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떠나다
창12:1-4
(2014/6/15)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 다섯이었다.]
• 떠남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인도할 길잡이는 사람들이 믿음의 조상이라 일컫는 아브람입니다. 그는 신앙의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를 연 사람입니다. 아브람 이야기는 창세기 11장 말미에 나오는 그의 아버지 데라의 족보로부터 시작됩니다. 데라 일가의 족보를 간략하게 보도한 후 성경은 데라의 이주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인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오려고 바빌로니아의 우르를 떠나서, 하란에 이르렀다. 그는 거기에다가 자리를 잡고 살았다."(11:31)
'우르'는 수메르의 도시 국가였고 '하란'은 메소포타미아의 상업도시였습니다. 두 지역 모두 달신(Sin, Nanna)을 주신으로 섬기는 지역이었습니다. 신들은 시대마다 부침을 겪습니다. 왕들의 통치 이념이나 세력관계에 따라 섬기는 신들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메소포타미아와 티그리스 강 유역, 그리고 시리아와 가나안 지역, 더 넓게는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까지를 사람들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Fertile Crescent)이라 일컬었습니다. 주변의 다른 지역이 척박했던 데 비해 비교적 비옥했던 그 지역을 연결시켜보면 마치 초승달 모양과 같다 해서 붙여진 명칭입니다. 농업생산성이 높았던 이 지역은 히브리인들의 주 활동무대이기도 했습니다. 그 지역은 달신 숭배가 성행했던 곳입니다.
달이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달의 변화가 계절의 변화는 물론이고 인간의 감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일 겁니다. 일정한 주기로 변화되는 달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삶의 은유를 읽어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례 전통에도 '달신 숭배'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제1성서 곧 구약성서는 사람들이 '초하루'와 '보름'을 중시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기록한 창조 이야기는 해와 달과 별이 하나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달을 신성시하는 일반 민중들의 태도에는 별로 변함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데라가 하란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는 것은 그도 달신 숭배를 하는 사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데라 일가의 족보에는 달신과 관련된 이름도 여럿 등장합니다. 데라가 우르에서 하란으로 이주한 시기를 학자들은 대략 기원전 2000-1800년경으로 봅니다. 그때는 아모리족의 대 이주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데라 가문의 이주도 사회·경제적 요인이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서 기자는 그러한 이주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12:1)
우리는 흔히 아브람의 '떠남'을 모든 안정과 보호의 울타리를 걷어버리고 위험 속으로 뛰어든 것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하지만 유목민이었던 아브람에게 떠남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는 땅', '난 곳',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말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기술한 까닭은, 성경이 기록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정착생활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보다는 익숙하고 편안한 생활에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성서기자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안일하고 나태한 신앙생활에 타격을 주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개인의 행복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복의 약속
아브람에게 '떠나라' 명령하신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약속하십니다. 12장 2절과 3절에는 '복'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이나 등장합니다. 복은 'bãrak'의 번역인데, 이 말은 '산출력, 번식력'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완제품이 아니라 가능성임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다 풀어주시는 분이라기보다는 그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삶의 문제는 스스로 풀어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울 때 돕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속에 그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성숙한 사람으로 머물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또 하나님의 복은 일회적으로 주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첫 번째 복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성서 기자는 다윗 솔로몬 시대의 번영을 머리에 그리면서 이 대목을 기술한 것이 분명합니다. '큰 민족'이라는 구절이 그러하고 '이름을 떨친다'는 구절이 그러합니다. 다윗·솔로몬 시대를 사람들은 황금시대라 일컫습니다. 특히 솔로몬의 지혜는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는 "그의 지혜에 관한 소문을 들은 모든 백성과 지상의 모든 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어서 배우려고 몰려 왔다"(왕상4:34)고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스라엘은 큰 민족을 이루었고, 크게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저자는 아브람에게 주실 복을 약속하는 이 대목에 하나의 강력한 메시지를 숨겨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 솔로몬 시대의 영화로움은 왕들의 탁월한 지도력 덕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특정한 사람들을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복은 보호에 대한 약속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12:3a). 여기서 말하는 '너'는 특정인 아브람과 그의 후손을 지칭하는 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모험적인 삶에 뛰어드는 모든 사람을 일컫는 말일 겁니다. 하나님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길을 떠나는 이들의 보호자가 되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살 때 삶은 든든해집니다.
하나님은 형 에서에게 돌아갈 복을 가로채고 도망자 신세가 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28:15) 길 떠나는 이들에게 이 약속은 든든한 지원군입니다. 기꺼이 길을 잃어버릴 각오를 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맛볼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을 저는 마음에 소중하게 갈무리해두고 있습니다. 'Solviture Ambulando!' 일단 걸으면 해결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너무 아는 길, 안전한 길로만 다니려고 합니다. 신앙은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용기입니다. 아브람이 그랬고,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던 첫 번째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올리신 예수님도 십자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셨습니다. 앉아서 걱정만 하면 안 됩니다. 삶은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 복의 매개자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주시는 또 다른 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복이 되는(be a blessing) 복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복을 이웃과 세상에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는 과정입니다. 성도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선물로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격려하면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고 말합니다(행20:35).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도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은총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각박한 것은 그 흐름이 끊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복의 매개자'가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이 아닐까요?
저는 수류화개水流花開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이것은 송나라 시인 황산곡黃山谷의 시 가운데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하늘이 가없이 푸르더니 萬里靑天/구름이 일고 비가 내리네 雲起來雨/빈산에 인적이 없고 空山無人/물은 흐르고 꽃은 피네 水流花開". 저는 다소 작위적이기는 하지만 '수류화개'를 좀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흐름이 막힌 곳은 뚫어 흐르게 하고, 꽃을 피워내기 위해 정성을 다 하자는 다짐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이 삶이 그러했습니다. 병든 사람은 고치시고,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쫓으심으로 가로막힌 생명을 회복시키셨고, 사람들 사이에 사랑과 우정의 꽃밭을 일구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삶을 살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아브람은 즉시 길을 떠났습니다. '떠났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에는 '길을 가다'라는 뜻도 있지만 '매일매일 그런 삶을 살았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치 복이 우리에게 주어진 아름다운 삶의 가능성이었던 것처럼, 떠남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날마다 지속되어야 하는 과제입니다. 살다보면 우리가 가진 것이 우리의 우상이 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이룬 성과, 지위 때문에 삶이 부자유해질 때가 많습니다. 저는 가끔 교우들로부터 그런 하소연을 들곤 합니다. 예수를 믿고 애굽으로 상징되는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애굽의 끓는 가마솥 주변을 맴돌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괴롭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보면 목회자로서 고마운 생각이 먼저 듭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급진적인 삶을 오롯이 살아내지는 못하지만 자기 삶이 문제라는 사실을 늘 의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 Homo Viator
신앙생활이란 '일상적인 출애굽'이어야 합니다.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는 것들로부터 자꾸만 떠날 때 우리 삶은 맑아집니다. 저는 내일부터 2달 동안 일종의 순례 여정에 오릅니다. 목사로서 살아온 30년의 세월을 톺아볼 생각입니다. '나는 그동안 복음의 본질에 충실한 목회를 했는가?',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아왔는가?' 묻고 또 물으며 제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늠해보려 합니다. 또 신앙의 근원을 고민했던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기회로 삼으려 합니다. 이미 갈릴리의 복음을 잃어버린 한국교회를 쇄신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보려 합니다. 순롓길에 나서면서 저는 가는 곳마다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라도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상가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1889-1973)은 인간을 가리켜 'Homo Viator'라 했습니다. 마음에 근원적 그리움을 품고 하나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인간의 인간됨이라는 뜻일 겁니다. 순례의 여정을 통해 더 깊어지고 맑아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두고 떠나는 마음이 흔쾌하지는 않습니다. 여러 가지 염려되는 일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총 속에 모든 것을 맡길 따름입니다. 길을 떠나면서 저는 조이스 럽(Joyce Rupp)의 기도를 저의 기도로 삼습니다.
제 영혼의 보호자시여,
오늘 하루 길 가는 저를 인도하소서.
해를 당하지 않도록 지켜 주소서.
주님과, 주님의 땅과, 주님의 온 가족과
관계가 더욱 깊어지게 하소서.
제 안에 주님의 사랑이 강건하여져서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제가
주님의 평화의 임재가 되게 하소서. 아멘.
이 기도가 저의 기도인 동시에 날마다 '떠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려는 교우 여러분 모두의 기도가 되기를 빕니다. 아멘.등 록 날 짜2014년 06월 15일 12시 00분 3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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