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는 끝났다 단5:1-6 (2014/6/8, 성령강림 및 환경선교주일) [벨사살 왕이 귀한 손님 천 명을 불러서 큰 잔치를 베풀고, 그 천 명과 더불어 술을 마셨다. 벨사살 왕은 술을 마시면서 명령을 내려서, 그의 아버지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 온 금그릇과 은그릇들을 가져 오게 하였다. 왕과 귀한 손님과 왕비들과 후궁들이 모두 그것으로 술을 마시게 할 참이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집 성전에서 가져 온 금그릇들을 꺼내서, 왕과 귀한 손님과 왕비들과 후궁들이 그것으로 술을 마셨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서, 금과 은과 동과 철과 나무와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갑자기 사람의 손이 나타나더니, 촛대 앞에 있는 왕궁 석고 벽 위에다가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왕은 그 손가락이 글을 쓰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왕의 얼굴빛이 창백해지더니, 공포에 사로잡혀서, 넓적다리의 힘을 잃고 무릎을 서로 부딪치며 떨었다.] • 성령 충만하다는 것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성령강림주일인 오늘은 감리교회가 환경선교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성령강림절은 교회의 탄생일이기도 합니다. 박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골방에 틀어박혀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자 그들은 광장으로 뛰쳐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그 메시지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는 이들은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둔 세상은 빛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참답게 살려는 이들은 시련을 각오해야 합니다. 둘째, 그런 시련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사랑의 길을 선택하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그처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이처럼 무기력한 이들을 일으켜 역사의 주체로 서게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과 깊은 일치를 이루게 합니다. 성령은 나뉘었던 것을 하나 되게 합니다. 성령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합니다. 어느 신학자는 성령의 감동이 없는 신학을 가리켜 ‘펑크 난 타이어 신학’(flat‐tired theology)이라고 말했습니다. 펑크 난 타이어로는 먼 길을 달릴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 이들은 하나님의 일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염원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까지 부여해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모든 교우들이 성령 충만해지기를 기원합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갈5:22)라고 말했습니다. 이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이 시대에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절제’라고 생각합니다. 절제의 문자적 의미는 ‘알맞게 조절함’, ‘방종하지 않도록 자기의 욕망을 제어함’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욕망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욕망이란 자기 확장을 위해 어떤 대상을 과하게 탐하거나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으려는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욕망을 제어하기보다는 그것을 부추기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그런데 허망한 욕망은 파멸로 귀착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 벨사살의 잔치 오늘 본문이 그 한 예입니다. 벨사살 왕은 바벨론 제국의 쇠퇴기에 등장한 사람으로, 그 이름은 ‘벨이시여, 임금을 지키소서’라는 뜻입니다. ‘벨’은 바벨론의 최고신인 마르둑의 다른 이름입니다. 벨사살은 어느 날 제국의 위용을 자랑하기 위해 귀한 손님 천명을 불러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술이 거나해져 기분이 한껏 고조된 벨사살은 자기 위세를 만방에 과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선왕인 느부갓네살이 전쟁 중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 온 금그릇과 은그릇들을 가져오라고 지시했고, 거기에 술을 따라 마셨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자기 힘에 대한 과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약소국에 대한 조롱인 동시에 야훼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일찍이 시편 기자는 포로로 잡혀간 이들이 바빌론 강변 곳곳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다고 노래했습니다. “우리를 사로잡아 온 자들이 거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짓밟아 끌고 온 자들이 저희들의 흥을 돋우어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하는구나. 우리가 어찌 이방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시137:3-4) 시인은 자기가 예루살렘을 잊는다면 오른손이 말라비틀어져 버리고,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려도 좋다고 말합니다. 자기들을 사로잡아 온 자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서 시온의 노래 한 가락조차 부르지 않겠다고 할 만큼 민족적 자존감이 강한 그들인데, 가장 거룩한 일을 위해 구별했던 성전 기물을 술자리의 여흥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야훼에 대한 모독과 조롱인 것은 그들이 한 다음 일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서, 금과 은과 동과 철과 나무와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였다.”(5:4) 그들은 바벨론 제국과 그 신들의 우월함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순간 흥겹던 잔치는 공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사람 손 하나가 나타나더니 촛대 앞에 있는 왕궁 석고 벽 그러니까 모두가 잘 볼 수 있는 곳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왕은 공포에 사로잡혔고 얼굴빛은 창백해졌습니다. 문제는 그 글씨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국의 모든 지혜자들이 그 글씨를 해독하려고 애써보았지만 누구도 그것을 풀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제국이 자랑하던 지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인 다니엘만이 그 글씨를 해독할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기록된 글자가 ‘메네 메네 데겔’과 ‘바르신’(5:25)이라고 말하며 그 뜻을 풀어줍니다.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임금님의 나라의 시대를 계산하셔서, 그것이 끝나게 하셨다는 것이고, ‘데겔’은 임금님이 저울에 달리셨는데, 무게가 부족함이 드러났다는 것이고, ‘바르신’은 임금님의 왕국이 둘로 나뉘어서 메대와 페르시아 사람에게 넘어간다는 뜻입니다.”(5:26-27) 사실 ‘메네’ ‘데겔’ ‘바르신’이라는 글자 속에 그렇게 심오한 뜻이 담겨 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니엘이 암호화된 단어를 그렇게 해석했을 뿐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 날 밤에 벨사살이 살해되고, 메대 사람 다리우스가 그 나라를 차지하였다고 전합니다. 흥겨운 잔치, 벽에 쓰인 글씨, 심판 예고, 심판의 실현이라는 사건의 흐름이 이렇게 신속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벨사살 왕의 잔치와 몰락을 전하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오늘 우리 삶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시적인 소비, 흥청망청, 경외심이 없는 삶의 결국은 파멸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인상 깊게 들려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 갈림길 인간의 과도한 욕망으로 인해 파괴된 피조세계의 신음소리가 들려온 지 이미 오래입니다.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경고하는 과학자들과 종교인들의 보고는 심각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위기는 문서에만 담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몸으로 실감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일찍이 시인 최영미는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발칙한 제목의 시집을 낸 바 있습니다만, 인간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자연을 함부로 착취하고,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하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아직도 잔치가 끝난 줄도 모르고 여흥을 주체하지 못해 비틀거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경고의 나팔소리가 이미 울렸는데도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들은 체 하지도 않습니다. 욕망에 취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는 생명의 길과 파멸의 길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마땅히 생명의 길을 택해야 합니다. 전 세계가 핵발전소를 줄여가는 추세인 데도 우리나라는 핵발전소를 지속적으로 확장해가고 있습니다. 에너지 선진국들이 탈핵의 길로 접어든 것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위험을 모른 체 하며 죽음의 길로 가려 합니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동부지역은 세계적인 핵 밀집지역입니다. 이미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사고를 통해 핵발전소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학습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내고 있습니다. 고리 핵발전소는 이미 수명이 다했는데도 여전히 가동 중입니다. 활화산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라며 현실을 직시하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이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괜찮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전문가들에게 판단을 맡겨버릴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세월호 참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무엇이 효율적인가를 따지기보다는, 무엇이 생명을 내신 하나님 뜻에 합당한가를 물어야 합니다. 단기적인 성과보다는 장기 지속의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악령은 우리에게 발전을 위해서는 누군가를 희생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성령은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발전은 오히려 퇴보라고 말합니다. 악령은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이 성공적인 삶이라 말하지만, 성령은 이웃들을 위해 자기의 욕망을 유보할 줄 아는 삶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악령은 돈과 권력과 명예로 우리를 유혹하지만, 성령은 우정과 돌봄과 섬김의 길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의 음성에 반응하며 살고 있습니까? 풍성하고 화려한 벨사살의 잔치에 가시렵니까? 아니면 조촐하지만 따뜻한 예수 그리스도의 식탁에 가시렵니까?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식탁에서 만날 수 있기를 빕니다. 오늘 우리가 행하는 성찬을 통해 생명을 향한 회심이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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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4년 06월 08일 11시 53분 12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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