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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옷, 낡은 부대(마태복음 9 : 16 - 17)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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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옷, 낡은 부대(마태복음 9 : 16 - 17)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다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본 비유는 앞장에서 말씀드린 의원과 신랑 비유의 연속으로, 의원이 되시고 신랑이 되시는 그 분을 맞는 자세와 마음가짐에 대하여 생각해야 할 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아무리 귀한 신랑이 여기에 있다손치더라도 신부가 부정하고 시원치 않으면 그 관계는 행복한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좋은 신랑에는 역시 좋은 신부라야 하고 그럴 때에 보다 큰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여 어느 한 쪽이 영 기울게 되면 그럭저럭 어떻게 살는지는 모르나 결코 행복한 관계는 이루어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의원을 맞는 사람도 그러합니다. 이제 환자가 의사를 맞았다면 그 앞에서 숨김없이 자신을 드러낼 수가 있고, 그리고 전적으로 믿고 맡길 때에 의사의 인술도 충분히 발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그들을 맞는 자세나 마음가짐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또 하나의 비유로써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을 보면 여기에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한 생활 풍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현대 과학 문명의 발달로 인해 화학 섬유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옷을 기워 입는 일이 없어지다시피 하였습니다마는 제가 어렸을 때에만 하여도 밤이 되기만 하면 어머님은 떨어진 옷과 양말을 기우시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양말 같은 것은 못 쓰게 된 전구 하나를 넣고서는 이리 저리 돌리면서 계속 기우시는 것입니다. 당시엔 무슨 옷이든지 떨어지기만 하면 안이든 밖이든 할 것 없이 더덕더덕 기워서 입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사실은 거기에 운치가 있고 정겨움이 있었어요. 그런데 요즈음의 옷은 해지지가 않아서 기울 정도의 옷이 되기까지 입을 수가 없어 아까운 것도 버리게 되는, 정말 좋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자니 이제 부인들이 할 일이 없어진 것이지요. 아무튼 옛날 부인들은 물레질을 하고 길쌈을 하며 베를 짜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삶은 빨래에 풀질, 다리미질, 깁는 일까지 해야 하는 참으로 굉장한 수고의 힘든 생활을 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아무래도 예수님께서는 옷을 기워 입어 보신 분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실감나는 이야기를 하실 수가 없습니다. 이는 옷을 기워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양말 한 짝만 기워 보아도 당장에 알 수가 있습니다. 헤어진 데에다 굵고 튼튼한 천을 대고 깁는다면 그 낡은 부분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더욱 해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낡은 옷에는 낡은 천을 대고 기워야 하고 부득이 새 옷이 찢어지기라도 하였다면 거기에는 새 천을 대어 기울 수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튼튼한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다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만약 그렇게 기웠다가는 그 단단한 생베 조각이 낡은 옷을 잡아당기게 되어서 마침내는 둘 다 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새 옷은 새 천으로, 낡은 옷은 낡은 천으로 기워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곧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낡은 술은 낡은 부대에라는 말씀에 이어짐으로 오늘 본문이 연결되어지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말씀하시는 포도주 부대 역시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 풍습으로 돌아가서 생각해야 하는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당시에는 지금 우리들처럼 유리병이나 플라스틱 제품의 그릇들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저 옹기를 구워서 만든 그릇들이어서 곧잘 깨어지는 데다가 더우기 이스라엘에는 바람이 심할 때가 있기 때문에 어쩌다 한번 세찬 바람이라도 불어닥치는 날에는 깨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포도주를 이러한 질그릇에 담는 것을 꺼려하고, 대신에 우리로 보면 휴대용 물병이라고도 볼 수 있는 가죽 부대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가죽 부대란 주로 양이나 염소를 잡을 때 목 부분만 잘라 버린 후 가죽을 그대로 밑으로 벗겨 잘 말리면 그것으로 하나의 부대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는 여기에다 포도주를 넣고 구멍난 부분을 꼭 묶어 두는 것인데 요즈음 같으면 마치 비닐주머니와도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어나기도 하고, 싣고 다니면서 마시는가 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잠자는 베개가 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이와 같은 가죽 부대가 처음에는 신축성이 좋아서 조금씩 늘어나 기도하고 줄어들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아직 발효가 다 되지 못한 술을 넣어 더 끓어오르는 일이 있어도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왜냐 하면 발효가 되는 동안에 이 부대도 같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몇 년을 두고 오래 써 온 가죽 부대인 경우에는 이제 그 신축성이 없어져서 만약 거기에다 다 발효되지 않은 술을 넣고 되면 어느 순간 이것이 끓어오를 때 펑하며 터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포도주도 버리고 부대도 버린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술은 반드시 새 부대에 넣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생각해 온 새 옷에는 새 천으로, 낡은 옷에는 낡은 천으로, 그리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낡은 술은 낡은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하셨을 때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요점은 두 세계의 만남을 뜻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낡은 옷이란 낡고 헤어진 것, 더러운 것, 때묻은 자국이 있는 것, 신축성이 없는, 이러한 것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에 비하여 새 옷감이라는 것은 힘이 있고 빳빳하며, 깨끗하고 신축성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낡은 부대란 탄력과 신축성이 없는, 수명이 다 끝나 가는 그러한 상태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가 하면 새 부대란 신축성과 포용력이 있어서 매우 여유 있게 수용의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술에 있어서도 낡은 술이란 이미 발효가 다 되어서 맥이 빠진 것을 말하며 새 술이란 아직도 끓어오를 것이 있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움직임과 생명의 상태를 뜻함이다. 생명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움직이며, 살아서 생명의 폭발력을 가지고 있음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좀더 깊이 생각하여야 될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내용과 그릇에 대한 문제입니다. 여기에 포도주가 있다고 할 때에 이 포도주와 그것을 담은 부대와는 별개의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새 것이든 낡은 것이든 간에 이 두 가지는 각각 따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진리를 두고 볼 때에도 어떤 진리 자체가 있고 그 진리에 따른 윤리가 있으며, 믿음에 있어서도 믿음의 내용이 있는가 하면 믿음에 따르는 행위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겉과 속, 내용과 형식은 언제나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주게 됩니다. 그 때문에 낡은 교훈에는 자연히 낡은 윤리가 따르며, 새로운 교훈에는 새로운 윤리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진리에는 새로운 생활 방법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그렇게 되지를 못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문제가 생긴단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낡은 교훈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구약 성경으로 돌아가서 보면 대부분의 말씀들이 대체로 하지 말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지 말라"는 식의 교훈은 율법적인 낡은 교훈이며 몽학선생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어른들이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무엇을 하려고 할 때마다 그저 하지 말라는 말로 일관하다시피 하다가 성장하여 철이 들게 되면 그 때에는 "하지 말라"가 아닌 "하라"로 바꾸어 교훈 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진실하라! 부지런하라! 사랑하라! 겸손하라! 고 하게 되는데 이와 같이 "하라"고 하는 것은 새 교훈인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성 어거스틴의 유명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마음대로 하라!"는 말은 이를 위해 매우 합당하고도 멋있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이제는 마음대로 하라! 진정 사랑하기에 되어지는 일이라면 거기에 거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쩌다 조금 잘못 되었다손치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느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낡은 법이다, 교훈이다 하는 것은 옛 것임과 동시에 대체로, 보아 부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고 제한적이며, 타부(禁忌, taboo)적인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것은 낡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많은 세월이 흘렀다는 것이며, 그 오랜 세월과 더불어 이제는 고정화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고정된 관념이 생기게 되면 그 후에는 내용과 형식에 혼돈이 오게 됩니다. 내용을 위해서 형식이 있고, 내용물을 위해 그릇이 있는 것이지만 이제는 그릇과 내용이 섞여 하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가정에서도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가정에서 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사랑하는 마음에서 즐거움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가령 예를 들어 부인이 남편을 위하여 매일 아침 구두를 닦아주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이는 결코 종살이한다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몇 년을 두고 하다 보니 이제 와서는 어쩌다 한번 빠지기라도 하면 마치 사랑이 식어진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닌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사실 그런 일이야 하면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안 하면 안 할 수도 있는 것인데 그것이 고 정화되어 왔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우리는 흔히 "만사는 길들이기 탓이다"라는 말을 합니다만 아무튼 처음부터 어떻게 길들여져 왔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와 같은 똑같은 형식을 계속 오랫동안 반복하게 되면 마침내는 그 형식 자체가 내용을 대치하게 되어 내용의 의미를 대치하게 되고 그 자체를 교리화하게 됩니다. 이것은 실로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모이고 있는 삼일 기도회도 그런 것입니다. 성경 어느 부분을 통하여 주신 규약이거나 율법도 아니요, 반드시 이 저녁에 나와야 한다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삼일 기도회는 계속 드려져 왔고 오늘 우리에게는 마치 하나님의 당연성처럼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어느 교회에서든지 간에 당회를 열고 제직회를 열어 요즈음 같이 바쁜 세상에서 삼일 저녁 예배까지 드릴 것이 무엇이냐며 그만두자고 한다면 아마도 저 목사님은 돌았나 보다고 할 것입니다. 이는 왜냐 하면 그것이 전승이 되었고 교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만일 이를 없애자고 한다면 거기에는 대단한 어려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언가 잘못 된 것 같고, 죄스럽고 허전한 마음이에요. 만일 오늘이라도 삼일 저녁 기도회는 모이지 않겠다고 소문이 난다고 하면 당장에 하는 말이 그 교회는 세속화 다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속화와 삼일 저녁 기도회하고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어떤 형식이 계속 반복되는 동안에 그 자체가 교리화되어 이제는 아무런 의미나 변화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무서운 것은 무의식화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삼일 저녁에 모였나에 대한 의식이 없어요. 이것은 언제부터? ? 꼭 이렇게 모여야 하나? 성경에 나타나 있는가? 등등 누구도 여기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를 않습니다. 그저 삼일 저녁이면 교회에 나가야지 하는 생각뿐 "?"라는 생각은 하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행하는 많은 의식들이 있습니다. 이 의식들은 믿음을 위한 그릇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고정 관념으로 바뀌어지게 되면 그때에는 낡은 그릇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계절에 관계없이 저녁 예배를 730분에 드립니다마는 요즘에 와서 어떤 교회에는 특별히 주일 저녁 예배 같은 경우는 4시에 드리는 교회도 있고 3시에 드리는 교회도 보게 되는데 어떤 이유에서든 그렇게 고쳐 시행하기까지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수요일이 어느 지역에서는 목요일일 수도 있고 주일이 토요일일 수도 있으며 730분이 530분일 수도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들에 대한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임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이 낡은 것은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저 옛 풍습에만 매여 철저히 습관화되었기 때문에 이제 거기에는 생명력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낡은 자세를 가지고 새로운 진리를 영접하려 든다면 그것은 걸맞지 않는 것으로 어려운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존경과 사랑을 한 것 같으면서도 자기의 고정 관념 때문에 그 놀라우신 새 진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낡은 관념, 낡은 자세들을 보시면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생베 조각으로 낡은 옷을 기울 자가 없고, 또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당연히 그런 것이 아니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천하에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따른다고 하면 마땅히 우리의 자세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목적에 따라 목적에 알맞은 새로운 방법으로 바뀌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있을 때에는 아무리 좋은 진리가 있어도 문제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개화기 초에 있었던 여학생 농구 선수들의 사진을 보면 꼭 파자마 같은 유니폼을 길게 입고는 더 이상 살갗이 노출되지 않게 하기 위해 손목과 발목을 비끄러맨 채 공을 따라 다니는 그 모양이 참으로 가관입니다. 그러자니 그 수준이나 여타의 문제는 오죽이나 했겠으며 아무래도 국제 선수로 나가기는 틀린 이야기이지요. 그래서 하는 말이 "갓 쓰고 자전거 탄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대로 자전거를 타려면 갓을 벗어야지 갓을 쓴 채로 자전거를 타겠다니 그것이 얼마나 불편하며 그래 가지고서야 갓에 신경 쓰느라고 어디 달릴 수나 있는 것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이와 같은 내용을 두고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새 교훈에는 당연히 새 마음 그릇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마음도, 뜻도, 세계관도, 생활 방법도, 전부 개선되어 새로운 관계라 성립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신랑 되신 주님을 맞을 수가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 부름 받은 마태가 그 불러 주심에 감격하여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벌이는 상황에서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이 잔치는 앞장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옛 친구들과는 헤어지는 송별의 잔치요,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새로운 공동체에 들어가는 환영과 축하의 잔치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너무도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있던 바리새인의 눈과 마음으로서는 예수님께서 죄인과 같이 앉아 함께 음식을 나누신다는 것이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제대로 생각이 돌아가는 것이라면 저 세리인 죄인 한 사람이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구나 하고 함께 기뻐하며 고마워하면 되겠는데 그것을 소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렇게 비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낡은 생각으로는 새로운 진리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신랑을 맞이하는 기쁨을 가진 자로서 어떻게 금식을 하며 슬퍼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신랑을 맞이하고도 금식을 하는 윤리관으로서는 진정 신랑을 맞는 그 큰 기쁨을 소화할 길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때에 따라서 금식도 좋고 절제도 좋은 것이지만 지금 신랑을 맞이하고도 금식을 하겠다고 하면 그것이 제대로 신랑을 맞는 것이 되겠느냔 말입니다. 적어도 신부가 되겠다면 신랑을 향한 신부로서의 격에 맞는 새 마음을 준비하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딴에는 없는 돈을 가지고도 이것저것 새 살림살이를 많이 준비해 갑니다마는 진작 필요한 것은 새 사람, 새 마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여전히 옛 사람 그대로인데 농짝이 새 것이라고 하여 새로운 만남, 새로운 감격이 있어지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 이 새로운 세계를 어떻게 맞아야 하는가 할 때에, 이에 대한 예수님의 논법은 새 옷에는 새 천으로 기울 것이며, 그것이 술이라면 새 술은 반드시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이미 낡은 것에 새 것이 주어지게 되면 결국은 둘 다 버리게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율법적 관계와 습관화된 고정 관념은 깨끗이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이제는 새 옷, 새 부대를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옛 것을 깨끗이 버려라! 이것은 부분적인 수선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가 낡아 버린 옷인데 어느 한 부분을 새 천으로 깁는다고 하여 그 옷이 새 옷이 되는 것도 아니요, 오히려 낡은 옷마저 버리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것에의 요청은 결코 부분적으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부분적인 참여, 즉 말하자면 생각이나 생활 방식은 여전히 옛날 그대로 하면서 그저 주일에 예배드리는 그 정도로만 기독교적으로 하려고 하는데 그게 다 문제가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중생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이는 전적으로 전체와 전체의 문제로서 마치 신부가 신랑을 맞이한 후에는 그야말로 출가외인이 되어 친정 집은 잊어버리고 이제는 새 마음으로, 당신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요, 당신의 부모가 내 부모님이며, 당신의 형제가 내 형제라는 마음으로 변화되어 살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되지 않아 시간만 나면 저쪽 생각이요, 얼핏하면 친정에 가는가 하면 남편 형제는 형제 같지 않고 친정 식구만 만나면 눈물이 나고 한다면 그 살림이 며칠이나 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신랑을 맞이할 수 있는 새 마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전적인 새 마음, 항상 새롭게 맞이할 수 있어야 하고, 생명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계속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며, 능동적이고 융통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창조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좀더 과감하게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런데 변화는 변화이되 무의식적인 변화를 세속화라고 하며 능동적이고 창조적으로 변화를 일으킬 때 그것을 개혁이라고 합니다. 똑같은 변화 같으나 하나는 의식적으로 변화를 일으킨 것이며 다른 하나는 무의식적으로 끌려간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능동적인 자세로서 새로운 진리에 맞는 변화의 생활을 스스로 창조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를 믿고 사랑하기 때문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변화인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진정한 바른 자세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사도행전 213절에 보면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오순절 교회에 성령이 충만하여 놀라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는 낡은 가죽 부대에 속한 옛 사람들이 이것을 감당하지 못하여서 하는 소리인 것입니다.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에 붙들려서 창조적인 역사를 나타나게 될 때 "새 술에 취한 것 같다"고 하는 이러한 별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선교를 하는데 있어서 계속 문제가 되었던 것이 다름 아닌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는 저들의 방해와 도전 속에 계속 고민하여 충돌하게 되므로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이로 인해 공의회가 모이기까지 하였습니다만 문제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낡은 부대의 율법적 관계를 넘어서 새 진리인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복음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법적 관계로 설명하는 참으로 위대한 교리적 선언을 로마서를 통하여 선포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새 술은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하듯이 신랑되신 우리의 주님도 새로운 마음, 새로운 세계관으로 맞아야 할 것입니다. 부분적인 변화가 아닌 전적인 변화로 신랑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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