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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라
잠 22:19 ~ 21,요 8:31 ~ 32
지난 91회 총회 주제는 “교회여,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라”입니다. 우리 교단의 모든 교회들은 한 해 동안 이 주제를 중심으로 신앙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특히 올해는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된 대 부흥운동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로서 부흥을 재현하는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교회도 “연동교회여,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라”는 목회주제를 정하였습니다.
“교회여,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라”는 것은 몇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가 잠자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가 본질적 사명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세상에 절대적 가치의 빛이 없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교회도 빛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세상이 진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교회도 진리를 비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일곱째는 교회가 다시 서야 세상에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전제로 올해는 꼭 교회가 다시 진리 가운데 서서 세상에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기독교는 마이너스 성장을 하였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기독교인들이 외국을 많이 가서 실질적인 하락이 있었다고 합니다만 기독교인만 외국을 간 것은 아닐 것입니다. 통계가 그렇게 말한다면 인정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체감하기도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다고 봅니다. 반면에 가톨릭은 급성장했습니다. 지난해의 성장률을 보면 불교가 3.9% 성장했습니다. 천주교는 74.4% 성장했습니다. 반면에 개신교는 1.6% 감소하였습니다.
얼마 전에는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톨릭의 성장”이란 제하에 세미나를 했습니다. 왜 가톨릭은 마음을 사로잡고 성장하는데 개신교는 못합니까? 제가 볼 때는 인간적 요인보다 성경적 요인 때문입니다. 교회가 진리를 떠나 있어서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지도 못하고 성장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가 다시 서야 합니다. 교회가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힘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형편없는 인간들로 교회를 세우신 것은 거의 도박에 가까운 모험입니다. 어느 교회 앞의 게시판에 이렇게 써두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교회에 들어오지 못할 만큼 악인이 아니죠? 그리고 당신은 밖에 있어도 될 정도로 선한 사람도 아니죠?” 교인 전체는 가치중립적입니다.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합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중립적입니다. 모든 교회가 신비와 혼란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존 스토트는 이것을 ‘교회의 이중성’이라 불렀습니다. 교회는 이미 거룩하며, 아직 거룩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거룩해졌으며 거룩해지라고 부르심을 받습니다. 성도를 선하게, 교회를 신비하게, 거룩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회개와 각성의 해, 부흥을 꾀하는 해에 먼저 교회가 다시 서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교회는 반드시 다시 서야 합니다.
교회는 다시 서야 합니다. 교회는 성장해야 합니다. 교회는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생명을 근거로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반드시 서야 하고, 성장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서야 하고, 성장해야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전에 신문에 난 기사가 참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미국 시애틀에 9살짜리 뇌질환성 전신마비 장애 소녀가 있습니다. 애슐리라는 소녀입니다. 이 소녀가 최근에 성장을 멈추는 ‘성장억제’ 시술을 받았습니다. 일부 의료계는 이 시술이 비인간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애슐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걷거나 말을 못하고 머리를 제대로 가눌 수도 없고 제 힘으로 구르거나 앉을 수 없는 채로 튜브를 통해 음식을 섭취합니다. 부모가 그 아이에게 붙여준 별명은 “베개 공주(Pillow Angel)”입니다. 이 아이가 6년 6개월이 되자 사춘기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몸의 타 기관은 계속 성장하지만 지능발달에 대한 개선의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능이 더 이상 발달하지 못한다는 진단으로 이 아이에게 성장억제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아이의 키는 134cm, 몸무게는 34kg 상태를 유지하게 한 것입니다. 일부 의료계와 일부 인사들은 ‘비열한 프랑켄슈타인식’의 행위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릇된 시술이라고 비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모와 시술한 의사가 오죽 했으면 아이의 성장을 억제하였겠습니까?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가 비극입니다. 서지 못하는 것은 생존의 의미가 없습니다. 다시 스스로 설 수 없는 교회가 되었습니까? 완전히 생명력을 잃은 교회입니까? 교회가 생명을 왜 잃어버렸습니까? 교회는 다시 서야합니다. 교회는 다시 설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교회는 생명의 말씀이 근거입니다. 생명이 근거이므로 성장해야 하고, 서야 합니다.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께서 “일어나라”고 하신 한 마디에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는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할 때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면 병자가 일어납니다. 죽었던 자도 살아납니다. 병든 교회도 일어납니다. 죽었던 교회도 살아납니다.
어느 자료에 보면 성장하는 교회의 제일 요건은 끊임없는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적 설교라고 합니다. 성장하는 교회들은 주로 강해설교를 하며 성경을 많이 가르친다고 합니다. 반면에 교회가 쇠퇴하는 신드롬은 첫째가 회의가 예배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된다. 둘째가 기독교 기관이 교회보다 더 발달한다. 셋째가 말씀을 문자보다 상징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유의하여 교회가 성장하고 서게 해야 합니다. 교회가 쇠퇴하는 갖가지 신드롬을 억제하고 피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9:31에는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합니다. 당신의 교회는 많은 환난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교회는 더욱 든든히 서 있었습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입니다.
교회는 사회의 최후의 보루입니다. 교회가 무너지면 사회는 기댈 곳이 없습니다. 진리를 지키고, 복음을 수호하는 일이라면 교회가 단호하게 나서야합니다. 머리만 깎을 것이 아니라 목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점점 교회들은 주류교단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주류교단들은 전자기술과 스크린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주역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단들은 복음에 대한 열정과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에 소홀합니다. 개교회가 조금만 앞서가면 발목잡고, 이단 시비를 합니다. 교회들이 교단을 탈퇴하는 징조가 많이 보입니다. 교회가 자유롭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교단은 좀더 탄력적인 사고를 해야 합니다.
교회는 변하지 않는 복음과 변하는 세상 가운데서 위치를 지켜 바르게 서야 할 때입니다. 이런 교회는 절대 쇠퇴하거나, 침체하거나, 이름만 남아 있거나, 자취를 감추는 교회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은 문자적으로 변하지 말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삶은 날마다 진보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소아시아 지역을 여행할 때마다 참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 옛날에 찬란하게 성장하고 칭찬을 듣던 빌라델비아 교회도 지금은 기둥만 몇 개 남아있고 교인의 흔적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교회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교회가 절대로 시들지 않고 설 수 있게 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책임입니다.
둘째, 교회는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야 합니다.
교회는 서되, 진리의 빛으로 서야 합니다. 진리가 아니면 세상을 비추지 못합니다. 진리는 참입니다. 진리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논리적으로 진리란 허위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국어사전에는 참된 도리, 바른 이치, 언제나 누구에게나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인식의 내용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시편 31:5에는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4:6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7:17에는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진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진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시며 진리이십니다. 요한복음 1: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충만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거하면 진리를 압니다. 요한복음 8:31 하반절에서 32절에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7:17에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진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이런 예배가 경건성을 가집니다. 말씀은 진리이며, 진리가 살아있는 예배가 경건한 예배입니다. 경건한 예배는 말씀 중심의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4:24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6:13-17에는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십니다. 전신갑주는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 검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의 허리띠입니다. 진리, 의, 복음, 믿음, 구원, 성령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우리가 전신갑주를 입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싸우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2-24에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옛것을 벗어버리는 회개와 새롭게 되는 변화는 진리로 새 사람을 입는 개혁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개인도 교회도 부흥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8:38에는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고 합니다. 빌라도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진리를 몰랐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지금도 진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설 때에 진리를 확실히 전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먼저 진리 위에 굳건하게 서야 진리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거짓에서 떠나고 진리 위에 서야 세상을 비추는 등대가 됩니다.
디모데는 참 부러운 사람입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깨끗한 믿음을 이어받은 교회의 일꾼입니다. 바울이 아들같이 여기던 바울의 협력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 5절에서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이 제일 부럽습니다. 좋은 가문도 부러워할 일이고, 바울이 인정하고 사랑하는 일꾼이 된 것도 부럽지만 가장 부러워할 일은 거짓이 없는 믿음입니다. 진실한 믿음입니다. 진리 가운데 서 있는 그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가문이나 사람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깨끗하고 거짓이 없는 믿음, 진리 가운데 서 있는 굳건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이 목사도 거짓말을 하는 것 아십니까? 거짓말은 진리에서 떠난 행위입니다. 저도 거짓말을 가끔 하는 것을 고백합니다. 흔히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미명하에 별 가책 없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진리의 빛은 거짓이 없는 빛입니다. 저도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많은 가책을 가졌습니다. “진리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거짓을 물리쳐야지”하고 다짐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 앞에서 약속하려고 합니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하지 않는 해가 되려고 합니다. 올해는 우리부터 거짓말을 하지 않는 해가 됩시다. 진리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찬송가의 가사에 “하나님의 진리 등대 길이길이 빛나니 우리들도 등대되어 주의 사랑 비추네”라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 교회가 진리의 등대가 되어 빛을 발해야 합니다. 진리의 등대는 거짓을 비추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진리의 등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세상이 변화되고 새로운 부흥을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결론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하자 안내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공항 안에서 댁의 보청기를 주웠습니다. 그러니 고객 서비스 카운터에 와서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찾아가지 않았답니다. 보청기가 없으니 들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안경을 못 찾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안경을 벗고 있으니 안경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못 찾았답니다.
교회는 복음을 들려주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곳이 돼야 합니다. 귀가 있어도 못 듣고, 눈이 있어도 못 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확실히 들려주고, 그리스도를 분명히 보여주기 위하여 교회는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야 합니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자 최면 상태’라고 합니다. 이 현상은 쾌락 호르몬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마라톤의 주자들이 한참을 달리다보면 최면상태처럼 되어 그냥 그 속도로 달리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느끼는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게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어 보이지만 옳은 곳을 향하여 끊임없이 달리면 주자 최면 상태에 들어갑니다. 끊임없이 세상 향락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갈 수도 있고, 끊임없이 하늘의 영광을 위하여 쉴 새 없이 달릴 수도 있습니다. 한 해 내내 신앙으로 달려가기를 바랍니다. 하늘나라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쾌락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열심히 달려 우리 교회가 반드시 1907년을 회복하는 회개와 각성과 부흥을 이루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성희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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