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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를 아는 신앙의 신비 (출애굽기 23:14-17)

by 【고동엽】 2022.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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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를 아는 신앙의 신비  (출애굽기 23:14-17)


우리 한국 문화를 살펴보면 좀 무언가 잘못된 문화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감사하다고 하든지 고맙다고 하면 내가 낮아지는 줄로 생각하는 잘못된 생활 철학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에 인색합니다. 더욱이 자기 식구들이나 자신의 부인에게까지도 고맙다는 말을 잘하지 않습니다. 고작 한다는 소리가“말 안 해도 안다.”고 합니다. 왜 이럴까요? 문제는 이것입니다. 상대방에게 고맙다고 하는 순간, 그는 높아지고 나는 낮아진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아주 옛날부터 체면 문화 속에 빠진 우리민족의 체질화 된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부인에게나 누구에게나 고맙다는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합니다. 생전 해봤어야 알죠. 그 동안에 알고 있기를 고맙다고 하는 순간, 내가 없어지고 내가 비하되고 내가 망가지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실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자그마한 일에도 고맙다고 하면 그 순간 자신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든지 고맙다고 말을 할 줄 아는 순간 나의 인격이 높이 높이 올라가는데 그것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감사를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뿌리 깊은 병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잠자리에 들기 전이면 언제나 예쁘게 무릎을 꿇고 또 두 손을 깍지 끼고 경건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하나님, 오늘밤에 우리 가족 모두를 지켜 주셔서 잠 잘 자게 해 주세요. 우리 아빠 하시는 사업도 잘 되게 해 주시고, 우리 가족들의 건강도 지켜 주세요.”그러고 나서 꼭 그 날 유치원에서 배운 율동과 노래를 멋있게 한 번 하고는 잠자리에 들곤 했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아이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겨 그에게 물었습니다.“얘야, 너는 기도가 다 끝났으면 잠자리에 들어야지, 왜 자기 전에 꼭 그렇게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느냐?”아이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기도하는 동안에는 하나님께 내 부탁만 드려서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 그래서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와 율동으로 하나님을 잠시라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어서요.”얼마나 예쁩니까? 어른들 보다 훨씬 낫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께“이것도 해 주시고 저것도 해 주시고”라며 무척이나 졸라대면서 많은 요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은 적었습니다. 그 사랑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그러다보니 감사할 줄도 모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경험이 감사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인간이 성숙되면서 그 순간 감사 앞에 내가 겸손하게 됩니다. 감사로 인해서 내가 자유해집니다. 감사로 인해서 미래가 보입니다. 감사해 보십시오. 행복할 뿐더러 앞이 환하게 보입니다.
유대의 어떤 어머니가 별로 배운 바가 없는 무식한 어머니였지만 자식은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 있었느냐 하면 늘 세 가지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하나는 모든 일에서 감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원망하는 사람하고 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친구든 누구든 만났을 때에 뭐 어쩌고저쩌고 원망하거든 다시는 만나지 마십시오. 그것은 전이됩니다. 원망하는 사람과 사귀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가 감사하는 사람과 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 마디로 훌륭한 자녀들을 양육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본에[우찌무라 간죠]라는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인간에게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질병도 실패도 배신당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정말 저주는 세 가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 아무리 믿어 보려 해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버림받은 심령입니다. 두 번째는 성경을 읽고 요절을 외워서 성경은 많이 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이 저주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 지식적인 책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와야 됩니다. 설교를 듣는 중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보다 세상 경험이 적은 사람의 알량한 지식으로 들려서는 안 됩니다. 나 보다 나이 어린 사람의 연설로 들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내 귀에 들려와야 합니다. 이것이 안 들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늘 원망과 불평뿐입니다. 사도바울이 빌1:4에서 말합니다.“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한다.”그는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그런데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이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감사란 철저히 깨달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많이 은혜 받았다고 많이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닫는 부분만큼만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래 신앙생활하고 내 직분이 중하다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깨달음이 많은 사람이 많이 감사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있다는 말씀이 옳은 것입니다. 특히 신앙생활에는 이 깨달음이 분명해야합니다. 그래야 사랑도 알고 은혜도 압니다. 더 나아가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세 가지의 명절을 정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각의 명절에는 그들이 깨달아 알아야할 각각의 의미가 있습니다. 출애굽을 기념한 무교병의 절기인<무교절>과 무교절로부터 오십 일째 되는 날이자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오순절이라고도 부르는<맥추절>그리고 광야 사십 년을 기념하는<초막절>또는<수장절>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절기들 속에는 공통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어렵던 시절 고난과 아픔으로부터의 해방과 배고픔과 방랑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그들에게 살길을 열어 주셨던 그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깨달음이 중요하고 또 한 가지의 공통점은 이스라엘의 추수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교절>은 처음 보리추수가 시작되는 때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받은<맥추절>은 보리추수가 끝나는 때입니다. <수장절>은 가을추수가 끝나는 추수감사절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세 번의 절기 속에 모두 구원을 기억하게 하고 곡식을 거두는 것과 연결시켜서 지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풍성함을 깨달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풍성합니다. 영적 풍성함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의 넉넉함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맥추 감사주일에 은혜차원에서의 풍성함이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물질을 가지는 것만이 풍성함이라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풍성함은 많은 물질을 가짐으로써 풍성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진 것을 바로 사용하는데서 누리는 풍성함입니다. 일용할 양식만 가지고서도 부요 할 수 있는 풍성함의 비밀입니다. [삭개오]를 보십시오. 그의 겉모습은 부요했지만 그의 실생활은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그는 돈을 쓸 줄 몰랐습니다. 무조건 모을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났을 때 그는 무엇이 참으로 풍성한 삶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얼른 나누어주기 시작합니다. 그 나누어 주는 자유함을 통해서 그는 진정으로 부요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먹을 것이 없어서 풍요하지 못한 시대는 아닙니다. 가진 것을 잘 사용하지 못해서 빈곤 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네 신앙의 선배들은 없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채워 주심에 눈물겹도록 감사하여 늘 드려도 아쉬움에 눈물마저 지었건만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내 돈 내면서 내 신앙 생활하는데 땀 흘려 고생을 왜 사서하느냐고 합니다. 정말 내 돈입니까? 그리고 교회가 극장입니까? 쇼핑 센타입니까? 마치 입장료 내고 권리나 찾는 그런 곳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진정한 풍요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조차 모를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감사가 메말랐기 때문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보리밥을 먹고 자란 기억이 있습니다. 미끈미끈한 보리밥에 달랑 고추장 하나로 점심을 때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 어려운 시절에는 배불릴 수 있는 선망의 양식이 보리밥이었습니다. 지금이야 그 보리밥이 별미가 되었습니다만 옛날에는 집집마다 처마 밑에 커다란 대소쿠리에 보리쌀을 삶아서 가득 달아놓았던 광경들을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도 엄청나게 복을 받고 산다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보리밥은 별미로 먹고 쌀밥, 혼합 밥, 콩밥...먹고 싶은 대로 먹습니다. 그 옛날 가난한 가정에서는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누렇게 떠서 영양실조에 걸려 죽어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는데.... 그러다가 춘궁기를 보내고 이제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고 보리를 추수하게 되면 그 보리를 빻아서 보리쌀을 가지고 밥을 지어서 꽁보리밥이라도 한번 실컷 먹을 수 있을 때 그때는 사실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울 때인지 몰랐다고 합니다.
이 먹고 살기 좋은 시대에 맥추 감사주일을 맞는 우리는 자신을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과연 얼마나 큰 것입니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시고(무교절), 율법을 주시고 언약을 맺으시고(맥추절), 광야 사십 년을 방황하면서 그들이 물이 없어 죽어 갈 때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그들을 살려 주셨던(수장절)그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우리의 것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내가 가진 모든 것과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정말 내 것이라고 우기며 살 것입니까? 내 돈 내고 내가 교회 다닌다는 식의 은혜가 메마른 소리를 하고 있다면 참으로 한심한 일일 것입니다. 제대로 된 감사의 마인드를 찾아야 합니다.
어느 날 철수네 식구가 목사님네 초대를 받았습니다. 식사를 끝내고 나오던 철수가 아빠에게 묻습니다.“아빠, 아까 식사할 때 왜 기도했어? 집에선 안 했잖아?”그러자 아빠가 하는 말“야 임마! 우리 집에선 아빠가 번 돈으로 음식을 장만했지만 오늘은 공짜잖아.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기도해야지!”하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유치한 감사는 하지 맙시다. 성숙된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감사를 아는 신앙의 신비>는 깨닫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맥추절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 먼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감사를 아는 신앙의 신비>속에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쳘현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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