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그리스도인의 이웃(롬12:14~21)

by 【고동엽】 2022. 7. 10.

 

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목차로 돌아가기

 

그리스도인의 이웃(롬12:14~21)

 

오늘의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살면서 이웃과 어떤 관계에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이 지켜야 할 하나의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이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지, 여기서 교과서적으로, 교본적으로, 원리적으로 찾아보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이웃관계가 잘못되면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모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었다가도 이웃과의 관계에서 바로 서지 못하면 그 신앙마저도 저버리게 됩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가끔 그런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가 원래 교회에 나갔었는데 교회의 어떤 분하고 이렇게 저렇게 마음 상하는 일이 있어서 벌써 꽤 오랫동안, 무려 10년 동안을 교회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만나보면 참 마음이 아파요. 이렇듯 우리가 남에게 전도한다 하지마는 어떤 때에는 오히려 교회 나온 사람까지 못나오게 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 이웃관계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자면 하나님과 나와의 수직적 관계는 물론, 이웃과 나와의 관계가 잘 맺어져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무슨 생각을 하는고 하니, 다른 사람이 내게 잘해야 나도 잘할 수 있지 않느냐, 환경이 그렇고, 경제관계, 정치관계가 그렇고, 대상이 워낙 나쁘고 보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지 없느냐, 라고 합니다. 사실이 그래요. 하지만 그런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해주는 이 원리는 절대적 원리입니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어요. 원수라도 상관없어요. 나를 평생 괴롭히는 원수라도 상관없어요.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이렇게 해야 한다-이것이 절대적인 관계예요. 환경의 변화도 상관없고, 대상이 어떤 사람이냐도 묻지 않습니다. 다만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즉 이웃관계에 의해서 신앙을 세우는 게 아니라, 신앙에 의해서 신앙적 관계를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에요. 신앙의 열매를 맺어나가야 돼요. 신앙이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요, 나 자신과 나와의 관계요, 그 다음에는 나와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나와 나와의 관계에서 그 열매로, 그 파급적인 결과로 우리는 이웃관계를 맺어나가야 되는 것이에요. 그런고로 여러분, 기독교인이면 대상에 대해서나 환경에 대해서나 어느 조건에 대해서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변명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의 성경은 바로 이것을 말씀하는 것이에요.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고 살아가야 한다, 성경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상대방에 대해서는 일절 묻지 않아요. 그것이 오늘의 본문에 주제가 되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가만히 말씀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도 있어요, 나를 반기도 사람도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도 있어요, 사랑 받는 사람도 있어요. 이밖에 여러 관계가 있겠습니다마는, 이런 경우에야 사랑 받고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늘의 성경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를 핍박하는 자가 있어요. 우리를 괴롭히는 자가 있어요. 어떤 때에는 원수 같은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그 때에도 여전히 교인은 교인이에요.

 

경제학에 '종속경제'라는 말이 있어요. 내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려고 애써도 상대방의 경제가, 또 나라의 경제라든가, 세계의 경제가 흔들리면 나 혼자 아무리 노력해도 안됩니다. 같이 맞물려 돌아가는 거예요. 큰 나라가 감기에만 걸려도 우리네 같이 작은 나라는 아예 병원에 입원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전체가 맞물려 돌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도 그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서로 같이 그만 종속될 때가 있어요. 웃는 자에게는 웃음으로 대하고, 미워하는 자에게는 미움으로 대하고, 빼앗기면 뺏고 싶어하고…… 이러한 마음이 일반적인 거예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빼앗기든 때리든 누가 미워하든 상관없어요.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오로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에요. 그것이 성경이 말씀해주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이웃 관계에서 첫째로 어떤 예를 들고 있느냐 하면 바로 '핍박하는 자'입니다. 핍박하는 자-'핍박'이란 일반적 고난과는 다릅니다. 배가 고프다든가, 사업이 안된다든가, 병에 걸렸다든가…… 이런 재난적인 것과 달라요. 또 어떤 경우에는 서로 관계가 돼서 나도 함께 피해를 입을 수가 있어요. 그러나 이 '핍박'이라고 하는 것은 고의적으로 주어지는 고통을 말하는 거예요. 상대방이 나를 핍박해요. 고의적으로, 의도적으로 나를 괴롭힌다는 말이지요.

가끔 우리가 손해를 입을 때가 있는데, 사실 모르고 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예요. 다 잘한다고 했는데 일이 그만 잘못되어서 내가 손해를 본 거예요. 이런 경우에는 다르지요. 이것은 핍박이 아닙니다.

'핍박'이라는 것은 의도적이고 고의적이에요. 악의가 그 속에 있어요. 그래가지고 나를 괴롭힙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14)"-이것 참 엄청난 얘기가 아닙니까? 옛날 헬라의 철학자의 플라톤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한 사람은 악을 대할 때에 악에 대항하기보다는 차라리 악으로부터 받는 피해를 감수한다. 차라리 내가 피해를 당하고 말지, 악과 더불어 싸워보겠다 하면서 미련을 떨지 않는다. 그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특별히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복을 빌라'-참 엄청난 말씀이에요. 내가 미워하지 않는 것만도 어려운데,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축복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기독교인인 우리가 핍박을 받을 때가 있는데, 이 때에는 보통 세 가지로 반응을 합니다. 첫째는 절망입니다. 핍박받음으로 인해서 낙심합니다. 그것도 잘못이에요. 핍박받음으로써 내가 낙심하는 것도 불신앙이에요. 또하나는 마음입니다. 원수로 대하는 것이에요. 이것도 안됩니다. 물론 저주하는 것은 더더욱 안됩니다.

그리고 오늘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4)"-복을 빌라 함입니다. 핍박하는 자를 저주할 권리가 우리에게 없다는 말씀이에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저주할 권리가 없어요. 참으로 조심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15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라고 미리 예언하셨습니다. 세상이 나를 미워했다, 스승을 미워한 세상이 제자를 미워하지 않겠느냐, 스승을 십자가에 못박는 세상이 그 제자를 그저 두겠느냐 하는 말씀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믿는 사람이 핍박받는 것은 당연해요. 디모데후서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여러분, 바르게 살려고 하면 핍박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내가 누구를 괴롭히지 않아도 죄인 중에 있으면서 의롭게 살면 죄인을 정죄 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저들은 정죄 당하고 있는 거예요. 악한 사람 속에서 선하게 살면 악은 절로 정죄 당하고 심판 받고 있는 것이거든요, 바로 그게 괴롭기 때문에 핍박하는 것입니다. 이는 의롭게 살려는 사람, 선하게 살려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로 주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또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핍박당할 때에 참으로 말을 조심해야 됩니다. 민수기 1427절로 2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을 당하게 되니까 이제는 하나님을 원망해요. 그리고 '진작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이런 소리까지 합니다. 이런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행하리라. 너희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니라'-쉽게 말하면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하니까 '알았다, 죽여주마'하신다는 이야기예요. 아무쪼록 말조심하세요.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은 말조심해야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축복도 저주도 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혹 여러분이 섭섭한 사건을 당할지라도 그런 사건 앞에서 누구를 저주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얼마 있다가 보세요. 말 그대로 됩니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 때에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고 두고두고 후회하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어떤 손해를 입어도 남을 저주 하든가 미워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저주하지 말라"-예수 믿는 사람의 말, 예수 믿는 사람의 기도는 한마디 한마디가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들려지고 있기 때문에 저주하지 말라 하시고 오히려 복을 빌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전도하려 이 집 저 집 다닐 때에 어떤 집에 가서든지 복을 빌라, 무조건 복부터 빌라. 복 받을만한 자격이 있든 없든 복을 빌라. 복 받을 만한 집이면 복을 받을 것이고, 복 받지 못할만한 집이면 복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저는 이 말씀을 아주 실리적으로 생각합니다. 어느 쪽으로 복을 빌어야 좋겠습니까? 가능하면 복 받지 못할 사람만 골라가며 복을 빌라, 그래야 내게 돌아오는 복이 많을 것이 아니겠어요? 여러분, 알아서 하세요. 남을 저주하지 말고 반드시 복을 비는 마음, 항상 복을 비는 마음, 나를 핍박하는 자에게까지도 복을 비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가끔 궁금한 것이 있어요. 어떤 집을 방문했을 때, 우리네 믿는 사람들을 잠깐 앉아서 묵상기도를 합니다. 그 때에 무엇이라고 기도합니까? '무사히 다녀가게 해주시고, 이 집에 내가 뭘 부탁하러 왔는데 잘되게 해주시고……' 이러겠습니까? 무조건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는 거예요. 복을 비는 것이지요. 어느 집에 가든지 딱 앉았다 하면 '하나님, 이 집에 북을 내리시옵소서'-이렇게 비는 거예요. 그게 묵상기도입니다. 그 때에 가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서는 안됩니다. 그 가정을 위해서 '하나님, 이 가정에 복을 내리시고, 예수 잘 믿는 가정이 되게 해주시고, 자녀들에도 복을 내리시옵소서'-이런 기도를 하는 거예요. 그것이 기도입니다. 모름지기 남의 집에 가서 기도할 때에는 언제나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저주하지 말고 복을 빌라'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있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다 함입니다. His part, our part-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실 거예요. 저주하거나 복 빌거나 하는 것은 우리의 문제예요. 그런고로 우리는 복을 빌 수밖에 없어요. 복을 비는 것만이 우리의 할 일이요. 나머지 문제는 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런고로 절대로 저주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이 둘에 맞아 죽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핍박을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죽이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여, 이 허물을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옵소서'-이렇게 기도합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그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 순간을 생각하고,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13)."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 이것 참 어려운 일이에요. 그러나 또하나,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에요. 가끔 우리에게 그런 일이 있습니다.

여러 아이가 시험을 쳤는데, 어느 아이는 합격하고 어느 아이는 합격하지 못했어요. 합격한 쪽에서는 합격하지 못한 쪽의 마음이 아플까봐 합격했다는 말도 못해요. 정말 그래요. 이런 경우가 문제입니다. 여러분, 비록 내 아이는 합격하지 못했지만 남의 집 아이가 합격했으면 찾아가서 축하하세요. 그 어려운 시험을 통과했구나, 너 참 잘했구나, 하고 칭찬해주세요. 아예 이렇게 할 수 있는 마음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예요. 내 아들이 3수하면 어떻고 4수하면 어떻습니까? 남의 집 아들이 합격한 것은 사실 아닙니까? 거기에 복을 빌 줄 알아야 합니다.

제가 결혼식 주례를 하면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결혼식장에 왔다가 축의금만 내버리고 그냥 가버립니다. 3분의 2가 가버리는 것 같아요. 몇 사람만 들어와서는 예배를 드립니다. 생각해보세요. 중요한 것은 돈주고 가는 게 아니에요. 이 집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지요.

지금 이 집의 아들딸들 장가가고 시집보내서 기뻐하고 있으니 그것을 축하하는 게 목적 아닙니까? 축복하고, 축하하고, 같이 기뻐해야지요.

우리 집에는 환자가 누워 있더라도 여기 와서는 기뻐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잔칫집에 가서 우는 사람이 있었어요. 자기 죽은 아들을 생각하면서 웁니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지요. 내게 어떤 일이 있든 간에 좌우간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말,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이것이 복 받은 마음이에요. 내 집에 가면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래도 남이 기뻐할 때에 같이 기뻐하고, 남이 축하할 때에 같이 축하하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 동참하는 것이에요. 그 기쁨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 마음이 없으면 영원히 불행해요. 어떻게 나혼자 기쁘겠어요? 더불어 기뻐하게 되어 있습니다. 남의 기쁨, 내가 함께 나누면 공짜 아닙니까? 어째서 이렇게 못합니까? 이것이 문제예요.

가만히 보니 옷을 입는 것도 그렇습니다. 특별히 여자교인들은 남이 좋은 옷을 입었으면 한 번쯤은 칭찬해보세요. 옆으로 지나가면서 힐끗 보고 '자기만 옷 있나? 나도 돈주고 사면 되지' 합니다. 이런 마음 참 못됐어요. 그것 좀 칭찬해주면 안됩니까? '좋은 옷 입었네요.

참 좋겠어요'-이 한마디를 안해요. 인색해요. 이 얼마나 불행합니까? 말하면서 자기도 좋을 텐데 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욕이라는 것은 한번하고 나면 세 사람이 나빠집니다. 첫 째는 욕 듣는 사람이 나쁘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전해듣는 사람들이 나쁘고, 욕하는 사람도 나빠져요. 반대로 좋은 이야기는, 기쁨이라는 것은, 칭찬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칭찬하니 듣는 사람도 좋고, 전해듣는 사람도 좋고, 칭찬하는 사람도 좋고다 좋잖아요? 밑천 하나도 안들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못하는 것입니까?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세요. 그런가하면 '우는 자와 함께 울라'-내게 아무리 기쁜 일이 많아도 우는 자에 동참하세요. 그와 함께 하는 거예요. 그의 아픔에 참여하는 거예요. 같이 우는 것, 그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아픔에 동참하라, 그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16)" 마음을 같이하는 비결은 바로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16)"-교만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교만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요. 교만하고 누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어요. 제가 결혼식을 주례할 때에 늘 얘기합니다마는, 교만한 사람은 사랑을 할 줄도 모르고 받을 줄도 몰라요.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 없습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모르니까요. 겸손해야 사랑할 수도 있고, 겸손해야 사랑 받을 줄 알아요.

여러분이 정말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려면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겸손하게 평가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말라(16)." 잘난 척하게 되면 사실을 부부간에도 나빠요. 심지어는 부자지간에도 나빠요.

저는 삼십여 년간 목회하면서 딱 한번, 어떤 어머니가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대개는 어머니들이 "우리 아이가 합격하게 기도 좀 해주세요"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 아이가 입학시험을 보는데 이 어머니는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우리 아이가 불합격하게 기도해주세요"합니다. 그래,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 "그 녀석이 아주 공부를 잘하고 똑똑합니다. 기고만장합니다. 부모까지 무시합니다. 이번에 대학까지 들어간다면 아주 못쓰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이번만은 꼭 낙방을 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가 불합격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어요. 정말입니다. 자식이라도 교만한 자식은 사랑할 마음이 없어요. 누가 낳아서 누가 키웠는데요? 그런데 저혼자 잘났다고 떠드는 거예요. 그러니 반갑지 않아요. 하물며 이웃관계야 어떻겠습니까? 그런고로 겸손한 사람만이 사랑을 받고, 겸손해야만 사랑할 수 있어요. 모든 사람을 존경하며 다 나보다 낫다, 훌륭하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항상 겸손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선한 일을 도모하라(17)"했어요.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오늘의 본문은 '언제든지 선을 따르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을 도모하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선한 일을 도모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도모(圖謀)'라는 것은 의도적인 것이에요. 힘쓰는 것이에요. 깊이 생각하는 것이에요. 이렇듯 선을 이루도록, 내가 어떤 형편에서든지 선을 생각해야 합니다.

선을 따르도록 힘써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좋은 목적을 두고도 방법이 악해짐으로 그만 결과가 악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적이 선하면 수단과 방법도 선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18)"-오늘의 본문은 화평 한다는 것에 대해서 네 가지 조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화평이 가능한가'입니다. 가능한 화평이 있다는 것입니다. 화평이라는 것은 모든 일에 가능한 것이 아니예요. 가능한 경우가 있고 가능치 못한 경우가 있어요. 다시 말하면 악과 더불어 화목할 수는 없어요. 죄와 더불어 화목할 수는 없어요. 불의와 더불어 화평할 수는 없어요. 그런고로 화평이라는 것만은 조건적입니다. 둘째가 화평을 위해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화평을 위해서 내가 희생해야 한다면 희생해야지요. 손해보아야 한다면 손해봐야지요. 그러나 어디까지 손해를 보느냐-의를 포기할 수는 없어요. 진실을 버릴 수는 없어요. 진리를 떠날 수도 없어요. 곧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 내가 무엇을 희생해야 하느냐, 내가 무엇을 따라서는 안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굽혀야 하느냐, 어떤 것을 굽히지 말아야 하느냐-그 한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화평에 대해서는 내 능력에 한계를 둡니다.

악과, 불의와 더불어 화목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죄를 사랑해소는 안돼요.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죄악과 타협을 해서는 안돼요. 그 한계를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화목을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100%로 가능한 것은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셔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화평하게 하시는 축복을 주셔야 돼요. 우리 인간의 힘으로 다 되는 게 아니예요.

희생만 하고 수고만 한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화평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그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합니다. 아무에게나 화평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은 원수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19)" 원수갚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예요.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원수갚을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하나는 하나님께 맡기라 함입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하나님께서 갚아주시겠다는거예요. 참으로 신앙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목말라하거든 마시게 하고 배고파하거든 먹이라-바로 이것이 우리의 할 일이에요.

원수라도 배고프면 먹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가끔 섭섭하게 생각할 때가 있어요, 우리가 '북한을 좀 도웁시다'해서 지금 이렇게 저렇게 애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많은 사람들이 좋은 마음으로 저를 도와주어서 제가 지금 북한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다 말씀을 못드리지마는 참 많은 것을 돕고 있어요. 또 저를 통해서 보내는 것이면 저쪽에서는 다 받아요.

그래서 얼마든지 보내려 애를 쓰는데, 어떤 분은 정면으로 반대합디다. "목사님, 공산당은 안됩니다. 그 원수같은 놈들한테는 안됩니다." 몇몇 장로님들도 저보고 그렇게 말합니다. 참 그런 때면 마음이 아파요. 오늘의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설사 원수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합니다. 지금 굶고 있으니까 먹어야 될 것 아닙니까? 저들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 모릅니다. 그래, 제가 그런 분들께 물었습니다 "당신들이 나만큼 피해를 입었습니까?" "목사님이 어땠는데요?" "제 아버지가 제 눈앞에서 공산당들한테 총살을 당했습니다. 또 저도 광산에 끌려가서 무지하게 고생을 했습니다.

정말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우리의 형제입니다. 원수도 아니요 바로 우리의 이웃입니다. 우리의 친척입니다. 어떻게 미워할 수 있습니까?

오늘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20)." 잊지 마세요. 이렇게 하면 그에 대한 보상과 은총이 있습니다. 나님께서 큰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말씀을 많이 했어요. 예수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너희에게 주는 자에게 준다면 이방사람과 다를 게 무엇이냐, 나은 게 무엇이냐, 이방사람들도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빼앗기고도 주고, 미움받으면서도 사랑하고, 원수도 먹이고 마시게 하고---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명심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확실한 이유가 오늘의 본문에 세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께서 갚으실 텐데 왜 네가 손을 대느냐 하는 거예요. 스스로 손대지 말라 함입니다. 가끔 보면 똑똑한 척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나쁜 사람 버릇 고쳐준다고 하다가 자기가 더 나빠집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맡기세요. 그것은 스스로의 일이 아닙니다. 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이에요. 하나님께 그대로 맡기세요. 그것이 중요합니다.

또하나, 참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정말 원수를 갚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갚는 것입니까? 사랑일 뿐입니다. 원수를 갚으면 또 그 사람한테는 내가 원수가 됩니다. 원수가 원수를 낳아요. 끝도 없는 것예요. 이 악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네 옛날 속담에서도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라고 하지 않아요? 그보다 더 좋은 게 없어요. 사랑하는 것보다 더 철저하게 갚는 게 없어요. 이것이 갚는 길이에요. 가장 강한 힘은 사랑의 힘이에요. 원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사랑뿐이에요. 사랑을 할 때에 그 마음이 녹아지는 것예요.

또한 사랑하고 희생할 때에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십니다. 보상적인 은총이에요. 상급으로 주시는 은총이 있어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 아름답게 선하게 진실하게 살았다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크게 갚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크게 가능하게 해주신다는 말씀이에요. 그런고로 사랑하고 희생하라는 것이지요.

오늘의 본문에 보면 해석이 잘 안되는 중요한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20)"-이것이 과연 무슨 말씀이지 깊이 생각해보세요. 옛날에는 정말로 여러 가지 형벌이 있었어요. 태형도 있고, 교수형도 있고, 단두형도 있고그 중에 이런 벌도 있었다고 합니다. 머리에다가 숯불을 올려놓아요.

그러면 머리카락이 전부 탈 것 아니겠어요? 그렇게 해서 고통을 주는 거예요. 혹은 '숯불을 올려놓으리라'하는 말씀을 '큰 부끄러움을 주는 것이다'라고 조금 순하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나는 저 사람을 미워했는데 저 사람이 나를 끝까지 사랑하면 내가 견딜 수 없는 법이지요.

얼마나 큰 부끄러움을 맛보겠습니까? 얼마나 양심에 큰 가책을 느끼겠습니까? 바로 그런 결과가 오리라는 내용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제 본문의 결론을 보십시다. 참 귀한 요절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 악을 이겨요. 원수도 이겨요. 핍박하는 자도 이겨요. 그런데 어떻게 이기느냐-바로 선으로 이깁니다.

악은 선으로 이기고, 미움은 사랑으로 이기고, 교만은 겸손으로 이겨야 합니다. 교만한 자와 같이 맞물려 같이 교만해지지 마세요. 자랑하는 자 앞에서 나도 자랑하려 들지 마세요. 핀잔을 주려고도 하지 마세요. 그대로 같이 즐거워하세요.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겸손으로 교만을 이기라, 정결함으로 부정을 이기라, 정결함으로 거짓을 이기라, 함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절대로 악에게 지지 말라, 바로 선으로 이기는 것이다, 의로 이기는 것이다,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는 것이다'-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