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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새로워진다는 것은? 약1:12~18, 눅3:1~9
1980년 경에 한국 교회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퍼졌던
'양적성장, 교회 부흥, 교회 성장'이
오늘날과 같은 교회의 세속화, 거룩성과 교회다움의 상실로 이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고 저마다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한 번도 새로워져 본 적이 없습니다.
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당위성은, 모두가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자기 중심적인 신앙생활의 안일함에 안주해서
'교회가 새로워진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지 않거나,
아니면 아예 생각해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연동교회는 이 아름다운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연동교회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연동교회 교인 여러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등지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돈을 벌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축재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그것을 복 받았다..고 여기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식을 공부시키고, 출세시키려 하고
하나님께 십일조, 헌금하는 것으로 '내가 좋은 교인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 교회가 새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내가 새로워지지 않고, 하나님께 십일조하고 감사헌금하고
주일예배에 참석하기에.. 내가 바른 신앙생활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건 하나님을 돈에 걸신들린 거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돈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이 다 하나님 것인데, 왜 하나님이 여러분 주머니의 돈을 필요로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정말 돈을 필요로 하는 신이라면
조지 소로스 같은 세상의 거대한 부자들, 그런 사람들 몇 사람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면
여러분이 내는 평생의 헌금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연동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은
여러분들의 교회밖 일상의 삶이 새로워져야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올해 2021년 가을에 각 교단마다 총회가 다 끝났습니다.
각 총회 보고서를 종합하는 기사를 보면
한국에 있는 수없이 많은 교단들 가운데 여섯 개 주요 교단,
즉 예장통합, 예장합동, 기독교 장로교회, 고신, 감리회, 기독교 성결교회
이 6개 교단의 교인만, 지난 1년 동안에 40만 명이 줄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그 여섯 개 교단에 176만 명의 교인이 감소 되었는데
작년 1년 한 해 동안만 40만 명이 줄었습니다.
작년 2~3월부터 코로나19 로 인해서 온라인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많은 분들이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 드리지 못했습니다.
예배당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이 40만 명이 줄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아예 교회를 떠나 버린 사람이 40만 명입니다.
여러분 10년, 20년 후에, 과연 대한민국에 기독교가 존재할까요?
존재한다면 어떤 모양일까요?
▲약 10년 전에, 영국 요크에서 영국 성공회 총회가 열렸습니다.
그 해에 영국에 있는 성공회 교인들의 나이를 따지니까 평균 연령이 60세가 넘었습니다.
교인들 연령이 평균 60세가 넘었다는 건 무슨 얘기입니까?
20년 지나면, 물리적으로, 성공회는 이 지구상에서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총회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성공회 교인 수를 늘리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고 총회적으로 결의했지만
지난 10년 동안 영국 성공회 교인은 또 더 줄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오래 전에 쇠퇴해 간 유럽교회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교회는 위기감을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데
'10년 후에, 20년 후에도 교회는 건재 하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건, 교회가 이런 위기에 직면하게 한 것은,
전적으로 제 자신을 포함한 이 땅의 목사들의 책임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위기에서 교인들은 자유로울 수 있는가요?
그런 것도 아닙니다.
목사들이 이 위기의 공범들이라면
교인들은 동조자, 내지 방관자 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회개할 것인가요?
교회를 이렇게 만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렇게 쇠퇴하게 만든 이 잘못을 어떻게 회개할 것인가요?
그것은 말로 해선 안 됩니다.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교회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새롭게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요? *이 설교의 주제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를 새롭게 한다는 것은
교회가 '광야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께서 이 땅에 강림 하시기를 열망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이 땅에 강림하실 것을 알고
그 길을 예비했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밥 벌어 먹고 살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온갖 종교 권력을 누리던 대제사장들, 제사장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 율법사들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밥 먹고 살아가는 대제사장을 포함한 제사장들도 모르는데,
율법사들도 모르는데, 서기관들도 모르는데,
어떻게 세례자 요한, 그 단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고 있었을까요?
눅3:1~2절 말씀을 한번 잘 들어 보십시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눅3:1~2
이 짧은 본문 속에 여덟 명이 등장합니다.
대 로마 제국 황제 디베료, *티베리우스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
헤롯 빌립, 루사니아
대제사장 안나스, 가야바
그리고 세례자 요한
세례자 요한 한 사람을 제외하면 나머지 7명은
그 시대 혹은 자기가 통치하는 지역의 제 1인자 들입니다.
그 시대에서, 그 지역에서 그들과 감히 견줄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비하면 세례자 요한은 거지와 같았습니다.
집도 없었습니다. 요즘 말로 저금통장도 없었습니다.
변변한 옷도 없었습니다. 낙타 털옷에 가죽띠 띠고 살았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 했습니다.
황제나 총독이나 분봉왕이나 대제사장들이 보면
이건 그냥 걸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 사람 세례자 요한에게 임했습니다.
'메시아가 오신다. 길을 예비하라!'
왜 하나님의 말씀이 세례자 요한에게만 임했을까요?
왜 대제사장에게 임하지 않고, 왜 황제에게 임하지 않았을까요?
로마황제는 그 거대한 로마제국의 3권을 장악한 사람입니다.
로마제국에서 가장 웅장한 황궁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 총독입니다.
유대 지방에서 철옹성 같은 총독관저에서 삽니다.
분봉왕들은, 자기 통치지역에서, 그들의 왕궁보다
더 큰 집에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그들이 얼마나 엄청난 대 관저에서 살았는가 하면
마26장에서 예수님을 붙잡아서 대제사장 집 마당에서 재판할 때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 집 마당에 모이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로 마당이 넓었습니다. 그 정도로 대 관저 였습니다.
여러분, 이 일곱 사람들은 그 거대한 왕궁에서
집만 컸을까요? 호화 가구가 있었겠지요.
금은보화가 가득 찼겠지요.
총독도, 분봉왕도,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도
그 거대한 대저택에서 주지육림의 빠져서 사느라
그들의 마음이 세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단 한 단어도 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그때 세례자 요한은 어디에 있었는가요?
빈들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눅3:2
세례자 요한은 빈 들에서 살았습니다.
아무 것도 없이 비어있는 그 들판을, 자기 숙소로 삼았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세례자 요한의 마음이 비어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텅 비어 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는 것입니다.
우리말 '빈 들'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레모스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를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성지순례 하시면서 유대 광야에 가 보셨습니까?
혹시 못 보신 분들은 다음에 성지 순례 가시면 한번 가보시기 바랍니다.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광야는 하나님만 보입니다. 하나님만 들립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런 데서 살았습니다.
당시 광야는, 풀 한 포기 나지 않아서 불모지였습니다.
▲사람이 살 수가 없는 죽음의 땅과도 같은 광야에 들어가서 사는 사람들은
세 부류가 있었습니다.
-도망자들,
큰 범죄를 저지르고 도시에 있으면 잡혀서 죽을 거니까 광야에서 숨어서 사는 겁니다.
그러면 질문이 생기죠. 아니 그 불모지 땅에서 뭐 먹고 사나요?
우리나라처럼 습식 문화는, 광야에 가서 숨어서 못 삽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건식 문화입니다.
우리처럼 쌀을 물에 넣어서 끓이고, 된장국 끓여서 밥 먹지 않거든요.
그들은 마른 빵을 먹습니다. 근데 그들이 굽는 빵은 둥글고 납작한 큰 빵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큰 빵 몇 개와 가죽부대에 물한 부대 짊어 메고
광야 동굴에 가서 숨으면, 꽤 오래동안 숨어살 수 있습니다.
-광야의 찾아 들어가서 살던 두 번째 부류는 강도 들입니다.
어쩔 수 없이 광야를 지나가는 행인들을 등쳐먹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10장 선한 사마리아사람 비유를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중간에 유대 광야가 있습니다.
바로 그런 행인들을 등쳐먹는 강도들이 광야에 있었습니다.
-세 번째 부류는,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눈에 보이는 게 많습니다. 집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광야는, 아무 것도 없기에, 보지 않으려고 해도 하나님이 보이는 곳입니다.
제가 유대 광야에 갔을 때가 40대 때였는데
'내가 나이 들기 전까지 만약에 나한테 시간이 있으면
한 달 동안 내가 광야에 가서 텐트를 치고 한 번 살아보아야지..'
이렇게 마음 먹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근데 70세가 넘도록 그런 기회가 아직 안 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 곳을 찾아 간 사람입니다.
바울이 뭐라 그랬죠? 고린도후서 4장 18절 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여러분들, 댁에 계시는 것보다, 예배당에 오면 좀 더 거룩하게 느껴지시죠?
그런데 이 눈에 보이는 것들은, 지금 점점 쇠퇴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터키에 가서 보지 않았습니까?
2천 년 전에 그렇게 사람들이 열심을 다해서 지었던 예배당들이
다 허물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보이는 것 너머를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것이니까요.
광야에 가면, 그 영원하신 하나님만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셨을 때
제일 먼저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을 알고, 가서 경배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그 목자들은 광야에서 양을 치다가
밤이 되면 모닥불을 피워놓고 하늘을 우러러 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말했습니다. 구주가 나셨다고!
가서 경배하라고!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 율법사들은 예수가 태어난 줄도 몰랐습니다.
광야의 목자들이 먼저 알고 가서 경배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제일 먼저, 이 분이 바로 왕이시라고 예물을 바쳤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굽니까? 동방박사 들입니다. 천문학자들입니다.
별을 관측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별을 관측하는 관측소는 도시 속에 있지 않습니다.
저 외딴 산 속에 있습니다. 옛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 대도시에 비하면, 옛날 도시들은 도시라고 할 수도 없지만
그러나 옛날 도시도, 그 때 수준의 도시였거든요.
밤이 되면 집집마다 창문으로 다 불빛이 새어나옵니다.
그런 곳에서는 하늘의 별이 제대로 관측이 안 됩니다.
그래서 옛날 천문학자들도 다 광야로 나갔습니다.
광야 구릉에서 사방이 깜깜한데, 하늘만 쳐다보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것을 알고
그 먼 곳에서부터 예물을 들고 와서 예수님께 첫 번째 예물을 바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메시아가 태어나실 것을 알고 그 길을 예비한 사람도, *세례요한
메시아가 태어나신 것을 알고 제일 먼저 찾아가서 경배한 사람도, *목자들
메시아가 태어나신 것을 알고 제일 먼저 찾아가서 예물을 바쳤던 사람들도 *박사들
다 광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광야의 사람들이었기에, 하나님과 늘 대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은, 그 유명한 스데반 집사의 설교내용 입니다.
스데반이 모세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행7:37~38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스데반이 모세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모세가 400년에 걸친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킨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광야에서 살고 있는데, 그 회중을 가리켜서 광야 교회(에클레시아 에레모스)
라고 불렀습니다.
광야교회에는, 예배당이 없었습니다. 성가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광야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교회'(에클레시아)라고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스스로 광야 교회 였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불기둥, 구름기둥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내가 여기에 조금 더 눌러 앉아 살고 싶은데도
구름기둥이 떠올라 출발하면 텐트를 걷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한 5KM만 더 가면, 더 좋은 장소가 있을 것 같은데
구름기둥이 머무르면, 그 자리에 텐트를 쳤습니다.
그게 광야교회의 교인들이었어요.
여러분 오늘 날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오늘날 교회의 예배당은, 마치 철옹성 요새 와도 같습니다.
목사도 보이고, 장로도 보이고, 권사도 보이고, 교인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보이는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여러분들 마음속에 있는 세상이 비워지고,
여러분들의 마음이 광야가 될 때
이 연동교회가, 광야교회가 되고,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아가 방주 속에 40일 있었다고 착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40일은 비가 왔던 날 수가 40일입니다.
비가 40일동안 계속 내렸고,
그 비가 땅에 넘쳐서 찰랑찰랑 했던 날수만 150일 입니다.
그리고 그 창일한 물이 안 말라서, 지구 표면이 드러날 때까지 또 많은 날이 지났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0일날 방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방주에서 나온 날이 601세 되던 해 2월 27일 입니다.
그러면 노아가 방주 속에 1년 17일간 있었습니다. 40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또 노아의 방주에 대해서 착각하는 것은,
노아가 방주 속에 있을 때, 그 곳은 천국의 모형이었을 것이다.. 라는 착각입니다.
여러분 과연 그랬을까요?
하나님께서 노아가 방주 속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땅에 기는 모든 짐승을 방주로 보낼 테니까
너는 그 짐승이 먹을 양식도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노아는 1년 17일동안
방주 속의 짐승들이 먹을 양식을 다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게 보통 일이었을까요? 아주 고되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 많은 짐승들의 배설물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 냄새는 얼마나 지독했을까요?
그 짐승들이 방주 속이라고 조용했을까요?
아마 짐승 한 마리가 울면 다 따라 울었겠죠.
여러분 1년 17일동안 노아의 방주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정신이 이상해 질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그 공간에서 노아는 멀쩡하게 자기 사명을 완수하고 나왔습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방주로 들어가는 문은 방주 옆에 있었습니다.
그 방주는, 노아의 8식구가 들어감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닫아 걸어잠그셨습니다.
노아 식구가 방주에서 나올 때도 하나님이 열어 주셨습니다.
그 큰 방주에는 창문이 단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보통 우리가 창문을 만들면, 건물의 측면에다 창문을 만듭니다만,
노아방주 속의 창문은, 천장에 달려 있었습니다. 천장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창문을 세상을 보는 창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창문이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광야'였다는 뜻)
'내가 왜 오늘도 이 많은 짐승들에게 밥을 줘야 해?
왜 이 짐승들의 오물을 치워야 되지?
왜 이 짐승들의 울음소리를 내가 듣고, 이 밤도 내가 지새야 되지?'
하나님이 시키셨으니까,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하나님을 향한 그 창이 열려 있었기에
하나님과 눈을 맞추면서, 노아는 1년 17일을 극복하고 이겨내고
인류의 중시조가 되었습니다.
노아가 그 방주 속에서 매일매일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과 시선을 마주치는 창을 만들어두고 있었다는 그런 의미에서
노아의 방주도 '광야의 방주' 였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광야 방주가 되십시오.
광야 교회가 되십시오!
이제까지 이 도시에 고정되어있는 여러분의 시선을 거두어서
하늘을 향해 보십시오. 땅을 보십시오.
머지 않아 여러분들은 한줌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 땅을 보면서, 내 육체가 한줌 흙으로 썩어 문드러질 때
나를 영원히 살려주실 하나님, 그 분을 바라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광야교회가 될 때, 연동 교회는 세상을 새롭게 하는 '광야 교회'가 될 것입니다.
◑광야 교회가 된다는 것을, 조금 더 깊게 들어가서 설명하면
광야 교회가 된다는 것은 '아웃사이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본래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입니다.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제사장들 중에서도
반차(순번)를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직접 직무를 행할 정도로
상당한 위치에 있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여러분 상당한 위치에 있는 2천년 전 제사장들은
다 잘 살았을 것입니다.
제사장은 세습직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가만히 있으면, 아버지의 제사장 직을 세습하는 겁니다.
그리고 평생 제사장 직을 이용해서 종교권력을 휘두르고
호의호식 하면서, 자기 종교적 야망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세례요한이, 예루살렘 인사이더의 그 자리를 버리고
스스로 예루살렘 밖 아웃사이드, 광야로 나갔습니다.
왜요? 예루살렘 안에 살고 있는 예루살렘 인사이더 들의 논리로는
하나님과 바르게 동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아웃사이더로 살면서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지 않았습니까?
그랬더니 예루살렘 안에서 살고 있던 예루살렘 인사이더들이
세례요한을 찾아 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 세리들,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 예루살렘 인사이더의 한 축을 이루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향해서 세례요한이 이렇게 질타합니다.
눅3:7~9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지금 세례요한이 그들을 향해서 '심판의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지금 너희들 발등에 심판의 도끼가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독사의 자식이다.'
당장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요한에게 나아왔던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 안에 가서 살면 어떻게 합니까?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살찐 소와 양으로,
좋은 예물을 제사장한테 바치고, 제사를 지내면
제사장으로부터 복 받았다고 칭찬 받는 사람들입니다.
인사이더들 사이에서는 칭찬 받는 사람들인데
아웃사이더인 세례요한이 보는 눈으로는,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마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아웃사이드 에서 볼 때,
인사이드 에서 사는 사람들의 가면 속의 실체가 보이는 것입니다.
인사이드 에서는 보이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 그렇게 따지고 보면
성경에서 세상을 새롭게 한 사람들 가운데 인사이더는 거의 없습니다.
세상을 새롭게 했던 하나님의 도구들은 거의 전부 아웃사이더 들이었습니다.
1) 출애굽한 모세는, 유대인들을 4백년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야 되는데
보십시오, 나일강에서 이집트 공주가 건져서, 40년 동안 왕궁에서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이질감을 느끼겠습니까?
거기에다가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80세 노인이 되기까지 양치기 했습니다.
유대인 공동체로 보면 철저하게 아웃사이더 였습니다.
그 아웃사이더가 출애굽의 대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2) 이스라엘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한 다윗은 어떻습니까?
예루살렘의 권세있는 집안의 아들이 아닙니다.
저 변두리 베들레헴의 양치기 목자 출신입니다.
그가 골리앗을 무너트려서 구국의 영웅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를 시기한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해서
10여년 동안 광야에서 동가식 서가숙 했습니다.
철저한 아웃사이더 였습니다.
3)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영적인 대결을 해서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쇄신시키고,
육체의 죽음을 보지 않고, 육체를 가진 채로 하늘로 올라갔던 엘리야,
길르앗 벽촌 디셉 출신의 아웃사이더 입니다.
4) 구약성경에서 이적을 베풀었던 엘리사,
그도 역시 요단 계곡 농부 출신의 아웃사이더 입니다.
5) 여러분, 아모스 선지자가 이렇게 외치지 않았습니까.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암5:24
공의를 물같이, 정의를 마르지 않는 강물 같이!
여러분 우리나라 민주화 시위 때도 이 구절이 인용되었습니다.
이런 혁명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다면
예루살렘 도심 한가운데 시위현장에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모스는 드고아 목자 출신의 아웃사이더입니다.
6) 여러분, 이 세상에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린 귀부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자기 태에서 배어서 낳게 한 성모 마리아 보다 더 존귀할 수 있을까요?
성모 마리아도 나사렛 아웃사이더 입니다.
열두 제자 중에 인사이더가 있습니까?
전부 갈릴리 빈민촌 아웃사이더 들이었습니다.
7) 바울도 철저한 아웃사이더 였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순간, 그는 예루살렘 안 inside 이 아니라
예루살렘 밖 outside 다메섹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길'이라고 그러니까
오늘 날의 잘 포장된 길을 연상하기가 쉽습니다만,
근데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에 230킬로의 길은 전체가 온통 '광야'입니다.
그 광야길 위에서,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이후로
그는 죽을 때까지 아웃사이더로 살았습니다. *outsider
여러분, 하물며 하나님의 독생자로 우리를 구원 하러오신 그리스도께서도
외양간 구유에서, 아웃사이더 중에 아웃사이더로 태어나셔서
저 갈릴리 그 빈민들 속에서, 아웃사이더로 사시다가
왕을 사칭하는 대역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아웃사이더 였던 것을 생각하면,
아웃사이더가 아니고는 세상을 새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요? 종교 집단이든, 세상 집단이든, 정치집단 이든
인사이더가 된 사람들, 혹은 인사이더가 되기 원하는 사람들,
인사이더가 되고 싶어서 그 언저리를 맴도는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인사이더 들은 자기의 기득권을 더 중요시 합니다.
자기 욕망이 목표하는 좌표를 더 중요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걸 중요시 하지 않고 인사이더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권력지향적이 됩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종교적 열심을 갖고 있습니다.
외적인 종교 행위에 열심입니다.
그러나 종교심이지, 신앙심은 아닙니다.
인사이더들이 갖는 그 열심, 헌금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하는 그 열심은
하나님을 달래고 얼러서, 내가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심은 미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사이더들은 세상을 새롭게 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그들의 이해관계를 확충시킵니다.
그들의 이해관계를 확장시키면, 확장시키는 만큼 교회와 세상은 오염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웃사이더를 쓰십니다.
인사이더가 될 수 있는 역량을 충분히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아웃사이더로 사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신앙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앙심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것을 이루기 위해서 나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를 철저하게 포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아웃사이더들 눈에, 인사이더의 모든 위선과 이율배반과 모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웃사이더 들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인사이더 들이 되기 위해서 애쓰셨습니까?
오늘 이 시간부터, 여러분들은 스스로 세례요한처럼, 엘리아, 엘리사, 바울, 예수님처럼
자발적인 아웃사이더가 되십시오.
그때 여러분 자신을 먼저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먼저 새롭게 할 때, 세상을 새롭게 하는 주님의 오른 팔, 왼 팔이 되는 것입니다.
◑광야교회가 되고, 아웃사이더 교회가 된다는 것은
조금 더 깊이 설명하면, 그림자 없는 투명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사도는 2천년 전 초대교회 지도자였습니다.
그 야고보는 오늘 본문 야고보서 1:12~18절을 통해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왜 우리를 당신을 자녀로 구원해 주셨는지
명쾌하게 설명해 줍니다.
▲본문 12절을 한번 보실까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여러분 여기서 '시험'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동사로 페이라조,
명사로는 페이라스모스 입니다.
그런데 영어성경, 프랑스어성경, 독일어성경은
이 '시험' 단어를 상황에 따라서 각각 다른 단어로 번역을 합니다. *trial, test, temptation 등으로 다르게
근데 우리 성경은 페이라조 라는 이 단어를, 일률적으로 '시험'이라고만 번역을 해서
성경의 원래 뜻을 모호하게 만듭니다.
지금 '시험' 이라는 말, 즉 페이라조 는
그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뜻이 달라집니다.
페이라조의 주체가 하나님이 되시면, '고난을 통해 훈련하다'는 뜻입니다. trial
하나님께서 인간을 페이라조 하실 때는, 언제든지 인간을 '고난으로 훈련'(시험)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고난을 통해 훈련해서, 강인한 당신의 자녀로
이 세상에 견고하게 세워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동사의 주체가 사탄이 되면 페이라조 는 '유혹한다'가 됩니다.
사탄은 언제나 우리를 유혹에서 쓰러뜨리기 원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약1:12절에 나오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trial : 고난을 통한 시험
'시험 trial 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왜 복이 있는가요?
'이는 시련을 견디어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약1:12
왜 하나님의 (고난의) 훈련을 거친 사람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가요?
하나님의 훈련을 거친 사람만,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3절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여기서 시험은 유혹입니다. 주체가 사탄입니다.
'사람이 유혹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유혹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내가 사탄의 유혹을 받으면서도
사람들은 '왜 나를 이렇게 유혹을 자리로 인도하시지?' 하는데, 그런 말 하지 마라.
왜요?
'하나님은 악에게 유혹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유혹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사탄의 유혹이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을 유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을 유혹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유혹을 받아 놓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나?'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그 말입니다.
약1:14 '오직 각 사람이 유혹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문제인 겁니다.
내 속에 욕심이 있을 때, 어떤 면에서는 내가 두 손 벌리고
사탄이 나를 유혹해 주기를 고대 하는 것입니다.
15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왜요?
죄의 삯은 사망이니까요.
16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말라.'
여러분 성경을 읽으실 때, 이런 구절이 나오면
이런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심경과, 여러분의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얘들아 속지 마라!'
우리가 얼마나 잘 속으면 '속지 말거라'
뭘 속지 말라는 겁니까?
17절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
좋은 은사, 온전한 선물.. 둘은 동격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은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은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혼탁한 어둠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용기를 낼 수 있는 은사.. 이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탄의 유혹을 당하면서도
'내가 여기서 번 (불의한) 돈으로 내가 하나님 은혜받은 자 답게 내가 살 거야'
이건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답게 해 주는 모든 은사, 은혜는
오직 빛들의 아버지께로서만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할 때마다 수많은 빛들을 내려 주셔요.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당연히 변함이 없으시죠. 영원하시니까요.
중요한 것은 그분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분은 돌아서셔도 그림자가 안 보여요.
사람은 어느 방향이든지 그림자가 있습니다. 왜요? 인간은 발광체가 아니거든요.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돌아서셔도 그림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은 스스로 발광체이시니까요! 그 분께는 어둠이 없으시까요. *마치 태양처럼
그림자 없는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다, 그분을 우리가 내 주인으로 모시는 교회로 살아간다면
우리도 그림자 없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림자가 있으면 안됩니다.
18절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우리를 당신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당신의 뜻을 따라 '육체로' 우리를 만드신 게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어요.
진리도 그림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림자 없는 하나님의 첫 열매로'
우리가 '진리의 말씀으로 낳아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평생 그림자 없는, 투명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로마 가톨릭 교황은 프란치스코 교황이시죠.
그분은 본래 아르헨티나 주교이셨습니다.
교황님으로 선출되고 나서 즉시, 아르헨티나에서 기자들과 했던 인터뷰 내용 중에
한 구절을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자들이
'교황이 되시면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에 있는 바티칸 은행을 없애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늘 궁금한 게 그거였거든요.
그 바티칸 은행은 온갖 검은 돈, 비자금이 거기에 다 모여있어서
세계 금융질서를 교란시키는 한 은행으로 문제시 되는 은행인데
교회가 그런 은행을 가지고, 과연 투명한, 그림자 없는 교회가 되겠는가요?
근데 그분이 그 이야기를 하셔서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아 이제 정말 가톨릭이 그림자 없는 교회가 되려나?'
여러 가지 사정이 있으시겠지요. 아직도 그 바티칸 은행을 없애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바티칸 은행의 감사를 시작해서, 여러 사람이 지금 수갑 차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정말 그림자 없는 투명한 교회가 되려고 하면
언젠가는 그 은행을 없애야 될 겁니다.
교회가 돈을 굴리는 은행을 가지고 있으면, 그림자가 생길 수밖에 없지요.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투명한 쇼윈도우 이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와 봐라, 내가 어떻게 사는지 와서 봐라! Come and see!"
다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투명하게 그림자 없는 교회가 됩니다.
여러분, 교회는 가릴 것이 없어야 합니다.
교회가 교인들에게 재정 원장을 공개할 수 있다면,
단돈 1원도 어떻게 사용되는지
하나님께 교인들이 바친 헌금이니까, 교인들에게 밝히는 건 당연한 의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일부 목사님들이 제왕처럼 살았습니다.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불투명한 교회, 그런 그림자 짙은 교회를.. 어떻게 새로 고치겠습니까?
당회가 회의를 하고 나서 당회록을 공개한다면
재정위 원장 공개하고, 당회 회의록을 공개한다면
한국 교회가 그 두 가지만 하더라도.. 저는 목사들이 타락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타락하지 않으면, 교회가 타락할 확률은 그만큼 줄어듭니다.
교회가 투명해 질 것입니다. 그림자가 없어질 것입니다.
◑광야 교회가 된다는 것, 아웃사이더 교회가 된다는 것,
그림자 없는 교회가 된다는 것은..
이거 한마디로 말하면, 욕먹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광야의 소리는
인간의 욕심을 위해서 왜곡되지 않은, 날 것 그 자체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야망이나 욕망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사람들에게
'광야의 소리'는 듣기 싫은 소리입니다.
아웃사이더의 소리는, 인사이더의 가면 속에 있는 실체를
백일 하에 드러내는 소리입니다.
인사이더가 듣기 싫은 거죠.
'그림자 없는 사람'의 외치는 소리는,
불투명하게 살면서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가면서 살고 있는 사람의
그 음흉한 속마음을 드러내는 소리입니다. 그들이 듣고 싶어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욕먹지 않고서는
광야의 교회도, 아웃사이더의 교회도, 그림자 없는 교회도 불가능합니다.
▲한국교회에서 많이 인용되는 사도행전 초대교회의 특징을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행2:43~47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초대교회는 누구도 자기재산을 자기 것이다 하지 않고 다 내어놓았습니다.
유무상통 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그리고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이 백성은 두말할 것도 없이 유대인 들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언급하면서 '우리도 초대교회처럼 칭송받는 교회가 되자'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이후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이렇게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면서
유대인들로부터 칭송받던 삶은
이것이 끝이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으로 넘어가면요.
베드로가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던 선천성 하반신 마비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웁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많은 유대인들이 베드로에게 모여듭니다.
그때 베드로가 이렇게 설교합니다.
'너희들이 못 박아 죽인 그 예수를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다시 살리셨다.'
여러분, 그 이야기를 들은 유대교 인사이더 들이 편하겠습니까?
자기들이 국사법으로 몰아서 죽였는데
자기네들이 국사범으로 죽은 사람이 메시아다? 용납할 수 없는 거지요.
그래서 성전에서 못 모이게 했습니다.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더더구나 행7장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촉발된 대 박해로 인해서
이렇게 성전에서 모이고 백성의 칭송을 받던 그들은
유대인의 혹독한 핍박과 모함과 모독 속에서
사방으로 흩어져서,
동굴 속에서 숨어서 예배드리거나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비밀리에 예배드리거나
아무도 없는 벌판에서 예배드리거나... 그렇게 하면서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욕 먹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감수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새롭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때는요. 그가 교회를 핍박할 때였습니다.
그때는 유대교 내에서 그는 스타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면서부터
그에게 돌아온 것은, 유대인들을 혹독한 핍박과 모독과 온갖 괴롭힘 이었습니다.
벨릭스 총독 때,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총독 관저가 있는 가이사랴까지 찾아가서
바울을 총독 앞에서 고발하는데, 자기가 직접 하지 않고
변호사 더둘로를 데리고 가서, 변호사로 하여금 바울을 고발하게 합니다.
그 내용이 행24:5~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4: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바울이라는 이 작자가 전염병이다. 이 자는 반드시 박멸해야 된다.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라'
여기에 '소요' 라는 말은, '정치적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정치범(최고 큰 죄)으로 몰아서 바울을 사형시키고, 생매장시키려는 거죠.
바울이 가는 곳마다, 전부 시민들을 로마제국에 반발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다.'
어느 시대 어디에서나 '이단' 하면, 사람들이 그를 색안경을 끼고 보는 거 아닙니까.
:6 '그가 또 또 성전을 더럽게 함으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 가까이 데려갔던 적이 있었는데,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것은 아니었어요.
근데 성전을 더럽게 하려고 했다니, 거짓으로 꼬투리를 잡아서 뒤집어 씌운 것이죠.
:8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변호사 더둘로가 벨릭스 총독에게 (수사의) 가이드라인을 주는 겁니다.
당신이 이 가이드라인 속에서 바울을 심문해라...
-전염병같은 사상을 퍼트리는 인간
-로마 제국에 반발하게 하는 인간
-이단 괴수
-성전을 더럽히는 그 혐의로
당신이 심문해서 그런 죄수로 만들어 주세요... 그런 요청이었습니다.
더둘로가 고소하는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유대인들
전부 다 이 변호사 더둘로가 진술을 끝내고 나니까
'옳소! 그 말이 맞습니다.'하며 동조했습니다. :9
여러분, 우리가 존경하고 우리가 다 그렇게 본받기를 원하는 사도 바울은
2천년 전에 스포트라이트 받으면서 살지 않았습니다. 박수갈채 받으면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욕을 들었습니다. 이런 모함을 받았습니다. 모독 당했습니다.
그러나 굴하지 않았습니다. 욕먹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새롭게 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도, 욕 먹지 않았습니까?
모욕 당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세상을 새롭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욕 먹지 않고 세상을 새롭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연동교회는 올 해로 창립 127 주년을 맞았습니다.
한국 교계에서, 교단 내에서 많은 칭찬을 받아온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칭찬인지.. 여러분 이제 한 번 곱씹어 보아야 합니다.
인사이더 내부 사람들이 칭찬 한다는 것은
이 교회가 세속화된 교회들과 한 편의 되었다는 이야기요,
세상이 불신하는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인사이드 내에서 칭찬만 받아 왔다면,
한 번도 대한민국 교회를 새롭게 하려고
광야교회, 아웃사이드 교회, 그림자 없는 교회가 되려고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은 아닌가요? 한번 숙고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결론을 맺겠습니다.
16세기 일본에서 100년 동안 춘추전국시대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 백 년에 걸친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오늘과 같은 통일 일본의 새로운 시대의 막을 올린 사람이 오다 노부나가 입니다.
그가 18살 때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성을 물려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입니다. 아버지 가신들이 다 장례식장에서 엄숙하게 서 있었습니다.
18세 된 오다 노부나가는 장례식장을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서
제일 앞의 빈소 앞에 서서, 그 빈소 앞에 있는 창을 들어서
아버지 빈소를 향해 던졌습니다.
사람들은 다 무례하다 하며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는, 지난 시대까지의 발상, 옛 사고방식, 관습과 질서를
나는 더이상 따르지 않겠다는 자기 나름대로 작별 의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철저하게 지연, 혈연에 얽혀 있던 구시대의 질서를 철폐하고
능력만 있으면 어떤 출신이든지 인재를 등용했습니다.
천하의 인재들이 모여들게 되었지요.
그래서 통일 일본의 새시대의 막을 올렸습니다.
만약 오다 노부나가가, 구시대의 발상, 사고방식, 관습, 질서를 그대로 고수하려고 했던들
새 시대의 막을 올리는 선두주자가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삼성그룹은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기업입니다.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삼성그룹과, 그 아들 2대 총수 이건희 회장의 삼성그룹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삼성그룹이 대한민국 1등 기업이었다면
이건희 회장의 삼성그룹은 세계 1등 기업이 되었습니다.
삼성그룹의 공과가 있지만, 대한민국 기업이 만든 물건이
세계 시장에서 1등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을 때, 세계 1등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이후에 많은 세계 1등 하는 기업들이 뒤따라 나왔습니다.
국내 1등 기업이 세계 1등 기업으로 도약하는 그 분기점이
1993년 그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선언' 입니다.
이건희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삼성그룹의 주요 임원들을 모아서 신 경영을 선언했는데
그 핵심 키워드가,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대한민국에서 1등 했지만
그걸 버리라는 겁니다.
대한민국 1등에 안주 하는 방식으로는 세계시장에 도전 못 한다는 겁니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1등에 안주 하던 사고방식, 발상, 관습, 질서.. 다 버리라는 겁니다.
그리고 세계 일등이 되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식으로 말하자면
1993년도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이건희 회장이, 과거를 향해서 오늘의 창을 던진 겁니다.
그리고 그는 글로벌 삼성의 미래를 얻었습니다.
▲1517년도에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당에서
95조문에 달하는 반박문을 발표했습니다.
당시 타락한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경에서도 벗어나고, 교회를 왜곡시키고, 세상을 짓밟았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그 로마 가톨릭 교회, 그 거대한 요새 와도 같은 가톨릭교회를 향해서
비텐베르크 성당에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발표했다고 하는 것은
그 로마 가톨릭교회라는 그 과거에 대해서, 오늘의 창을 던진 것입니다.
그리고 마르틴 루터는, 프로테스탄트 개신교 라는 새로운 미래를 얻었습니다.
여러분, 버리지 않고 새 것을 얻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버리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새롭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우리 모두가 한국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하나님보다 맘몬을 더 신뢰하면서
교회의 거룩성과 교회다움을 상실하게 한 이 교회의 위기에
어쩌면 일익을 담당해온 사람들임을 자인한다면
여러분, 우리의 그 과거를 향해서
오늘이라는 창을 과감하게 내 던지십시다.
오늘 이 시점으로부터 우리는
광야 교회, 아웃사이더 교회, 그림자 없는 교회, 욕 먹는 교회의 행보를 시작하십시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로워지기 원하는 주의 종들이 머리를 숙였습니다.
새로워지기 원했지만, 새로워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주의 종들이 머리를 숙였습니다.
주님 지금부터 광야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부터 아웃사이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부터 투명한 그림자 없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을 새롭게 하기 위해, 욕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분들의 삶 속에, 이 교회 위에
주님께서 새로운 미래로 응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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