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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며 삽시다 (시100:4)

by 【고동엽】 2022.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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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며 삽시다  (시100:4)

(시 100:3,4)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하나님께 감사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교훈해 주는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버려도 전혀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낡고 찌그러진 아
빠의 신발을 볼 때마다 나는 견딜 수 없이 우울하고 슬프기만 했습니다. 내가 이런 비참한 마음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아빠가 실직한 이후부터였습니다. 아빠의 실직 이유를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하지만 아빠는 그 일로 몹시 괴로워하셨습니다. 가끔 주무시다가도 몸을 부르르 떠시던 모습은 마치 활동사진처럼 내 기억 속에 생생합니다. 실직 하신지 3개월쯤 되었을 때 아빠는 어느 회사의 신입사원으로 새로 입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전 회사와는 전혀 다른 업종의 회사였는지라 아빠에게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었나 봅니다. 입사한지 1개월이 조금 지나, 아빠는 다른 사람들이 꺼려하는 출장근무를 자원하셨고, 회사의 허락을 받은 아버지는 그 이후 늘 출장만 다니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3-4일이었던 출장이 조금 지나서는 1-2주로 늘어나더니 요즘에 와서는 한 달에 한 번씩만 겨우 집에 들어오십니다. 아빠가 출장을 다녀오실 때마다 아빠의 구두는 검정색인지 황토색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아빠는 어딘지는 알 수 없으나 거의 매일 걸어 다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나마 어느 구두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원래 낡았던 구두가 어느 샌가 뒷 굽도 다 닳고 앞은 입을 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빠는 그 낡은 구두를 몇 번이나 수선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수선마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아빠는 가장 값싼 운
동화를 사 신으셨습니다. 우리 남매를 키우시느라 구두를 살 형편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운동화 역시 한번 출장을 다녀오시면 금방 낡은 신발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빠의 그 신발을 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아빠의 생신 때에는 반드시 구두를 선물해 드리리라 다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용돈을 따로 받아 모을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교 오갈 때 버스를 타는 대신 걸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금세 2,000원이 모였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기뻤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어느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소복히 쌓인 은행잎들을 밟으며 중앙청 앞길을 걸어 집으로 향해 가던 중, 저 앞앞에 웬 키작은 남학생 한 명이 낙엽을 터벅터벅 밟으며 힘없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동생의 팔을 잡으면서 말했습니다. “너 왜 자꾸 누나 말 안 듣니? 넌 아직 어려서 걸어 다니면 피곤해 성적 떨어진다고 반드시 버스 타고 다니라고 했잖아?” 동생이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럼 난 아빠 구두 값을 어떻게 모으란 말야?” 나는 동생에게 애원하듯 말했습니다. “누나가 다 모을테니까 넌 걱정하지 말랬잖아” 갑자기 동생이 표정을 바꾸면서 물었습니다. “누나 누나는 얼마나 모았어?” 2,500원이란 대답을 들은 동생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럼 내가 모은 것과 함하면 웬만한 구두는 살 수 있겠다! 누나 나 그 동안 2000원 모았어! 잘했지?” 나는 동생이 너무나 대견스러워 하마터면 대로변에서 울음을 터뜨릴 뻔 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가 다음 토요일, 동생과 나는 남대문 시장에서 만원짜리 구두를 쌌습니다. 그리고 예쁘게 포장한 다음, 며칠 남지않은 아빠의 생신을 기다렸습니다. 아빠가 그날만큼은 꼭 집에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입니다. 마침 동생이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빠가 오늘 못 오신대. 그러니까 구두를 드릴 수가 없잖아” 동생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다 낡아빠진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 지금도 어느 길 위에선가를 걷고 계실 아빠를 생각하자 어느새 내 눈에도 뜨거운 이슬이 한 방울씩 맺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쉬움의 눈물이었을 뿐, 더 이상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빠에게 드릴 새 구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1985년경 영락중학교 한 여학생의 글입니다.)
  본시는 '감사의 시'라는 표제가 붙은 시로서, 예배자들이 감사제의 예물을 가지고 성전 문과 뜰을 통과할 때 부른 노래입니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 관계인가를 분명히 밝혀주며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도 감사하며 삽시다.

   우리를 지으신 자이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시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오.' 인간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특별히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거룩한 성품을 부여받은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최초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러한 거룩한 속성이 많이 손상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과 성품을 간직하고 있는 존재요, 따라서 모든 인간은 가장 존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시면서 모든 인류를 대속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을 '천하보다 귀하게'대해 주셨습니다.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과 이웃을 대할 때 죄와 허물만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영혼 속에 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진 자신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여호와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고 묘사했습니다.
이러한 시인의 묘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요 소유라는 사실을 밝힘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우리의 호흡이 다하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돌보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헨리 왕은 퀸카게시마 주일날(Quinquagesima Sunday:사순절의 바로 전 일요일-역자 주) 사냥을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수행원들은 다 흩어지고 왕 혼자만 어떤 숲 어귀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근처에 교회가 있는 것을 발견한 왕은 그리로 갔습니다. 그리고 마치 군졸인 양 행세하면서 사제에게 미사를 집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사제는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얼굴이 심히 일그러져 사람이라기보다는 괴물처럼 보였습니다. 왕은 사제에 관해 곰곰이 생각을 하였습니다. 왜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못생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성례전을 집전하게 하실까 하고 그는 몹시 궁금해졌습니다. 그런데 미사가 진행되어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라는 말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 소년이 이 말씀을 영창하자, 사제는 소년이 안이하게 노래한다고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자는 주님이시요 우리 자신이 아니다.' 이 말씀을 들은 왕은 그가 선지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사제를 쾰른 대주교로 승진시켰습니다. 이후 그 사제는 뛰어난 헌신과 덕으로 큰 칭송을 받았습니다. -로저 웬도버(Roger Wendover, Flowers of History, ?-1237).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그대로 감사하며 사는  모두가 됩시다.

   우리를 자신의 소유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시다.
'우리는 그의 것이니.'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땅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합하여진 존재입니다. 영과 육이 합하여 있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과 육은 다 내 것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내 것입니다. 그런데 내 영과 육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몸은 값을 주고 산 것이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6;19-20)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의 것이라고 에스겔 선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 것이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함같이>(겔18;4)
우리의 절대 주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에게 속하여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해군장교 가와가미 기이치씨가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현실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불평과 불만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활이 계속되자 그의 몸이 굳어져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정신과의사인 후치다씨는 그에게 이런 처방을 내렸습니다. “하루에 1만번씩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세요. 감사의 마음이 당신의 병을 치료해줄 것입니다” 그는 병석에서 매일 ‘감사합니다’라고 중얼거렸습니다. 하루는 그의 아들이 감 두개를 건네주었습니다. 가와가미 기이치씨는 손을 내밀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굳었던 몸이 풀리고 질병에서 벗어났습니다. 불평과 불만, 원망과 저주는 모든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특효약입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와서 불평의 문으로 나갑니다.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항상 ‘감사’가 풍성하다는 것입니다(인터넷 정보클럽- 감사와 치유)
우리를 소유 삼으신 하나님 치시기도 하시고 고치시기도 하시니 감사하며 사는 모두가 됩시다.

    우리를 그의 백성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시다.
  '그의 백성이요.' 이 말씀은 우리의 통치자는 하나님이시라는 시인의 절대적인 선언입니다.
(레 26:12)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합니다.
우리가 섬겨야 하고 경배해야 하며 통치 받아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명령을 두려워해야 하며,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뜻을 이뤄 들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 개개인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이를 감사하여야 합니다.
고대 왕정 시대의 백성들은 임금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을 가장 가치 있는 일이요, 최대의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희생하여 왕의 뜻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바로 이러한 자세로 성도들은 하나님을 떠받들고 그의 통치에 순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받지 않고 다른 여자가 받더니 말했습니다. <저는 파출부입니다> 주인아주머니 좀 바꿔달라고 말했더니 파출부가 말했습니다. <아주머니는 남편 분하고 침실로 드셨는데요?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누구시죠?> <헥! 남편이라고 했습니까?><예, 야근하고 오셨다던데...> <이백, 아니 오백, 드릴 테니 좀 도와주세요. 부탁입니다. 몽둥이 하나 들고, 몰래 침실에 가서 남편 뒤통수를 사정없이 내리쳐서 기절시키세요. 만약에 마누라가 발악하면 마누라도 같이 때려눕히세요. 뒷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부탁입니다> 파출부는 잠시 망설이더니 한번 해보겠다고 하였습니다. 전화도 그냥 내려놓았습니다. 전화를 통하여 으악 윽 아이구 소리가 요란하였습니다. 잠시 후 파출부가 다시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시키는대로 했어요, 둘 다 기절했는데... 이젠 어떻게 하죠?> <잘했습니다. 두 사람을 묶어두세요. 거실 오른쪽 구석에 다용도실이 보이죠? 그 안에 끈이 있으니 가져오세요> 파출부는 한참 찾았습니다. 다시 전화기를 들고 말했습니다. <이 집엔 다용도실... 없는데요?> 남편이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습니다. <거기 532-37XX 아닌가요?> 파출부 대답은 <아닌데요>였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지키시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시 79:13) 그러하면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리이다 하신대로  우리를 백성 삼으시고 다스리시고 지키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시다.

   우리를 기르시는 양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시다.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합니다. 하나님이 길러주신다는 말씀은 완전하게 복되게 길러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양은 목자가 없으면 굶어 죽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이시고 우리는 그의 양입니다. 하나님이 길러 주시고 보호하여 주셔야 제일 안전합니다. 목자는 양의 처지를 양보다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양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알며 운동해야 할 시간과 안식해야 할 시간을 압니다. 또한 양의 아픈 곳을 알며 치유책을 압니다. 아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목자는 양의 처지를 아는 대로 그 필요를 채워 줍니다. 그래서 양이 배고플 때는 좋은 목초지로 인도하며 목이 마를 때는 맑은 시냇가로 인도합니다. 목자가 이처럼 양떼의 사정을 잘 알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그만큼 양떼에게 관심을 쏟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늘 주시하게 되고 늘 주시하기 때문에 그들의 사정을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목자가 양떼에게 쏟는 것과 같은 지극한 관심과 보살핌은 목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똑같은 관심과 보살핌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양된 백성들에게 가지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시 139:1)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완벽한 보호를 받는 사람들이 우리 성도들입니다.

경상도 영주의 영주 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내시고 지금은 이사장이신 강 경훈 장로님의 젊은 시절에 관한 이야기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이 강 장로님이 일제 말엽, 보급대로 끌려가 채석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채석장의 하루 일과는 아침 일찍 일어나 바위들 마다 구멍을 뚫고 그 구멍들 마다 다이너마이트를 집어넣는 작업을 점심시간 이전까지 합니다. 그리고는 점심시간 바로 직전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놓고 돌을 부숴뜨린 후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돌을 나른다고 합니다. 이날도 어김없이 오전일을 마치고 다같이 둘러 앉아 점심을 먹게 되었습니다. 강 장로님은 그날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식전에 하나님 앞에 간절함 마음으로 감사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개 한 마리가 와서 기도하는 장로님의 도시락을 물고 가는 것입니다. 장로님은 기도를 마치고 보니 개가 자신의 도시락을 물고 저만치 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옆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조롱했겠습니까? “배고픈데 빨리 먹지 무슨 기도는 기도냐! 하나님이 계시다면 저 도시락도 안 지키시고 어디 계신가!”하면서 조롱합니다. 그래서 장로님은 도시락을 찾으러 개를 쫓아가는데 장난을 치듯 개는 잡힐 만큼 가까이 가면 얼른 도망가고 천천히 가면 개도 천천히 가면서 어느새 백여 미터를 넘어 이 백여 미터 가깝게 갔을 때 이상하게 그 개는 도시락을 놓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도시락을 주어 돌아서는 순간 다이너마이트가“꽝”하며 터지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오전에 바위구멍에 넣어 두었던 다이너마이트가 다 터진 줄 알았는데 그중 불발탄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곳에 모여 점심을 먹던 사람들이 다 죽고 개에게 도시락을 빼앗겨 멀리 온 강 장로님만 살아 나게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지키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도시락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그 수고를 통해 그의 생명을 살리셨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맥추 감사주일입니다. 과거 농경 사회에서 보리농사를 거두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만, 오늘 현대 사회에 있어서는 한 해의 전반기를 은혜 가운데 보내며, 또 후반기를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며 드리는 절기입니다. 맥추감사 주일을 지키며 우리를 지으신 자시며 우리를 자신의 소유 삼으시고 백성 삼으시며 기르시는 양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모두가 됩시다.

출처/강성찬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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