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태론이 왜 이단인가?
이인규
삼위일체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삼위일체는 우리가 믿는 신앙의 대상인 신(神, God)에 대한 교리이다. 삼위일체는 인간의 이성적인 이해를 위한 교리가 아니라, 성경을 그대로 정리하고 요약한 교리가 되어진다. 그래서 버뱅크는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심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간혹 사람들은 삼위일체는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교리라고 비난을 한다. 주로 이단들이 그런 비난을 하므로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견해에 동조를 한다. 그러나 교회사를 살펴보면 먼저 교회에 이단적인 주장이 나타나고, 그것을 반박하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정통신학이 정립된 것을 볼 수 있다.
삼위일체도 역시 아리우스라고 하는 이단이 나타나 예수가 하나님과 유사본질이며,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다가 니케야회의를 통하여 아타나시우스와 토론 끝에 이단으로 정죄를 당함에 따라 삼위일체의 초석이 정립된 것을 알 수 있다. 니케야회의는 아리우스가 장로로서 처음부터 정치적으로 동조세력이 많았으며, 아타나스우스는 집사로서 알렉산더감독의 서기였으나, 알렉산더감독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토론을 참여하게 되었다. 결국 아타나시우스는 성경적으로 토론을 승리함으로서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되고 만다.
그동안 기독교 교회사를 통하여 이 삼위일체 교리는 소위 이단이라고 불리는 교회에게 엄청난 공격을 받아왔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언제나 정통신학에서 밀려나 본 적이 없으며, 이단들의 공격과 비난에서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삼위일체가 가장 성경적인 교리이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삼위일체적인 신앙고백은 이단을 구별하기 위한 시금석으로 사용되어져 왔던 것이다.
삼위일체가 이해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삼위일체는 인간의 이해를 위한 논리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성경을 그대로 정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성부하나님과 함께 예수도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성령도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또한 삼위간에 상호교류와 인격적 구별을 말하고 있다.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그 한문적인 용어는 사실 원래의 의미와 좀 다르다. 한문으로는 위(位)가 셋이고 체(體)가 하나라는 용어이지만, 실제는 그런 한문의 문자풀이적인 뜻이 아니다. 삼위일체는 인격(페르소나, person)이 셋이고 본질(우시아, essence)이 하나라는 것이다. 즉 인격적으로는 상호교류가 가능하고 구별되는 셋이지만, 그 신적 본질은 하나라는 것이 삼위일체가 된다.
삼위일체의 많은 이단교리를 크게 구별하자면 단일신론, 양태론, 삼신론, 다신론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장 착각하기 쉬운 교리가 바로 양태론이다. 이 양태론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매우 성행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양태론을 결코 용납하면 안된다. 2000년 교회사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이들과 싸워왔듯이 우리도 양태론과 싸워야만 한다.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맥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양태론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부터 살펴보자....
(1) 양태론의 정의
양태론이란 결국 단일신론이다.
즉 성부하나님이 직접 육신을 입고 예수로 와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오순절에 성령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한다. 즉 동일한 한분의 인격(위격)의 하나님이 세가지 양태로서 나타나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사역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정통삼위일체가 세 인격(위격)과 한 본질(본체)을 말하는데 반하여, 양태론은 한 인격과 한 본질을 말하므로, 그들이 말하는 삼위일체는 사실 실제적인 삼위라고 볼 수 없다.
양태론적인 설명을 잘 표현하는 비유가 곧 “한 사람의 세가지 사역적 직분”과 “물과 얼음과 수증기”에 대한 비유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사람이 교회에서는 장로이며, 집에서는 아버지이고, 회사에서는 사장이라는 비유는 매우 적절한 양태론이 되어진다. 그것은 삼위를 단지 사역적으로 구별할 뿐, 인격적으로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동일한 물이 기후나 조건에 따라 수증기와 얼음으로 형태를 바꾸어 나타난다는 주장도 양태론적인 이해와 가깝다. 동일한 물이 세가지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비유들은 삼위일체를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키는 결과가 되므로 가급적 사용하지 말아야만 한다.
(2) 양태론의 오해
많은 성도들과 심지어 목회자들까지도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양태론적인 오해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필자는 두가지로 구별하고 싶다.
① 삼위일체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어서 양태론적으로 이해함
② 양태론에 대해서 정확한 지식이 있지만 고의적으로 양태론적인 주장을 함
1번의 경우 정확한 지식을 알려 줌으로서 그것을 수정하도록 가르쳐야만 한다. 평신도는 이렇게 이해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할지라도, 신학교육을 거친 목사가 이것을 착각한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것이 실수나 착각이라면 수정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2번의 경우는 우리는 이단이라고 불러야만 한다.
만약 2번의 경우를 인정하거나 방치한다면, 기독교의 근본 교리가 모두 뒤바뀌게 되기 때문이다. 첫번째 단추를 잘못 꿰면, 마지막 단추를 채울 수가 없어진다. 이 양태론은 숱한 성경적인 모순과 오류를 초래하며, 단 한번도 기독교 교회사에서 정통교리로 인정받았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왜 양태론이 비성경적이며, 왜 성경적인 모순과 오류를 초래하는지를 살펴보자.
(3) 양태론의 오류와 모순
①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아버지에게 기도한 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도는 단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도였단 말인가?
②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누구에게 바쳐진 제물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였단 말인가?
“하나님은 불사(不死)의 존재”라는 성경이 오류가 된다. 그래서 양태론은 성부수난설이라고 불리워졌던 것이다. 딤전6:16은 "오직 그[하나님]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③ "아버지여 내 영혼(spirit)을 아버지에게 부탁하나이다"(눅23:46)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하신 이 말씀은 누구에게 자기 영을 부탁한다는 것인가?
④ 다윗이 기록한 시편110:1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되...."라는 구절은 신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을 구별하는 의미로 재조명 되어진다(마22:43). 다윗이 본 구별된 예수와 하나님은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110:1)
이 시편의 기록은 신약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직접 인용하셨으며, 다윗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구별되었다(동시대에 공존하셨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구절이다. 예를 들자면, 신약에서 마22:43을 보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기록하고 있다.
⑤ 보혜사이신 예수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준다는 성경말씀은, 다른 보혜사가 곧 동일한 보혜사라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문자 그대로 구별된 인격으로 다른 보혜사를 말하는가?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면서 왜 3인칭 대명사 “그”라고 하셨는가?
⑥ 사람과 한 분 하나님 사이의 또 다른 한분이신 중보자 예수가 있다는 성경말씀(딤전2:5)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일한 인격이라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와 구별되는 인격으로서의 예수님이 중보자로서 한 분이라는 것을 가르키는가?
⑦ 성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으며,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 인격이 모두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인격인가? 또 요한12:28의 예수님의 지상간구와 하나님의 하늘로부터의 소리는 무엇인가? 또 변화산에서 하늘로부터 들려오던 하나님의 소리는 예수님 자신의 소리인가?
⑧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은 "예수님"을 보았다. 이 삼위는 모두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하나의 인격인가?
⑨ 예수님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면, 지상에 사역을 하시면서 주기도문에서 왜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는가?
⑩ 사도행전 10:37-38 성경본문...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며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7-38)
"하나님"이 "예수"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이 동일한 한 실체라면 성경본문은 무엇인가?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에 있는 예수에게, 자신의 안에 있는 성령을 부어주셨는가? 다음은 한 인격이라는 주장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2:33)
(4) 양태론자들의 재림과 천국에 관한 중대한 오류 :
양태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단순한 양태론자도 있다. 한마디로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적인 지식이 없는 무지의 소산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양태론자들은 심각하고 근본적인 오류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예수님이 되었고, 예수님이 성령이 되어 버리셨다고 한다면, 종말적으로 예수의 재림은 누가 오느냐는 심각한 오류가 나타난다. 즉 양태론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인격적이며 가시적, 신체적인 재림을 부정하여야만 하며, 예수님이 이미 성령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영적 재림, 내적 재림을 주장하게 된다. 과연 양태론자들은 예수의 재림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가?
구약의 하나님아버지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예수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오순절 이후에 성령으로 오셨는데, 그 성령이 또 다시 신체적으로 변화하여 재림하는가?
아니면 여호와의 증인이나 신*지와 같이 예수가 영적으로 재림하신다고 주장할 것인가? 혹은 지방교회와 같이 이미 예수님이 성령으로 재림하셨다고 주장할 것인가?
이와 같이 양태론은 첫단추인 신론을 잘못 꿰메어서, 마지막 단추인 종말론을 꿰메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양태론자들은 재림과 부활, 천국에 대한 주장이 다르다.
양태론에 의하면, 하나님이시며 예수이신 그 분이 성령으로 성도들에게 와있으므로 실제적인 재림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 되며, 더 이상 하늘보좌에는 하나님과 예수가 계시지 않게 된다. 즉 그들에게 천국이라는 개념은 실제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래서 양태론자들을 살펴보면 하나님나라, 천국의 실존적인 개념을 부정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성경이 말하는 사후천국의 개념과 하늘보좌의 개념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다. 실제로 지방교회와 같은 양태론자들은 사후천국과 하나님나라를 부정한다.
- 죽으면 천당(국)간다는 말은 이교도의 가르침입니다. 사탄이 한 최대의 거짓말 중 하나는 '예수 믿고 죽으면 천당(하늘 어디엔가 있는 집) 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경근거가 전혀 없는 거짓말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이교도적인 거짓 사상이 버젓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가르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이런 비성경적인 가르침은 믿음 생활의 초점을 흐리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 목적을 변질시킴으로 참된 성도들 생각 속에서 말끔히 씻겨져야 할 누룩인 것입니다.(지방교회 게시판의 글)
- 일반적으로 말해서 기독교는 사람들이 죽으면 주 예수를 믿는 한, 그들에게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며, 그들이 일단 죽으면 그들은 천당에 갈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그러나 여러분이 왕국의 비밀을 안다면 여기에 커다란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위트니스 리의 왕국, 315쪽)
그렇다면 권신찬계열의 구원파의 천국관에 대해서 살펴보자
(권신찬교회의 홈페이지< 질의와 응답에서)
143. 천년왕국과 천국과 교회
천국과 하나님나라와 하늘나라는 성경에 구별되어 있다. 천국은 일반인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듯이 죽은 후에 가는 곳이 아니다.
-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천국)
하나님나라와 천국과 하늘나라가 다르다. 하나님나라(교회), 낙원, 천국(지상천국, 천년왕국)은 시작과 끝이 있다. 하나님나라는 거듭난 자들 즉 영생을 얻은 자들이 성령과 함께 하는 교회이다.
양태론자에게 하나님나라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있는 것이 된다. 그들에게 성령이 있는 성도와 교회가 곧 하나님나라가 되는 것이다.
또한 양태론자의 입장에서는 예수의 우주적이며 가시적이며 신체적인 재림도 부정하게 된다.
- 주님의 오심은 갑작스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주 예수님께서 오실 것이지만 여러분이 생각한 대로는 아닐 것이다. 주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안에서부터 오실 것이다. 여러분은 그분이 갑자기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이 여러분으로부터 오실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위트니스 리, 왕국, 329쪽)
결국 그들은 사후천국을 부정하게 되고, 하나님나라를 지상에서 이루는 것이 된다. 더욱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바쳐진 예수와 그 제물을 온전하게 제물로 받아주신 하나님의 구별조차 못하므로 대속적인 개념마저 달라진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바쳐졌으며, 하나님아버지께서는 그 제물을 온전히 받아들이심으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로 하셨다는 성경의 기록을 부정할 것인가?
과연 누가 십자가에서 죽었는가?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불사(不死)의 여호와 하나님이 스스로 죽었던 시간이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 희생제물은 누구에게 바쳐진 것이었는가?
베뢰아 출신인 인터콥 최바울도 양태론을 주장한다
- 아담과 하와의 범죄 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로 그 ‘여자의 후손’이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분이 다름아닌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이 어찌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육신의 옷을 입고 직접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이 직접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최바울, 세계영적도해, 35쪽)
-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직접 영으로 증거하시면 되지 않을까요"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 육체를 입고 오셔서 천국복음을 증거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해진 성도들의 육체 가운데서 임하셔서 천국복음을 증거하게 합니다(왕의 대로, 75쪽)
인터콥 최바울은 아예 노골적으로 “신들의 전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과 사탄이 사람으로 와서 전쟁을 한다고 표현한다.
- 사단은 어떻게 어둠의 역사를 이루어갈까요? 사단은 자신의 제자들을 내세워서 자신의 지배체제를 구축해 갑니다.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을 주시고 역사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단도 자신의 제자를 통해 일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육체로 이 땅에 오셨고, 사단도 육체(뱀)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온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육체를 가진 존재, 즉 인간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단이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가히 ‘신들의 전쟁’을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왕의 나라, 21쪽)
그런데 양태론자인 최바울의 천국관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역시 그는 천국은 비밀이라고 하며 기독교가 모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양태론과 이원론에 근거한 “신들의 전쟁”이 천국의 비밀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감각없는 천박한 기독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천국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은지 5년, 10년 됐어도 아직 천국의 비밀을 모르는 신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기독교 지성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대부분 영적 전쟁에 관한 기초 지식도 없는 종교적인 기독교인들입니다.(최바울, 왕의 대로, 21쪽)
- 천국의 비밀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연구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박사학위를 10개쯤 가졌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최바울, 왕의 대로, 15쪽)
- 그런데 언젠가부터 기독교는 이방종교의 영향으로 묵상, 성찰, 도덕의 종교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물론 기독교 내에 그런 요소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이 땅 지상의 역사에 도전하고 저항하며 변혁시키는 역사가 강력한 천국운동의 본질입니다(최바울, 왕의 대로, 46쪽)
- 이것이 하나님나라, 천국의 비밀입니다. 우리는 천국으로 간다고 생각했는데, 천국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작동하고 성장하며 팽창합니다. 엄청난 운동성이 있습니다. 이 천국의 비밀을 누가 알겠습니까? (최바울, 왕의 대로, 18쪽)
-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관념이 아니라, 자라나고 성장하며 결실을 맺어가는 실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운동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천국에 간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최바울, 왕의 대로, 16쪽)
인터콥 최바울에게 하나님나라는 성도들이 이루는 지상의 나라이며, 그것이 곧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로 온 신들의 전쟁이며, 기독교가 모르는 천국의 비밀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양태론을 주장하는 베뢰아의 천국관은 무엇일까? 베뢰아가 말하는 천국과재림은 다른 양태론자와 동일하게 내면적인 천국과 재림을 주장한다.
- 오늘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며 천국이 가까웠다고 전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오늘날은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주께서 죄를 담당하셨기에 생명이 들어왔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미 내 속에 들어와 계십니다. 그가 죽으시고 하늘로 들어가신 후에는 천국이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천국은 예수그리스도 자신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뢰아원강, 2005년, 771쪽)
(5) 누가 양태론자인가?
양태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은 초대교회의 사벨리우스(AD 250 - 260)라는 사람이었다. 그 외에도 프락세아스, 노예투스라는 자들이 있었으며, 캘빈과 토론을 하였던 세르베투스도 양태론자였고 스웨덴보그도 양태론자였다. 특히 지방교회의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도 양태론자이다. 특히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은 성부수난설이라고 불렸는데, 결국 십자가에서 죽은 분이 성부하나님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방교회 계열과 베뢰아 계열의 교회들, 즉 다락방, 구원파는 양태론을 주장한다. 지방교회 계열은 지방교회와 대구교회(이현래)가 있으며, 최근에 지방교회와 유사한 주장을 하는 곳들이 많다. 특히 베뢰아 출신들은 양태론을 주장한다.
사벨리우스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유일성을 구속사 가운데 계시하는 세 얼굴 또는 세 역할로 표현했다. 인간이 육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듯, 신의 본질이 가지는 세가지 면도 이와 같다고 말하였으며, 태양과 열과 광선은 신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비유라고 하였다.
정통신학이 말하는 양태론적인 정의를 살펴보자.
- 이 사실은 성경에서 명백히 가르쳐주고 있고 또 일반적으로 합의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부인하고 있는 사벨리안 체제는 결코 어떤 보편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성부에 의해서 보냄을 받고, 그에게서 오며, 그에게로 돌아가고, 그의 명령을 받고, 그의 뜻을 행하고, 그를 사랑하고, 그에 의해서 사랑받고, 그에게 기도를 하며, 당신이란 대명사를 사용하고 또한 그에 대해 언급할 때 그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신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상대적인 칭호를, 아버지와 아들에 역시 포함되어있다.(하지 조직신학 262쪽)
- 싸벨리우스파는 삼위를 단순히 신적행위, 혹은 신적 현현의 많은 형태로 보고 하나님은 창조와 율법의 수여자로, 성육신에서는 성자로, 중생과 성화에서는 성령으로 각각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삼위는 한위로 축소되어 버렸다.(루이스벌콥, 기독교 신학개론 87쪽)
- 시대에 따라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 위가 아니라 다만 다른 때에 다른 형태로 나타나시는 한 위라고 가르쳐왔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나타나시고, 복음서를 통해서는 같은 분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보는대로 아들로 나타나시고, 오순절이후에는 같은 분이 교회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상권 347쪽)
-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한 둘째 이단은 제4세기에 나타난 사벨리우스파 혹은 양식적 단일신론 이단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한 형태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는데 관심이 있었으나, 그 기본적인 관심은 기독론, 즉 그리스도의 충분한 신성을 주장하는데 있었다. 이 견해는 양식적 단일신론이라 불리워졌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3위를 하나님 현현의 세 양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란 명칭은 단순히 신적본체가 자신을 나타날 때의 세 형상을 가르키는 것이라 하였다. (기독론에 나타난 이단사상. 신복윤교수)
- 프락세아스(Praxeas)는 알려지지 않은 이단으로서 어떤 학자들은 그를 사벨리우스(Sabellius)라고 보기도 하지만, 프락세아스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서머나의 노예투스(Noetus of Smyma. 150년경에 활동)의 가르침에 훨씬 가깝다. 프락세아스는 삼위일체의 위격사이의 구별은 진짜 구별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세 이름은 구속의 형태를 설명하는데는 약간의 가치가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구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부라는 이름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며, 성자라는 이름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활을, 그리고 성령이라는 이름은 성화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 모든 작용의 역사자는 유대인의 성경에 나오는 그 한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성육했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53-154쪽)
- 이 형태의 군주신론은 사벨리우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인데, 그는 하나님 안에 세 인격이 잇는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세 개의 양식이나 형태로 자신을 현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창조자이며, 똑같은 아들로서 하나님은 구속자로 성육신하여 자신을 드로내었다. 한편 성령은 똑같은 하나님인데 교회의 영적인 삶 속에 드러났다. 이것은 인격의 삼위일체가 아니라 단지 현현의 삼위일체임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이 이론은 기본적으로 단일론이지 삼위일체론이 아니다(웨슬리안 조직신학, 세복, 149쪽)
즉 정통삼위일체에서는 성부도 하나님이고, 성자도 하나님이며, 성령도 하나님이지만,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가 아니어야만 한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한분 하나님이지만, 인격적인 측면으로는 서로 구별되며 상호관계가 가질 수 있는 셋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I and the Father are one.”
웨슬레는 사벨리우스나 아리우스의 설을 아래와 같이 반박하였다. 요한10:30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라는 본문을 웨슬레는 are가 복수형이다. (are)는 인격의 복수를 실증함으로서 사벨리우스는 반박하는 반면에,(one)은 하나님 안에 본성의 일치를 실증함으로서 아리우스를 반박한다.”(웨슬레 조직신학, 성광문화사, 50쪽)
삼위의 사역적인 구별은 다음 성경에 정확히 나타난다.
즉 For Jesus, By Spirit, To Father 를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한 성령님에 의해서 아버지께 나아가느니라”(엡2:18)
For through him we both have access to the Father by one Spirit.
이러한 양태론은 그대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과연 자신이 신학적인 지식이 부족하여 몰라서 그러한 주장을 하였는지, 아니면 자신이 배웠던 양태론이 옳다고 생각하여 그런 주장을 하였는지 분명히 밝혀야만 한다.
과거에 양태론적인 주장을 한 적이 있다고 비난을 받은 목회자는 반드시 자기의 현재 견해를 정확히 밝히고, 과거 양태론을 주장한 적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사과하고 수정을 하여야만 한다.
이러한 양태론은 여러가지 다양한 주장으로 변형되기도 하여 알려져 있지만, 결국 “한 위격의 시간적 차이를 둔 세가지 양태”라는 방식은 동일하다.
그렇다면 누가 양태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인지 그 증거와 함께 살펴보자.
(6) 양태론적인 주장들
대표적인 양태론자로서 지방교회의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살펴보자
-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은 세 개의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가지의 세 단계>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 하나님의 세 방면>이다. 예를 들어 얼음은 물이 되고 물은 수증기가 된다. 즉 <한 실체가 세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실체가 수증기의 상태에 이를 때에 우리가 호흡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은 성령이 받으며, 성령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그분을 우리 안으로 가져다 준다. 하나님은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설명하고 묘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예들이 있다.(위트니스 리, 하나님 297쪽)
-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처녀의 태 속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아홉달 동안을 머무셨다. 이렇게 해서 그분은 인성을 그분의 피난처와 거처로 취하셨다. 분명히 그분의 성육신은 그분의 과정이었다. 두 번째로 그분은 삼십삼년 반이라는 인생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이 땅에서 생활하셨다. 이것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세 번째로 그분은 죽음 안에 들어가서 무덤과 음부를 포함한 죽음을 통과하셨다. 네 번째로 그분은 삼일후에 사망과 음부를 걸어 나오셔서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 분의 죽음과 부활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위트니스 리, 세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52-53쪽)
-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주셨다. 이 아들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지 말라.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이 아들이 바로 다름아닌 그 <하나님 자신>이다. 당신이 아들을 영접할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당신의 기도에서 당신은 그분을 아들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 부른다.(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큰 비밀. 18-19쪽)
-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아들이 아버지이고 주님이 그 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들이 충고할수록 나에게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할 힘이 더 생긴다. 나는 성경에 따라 아들이시고, 사람이 되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그리스도가 오늘 아들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 그 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위트니스 리, 성령42쪽)
그렇다면 베뢰아 김기동목사의 주장을 살펴보자.
- 비록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사역에 시간적인 차이는 있으나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는 성령이 오시지 않았고 또 아버지의 뜻이 없었다면 아들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중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김기동, 성령을 알자, 46-47쪽)
삼위가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사역을 하였다면, 구약의 하나님과 공존하였던 하나님의 신, 여호와의 신은 무엇인가? 김기동목사는 구약의 성령의 임재와 사역 자체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신을 천사라고 주장하게 된다.
- 구약에서 아브라함이나 모세에게 나타난 여호와가 천사였던 것처럼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느니라고 한 말은 하나님이 그의 천사들로 지키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사자(신)는 그의 천사를 말합니다. (김기동, 성령을 알자, 65페이지)
-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예수 안에 계신 성령은 어느 장소에도 어느 사람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과거 선지자들도 성령을 힘입었고 요한도 “모태로부터 성령충만함을 입어”라고 했으나 그들은 성령의 권위로 외투를 입고 있듯 힘입었던 것이지 내주하여 임하신 것은 아닙니다.(김기동, 성령을 알자, 76쪽)
- 그 하나님은 본질을 말하는 것이기에 아버지이시며, 이 분이 나타났을 때는 본체이시며 영으로 오셨을 때에는 본영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나 영들이 많기에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실 때는 성령이십니다(김기동, 성령을 알자 88년도, 74쪽)
우리나라의 양태론은 주로 지방교회와 베뢰아를 통한 두가지 방법으로 전파하였다고 보여지는데, 지방교회는 배타적인 형제교회의 한 분파와 관련이 있고, 그 양태론은 구원파와 베뢰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 우리나라에는 베뢰아에서 베뢰아 아카데미를 수료한 출신의 목사들이 많다. 그들 많은 목사들이 또한 양태론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렇다면 구원파의 권신찬과 이요한계열의 양태론을 확인하여보자.
(이요한목사의 동영상 자료 요약)
1. 아버지가 어떻게 아들이라고 불리는가?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 자신인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다.(이요한은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반복하여 강조한다.)
2. 하나님과 동일하신 예수님은 원래 기도를 하실 필요가 없는데, 우리를 위해 기도를 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3. 예수님은 구약에서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고, 33년은 말씀으로 오셨으며, 죽고 부활하여 성령으로 오신 것이다.
4. 나(이요한)는 사람은 하나인데 세 역할을 한다. 교회에서는 목사이고, 집에 가면 여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고 아버지도 된다. 이렇게 목사도 되고, 남편도 되고, 아버지도 되지만 사람은 몇사람인가? 한 사람인 것이다. 이런 것은 잘 모르면 그냥 놔두자......(이요한목사의 동영상. 예수님이 하나님인가?)
말할 필요도 없는 명백한 양태론이다.
- 삼위일체가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쉽게 몇 가지 비유를 들어보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 잎 클로버는 세 잎으로 구별되어 있지만 동시에 하나입니다. 가로, 세로, 높이는 서로 구별되지만 체적 자체로는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나무는 뿌리, 줄기, 가지로 삼분되지만 결국 하나입니다. 또 이것을 전기에 비유해 보면 전기를 전구에 연결하면 빛이 나고, 전열기구에 연결하면 열이 나며, 동력에 연결하면 큰 힘이 나옵니다. 전혀 나타나는 모양이 다르지만 전기는 하나입니다. 물도 그렇습니다. 흘러가는 물이 겨울에는 고체가 되고, 이것을 다시 가열하면 기체가 되어 수증기로 날아갑니다. (대한예수교복음침례회, 이요한)
위의 비유는 전형적인 양태론적인 비유이다.
- 또 마태복음 28장 19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하신 말씀에서 ‘이름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하지 않고, ‘이름’이라는 단수를 사용한 것도 삼위가 세 분이 아닌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삼위가 동시에 나타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각각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면 그래도 우리의 이해의 범위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동시에 세 분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니까 이해하기도 어렵고 설명하기도 어려워집니다.(대한예수교복음침례회, 이요한)
그렇다면 이요한이 구원파의 교리를 공부하고 배웠던 권신찬목사의 삼위일체론은 무엇일까? 권신찬목사는 지방교회의 교리를 주장하다가 장로교단에서 제명을 당한 목사이다.
이 자료도 권신찬목사의 교회(기독교복음침례회)의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것이다.
-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삼위일체 하나님)
물론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다. 그러나 요한10:30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했고, 이사야9:6의 말씀(....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사도행전20:28(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했으니 예수님과 하나님이 한분이시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독교복음침례회 홈페이지)
- 하나님과 성령과 예수님은 하시는 역할로는 세분(삼위)이지만, 근본은 한분(일체)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복음침례회 홈페이지)
삼위는 역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삼위는 인격적으로 구별되어야만 한다. 권신찬과 같이 한분의 세 역할을 주장하면 그것은 양태론이 된다. 삼위를 역할로 표현하는 것을 사역적삼위일체(경륜적삼위일체)라고 말하는데, 곧 양태론을 뜻한다.
이요한목사도 역시 자기가 교회에서는 목사, 부인에게는 남편, 자녀에게는 아버지라고 삼위일체를 사역적으로 설명하며 물과 얼음과 수증기, 빛과 열과 해로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사역적인 삼위일체는 한 인격의 세 양태이므로 양태론이다.
또 권신찬목사는 삼위일체를 인간의 영과 육과 혼으로 비유한다. 이것은 바로 양태론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벨리우스의 주장이었다.
-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영과 혼과 몸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마치 3위의 하나님처럼(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래서 사람도 삼위로 되어 있습니다. 3위는 나눌 수 없습니다. 그 하는 기능은 각각 달라도 3위는 나눌 수 없습니다.(권신찬교회 홈페이지)
소위 베뢰아계열이라고 밝혀진 이단교회 외에 베뢰아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한 목사로 알려진 기침교단의 Y 목사, 예장합동의 L 목사, 너무나 유명한 부흥목사 J 목사, 대형교회의 H 목사에게도 양태론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한때 이단성의 문제로 말이 많았던 침례교단의 Y 교회 Y목사의 주장을 확인하여보자.
- 성령과 예수와 아버지는 동일한 1위이십니다. 오해하면 안돼요. 자 - 아버지가 영으로 계실 때가 뭐요 ? 예 성령이요 아들이 영으로 계실 때가 뭐요 성령이요 성령은 성령으로 계실 때를 거룩한 영 성령이라고 말 한다 이 말여 육신을 입고 왔을 때는 아들이요 육신을 벗고 영으로 계실 때는 성령이라 이 말이여 내가 너희 안에 있겠음이라 - 세상 끝 날까지 너희 안에 있겠음이라- 어떻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삼위일체라고 말하면서...성령은 그렇게 무시합니까 ? 이 분이 한 분이신데 이 분이 영으로 계실 때는 아버지요 육신을 입었을 때는 아들이시오 또 육신을 벗고 부활하시고 영혼일 때는 또 근본이 성령이신데 어찌 이분을 이렇게 무시 하냐 이 말여
Y 목사는 몇몇 장로교단에서 이단성의 문제가 있다고 발표되었다가 모두 해제되었으며, 현재 한 장로교단에서만 아직도 이단성이 있다고 발표되고 있는데, 그는 최근에도 양태론을 설교하고 있다.
또 L 목사는 베뢰아 계열로 분류되어 한때 교단에서 제명을 당하였다가, 공개 사과를 하고 다시 회복되었는데, 최근에 그가 이름을 개명하고 기독교 방송국에서 요한복음을 가르치는 동영상에서 요한복음의 말씀이 예수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가 물의를 일으켜 도중하차를 한 적이 있었다. 또 그에게 영향을 받아서 베뢰아와 유사한 주장을 한다고 알려진 류광수목사의 다락방 양육교재를 살펴보자. 류광수목사의 다락방은 이미 이단으로 발표되었지만 그가 양태론을 주장하였다고 발표된 적이 몇사람뿐이다. 그러나 그가 만든 양육교재를 보면 명백한 양태론이 기록되어 있다.
(기본멧세지- 영접의 열두가지 의미)
영접- 이 말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 내주한다. 그러니까 이 말을 이해해야만 영접이란 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영접시킨다는 말이 보통 말이 아니지요. 신약에서는 영접이라는 말을 요한복음 1장에서 썼는데 구약에서는 쓰지 않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구약에서는 전부 예언이고, 그림자인데 신약에 와서 썼습니다. 구약에는 성령이 임했다. 동행했다. 이 말은 썼지만 성령의 내주란 말은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고 난 뒤에 쓴 단어가 성령의 내주입니다. 그렇지요? 이 말을 이해해야만 성령이 우리 속에 오셨다는 이 말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오셨다. 말씀이 육신을 입어 오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뭐라고 말하느냐? → 성령의 내주! 이것을 이해해야 이해되는 말입니다. 주님이 여러분 속에 오셨다는 그 말이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뭘 주셨으니?- 권세를 주셨으니...
과연 예수님의 성육신이 성령의 내주를 말하는가?
이러한 주장은 위트니스 리의 주장일 뿐이다.
(기본멧세지 -영접의 열두가지 의미)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성부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성자 하나님은 이 땅에 와서 그 말씀을 다 성취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을 입고 오셨는데 그분이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죠? 그런데 하나님이 지금 우리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이 뭐라고요? 성령 하나님. 맞지요?
너무 너무 놀라운 구원의 비밀입니다. 당장 여러분이 언약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 성삼위하나님의 비밀. 성삼위 하나님이 내 속에 오셨습니다. 이 놀라운 구원 때문에,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여러분 속에 이 하나님이 계십니다. 어떻게?- 성령 하나님으로. 이것을 보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인 것입니다.
위의 자료에 의하면, 류광수목사가 주장하던 "영접의 비밀"이 바로 양태론이었던 것이다. 그는 기존교회가 예수를 영접하지 못하였다는 소위 재영접론을 주장하다가 이단으로 발표되었다. 류광수목사는 지금도 다락방이 초대교회의 복음을 전하는 유일한 곳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복음편지 -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영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바로 그 분의 이름이 "예수"입니다.
물론 누구든지 실수를 할 수 있으며, 신학적인 뿌리가 얕아서 잘못 착각할 수도 있다. 평상시에는 그러한 양태론이 나타나지 않는데, 어쩌다가 표현적인 실수를 할 수도 있다고 본다. 필자는 그러한 트집을 잡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러나 명백한 양태론을 계속적으로 설교한다면 이것은 정말 문제이며, 많은 교인을 양육하는 영향력이 큰 목사가 이러한 주장을 계속한다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최근에 유명한 O 교회의 H 목사, 같은 교회의 장로로서 신유집회를 인도하는 S 장로에게도 양태론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충격이다. 그런데 베뢰아 김기동목사는 Y 목사, J 목사를 비롯하여 H 목사도 베뢰아 교육을 받은 자기 제자였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필자는 동영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바로 그 분이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에는 성령님으로 오셨습니다. (O교회, H 목사)
멧세지는 짧지만, 너무나 명백한 양태론이 아닌가?
더욱이 치유집회를 하는 S장로는 그 교회 목사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쉽게 추정할 수 있다. 그 장로는 동영상에서 이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고, 말씀이 예수님이시고, 말씀이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집회를 하고 수많은 설교를 함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느냐? 믿지 않기 때문에 말씀과 성령님을 나눌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성령님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예수와 성령님을 나눌 수가 있습니까?. 성령님은 예수그리스도이시고 성령님은 하나님 아버지십니다."(S 장로)
그 외에도 인터콥 최바울, 초대형교회 J 목사, 유명한 부흥목사인 대전의 J 목사, 광주 S교회 J목사, 장로교회의 유명한 L 목사, 감리교의 부흥목사인 C 목사, 감리교 대형교회의 K 목사도 공공연하게 양태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통교단의 이단대책위원회는 이것을 철두철미하게 조사하여 그 이단성을 경고하고, 그래도 그것에 대해서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그 이단성을 공식으로 발표하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2000년 기독교 교회사에서 언제나 이단으로 분별되었던 양태론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이렇게 공공연하고 무분별하게 설교되고 있어도 상관이 없는가?
정통교단의 이단대책위원회는 이러한 목회자를 제명을 시키거나, 차후로는 이러한 설교를 하지 말라고 강하게 경고를 주어 공개사과문이라도 받는 것이 옳지 않는가?
아니면 앞으로는 한국교회에서 양태론을 인정하거나 주장하여도 아무 상관이 없는지 정확히 발표를 하여주어야만 할 것이 아닌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혹시 정통교단의 이대위가 양태론을 옳다고 인정하는 단체인가? 그렇다면 차라리 정통 조직신학책을 모두 수정을 하여 삼위일체를 양태론으로 바꾸어 주든지, 아니면 정확한 신론의 정체성을 발표하여 목회자나 평신도에게 더이상 혼선을 주지 말아야할 것이 아닌가? 혹시 교단에서 높은 위치를 갖는 목사들이기에 정치적으로 눈감아 주기로 한 것인가?
이미 수많은 교회에서 배포되어지는 초신자의 양육교재자료들에도 이미 양태론이 침투해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미 수십만명이 그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알파코스의 처음 교재는 성령을 "예수의 다른 자기"라고 표현하였고, 성령이 "예수와 같다"고 말하고 있었던 적이 있었으며, 적지 않은 목사들은 "한 인격의 세 사역적 양태"를 설파하고 있다. 인터콥의 최바울대표의 책은 양태론을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더욱이 수년 동안 네비게이토의 교재에서도 명백한 양태론이 등장하고 있다.
네비게이토 성경공부교제 (그리스도인의 생활연구 제5권 2과)- 하나님은 세 인격으로 존재하십니다. (이것을 삼위일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삼위의 세 인격은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과 아들되시는 하나님과 성령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 사람이 아버지이면서 아들이기도 하고 또한 남편이 될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 관계에 있어서 그 사람의 각각의 책임과 의무는 모두 다릅니다. 그러나 그 각각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은 같은 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세 가지 다른 방법으로 즉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그리고 성령으로서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수년전 필자가 네비게이토에 대한 양태론을 정식으로 문제를 삼자, 다행히 네비게이토는 그들의 책을 수정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양태론을 잘못된 것으로 인정하고 수정하였는지는 의문이다. 네비게이토에서 오랫동안 그렇게 가르쳐 온 것에 대해서는 과연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양태론자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대내적으로는 이 양태론이 자신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며 복음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양태론자라고 비판을 받으면 변명과 위장을 하면서 자신이 양태론이 아닌 것처럼 숨기고 감추기에 급급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차라리 당당함도 보이지 못하는 비굴하고 거짓말을 하는 이중적인 이단들이다.
2000년 교회사에서 진리토론을 해왔지만, 양태론은 정통삼위일체를 한번도 이긴 적이 없다. 성경적으로 양태론은 숱한 오류와 모순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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