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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은 없다 -엡3:7-13

by 【고동엽】 2022. 7. 5.

외인은 없다
엡3:7-13
(2014/8/10)

[나는 이 복음을 섬기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이 작용하는 대로 나에게 주신 그분의 은혜의 선물을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 가운데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을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있는 비밀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모두에게 밝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제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리시려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하신 영원한 뜻을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위하여 당하는 나의 환난을 보고서, 여러분이 낙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내가 당하는 환난은 여러분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 낯선 세계와의 만남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저는 지난 54일 동안 주님께서 맡기신 사역의 현장이자 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장소인 청파 공동체를 떠나 유럽의 여러 나라와 도시들을 떠돌았습니다. 하나님의 각별하신 보살핌과 인도하심으로 건강하게 순례를 마치게 되어 참 감사합니다. 순례 여정을 시작하면서 저는 지금 한국 개신교회가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3세기의 성 프란체스코의 고향인 이탈리아의 아씨시에서 순례를 시작했습니다. 철저하게 성경의 정신대로 살려고 한 그의 흔적을 찾아 나섰던 시간이 제게는 너무도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찾아와 함께 기도하고 세계 평화를 모색하는 프랑스의 떼제 공동체에서 보냈던 시간도 아주 각별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낯선 정교회 신앙을 배우기 위해 찾아갔던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에서의 경험도 저는 매우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낯선 곳을 찾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을 안겨줍니다. 길을 잃지 않을까, 차를 놓치지 않을까, 거친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까, 온갖 걱정이 찾아들곤 합니다. 하지만 어디를 가든지 제가 마주친 것은 평범한 행복을 구하는 이들의 염원이었습니다. 부유한 나라 사람이든 가난한 나라 사람이든 모두가 행복과 평화를 구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들 모두가 소중한 이웃으로 보였습니다.

주님 안에서 바라보면 나와 무관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런 세상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종, 국적, 피부색, 종교, 빈부, 노소, 남녀, 성속으로 갈린 세상을 하나로 통합시키신 분이십니다. 주님 안에서 남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나와 무관한 세상의 고통은 없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당신의 것으로 품어 안으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속에서 그런 경계선을 점차 지워나가는 과정입니다. 나를 넘어 너의 세계로 나아가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하는 것이 믿음의 진보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조각난 세상입니다. 전쟁과 테러의 소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저는 가슴으로 주님의 슬픔을 느낍니다. 왜 우리는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삶을 경축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직전에 바울 사도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이라 부르며 천시했던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는 "유대 사람들과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이 되고, 약속을 함께 가지는 자가 되는 것"(엡3:6)이 복음의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당연한 말처럼 생각될지 모르겠지만 이 서신이 기록되던 당시에 이것은 매우 위험한 발언이었습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유대인들은 이 말을 자기들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말로 들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판에 그들이 자기들과 한 몸이고 하나님 나라를 함께 상속할 사람들이라니요? 바울이 회중들의 눈치나 보는 사람이었다면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망설이지 않고 진실을 말합니다.

• 일꾼 의식
그는 자기가 누구의 일꾼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 사도는 아주 확고하게 자기 입장을 밝힙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 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갈1:10)

바울은 일꾼 의식을 가슴에 품고 산 사람입니다. 억지로 주인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그 사랑의 빚을 갖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산 사람입니다. '빚진 자' 의식이 없다면 하나님의 종으로 살 수 없습니다. 탕감 받은 것이 많음을 알지 못하는 이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속에 감사가 없는 사람은 충심으로 그분의 일을 할 수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자기가 섬기는 분의 뜻을 잘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좋을 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행하고, 또 그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뵌 후에 복음의 일꾼이라는 자기의 정체성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과 하나님 속에 감추어진 비밀스러운 경륜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고난 받는 자리에 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는 것을 자기 인생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2:20)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실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누구보다도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먼저 우리의 변화를 알아차리기 시작합니다. 주님은 당신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옳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이들은 생명을 풍성하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며칠 후면 프란체스코 교종이 이 땅을 찾아옵니다. 굳이 시복식을 광화문 광장에서 해야 하는지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경호 계획에 대한 보도를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프란체스코 교종도 아마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떼제에 머무는 동안 저는 정말 다양한 나라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각 나라의 종교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프란체스코 교종의 등장 이후 교회를 떠났던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교종이 등장한 것에 대해 많은 주교들과 사제들이 의혹에 찬 시선을 던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도 적극적으로 교종이 하는 일을 기뻐하고 있답니다. 청년들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던 분이 지나가듯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프란체스코 교종은 교리적인 문제나 신학적인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바로 이 말 속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정답이 없는 신학 문제에 매달리느라 지금 당장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믿음은 교리에 대한 승인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교리나 신학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궁구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삶의 변화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 교회의 직무
물론 혼자서는 어렵습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벗을 허락하십니다. 성령으로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언을 들은 마리아는 두려웠습니다. 그때 주님은 아기를 낳지 못하던 여인 엘리사벳도 하나님의 은혜로 아기를 갖게 되었다며 마리아를 격려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간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비한 은총으로 아기를 갖게 된 두 여인은 서로의 두려움과 설렘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해주었을 겁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열둘이나 부르셨습니다. 교회는 바로 우리가 복음 안에서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고 북돋워주라고 주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교회는 돈과 출세를 마치 인생의 목표인양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백향목처럼 남들 위에 우뚝 솟은 사람이 되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굽은 나무일망정 다른 나무와 더불어 숲을 이룰 줄 아는 것이 참 삶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삶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은 이제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리시려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하신 영원한 뜻을 따른 것입니다."(10-11)

교회의 직무는 이처럼 중차대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습니다. 몸은 유기체입니다. 유기체의 특색은 '배려'입니다. 고통 받는 다른 지체를 위해 자기 몫을 덜어낼 줄 아는 것이 유기체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가 떠오릅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하나님께서 계시도다". 단순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교회는 함께 삶을 연습하는 곳입니다.

떼제 공동체를 떠나기 이틀 전 저는 참 감사하게도 알로이스 원장 수사와 다른 수사들의 점심식사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떼제 마을의 아름다운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공동체의 정원에서 우리는 정겹게 음식을 함께 나눴습니다. 떼제 음악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기도의 경험도 나누고, 공동체 생활에 대해 궁금한 것도 물으며 참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식사를 마칠 무렵 저와 더불어 함께 초대를 받았던 미국인 학생 잭이 자기 사연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도 떼제에 온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두 번째 방문입니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는 제 절친한 친구와 함께였지만 이번에는 혼자 왔습니다. 그 친구는 작년에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친구를 잊지 않으려고 팔에 그 친구의 모습을 문신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제 속에서 반항심이 커갔습니다. 떼제에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조금 망설였지만 응한 것은, 2005년에 로제 원장 수사님이 기도 중에 살해를 당했는데, 여러분들이 어떻게 여전히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를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리지만 잭의 이야기는 매우 정연했습니다. 우리 사이에 낮은 탄식소리가 스쳐갔습니다. 알로이스 원장 수사는 잭을 따뜻한 말로 위로하면서 "우리도 혼자였다면 그 고통을 견디기 어려웠을지 모르지만 형제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수사들과 함께 잭을 격려하는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떼제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말은 '함께 하는 삶'(life together)입니다. 공동체는 삶을 함께 나눌 때 든든히 서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야말로 교회의 핵심입니다. 사랑으로 삶을 나누는 이들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는 자라납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롬14:17)

교회는 사랑과 평화가 추상이나 관념이 아니라 구체화 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이 땅에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 믿음의 용기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안일한 삶으로부터 자꾸만 벗어나야 합니다. 물 위를 걷다가 물속에 빠져버린 베드로를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상식에 반하는 일입니다. 그는 비교적 안전한 배 밖으로 나와 물 위를 걸었습니다. 저는 그의 시행착오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익숙한 세계에 머물려 할 뿐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1970년대의 젊은이들은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대부분의 갈매기들은 하구 근처에 몰려들어 끼룩거리면서 죽은 물고기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지만,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은 높이 그리고 빨리 나는 데만 골몰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젊었기에 저도 고독한 조나단의 모습과 나를 동일시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힘겹고 눈물겨운 일인지 알기에 하구에 몰려든 갈매기들을 함부로 비웃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인간의 인간됨은 자기의 한계를 뛰어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나'에서 벗어나 '큰 나'로 도약하는 것, 비루한 욕망에 온통 붙들려 사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꼭 붙드는 삶을 선택하는 것, '소인배'의 삶에서 벗어나 '군자'의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과제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런 삶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의 본보기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권고합니다.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뜻은 늘 패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생명과 평화 세상의 꿈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합니다. 악한 이들은 자기들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때로는 교묘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약한 이들을 이용하거나 억압합니다. 착하게 사는 이들은 늘 당하고 맙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우리 의식에는 그림자가 하나 생깁니다. '아, 안 되는구나!' 이런 패배 의식이야말로 세상의 통치자인 악한 영이 가장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람이 부는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빙하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빙하는 보이지 않는 저 바닷속의 해류의 영향에 더 크게 받는다고 합니다. 보이진 않지만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서 분명히 역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이들을 들어 강한 이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입니다. 바울이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말하는 것은 그저 힘을 내자는 맥 빠진 격려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결국에는 승리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눈으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중에 하나님의 나라는 자라고 있습니다.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고 외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에서 우리 곁에 다가온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본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징표가 될 차례입니다. 사람을 이리저리 가르는 온갖 장벽들을 철폐하고, 사람들이 서로를 낯선 이로 대하지 않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는 일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즐겁게 그리고 명랑하게 하나님 나라의 삶을 구현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등 록 날 짜2014년 08월 10일 12시 04분 4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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