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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왕상12:6-16

by 【고동엽】 2022. 7. 5.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왕상12:6-16
(2014/8/17)

[르호보암 왕은 부왕 솔로몬이 살아 있을 때에, 부왕을 섬긴 원로들과 상의하였다. "이 백성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경들의 충고를 듣고 싶소." 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임금님께서 이 백성의 종이 되셔서, 그들을 섬기려고 하시면, 또 그들이 요구한 것을 들어 주시겠다고 좋은 말로 대답해주시면, 이 백성은 평생 임금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 원로들이 이렇게 충고하였지만, 그는 원로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자기와 함께 자란, 자기를 받드는 젊은 신하들과 의논하면서, 그들에게 물었다. "백성들이 나에게, 부왕께서 메워 주신 멍에를 가볍게 하여 달라고 요청하고 있소. 이 백성에게 내가 어떤 말로 대답하여야 할지, 그대들의 충고를 듣고 싶소." 왕과 함께 자란 젊은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백성은, 임금님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메우신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 달라고, 임금님께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임금님께서는 이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내 새끼 손가락 하나가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다. 내 아버지가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웠다. 그러나 나는 이제 너희에게 그것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메우겠다. 내 아버지는 너희를 가죽 채찍으로 매질하였지만, 나는 너희를 쇠 채찍으로 치겠다' 하고 말씀하십시오." 왕이 백성에게 사흘 뒤에 다시 오라고 하였으므로, 여로보암과 온 백성은 사흘째 되는 날에 르호보암 앞에 나아왔다. 왕은 원로들의 충고는 무시하고, 백성에게 가혹한 말로 대답하였다. 그는 젊은이들의 충고대로 백성에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가 당신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웠소. 그러나 나는 이제 그것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당신들에게 메우겠소. 내 아버지는 당신들을 가죽 채찍으로 매질하였지만, 나는 당신들을 쇠 채찍으로 치겠소." 왕이 이렇게 백성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일을 그렇게 뒤틀리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실로 사람 아히야를 시켜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온 이스라엘은, 왕이 자기들의 요구를 전혀 듣지 않는 것을 보고, 왕에게 외쳤다. "우리가 다윗에게서 받을 몫이 무엇인가? 이새의 아들에게서는 받을 유산이 없다. 이스라엘아, 저마다 자기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아, 이제 너는 네 집안이나 돌보아라." 그런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은 저마다 자기의 장막으로 돌아갔다.]

• 지도력의 교체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한국 방문이 상처를 입은 많은 이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이 된 것 같습니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성서에 기초한 것이지만 그가 많은 이들에게 도전과 위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끝없이 낮은 곳을 응시하고, 또 그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방문이 우리 사회의 화해와 일치의 모퉁잇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솔로몬이 죽은 후 그 아들인 르호보암에게 권력이 승계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을 보여줍니다. 지도력의 교체 시기는 위기인 동시에 과거의 적폐를 해소하고 새로운 미래를 기획할 수 있는 호기이기도 합니다. "역사는 발전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주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역사는 발전한다고 믿고 싶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 도처에서 벌어진 일들은 그런 우리의 낙관론을 비웃는 것처럼 보입니다. 종족과 종파간의 분쟁과 테러가 끊이질 않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적대관계도 심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역사의 발전을 자유의 확대 과정으로 본다면 지금 우리는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발전한 게 사실입니다. 억압과 착취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자유라는 것을 자기 삶에 대한 결정권을 갖는 것으로 본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집니다. 외적인 강제와 억압은 줄어들었지만, 내적인 강제와 억압은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더 많이, 더 편리하게' 살고 싶은 욕망, 남들과 구별되고 싶은 욕망 때문에 삶은 전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어진 삶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은 패배자처럼 보입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다보니 사람들은 삶의 자리에 녹아들지 못한 채 버성깁니다.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솔로몬 시대를 이스라엘의 황금시대라고 말합니다. 그 시기는 정치·경제·문화·군사적으로 이스라엘이 중근동 지역에서 나름대로의 입지를 확보한 때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속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시기를 아름다운 시절로만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억압받는 이들을 찾아오시어 그들을 자유와 해방의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시절은 역사의 퇴행기라 할 수도 있습니다. 뛰어난 신학자인 노만 갓월드는 다윗 솔로몬 시대의 특징을 네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 정치적 중앙집권화가 일어났습니다. 백성을 초월하는 권력을 가진 왕이 등장하고, 그는 조세권과 징집권을 갖게 됩니다. 통치의 편의를 위해 관료집단들이 등장합니다. 둘째, 사회적 계층이 발생했습니다. 국가의 부가 생산자들에게 고루 분배되기 보다는 비생산자 계급으로 이전되고, 그것이 상속됨으로써 사회적 분화가 가속화되었습니다. 셋째, 토지 보유권에 대한 이해가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토지 소유권이 가족이나 확대 가족에게 있었지만 이제는 부자들에게 토지가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토지를 잃은 이들은 임금 노동자로 전락했습니다. 넷째, 무역·외교·전쟁이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커졌습니다.(노만 K. 갓월드, <히브리 성서1>, p.388-389)

• 충고를 구함
오늘 본문은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왕위를 계승한 르호보암은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통치 경험은 전무하고, 다스려야 할 나라는 컸습니다. 어느 날 여로보암을 대표자로 한 북부 지파 동맹 사람들이 세겜에 있는 왕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솔로몬이 백성들에게 부과했던 세금과 노역이 너무 과중하여 견딜 수 없으니 그 멍에를 가볍게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솔로몬 시대의 영화로움은 백성들의 희생을 통해 이룩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황한 르호보암은 선왕과 함께 나라를 일으켜 세웠던 원로들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올바른 길을 가르쳐줍니다.

"임금님께서 이 백성의 종이 되셔서, 그들을 섬기려고 하시면, 또 그들이 요구한 것을 들어 주시겠다고 좋은 말로 대답해 주시면, 이 백성은 평생 임금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12:7)

원로들은 이미 특권을 누리고 있는 이들이기는 했지만, 아직 출애굽 정신을 다 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왕에게 주어진 권한은 백성을 마음대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섬기는 일이라는 사실, 백성들이 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백성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점잖게 일깨워줍니다. 하지만 르호보암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와 함께 자란 젊은 벗들에게도 충고를 구합니다. 성서 기자는 그 젊은 관료들이 누구인지를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자란", "그를 받드는". 그들은 왕실 가까이에 머물면서 온갖 특권적인 삶을 누려온 이들입니다. 또 권력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는 길임을 너무나 잘 아는 이들입니다. 강제 노역에 시달리고, 과중한 조세 부담에 허리가 휜 민중들의 처지를 알 리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세상은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로 나뉠 뿐입니다. 르호보암은 백성들의 말을 듣다가는 통치를 할 수 없다면서 그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는 그 젊은이들의 조언을 달콤하게 들었습니다.

우리는 솔로몬이 통치를 시작하기 전 기브온 산당에서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올렸던 사실을 잘 압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기를 바라느냐? 나에게 구하여라"(왕상3:5) 하였을 때 그는 '지혜로운 마음',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그렇게 청한 것이 주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은 하나님의 뜻이나, 그 뜻을 반영한 원로들의 충고를 내치고, 자기를 받드는 젊은 신하들의 말에 마음을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욕망을 거스를 때가 많습니다. 욕망은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두도록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타자를 향해 우리를 선물로 내어주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 삶을 조율해 나가기 위해서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 머물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 기쁘고 행복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의 모든 순간에 나를 누군가를 위한 선물로 내어주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독교인은 '나 좋을 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남 좋을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탈리아의 아씨시 인근 마을을 터덜터덜 걸어 다니다가 어느 날 저는 리보 토르토(Rivo Torto)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은 프란체스코회가 시작된 곳이었습니다. 초기에 그는 몇몇 형제들과 양우리였던 그곳에 머물며 금욕적인 생활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모두가 밀짚으로 만든 매트 위에서 잠든 때에, 형제 가운데 하나가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 죽겠다. 아이고 죽겠다." 프란체스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밝힌 후 죽겠다고 외친 것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한 형제가 자기가 그랬노라며 "배가 고파 죽겠다"고 말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즉시 음식을 준비한 후에 모든 형제들을 그 식탁에 동참시켰습니다. 그가 홀로 음식을 먹으면 창피를 느낄까 염려되었던 것입니다. 밥을 굶고 편태로 자기 몸을 때리면서까지 욕망을 다스리려 했던 그들이지만, 가련한 형제를 위해 기꺼이 고행을 중단했습니다. 율법을 넘어선 복음이 바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 멍에와 채찍
르호보암은 고통을 호소하며 부담을 경감시켜달라는 백성들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그만한 그릇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는 저 아래 땅의 사람들이 겪는 삶의 애환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성서 종교의 가장 놀라운 점은 하나님께서 땅의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불의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세상과 연루되는 것을 꺼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성육신의 신비는 지금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은 지금 울고 있는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 일을 거절하면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라도 그들을 도우실 것입니다. 힘들다고, 못살겠다고 외치는 백성들에게 르호보암이 돌려준 말은 무엇입니까?

"내 아버지가 당신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웠소. 그러나 나는 이제 그것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당신들에게 메우겠소. 내 아버지는 당신들을 가죽 채찍으로 매질하였지만, 나는 당신들을 쇠 채찍으로 치겠소."(12:14)

이 대목에서 제게 유난히 아프게 다가오는 두 단어는 '멍에'와 '채찍'입니다. 그것은 출애굽 정신에 대한 부정의 상징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바로의 멍에와 채찍 아래에서 신음하던 히브리인들을 가나안으로 이끄셨습니다. 갈대 바다 속에 수장되었던 애굽의 군병들과 병거들은 멍에와 채찍의 역사에 대한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이 새로운 애굽이 되고 만 것입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갈리고, 멍에와 채찍이 다시 등장합니다. 르호보암은 자기가 백성들을 섬기는 존재임을 잊었습니다. 자기에게 위임된 권한이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임을 잊은 것입니다.

15절은 자칫하면 오해하기 쉬운 구절입니다. 왕이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일을 그렇게 뒤틀리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아래서 일어난다는 말일까요? 인간은 다만 하나님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이 우주 가운데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지식이나 경험에 통합되지 않는 일들,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곤 합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것을 '모이라' 곧 운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신화에 나오는 신들조차 모이라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운명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인간의 오만과 오판으로 빚어진 참상조차 하나님의 뜻 혹은 운명으로 돌리려는 태도입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세월호 참사가, 군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인륜적인 폭력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입니까? 하나님이 그런 일을 허락하신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 혼란과 고통의 한복판에서 희망과 빛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성도들은 그 창조적인 사역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그렇게 뒤틀리게 하셨다는 말은 일종의 원인론적 설명입니다. 성서 기자는 분단의 빌미가 된 르호보암의 태도에서 절망만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희망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자기들을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희망을 그는 그렇게 표현한 것일 겁니다.

• 십자가 붙들기
멍에와 채찍으로 하는 지배는 사람들을 갈라놓게 마련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를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20:25-27)

다른 이들의 어깨에 무거운 멍에를 얹고, 채찍으로 그들을 치는 이들이 있는 곳에서 평화는 싹틀 수 없습니다. '멍에와 채찍'이 아니라 '십자가'가 우리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너를 위해 나를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 되기 위해 자기 욕망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아니고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14:6b)는 말을 저는 누구든지 십자가를 자기 삶의 원리로 삼지 않고는 하나님께 갈 수 없다는 말로 이해합니다. 교종 프란치스코가 온몸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은 '십자가'를 꼭 붙드는 삶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프란치스코 개인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뻐하고 찬탄하는 것은 좋지만, 이제 그것을 넘어 그가 가리켜 보이는 삶을 향해 길을 떠나야 합니다. 그것은 고단하고 힘겨운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보람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채찍과 멍에를 든 이들이 얼러대는 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오지만, 묵묵히 십자가를 지는 이들을 통해 세상에 하늘의 희망이 유입됩니다. 교우 여러분 모두가 십자가를 든든히 붙잡은 사람다운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4년 08월 17일 11시 58분 0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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