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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맥추감사절 (살전5:16~18)

by 【고동엽】 2022.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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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맥추감사절   (살전5:16~18)

장광영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1999년도 벌써 반년이 지나서 절반이 남았습니다. 이제 6개월만 지나면 2000년대가 시작되기 때문에, 이번 맥추 감사절은 1990년대의 마지막 맥추 감사절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년 맥추 감사절은 가장 의미가 있고 뜻이 있으며 기념이 되는 맥추 감사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33세에 금호동에 와서 지난 6월 24일에 생일이 지나 이제 67세가 되었습니다. ‘나의 청춘은 금호동에서 전부 보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한번 과거를 회상해 보았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던 일제시대에 태어나 1945년에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교회에서 예배당 한가운데에 휘장을 치고 강대상은 가운데 두고 한편에는 남자, 한편에는 여자를 앉게 해서 서로 눈짓도 하지 못한 채 예배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고 해서 일곱 살만 되면 남녀가 한자리에 있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1945년에 해방이 되자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모습도 달라졌습니다. 예배당 마루바닥에 쳐놓았던 휘장을 걷어내고 남반과 여반으로 나누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름에는 해가 드는 곳에 남자들이 앉고 음지에 여자들이 앉았습니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반대로 양지에 여자가 앉고 음지에 남자가 앉았습니다.

또 한 때는 예배당에 피아노를 들여놓을 것인가? 아니면 전처럼 풍금으로 예배를 드릴 것인가? 하는 문제로 논란이 일었습니다. 특히 장로교회에서 피아노를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우리 감리교회에서 처음으로 예배에 피아노를 도입해서 사용하기 시작하자 다른 교회들도 피아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음에는 예배당에 의자를 설치하고 예배를 드릴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마루바닥에 앉아서 예배드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감리교회가 제일 먼저 예배당에 의자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러자 정통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반발하였습니다. “무릎을 꿇고서 예배를 드려야지, 어떻게 불경스럽게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그러나 10년쯤 지나자 그들도 예배당에 의자를 설치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여자들의 치마와 남자들의 신사복이 구겨지기 때문에 의자가 있는 교회를 사람들이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에서 의자를 들여놓고서 예배드리는 것을 공식화 한 것은 1970년대부터입니다.

이제 2000년대가 되면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자식이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고 학생이 스승에게 감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신자들은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마음이 퇴색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가 되면 우리 기독교의 사대 절기인 부활절과 맥추 감사절과 추수 감사절과 성탄절 중에서 아마 맥추 감사절을 없애라고 하는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오늘 드리는 맥추 감사절이 마지막 맥추 감사절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이 마지막 맥추 감사절을 어떻게 드려야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는 의미가 있고 기념적인 맥추 감사절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 마지막 맥추 감사절은 후회가 없는 감사절로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1년을 절반으로 나누어서 전반기 감사를 가리켜 맥추 감사절이라고 합니다. 본래 맥추 감사절은 일년중 보리를 제일 먼저 수확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보리수확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맥추 감사절입니다. 그러므로 금년 추수 감사절은 후회가 없는 절기로 지키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후회라는 것은 아쉬움으로 끝납니다. 후회는 수정할 수 없는 흠으로 남습니다. 후회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입니다. 그러므로 후회가 없는 절기는 우리 생활을 통하여 많은 결심을 맺음으로써 우리 마음속에서 기념이 될 수 있는 절기입니다.

시편 126편 5절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그러므로 눈물로 감사를 드리는 사람은 영원히 기념이 되는 기쁨의 단을 거두게 됩니다.

후회는 천 번, 만 번을 해도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회는 덧없이 과거 속으로 사라지고 한숨만 짖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부자 선비가 임종이 다가왔을 때, 마지막으로 자식들을 불러서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상여(喪輿)의 맨 앞에 큰 글씨로 ‘걸’ 字(자)를 써서 붙이고 양옆과 뒤에도 ‘걸’ 字(자)를 붙여라. 그리고 상여 위에서 상여를 인도하는 사람 옆에 이와 같은 내용의 글귀를 붙여라”

“이 사람은 아주 열심히 일을 하고 수전노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아껴서 알뜰하게 재산을 모았습니다.”

자식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왜 상여의 앞과 양옆 면과 뒷면에 ‘걸’ 字(자)를 붙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이와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 알았더라면 ‘그 동안 모은 재산을 선한 일에 쓸 걸’ 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 상여에 ‘걸’ 字(자)를 쓰라고 한 것이다. 또 ‘가난하고 못사는 사람을 도와 줄 걸’ 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걸’ 字(자)를 써 붙이라고 한 것이다. 또 ‘음식을 실컷 먹어 볼걸’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걸’ 字(자)를상여에 써 붙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 앞에 드리는 맥추 감사절 예배가 ‘걸’ 하고 후회하는 감사절이 아니라 마음속에 길이 기념될 수 있는 감사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마지막 맥추 감사절은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1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것은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을 따로 따로 분리해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계를 이루어서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감사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4장 4절에서 이와 같이 증거 하였습니다.

“주안에서 항성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독교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기쁨의 종교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는 감사는 절대로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기분이 나쁜 상태에서 감사를 한다면, 그것이 어찌 참된 감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감사는 후회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들과 비교해서 감사를 드려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만약 옆에 있는 사람과 비교를 해서 이 사람이 이 만큼 냈으니까 나는 저만큼 내야겠다하고 비교해서 감사를 드리면 건전한 감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기뻐하는 마음으로 감사를 드리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마지막 맥추 감사절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기독교인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세 가지에 관하여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같이 증거 하였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 (살전 5: 16∼18)고 증거한 까닭은 믿음이 있는 사람은 기쁨이 있어야 하고 소망을 가진 사람은 주님을 만나는 시간까지 기도해야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감사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없는 감사는 감정 혹은 짜증스러운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있는 감사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드리는 감사는,

(1) 처음 것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잠언 3장 9절)

(2) 익은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익었다”하는 것은 기쁨으로 드리는 것이며 “설익다”라고 하는 것은 억지로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설익은 것으로 억지로 감사하는 자가 아니라 익은 것을 드리는 기쁨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열매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과 잠언 3장 9절∼10절은 이와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잠 3: 9∼10)

감사에 대한 마음의 표현은 물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마음의 표현인 귀한 물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상급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목사는 목사다운 감사의 표현을 해야 합니다. 장로는 장로다운 감사의 표현을 해야 합니다 권사는 권사다운 감사의 표현을 해야 합니다. 집사는 집사다운 감사의 표현을 해야 합니다 성도는 성도다운 감사의 표현을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재물은 각각 곡식과 짐승이었는데 그 재물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차이는 믿음 이였습니다. 그러한 차이점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벨의 재물은 받았으나 가인의 것은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는 맥추 감사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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