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딸
눅13:10-17
(2014/6/1)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그런데 거기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허리가 굽어 있어서,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이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불러서 말씀하시기를, "여자야,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곧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에 분개하여 무리에게 말하였다. "일을 해야 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 주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끌고 나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이 매임을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니,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모두 부끄러워하였고, 무리는 모두 예수께서 하신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 난감한 현실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때 이른 더위로 거리를 걷는 이들의 표정이 권태로워 보이는 나날입니다. 너무 큰 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고양시 버스터미널 화재사고로 많은 이들이 죽은 지 며칠 되지 않아, 장성의 효사랑요양병원에서 일어난 방화사건으로 많은 노인들이 죽었습니다. 주님의 자비와 위로가 유가족들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제가 가끔 만나는 한 일간 신문의 논설위원은 '설마'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악마라는 내용의 칼럼을 썼습니다. 우리는 번번이 속으면서도 너무 쉽게 사람들을 믿어왔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혹이 일어도 '책임 있는 이들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문제를 직시하지 않았습니다. "다중은 늘 의심하지 않고 진상을 즉각 따져 묻지 않은 채 속아주고 믿어주었다."(조현, '설마 뒤에 악마 있다', 한겨레신문, 2014년 5월 29일 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위험 세상은 바로 그런 묵인 혹은 방조 가운데서 자라난 것입니다.
위험한 세상에 살다보니 사람들의 심성도 나날이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도곡역에서 일어난 70대 노인의 전동차 방화사건은 그 단적인 예입니다. 법원 판결에 불만을 품은 그는 자기의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전동차에 불을 질렀다고 말했습니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존재'가 아닌 '소유'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그런 영혼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마녀의 주술에 걸려 개구리로 변한 채 살아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공감의 능력은 퇴화되었고, 고통조차도 자기 삶으로 부둥켜안는 존재의 용기를 잃었습니다. 이제 몸과 마음을 추슬러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요즘 세상을 더 어지럽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정책 대결을 하기보다는 상대에 대한 흠집내기로 표를 얻으려는 지방선거 후보자들을 생각하면 화가 납니다. 참 유치합니다. 또 그런 게 먹히는 현실이 답답합니다. 그러나 근래 한국 기독교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이들의 망언은 거의 망발 수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 나라를 차마 버리실 수가 없어서 정신을 차리라고 세월호를 침몰시켰다고 말합니다. 대체 그게 무슨 신학입니까? 그는 한번도 "희생되어야 할 사람이 왜 내가 아니고 그들인가?"를 묻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스스로를 전능자의 자리에 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반신학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부인하는 자입니다.
• 희망 없이 사는 여인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리던 여인이 있습니다. 참 긴 세월입니다. 며칠만 아파도 삶의 리듬이 깨지는 법인데 그 긴 세월을 여인은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요? 천형처럼 다가온 질병을 고쳐보려고 백방의 노력을 다했을 겁니다. 슬픔과 분노, 그리고 절망과 좌절의 시간이 계속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참 안됐다고, 잘 될 거라고 위로하던 이들도 이제는 그의 고통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우리는 그 여인에 관한 아무런 정보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가족들은 있었을까요? 설사 있었다 해도 가족들조차 여인을 짐스럽게 여겼을 겁니다. 여인의 허리는 굽어 있었습니다. 병이 여인을 그렇게 만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남부끄러워 땅만 보고 살다보니 그렇게 굽은 것일까요?
여인이 아름다운 별 하늘을 우러러본 때는 언제일까요? 청명한 하늘을 자유로이 날며 우짖는 새들을 보며 기뻐했던 때는 언제일까요? 누군가의 따뜻한 포옹을 받아본 때는 언제일까요? 아무 거칠 것조차 없이 맑은 웃음을 웃은 때는 언제일까요? 구차한 살림이었을망정 벗들과 어울려 놀아본 때는 어느 때일까요? 기억의 두레박을 아무리 깊이 내려도, 마음을 시원하게 할 시원한 물 한 모금 얻을 수 없었을 터입니다. 긴 병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외로움이었을 겁니다. 이웃들은 여인을 나름의 꿈을 꾸고 있는 생명이 아니라 하나의 풍경으로 대했을 겁니다. 그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차라리 없으면 좋을 잉여 존재였을 겁니다.
그래도 여인은 회당 예배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회당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여인에게 일종의 숨쉬기와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그 운명의 날, 여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떤 뜨거움이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여인의 존재를 꿰뚫었을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보인 사람들의 반응을 잘 압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서기관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수사학적으로 세련되었기 때문이 아입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사용하신 말이 그러했듯,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가슴 속에 뭔가를 창조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우는 정말 드뭅니다. 가끔 말씀을 듣고 우는 분들을 봅니다. 그것은 뭐랄까, 세상을 헤매다가 고향에 돌아온 자의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겁니다.
• 예수의 눈
예수님도 그 회당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을 예민하게 알아차리셨습니다. 허리를 펴지 못하는 그 여인 속에서 하나님은 이미 활동하고 계셨습니다. 18년 동안 한 번도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여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여인을 주목하여 보시고 그를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어떤 어조였을까요? 어리둥절해 있는 여인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야,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이 음성이야말로 '빛이 생겨라' 하시던 그 음성이 아닙니까? 사건을 일으키는 말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말씀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스스럼없이 손을 얹으셨습니다. 이 아름다운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강은교 선생의 <당신의 손>이라는 시가 기억납니다.
당신의 손이 길을 만지니
누워있는 길이 일어서는 길이 되네.
당신의 슬픔이 살을 만지니
머뭇대는 슬픔의 살이 달리는 기쁨의 살이 되네.
아, 당신이 죽음을 만지니
천지에 일어서는 뿌리들의 뼈
보고, 가까이 부르고, 선언하고, 접촉하는 일련의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습니다. 생명은 그렇게 소생되고 있었습니다. 여인의 허리가 펴졌습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여인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던 병이 마침내 떠나간 것입니다. 여인을 사로잡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죄책감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 대한 혹은 세상에 대한 원망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만남이 그 여인을 부자유에서 해방시켜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의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맺힌 것을 풀어 자유롭게 하는 의사이십니다.
허리를 펼 수 있게 된 여인은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올렸습니다. 누가 들을세라 숨죽여 부르는 찬양이 아니라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의 찬송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놀라운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라 해서 다 그 이적을 기뻐한 것은 아닙니다.
• 누가 매인 사람인가?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에 분개했습니다. 그는 회중에게 말하였습니다. "일을 해야 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 그가 하는 말은 결국 예수가 안식일 규정을 위반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꽉 막힌 사람입니다. ‘본’과 ‘말’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침몰해가는 배에 갇힌 승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죽어가는 이들을 구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비용 문제를 계산하는 사람입니다. 규정, 규칙에 얽매여 생명 중심의 사고를 하지 못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안식일의 존재 이유는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 계명을 통해 사람들이 일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 속에 몸을 맡기는 날입니다. 그 리듬 속에 머물면 사람은 회복됩니다. 안식일은 생명이 회복되는 날입니다. 허리를 편 이 여인은 예수를 통해 진짜 안식일을 경험한 것입니다.
마치 자기 권위가 훼손되기라도 한 것처럼 화를 내고, 회중들에게 일장 연설을 한 회당장은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일까요? 허리
가 굽은 진짜 환자는 바로 이 사람이 아닐까요? 주님은 법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것을 보시고는 그 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이런 일의 연속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하는 것과 끊임없이 접촉하셨습니다. 물론 접촉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접촉을 통한 정화가 목적입니다. 명상 훈련을 받는 이들이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것은 '자비 명상'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따뜻하고 밝은 기운이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는 광경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며 자비 명상을 하다보면 놀랍게도 새로운 기운이 우리 속에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本을 버리고 末에 집착하는 이들을 향해 주님은 준엄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끌고 나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 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이 매임을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15-16)
예수님은 안식일 법이 충실하게 지켜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그렇기에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예수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위선자란 문자적으로 보면 '선을 가장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위僞'라는 한자의 구성이 보여주듯이 위선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이 지켜져야 한다고 강변하는 사람들 속에서 위선을 보셨습니다. 규칙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일이 반복될 때 공감 능력은 퇴화되게 마련입니다.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이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지칭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느꺼워져서 가슴이 뭉클해지곤 합니다. 그 여인도 유대인이었으니 아브라함을 조상이라 한다한들 하등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여인은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의 오물덩이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그 여인을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사실을 일깨우시려고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택하신 것이 아닐까요?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어구는 그 자리에 입회한 이들의 무정함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이 여인의 처지와 다를 바 없이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의 꺾인 마음의 허리를 누가 펴줄 수 있을까요? 천대받고 무시당하는 이들의 굽은 허리를 누가 펴줄 수 있을까요? 물론 주님이 해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바로 우리를 통해 그 일을 하고 싶어 하십니다. 지금 울고 있는 사람들, 지금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을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부르지 않으실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빌어 그들의 허리를 펴주고 싶어 하십니다. 지금 개신교회는 총체적 위기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아름다움이 드러나야 할 때입니다. 울면서 씨를 뿌리는 이라야 웃으며 거두어들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것 같은 이 때, 한숨만 내뱉지 말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길을 떠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등 록 날 짜2014년 06월 01일 11시 10분 4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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