주실 때 제자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황송하죠! 몸 둘 바를 모릅니다. 그런데 진한 감동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내 발을 씻겨주셨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그런 예수님이 내 발을... 이분이 이런분이 아닌데, 이런 일을 하셔야 할 분이 아닌데, 그분이 친히 낮아지셔서 이런 일을 하시니까...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발 마사지 하는데 가서 돈 주면 발 씻어주고 시원하게 마사지까지 해줍니다. 그런데 감동은 없죠? 왜요? 내가 내 돈내고 하니까... 그런데 아~ 저분이! 저분의 나이와 지위와 경제력과 학력과 이런 것을 보면 여기에서 이런 일을 해서는 안될 사람인 것 같은데... 교회에서 화장실 청소를 하고,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기꺼이 하고,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곳에 갈 때... 그것이 예수님처럼 발을 씻어주는 삶이고, 그것을 본 사람들에게 마치 예수님을 본 것과 같은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내 발은 못 씻기십니다(6-8)
이렇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실 때, 다른 제자들은 묵묵히 예수님의 섬김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는 데... 6절.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베드로는 예수님께 왜 내 발을 씻기시냐고 소리쳤습니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세상 가치관,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지금은 내가 왜 이러는지 네가 모르지만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 8절.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여러분, 베드로가 왜 이렇게 강하게 반발했을까요? ‘예수님! 제가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려야 합니다’, 아니면 ‘제 발은 제가 씻겠습니다’가 아니라 “내 발은 절대로 못 씻기십니다!” 여기에는 다른 제자들을 추궁하는 마음이 숨어있는 겁니다. “이런 나쁜 놈들, 예수님이 자기 발을 씻기도록 가만 두는거냐? 이런 파렴치한 놈들. 나는 너희들과는 다르다!” 이런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동안 베드로는 그 마음 속에서 내내 ‘저런 나쁜 놈들, 저런 나쁜 놈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마음이냐~ ‘교만’입니다. ‘자기 의’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예수님께서 내게 해 주시는 것은 받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섬김, 예수님의 말씀에는 깊이 빠지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겠다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속내는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와 다르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8b.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내 사랑을 너에게 주고, 내 섬김을 너에게 주는데, 받기 싫다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한 마디로 “인연 끊자!” 이런 말씀입니다.
목욕과 발 씻음의 차이(9-11)
이렇게 예수님께서 ‘상관없다’고 말씀하시자 베드로의 태도가 순식간에 변합니다. 9절.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내가 네 발을 씻어주지 않으면 너와 나는 상관없다”라고 하시니까, 처음에는 발도 못씻게 하더니 이제는 자기의 ‘온 몸’을 씻겨 달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양극단을 오가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언제는 기분 좋아서 신나게 일하다가, 언제는 이젠 나 안한다... 그 뿌리가 무엇입니까? 교만이고 자기 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주십니다. 1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목욕한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목욕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여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하며,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중생이라고 하며 우리 전 인생에 걸쳐 딱 한번 일어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의 사건입니다. 여러분, 목욕하였습니까?
그러나 목욕했다고 항상 깨끗한 것은 아닙니다. 밖에 나가서 일을 하다보면 손과 발이 더러워집니다. 그럴 때 우리는 목욕은 안해도, 집에 들어와서 손과 발을 깨끗이 씻지 않습니까? 이것을 발을 씻는 것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거듭난 이후에도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매일의 삶 속에서 범죄하게 됩니다. 이럴 때 날마다 자기의 모습을 돌아보며,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 보혈로 용서의 씻음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이 성화는 우리의 일생동안 계속되는 성도가 예수님을 닮아 거룩해져가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와 목욕해야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또한 이렇게 새생명을 얻은 자는 날마다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피로 발씻음을 받는 성화의 생활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발 씻어주시는 일이 없는 사람은,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다 이미 목욕했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의 고백을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한 사람은 안했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가룟 유다! 가룟 유다는 한 번도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른 적도 없고, 신앙의 고백을 한 적도 없습니다.
결 론
결론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나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둘째, 진정한 믿음이란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일을, 시키시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는 사실입니다. 행동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수용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내가 하고, 생색을 내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네게 하신 것을 먼저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주시면 받는 것이 겸손입니다. 베드로와 같은 교만과 자기 의의 신앙생활을 버려야 합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양극단으로 나타납니다. 열심히 일하다가, 손 놓고 아무 것도 안합니다. 균형잡힌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십자가와 부활, 말씀과 기도의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셋째, 먼저는 목욕을 해야하고, 그 다음은 발을 씻어야 한다. 목욕은 구원을 말하고, 발 씻는 것은 회개를 말합니다. 우리는 늘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를 씻는 생활을 해야합니다. 나를 향한 예수님의 끝까지의 사랑을 확신하시고, 예수님께 발씻김을 받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김성기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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