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 11:24-26
새해에 성도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풍성히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새해를 맞이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 번째 시간으로 진정한 믿음의 성공자 모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려운 시대를 살수록 사람들은 [성공 신드룸]에 쉽게 빠집니다. 요즘처럼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속에 붙잡혀 있을 때가 아마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경제 대난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 중에 하나가 요즘 회사에서도 동료(同僚),선(先).후배(後排)간 인간관계(人間關係)가 파괴돼 가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성공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성공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성공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정당화 됩니다.남의 돈 마구잡이로 빌려 화려하게 시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선 보기에는 꽃다발도 많이 들어오고, 사람도 많이 오고, 화려하여 좋지만 사실은 실속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성공주의가 한탕주의, 요행주의를 부채질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진정한 성공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미국의 강철 왕 카네기는 그 당시 세계제일의 부자로서 수십억 불의 재산을 전부 사회에 기부했습니다. 그는 평소 60세까지의 자신의 인생을 돈을 버는데 쓰고, 60세 이후의 인생은 돈을 쓰는데 바치겠다고 이야기 했었습니다.그는 부자로 죽는 것이 가장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카네기는 돈을 버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가치 있는 삶을 사는 일에 목적을 둔 바른 인생관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관 밑바탕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카네기는 진정한 믿음의 성공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세상적인 성공을 열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도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때때로 세상과 더불어 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세상적인 열망을 사로잡힌 채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정말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성도라면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선진들처럼 믿음의 성공자가 되기를 우선적으로 열망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성공하기를 열망하면서도, 믿음에 대해서는 성공자가 되기를 열망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성공자는 믿음의 성공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었던 믿음의 성공자 모세에 말씀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우리들에게 삶의 바른 방향과 자세를 제시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성공 자였던 모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모세는 영웅적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삶은 기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서 생명을 보존한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가 사막의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것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고 애굽의 통치자 바로와 싸우면서 출애굽 하는 장면은 얼마나 위대한 드라마입니까? 또한 신명기 34장에서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죽음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그러기에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향하여 “전무후무한 선지자”(신 34:10)요,“다정한 친구처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출 33:11)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인생(人生)의 성공자가 되어야 하겠지만, 주님 안에서 믿음의 성공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모세로 하여금 믿음의 성공자가 되게 하였던 삶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본문 24절에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애굽 왕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면 얼마나 명예스러운 자리입니까? 그런데 모세는 믿음으로 이 명예를 거절한 것입니다. 물론 ?명예(名譽)?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요셉과 다니엘은 한 나라의 훌륭한 지도자이면서도 철저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좋은 의미에서 유명해지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셉과 다니엘이 인정받는 지도자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되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성공자가 되기 앞서 전에 먼저 믿음의 성공자였습니다. 예를 들어 요셉은 비록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애굽의 시위 대장 집에서 가정 총무로 있는 형편이었지만,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할 때에 부정한 죄악(罪惡)을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비록 바벨론의 포로로 되어서 끌려 다니며 고생하는 가운데 있는 형편이었지만 뜻을 정하여 느부갓네살 왕이 내리는 우상 숭배했던 ?산해진미?(山海珍味)의 음식을 과감하게 거절했던 것입니다. 물론 요셉과 다니엘처럼 ?영적 자존심?을 가지고 믿음 생활에 방해가 되는 것을 과감하게 거절하려면 많은 희생과 대가가 치루어야 합니다. 하지만 요셉과 다니엘이 믿음으로 바로 살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거절한 것이 결코 헛된 희생과 대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요셉과 다니엘은 실패자 같으나 성공자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은 서머나 교회의 12번째의 순교자라고 합니다. 폴리갑은 그의 나이 86세에 되던 해에 로마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노천 극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군중들이 모여 있었고, 한쪽에서는 사나운 맹수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때에 형을 집행하는 총독은 폴리갑에게 향하여 말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말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를 맹세코 살려 주리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폴리갑은 조금도 두려워함이 없이 의연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86년 동안이나 구주 예수님을 섬기고 믿어 왔지만, 그분은 단 한번도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이제 와서 나더러 그분을 배신할 수 있겠냐?”라고 하면서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총독은 몇 번이나 협박과 회유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노감독 폴리갑은 “그대는 똑똑히 들어주시오! 나는 맹세코 그리스도인이요”라고 하면서 끝까지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폴리갑은 화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저를 이렇게 의미 있고 중요한 시대에 살게 하셨음을 감사합니다” 참으로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분명히 폴리갑은 순교하였지만 믿음의 성공자였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거절할 바를 거절하지 못해서 낭패를 본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거짓 선지자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모압 왕 발락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뇌물을 받고 거짓 예언을 하러 가다가 나귀와 천사에게 견책을 받고, 그러나 끝까지 깨닫지 못하고 행음과 우상 숭배로 이스라엘을 타락케 하여 모세가 미디안 다섯 왕을 죽일 때에 함께 죽임을 당하였습니다(민 25:1-9)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연약할 때에 사래가 늙도록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사를 생산하지 못하자 여종 하갈을 통하여 아들을 갖자는 계획을 거절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가정불화는 물론이고 민족간의 불화를 초래하였습니다(창16:4-6)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악한 영향을 미친다면 희생과 대가를 치룰지라도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바로 살아가는데 거침이 되는 것이라면 끊을 것은 끊고, 버릴 것은 버리고, 신실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 3:8에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8절)라고 고백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모세에게 있어서 자신에게 주어진 명예(名譽)를 거절하는 것보다 자신을 길러 준 바로의 공주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에 더 큰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사랑이 하나님과 우리 시이에 금이 가게 한다면 그것은 우상인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우상이 되어 하나님과의 사이에 거침이 된다면 그 사랑은 부패하고 맙니다.
또한 마귀는 지금도 교묘한 수법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타협할 수밖에 없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마치 마귀는 말에게 달콤한 홍당무를 주는 것처럼 그럴싸하게 부드럽고 달콤하게 유혹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 믿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너무 깊이 들어갈 필요가 없어. 주일에 예배 한 번 드리면 되는 것이지 다른 날까지 나와 예배 드릴 것까지는 없어... 아니 요사이 얼마나 바쁜 세상인데, 시대에 맞게 예수 믿어야 돼! ... 네 몸으로 헌신하는 것은 좋아. 그러나 시간 바치고 물질까지 바칠 필요는 없어. 그저 적당히 믿어... 더구나 예수 믿으려면 너 혼자만 믿어. 왜 다른 식구들까지 못살게 구는 거야”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마귀의 유혹을 물릴 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모세처럼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변질된 그리스도인처럼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바로 분별하지 못하고 너무나도 안일하게 평안한 가운데 적당히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때를 따라 혹독할 정도로 따끔하고 분명하게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고난 받는 것도 좋아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25절)
고난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본문 25절에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삶을 선택했습니다. 모세는 공주의 아들로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자라났고 세상적으로는 최고의 권세에 오를 수 있는 자리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받기를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받기 전까지는 죄악의 날이 훨씬 더 좋아 보입니다. 그리고 성경도 죄악에도 낙(樂)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낙(樂)은 잠시입니다. 그 잠시가 지나면 허무와 고통의 열매를 씹어야만 합니다. 모세는 이 죄의 본질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 삶이 고난의 길이라고 할지라도 그 길을 가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40년의 긴 광야 생활 속에서 굶주림에 대한 원망, 목마름에 대한 원망, 우상을 숨기는 배교(背敎)의 고통 속에서도, 심지어 자신의 영도권에 대한 도전 속에서도 끝까지 그 온유함을 변개(變改)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 인내의 경주를 계속함을 잘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진실로 모세는 고난 속에서도 오직 사명을 향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거나 후회함이 없이 시종일관 한 마음으로 그의 사명을 향하여 달려가는 성공된 신앙의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로 하여금 고난까지도 좋아하게 하였던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고난 뒤에 숨은 하나님의 축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은 장래가 약속된 고난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벧전 4:14,16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 세찬 비바람에 소나무의 생명력은 더욱 강해지듯이 세찬 고난에 연단 된 신앙 인격은 더욱 성숙해 집니다.
② 주님을 위해 받는 고난은 곧 주님과 더불어 받는 고난이므로 결국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영광스런 일입니다
③ 주님을 위한 고난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내버려 주지 않습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어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십니다. 물론 하나님께 범죄 함으로 받는 고난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일지라도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된다면 궁극적으로 그 고난 역시도 우리에게 유익한 고난일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서 받는 고난을 결코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그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벧전 4:12-13) 따라서 성도에게 있어서 고난은 절망케 하는 시험이 아니라 성숙케 하는 연단임입니다.
참된 믿음 생활을 몸부림치는 중에 고난을 받는 분이 있습니까? 모세처럼 고난까지도 좋아할 줄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모세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서성이는 분이 있습니까? 이제라도 무엇이 가장 귀한 것인지를 바로 깨닫고 올바른 것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2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모세는 상급을 바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살고자 했던 모세는 참으로 것들을 잃어버렸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믿은 후에 많은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모세는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로 장차 일국의 왕이 될 수도 있는 특권도 잃어버렸습니다. 수많은 재물을 마음대로 누릴 수 있었으나 이것 역시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모세는 본문 26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모세는 상급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당하게 거절할 것을 거절하였고, 심지어 고난조차도 좋아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그리스도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여기의 “여겼다”라는 말은 그렇게 “간주했다” 혹은 “선택했다”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모세는 분명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으로서 상급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모세가 상을 받기 위하여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거절하고 고난까지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었기에 결국 하나님의 보상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고 담대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주후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받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시간과 과정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히 11:35-38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희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결박당하고, 옥에 갇히고, 돌에 맞아 죽고, 불에 타 죽고, 톱에 켜 죽임을 당하고, 심지어 양과 염소의 가죽을 뒤집어쓴 채 맹수들의 밥이 되고, 따라서 광야와 산중에 암혈과 무덤과 토굴 속에 숨어 가는 참으로 가혹하고 처절한 핍박”을 당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예배된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잠시 잠깐의 환난을 참고 견디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을 때에도 “죽도록 충성된 자에게 약속대로 생명의 면류관을 주어질 것”(계 3:10)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소망과 기쁨의 얼굴로 죽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았던 그들을 가리켜 세상이 감당치 못한 사람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히 11:38)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바 생명의 면류관은 대충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모세처럼 거절할 수도 없고, 혹 거절한다고 할지라도 어떤 형태든지 간에 마귀의 시험과 환난을 이길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시대가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전신(全身)갑주를 입소 순교할 각오로 아주 분명한 신앙의 색깔을 가지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주셔서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하였도다”라고 칭찬을 받을 그 날이 있을 줄 믿습니다.
믿음의 성공자 모세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방해가 되고 거침돌이 되는 것이 있다면 과감하게 거절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성공자 모세처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라면 당당하게 그 고난까지도 받아들이고 비싼 대가를 치를 지라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더 좋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우리들은 바른 막대기보다 보다 못한 연약한 존재이기에 쉽게 타협하고, 굴복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의 성공자 모세처럼 상급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거절할 것은 당당하게 거절하고,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심지어 고난까지도 당당히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마시고 믿음의 주(主)가 되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쩌면 오늘 본문의 말씀이 오늘의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설득력이 없는 탁상공론(卓上空論)적인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자신이 납득하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우리로 하여금 바른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말씀이기에 믿는 것임을 깨닫고 땅의 것을 바라보지 말고 위엣 것을 바라보는 가운데 다시금 희망과 비전을 갖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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