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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기도

이렇게 기도하라(1) (마태복음 6:9~10)

by 【고동엽】 2022.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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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기도하라(1)  (마태복음 6:9~10)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기도를 모르는 사람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마음에 이 질문을 한번 담고 스스로 대답해 보십시오.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주시는 대답입니다. 기도의 거장인 바운즈라고 하는 사람은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를 대신할 만한 것도 없고 기도에 버금갈 만 한 것도 없다. 옳은 말입니다. 정말 기도를 빼버리면 신앙생활은 심장이 멎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또 기도할 때에 바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 할 때에는 뜨겁게 해야 합니다. 반드시 해야 합니다. 바로 해야 합니다. 열정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진면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에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면서 유명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주기도문이라고 하기보다는 제자의 기도라고 해야 더 적절할 것입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은 무엇을 암시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경고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도는 나 좋을 대로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식으로 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되는 대로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칙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에도 원칙이 있고 기도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그 법칙을 항상 마음에 두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주기도문 하면 외우는 기도로 늘 생각을 합니다. 주후 2세기 교회에서는 교인들에게 하루 3번씩은 꼭 주기도문을 외우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물론 외워야 합니다. 너무나 좋은 기도, 너무나 소중한 기도를 왜 안 외웁니까? 외우기 때문에 자주 반복합니다. 1000번, 100번이라도 이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교회가 시작되고 나서 아마 1,2년 후부터 예배시간마다 주기도문송을 부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제가 워낙 주기도문을 좋아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담고 기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기도 하지만 주기도문송을 부를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벌써 20년 동안 한 주일도 빼놓지 않고 주기도문송을 불러왔습니다. 특별히 2부와 3부, 전통적인 예배를 드릴 때에는 꼭 주기도문송을 부릅니다. 부를 때마다 너무 가슴이 뜨겁습니다. 내 영혼이 찬양의 날개를 달고 우리 아버지 되신 하나님 앞으로 훨훨 날아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꽉 쥐고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어찌 안 부를 수 있습니까?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고 부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눈감고 부르기 때문에 목사가 손을 드는지 내리는지 모르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번쩍 들고 기도합니다. 10번이고 20번이고 부르고 싶습니다.

저와 같이 주기도문 찬양을 할 때마다 그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서 달려가는 거룩한 백성들이,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고 찬양하는 그런 성도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교회에 처음 들어와서 주기도문송을 부르는 것을 들으며 너무나 진한 감동을 받았다고 간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외워야 합니다. 10번이고 100이고 반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꼭 기억하십시오. 주기도문은 외우라고 주신 기도가 아닙니다. 외우라고 주신 기도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도의 지침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기도의 골격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주님이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도문을 가지고 기도의 원칙을 파악합니다. 기도라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하는 원칙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원칙을 중심으로 해서 다양한 기도를 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기도를 하게 됩니다. 원칙만 어그러지지 아니하면 됩니다. 이 원칙을 주기도문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을 살펴보면 기도가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잘못된 기도를 할 확률도 높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린애가 배고프면 보채듯이 하는 기도, 그런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불이 나면 119로 다이얼을 돌리듯이 하는 기도는 누구나 합니다. 안 믿는 사람까지도 하늘을 향해서 급하면 손비비고 하는 기도는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도 믿음이 약할 때는, 하나님이 그렇게 약간 유치한 기도를 해도 별로 상관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자기를 따르고 자기를 닮고 자기를 위해 생명을 바치기를 소원하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적어도 제자들의 수준에 이르는 기도를 하려면 항상 그렇게 유치하게 기도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제자들의 수준에 이르는 기도를 하려면 주기도문을 아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한번 보십시오. 순서부터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기도 하면 내 마음에 있는 것을 처음부터 쏟아 놓기가 바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하고는 그 다음부터는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하는 기도가 이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기도에는 순서가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주의 나라가 임하시며 주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가 먼저 있어야 된다. 하는 것을 주님께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급한 기도가 있어도 하나님을 위한 기도,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기도, 하나님 자신을 먼저 마음에 떠올리는 기도, 그 기도부터 앞세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순서가 틀립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기도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은 제자다운 사람이 됩니다.

그 뒤에 따라 오는 기도를 보십시오. 별로 호감이 안 가는 기도들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여러분 가운데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할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되십니까? 한번 손 들어 보십시오. 일용할 양식이 무엇입니까? 그날 먹고 마시고 끝나는 것이 일용할 양식입니다. 꼭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아침에 나가 만나를 거두어 와 가지고, 하루종일 그저 그것을 가지고 빻고 찌어서 빵도 구워먹고 여러 가지로 자기가 하고 싶은 요리를 해서 먹고 저녁이 되면 없어집니다. 만약 아까워서 두면 벌레 먹어 못 씁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아침에 또 나가서 들판을 헤매면서 만나를 거두어야 됩니다. 이것이 일용할 양식이라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기도할 때에 주여, 일용할 양식만 주옵소서. 그런 기도하면서 만족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대부분  오 하나님 아버지, 제가 하는 일에 축복 하옵소서. 하늘의 복도 주시고, 땅의 복도 주시고, 떡 반죽에 복이 넘치게 해 주옵소서. 주여,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소서.  나도 모르게 막 내놓는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 비추어보면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욕심이 너무 많이 차 있는 기도입니다. 주님은 그런 기도를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주기도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굉장히 무서운 교훈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 할 때에 하나님 앞에 내가 용서 받기 위해서 나에게 잘못한 다른 사람의 죄를 먼저 용서하려고 노력합니까? 주기도문에 그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내가 먼저 용서하오니 나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우리 주님이 그렇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서 받기 위해서 내가 먼저 용서합니까? 저도 잘 못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네가 용서 받기 원하면 먼저 용서해라. 이것입니다. 이 원칙대로 우리는 잘 안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또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요즘에는 자동차 타고 다니기 무섭습니다. 술 먹은 운전자가 너무 많습니다. 마약에 빠져 가지고 환각 증세를 일으키면서 운전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 꼭 지켜주셔야 되겠습니다.  하는 기도를 합니다. 이 기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이 젊은 나이에 병들어 죽는 사람도 가끔 보는데, 주님 제발 병좀 들지 않게 해 주시고 건강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기도보다도 다른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악에서 건지시옵소서. 우리는 나의 육신적인 건강, 세상의 평안을 위해서, 안전을 위해서 항상 기도를 앞세우지만 주님은 영혼의 건강, 영혼의 안전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의 전체 흐름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가만히 보면서 야, 기도하기가 쉽지 않구나. 잘못하면 빗나간 기도도 하기가 쉽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배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우리가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주기도문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또 어떤 때는 의미 없이 외우는 것으로 반복하는 것으로 주기도문 기도를 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 주기도문을 통해서 기도의 원칙을 배워야 됩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기도의 교과서입니다. 이 교과서를 우리가 잘 배우고 깨닫고 마음에 담으므로 그 기도를 중심으로 해서 날마다 다양한 기도, 짧은 기도, 긴 기도, 개인의 기도, 중보기도, 다양한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기도의 용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기도를 드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두 가지 생각합시다. 첫째로, 예수님은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여 어느 학자의 견해를 보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유대나라에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남아있는, 전해 내려오는 모든 문서를 다 뒤지고 연구를 해도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른 사례가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나님을 아버지하고 부른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죄로 다루어지기 때문에 엄두도 못 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자마자 처음부터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는 내 안에 있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느니라.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120번 이상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이 아버지는 우리가 흔히 격식을 갖추어서 부르는 호칭하고도 다릅니다. 아버님이 아닙니다. 아빠, 아빠 그래서 아바 아버지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어린 아이가 자기 아빠가 너무 좋아 가지고 격식 없이 부르는 그런 이름입니다. 이런 이름을 우리 주님께서 부르시면서 특별히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 앞에 어린애처럼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릴 보고 너희도 그렇게 기도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기도해라.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을 아버지 하고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권세를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얻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보면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한번, 너희는 아들인고로, 너희는 자녀인고로 하나님이 우리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 마음에 계셔서 계속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기 때문에 부르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너희도 기도 할 때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불러라. 내가 부르듯이 그렇게 불러라.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지금 당장 우리 눈에 보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이 자리에 임재하신다면 우리 모두는 죽은 자와 같이 다 쓰러지고 맙니다. 구약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인간의 모양으로 어떤 때는 약간 찬란한 천사의 모양으로 사람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그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는 견디지 못해 다 쓰러지지 않습니까? 아니면 옷으로 자기를 뒤집어 쓰고 일어나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완전 죽은 자처럼 되 버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악인이나 더러운 자가 가까이 할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죽은 자도 살리시는 전능하신 그분, 하늘의 스랍들과 하늘의 천사들도 그 앞에서는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면 감히 그 앞에 설 수가 없는 영광의 빛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 같은 흙덩이가, 우리 벌레 같은 존재가 아버지라고 부릅니까? 아빠 아빠라고 부릅니까?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부르라고 그럽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예수님 때문에 부르라고 그럽니다. 얼마나 큰 권세입니까?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이  주기도문 제일 앞에 나오는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여, 이것은 기도의 황금 문이다.  그랬습니다. 기도의 황금문입니다.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부를 때 벌써 우리는 기도의 황금문을 마차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당당히 가서  아버지  하면 하나님이  오냐  하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기도가 잘 안 나와서 머뭇머뭇거리면  그래 괜찮다 천천히 마음 놓고 해라.  말씀하시는,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기도하라고 하는데는 또 우리가 생각해야 될 점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좋은 것만 골라서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7장에 기가 막힌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7장 9절부터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얼마나 우리 마음이 평안해지고 기쁨이 넘칩니까? 너무 좋아서 저는 다 외우는데 여러분 외우시는지 모르죠. 그러나 여러분도 외우십시오. 9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겠느냐. 그렇죠? 너희 중에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요사이는 뱀을 줄 것입니다. 보신탕에 하도 좋으니까. 그러나 우리가 상식으로 따지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악한 아버지라도 자식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리가 없습니다. 자, 그 다음에 중요한 말씀입니다. 11절입니다. 너희가 악한 인간이 아니냐? 악한 아버지가 아니냐? 급하면 자식도 버리는 악한자가 아니냐? 급하면 자식도 죽이는 악한 인간이 아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을 왜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아버지는 항상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심지어 1년 기도하고, 3년 기도하고, 5년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 안 하시는 것도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생각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은 것만 주셔. 그러기 때문에 응답 안 하시는 것도 좋은 대답 중에 하나야. 좋으니까, 좋은 대답으로 응답으로 아시기 때문에 안 주시는 거야.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좋은 것 주시는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  하고 기도하면 아무것도 받는 것 없어도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하나님이 좋은 것을 반드시 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거 기가 막힌 것 아닙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시는 데는 또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는 어린아이의 심정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가식이 없습니다. 사람을 떠보지 않습니다. 이론이 많이 않아요. 어린아이는 아빠한테 뭐 달라고 하면 단순합니다. 순수합니다. 신뢰합니다. 그래서 아빠가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해도 이미 아빠는 주실 줄 알고 좋아서 펄펄 뜁니다. 이것이 어린애의 심정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어린아이의 심정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아버지여,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소서. 그런데 나는 십자가 지고 싶지 않습니다. 할 수 있으면 지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이것이 어린애의 기도 아닙니까? 할 수 있으면 지지 않도록 해 주세요. 그렇지만 하나님 꼭 져야 한다면 지겠습니다.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어린 아이와 같이 예수님은 통곡하면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을 부르면서 기도할 수 있도록 해 주신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오늘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중보자가 되십니다. 이 놀라운 권세를 가지고 있으면서 기도하는 권세의 특권을 장롱 속에 집어넣어 자물통을 잠가놓고 한 주일에 한번 정도 기도할까 말까, 한 달에 한번정도 꺼내 볼까 말까 하는 그런 어리석은 생활을 하지 마십시오. 너무나 손해를 많이 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항상 먼저 앞세우는 기도를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무슨 뜻입니까? 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의 받으실 영광과 존귀와 거룩함을 홀로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대우를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절대로 모욕 당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절대 사람들에게 무시 당해서도 안됩니다. 모든 존귀와 찬양과 경배가 그 거룩하신 이름에 올려져야 됩니다. 여러분, 세상을 보십시오. 여기저기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이름을 짓밟는 악한자들이 많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얼마나 모욕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이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우리의 가슴이 답답해지고 우리의 가슴이 찢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은 존귀 여김을 받아야 되는데 사람들로부터 짓밟히고 모욕 당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눈을 감을 때마다 우리가 무슨 기도를 해야 합니까? 하나님, 부디 주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고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하다 못하면 나 하나만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기를 원합니다. 이런 기도가 우리 마음에서 나와야 되지 않습니까? 이것만큼 소중한 기도가 어디 있습니까?

최근에 7.9라는 엄청난 힘을 가진 강진이 일어나서 수십 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50억불 재산 피해를 입은 인도의 비참한 비극을 우리가 잘 듣고 있습니다. 인도 구자라트 자치주가 지진의 진원지입니다. 그곳에서 죠지라고 하는 어느 목사님이 한국의 어느 목사님에게 보낸 편지가 최근에 공개가 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니 좋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입니다. 인도에서 제일 처음으로 법을 정했습니다. 누구든지 기독교로 개종하면 안된다. 기독교로 개종하면 축출을 당하던지, 처형을 받던지, 재산을 몰수 당하던지, 어쨌든 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완전히 억압해 버린 것입니다. 최초로 인도에서 구자라트 주가 그런 법을 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작년 한해동안 교회 500곳을 파괴했답니다. 500곳을 전부다 문을 닫아버리게 만들고 부수었습니다. 그리고 지진이 일어나기 2주 전에는 교회를 약탈하고 교회 안에다 힌두교 우상을 갖다 세우면서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그리고는 지진이 났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최고의 지진이 아닌가, 가장 비참하고 참담한 지진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통계 조차도 제대로 안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죠지 목사라는 사람이 그럽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경고로 이번 지진을 주신것이다.  그는 그렇게 해석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재림하실 날이 가까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런 상황을 보면서 어떤 기도가 우리 마음에서 나와야 됩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고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되는데 인도의 구자라트 주 같은 데서는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짓밟고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고통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여, 아버지여 그 땅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두손 들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받들며 찬송하는 일이 일어나게 해 주시옵소서. 여러분 이런 기도가 우리의 가슴에서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이런 기도가 우리 가슴에서 폭포처럼 터지지 않겠습니까? 쏟아져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 기도를 앞세우라고 그랬습니다.

주기도문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첫마디가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생동안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그 마음을 다스리는 거룩한 백성들이 이 땅을 가득히 메우기를 소망하면서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40일 동안 만나 예수님의 비전을 나눌 때도 그 비전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이만큼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 이것은 예수님이 마음에 평생 간직하던 비전이요, 오늘도 하나님 나라에서 그가 기도하고 있는 제목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을 위해서 먼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 나라가 잘되기를 소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평화를 위하여 우리는 밤낮 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의 젊은이들이 마음 놓고 뛸 수 있는 나라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악과 이 세상의 불의를 향하여 담대히 대적하면서 공의가 바로 서는 아름다운 나라, 빈부 격차가 가능한 한 축소되는 살기 좋은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몇 십년은 이 세상에서 살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이 계속 살아야 되기 때문에, 이 세상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세상 기도 보다도 앞세워야 되는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어떤 기도라도 옆으로 제쳐놓고 먼저 앞서야 되는 기도가 있다고 주님이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이세상을 위해 기도한다고 할 지라도 이 세상은 어두움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미워하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만 골라 잡아서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잔인합니까? 얼마나 음란합니까? 얼마나 거짓됩니까? 공의가 바로 서지 못하니까 악한자는 점점 득세하고 선한자는 더 살 수가 없고 발 붙일 곳이 없는 나라로 바뀌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현실입니다. 질병의 공포, 죽음의 공포는 여전히 우리를 위협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10대들이 인터넷에다가 자살 사이트를 만들어 놓고 너 죽자, 나 죽자. 하고 서로 유혹하고 유인하는 이런 기가 막힌 현상이 일어나겠습니까? 한번 들어가보니 그렇습니다. 야, 세상은 살 의미가 없다. 살아봐야 뻔해. 죽음만이 우리의 탈출구야. 우리 같이 죽자. 중학교 다니는 이 어린애들이 세상에서 소망을 도무지 갖지 못하고 절망과 좌절 속에 빠져서 서로 죽자고 권하고 서로 죽여 주겠다고 야단을 치는 이런 더럽고 악한 세상. 여기에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문명은 계속 발전할 것입니다. IT 산업은 계속 발전할 것입니다. 유전공학도 계속 발전할 것입니다. 아마 나중에는 달나라 여행을 우습게 생각 할 때가 올지 모릅니다. 그리고 화성까지 다녀올지도 모릅니다. 120살까지 사는 것을 상식으로 생각하는 날이 올지 모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그렇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 두어야 합니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성은 타락하고 타락해서 나중에는 마귀와 같이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어두움의 권세가 먹구름처럼 사람들의 심령을 덮어 더 이상 생명의 빛을 발견하기가 어려운 죽음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2월 호 한국판을 펴 보았더니 몇 장 넘기지도 않았는데 이런 말이 나옵니다.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인류는 위기를 맞고 있다. 하도 듣는 소리가 되서 이제는 감동도 없고 놀래지도 않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될 대로 되라 하는 식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다 넘기고, 그때가 되면 그때고, 복이 많아 내가 죽은 다음에 그렇게 되면 다행이고, 뭐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조금 밑을 읽어보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난 100년 사이에 바다의 수면이 어느 정도 높아졌는가 하면 15Cm가 높아졌다고 합니다. 전문가가 아닌 우리는 15Cm 높아졌으면 어때. 파도만 치면 2m도 높아지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15Cm가 높아졌다는 것은 100년 이전에 2000년 동안 바다 수면이 높아진 것의 10배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것이 대단한 겁니다. 2000년 동안 바다 수면이 높아진 것 10배가 지난 100년 사이에 높아진 것입니다. 결국은 어떤 일이 우리 앞에 일어날 것입니까? 홍수가 일어납니다. 침식의 현상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납니다. 식수가 오염되어 버립니다. 농지가 유실됩니다. 생태계가 파괴되고 많은 인구들이 육지고 산 위로 이주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15년 이내에 전세계 인구의 반 이상이 물 부족으로 인해서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면이 높아지면 점점 해안선이 넓어지면서 육지가 계속 좁아지지 않습니까? 이것을 막고 미국이 지금의 해안선을 유지하기 위해서 방파제를 쌓는다면 아무리 안 들어도 2500억불 이상의 돈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라 경제가 완전히 파탄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날이 눈 앞에 다가오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미 지구의 종말, 역사의 종말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희들 기도할 때 아무 대안도 되지 않는 세상 나라를 앞세워 가지고 먼저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하기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 말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고 간절히 사모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찌 이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나라는 대안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 나라를 기대했다가는 남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어찌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통치하시는 그 나라가 임하여 이땅에 있는 모든 심령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며 이 세상에서 당한 모든 상처와 고통을 완전히 씻음 받고 고침 받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을 찬양하는 영광을 누리기를 어찌 기도하지 않겠느냐 말입니다. 아무리 나의 형편이 절박해도 그 절박한 기도 옆으로 제쳐 놓고  하나님이여, 주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합니다.  하고 어찌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내가 하나님 앞에 당장 구하고 싶은 것, 급한 것이 있어도 그것 잠깐 제쳐 놓고  하나님이여, 주의 나라가 먼저 임하기를 원합니다.  어찌 우리가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병이 나도 우리는 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죽으면서도 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부도가 나고 직장을 잃어도 우리는 이 기도를 먼저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기도만이 우리로 하여금 숨을 쉬게 만들고 소망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이 기뻐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한 주 전에 귀한 자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방암으로 한 3,4년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30대 후반의 참 아름다운 자매입니다. 자녀를 셋이나 놓고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천국에 가서 날라 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좋을까. 눈만 감으면 그 자매가 날라 다니면서 찬송하는 모습이 내 눈에 확 들어옵니다. 그 자매의 남편은 저의 이 설교를 돕는 비서로서 지난 10년 동안 일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특별히 마음에 두고 기도해 주고 지금까지 왔는데 그만 하나님이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가 세상 떠나기 직전에 저에게 보낸 편지를 세상 떠난 다음에 제가 받았습니다.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목사님께. 수술 후 1년 반 만에 재발한 것을 알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저 자신과 저희 가정의 회복이 되고 좋은 일이 될 것이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려 주셨습니다. 저를 구원하신 주를 위해 이 생명을 다해 섬기고 어떻게 하면 주를 더욱 사랑할 수 있을까요?

다 죽어가는 마당에 이런 소리가 어떻게 나옵니까. 그 다음에 더 놀라운 말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목사님, 이제 제 힘으로 버틸 수 없는 한계에 와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너무 고통스러워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목사님, 기쁨을 빼앗기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또 목사님,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선포되며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시도록 계속 기도해 주십시오.

바로 이 기도들이 무슨 기도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면 나라가 임하시며 주의 뜻이 이루어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하는 주기도문의 정신, 주기도문의 원칙이 바로 그 자리에 고스란히 들어있는 기도입니다. 죽어가는 마당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연필을 겨우 들고 목사님,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선포 되기를 기도해 주세요.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시도록 기도해 주세요. 제가 비록 죽어가지만 이 죽음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일을 위해서 썩는 밀알 되기를 바라고 내가 죽는 이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을 이땅에 성취하는데 쓰임 받는 죽임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것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죽어가는 자도 이렇게 기도하는데 오늘 건강하고 멀쩡한 우리가 날마다 내 기도만 하고 세상 기도만 합니까? 내 편할 기도만 합니까? 내 급한 기도만 합니까?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가슴 속에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위한 기도가 부글부글 끓어야 됩니다.

핸리 비쳐라고 하는 미국의 유명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기도 할 때에 포도주가 병마개를 밀어 내듯이 기도한다. 우리는 술을 잘 안 먹지만 그래도 좀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술을 옛날에 병에다 담아 놓고 마개를 꽉 막아놓으면 나중에 발효가 되어 거품이 올라오고 그럽니다. 그래 가지고 나중에는 그 까스가 병마개를 확 밀어 버리고 터집니다. 나는 그런 식으로 기도한다 그 이야기 입니다. 멋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자 하는 열정이 내 가슴에 가득하게 차면 주님의 나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열정이 내 마음에 가득하면 그것이 그냥 부글부글 끓다가 탈출구가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 가지고 목을 밀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 기도 먼저 안 하면 못 견디는 사람이 됩니다.

아침에 직장 갈 때도 하나님, 오늘도 똑 같은 직장 생활이지만 나의 직장 생활을 통해서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게 하옵소서. 주여. 이런 기도를 하라는 말입니다. 가정에서 똑 같은 가정생활 그저 평범하게 하지만 아이들 뒷 수발 하고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 어떤 때는 지루하고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어린 자녀 키움으로 인해서 주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할 수 있도록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와 같은 놀라운 일이 있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 내가 왜 부도가 납니까? 왜 내가, 내 사업이 무너집니까? 하나님 무슨 뜻이 있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믿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거룩히 여김을 받을 것이고 주의 나라가 이땅에 임할 줄 믿습니다. 주님, 그 일을 위해서 나의 실패도 사용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가라는 그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을 집중하고 하나님을 우선에 두고 하나님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소망하면 그 다음에는 우리가 걱정하는 모든 문제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할렐루야!

6장 33절을 읽고 끝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앞세우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그 일을 우선 순위에 두고 날마다 뜨겁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셔서 우리가 걱정할 문제 다 책임져 주신다고 하십니다. 다같이 33절을 읽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너는 내 걱정해라. 나는 네 걱정할게. 그 이야기입니다. 어느 것이 좋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걱정 하세요. 나는 내 걱정 할 테니까. 그것 보다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하는 게 좋습니까? 하나님 부족하지만 저 하나님 걱정 할게요. 하나님은 내 걱정 해 주세요. 그러고 살면 얼마나 신납니까?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얼마나 좋습니까?

별관에 있는 분들은 가만히 보니까 찬송가도 안 부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찬송가, 여러분 힘있게 불러야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멘 하자고 해도 거기는 아마 소리도 안 날 것입니다. 다시 한번 할렐루야! 아멘!


출처/옥한흠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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