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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이 그대들과는 관계가 없는가? -애1:7-14

by 【고동엽】 2022. 7. 5.
이 일이 그대들과는 관계가 없는가?
애1:7-14
(2014/5/18)

[예루살렘이 고통과 고난을 겪는 날에, 지난날의 그 모든 찬란함을 생각하는구나. 백성이 대적의 손에 잡혀도 돕는 사람이 없고, 대적은 그가 망하는 것을 보며 좋아한다. 예루살렘이 그렇게 죄를 짓더니, 마침내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그를 떠받들던 자가 모두 그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서 그를 업신여기니, 이제 한숨지으며 얼굴을 들지 못한다. 그의 더러움이 치마 속에 있으나, 자기의 앞날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비참해져도 아무도 위로하는 이가 없다. "주님, 원수들이 우쭐댑니다. 나의 이 고통을 살펴 주십시오. 대적들이 손을 뻗어 보물을 빼앗습니다. 이방인이 주님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이미 금하셨으나, 그들이 성소에 침입하는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온 백성이 탄식하면서, 먹거리를 찾습니다. 목숨을 이으려고, 패물을 주고서 먹거리를 바꿉니다. 주님, 이 비천한 신세를 살펴 주십시오. 길 가는 모든 나그네들이여, 이 일이 그대들과는 관계가 없는가? 주님께서 분노하신 날에 내리신 이 슬픔, 내가 겪은 이러한 슬픔이,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주님께서 저 높은 곳에서 불을 보내셔서 내 뼈 속 깊이 들어가게 하시고, 내 발 앞에 덫을 놓아서 걸려 넘어지게 하셨으며, 나를 폐인으로 만드셔서 온 종일 힘이 없게 하셨다. 주님께서 내가 지은 죄를 묶고 얽어서 멍에를 만드시고, 그것을 내 목에 얹어서 힘을 쓸 수 없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내가 당할 수 없는 사람의 손에 넘기셨다.]

• 역사의 전환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5.18 광주민주화항쟁 34주년 기념일입니다.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습니다. 그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던 이들은 무참하게 짓밟혔지만 그들의 희생을 통해 우리는 조금은 더 자유로운 나라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3.1운동이나 4.19혁명, 5.18 광주민주화항쟁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전통입니다. 젊은 시절 우리는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는 서서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목이 터져라 외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하던 결기가 어느 결에 풀어지고 안락에 길들여진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선진국 대열에 접어들었다고 기뻐했고, 무역 강국임을 내세웠고, 세계 초일류기업을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현실은 참담합니다. 외국인들은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어떻게 당신 나라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입니다. 국민의 종복으로 세움을 입은 이들은 국민들을 지키고 돌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나라 '국國' 자는 '입 구口' 안에 '혹 혹或' 자가 들어있는 글자입니다. '구' 자는 성곽을 의미하는 것이고, '혹' 자 속에는 ‘창 과戈’ 자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혹'은 창을 들고 일정한 구역을 지키는 것을 나타냅니다. 국민들이 안심하고 살도록 지키는 것이 국가 본연의 임무임을 알 수 있습니다. 5.18은 국민을 지켜야 할 책임을 진 군인들이 국민을 적으로 대했기 때문에 충격적이고, 세월호 참사는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국가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충격적입니다.

중국의 역사서인 <십팔사략十八史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은나라에 7년간 큰 가뭄이 들었습니다. 나라의 법규 기록을 맡은 관리인 태사(太史)가 탕왕에게 하늘에 기우제를 지내면서 인신공희(人身供犧)를 건의하였습니다. 그러나 탕왕은 이를 거부하면서 "하늘에 빌려는 대상이 백성인데 어찌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내가 희생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스스로 목욕재계한 뒤 흰 띠를 몸에 두르고 상림(桑林)의 들에 나아가 하늘에 여섯 가지 자책을 하며 기도를 올렸습니다.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큰비가 내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탕왕의 여섯 가지 자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치가 알맞게 조절되지 않았는가(政不節歟)[어조사 여歟]
백성들이 직업을 잃고 있지 않은가(民失職歟)
궁실이 화려한가(宮室崇歟)
여자들의 치맛바람이 심한가(女謁盛歟)[아뢸 알謁-visit a superior]
뇌물이 성행하는가(苞苴行歟)[꾸러미 포苞, 꾸러미 저苴]
아첨하는 사람이 들끓는가(讒夫昌歟)[참소할 참讒-slander]

• 슬픔의 노래
지도자란 모름지기 남을 탓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게 될 책은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책의 저자가 예레미야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름으로 불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꼭 그가 저자라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몇 가지 점에서 이 책의 저자는 예레미야와 비슷한 역사 인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책 전반에 배어있는 것은 바벨론이라는 초강대국에 의해 나라가 멸망한 사실에 대한 슬픔입니다. 또 나라가 그 지경이 된 까닭에 대한 분석도 유사합니다. 즉 하나님보다 외세에 의존하려 했던 왕과 지도자들의 무능, 사람들에게 거짓 평안을 외친 선지자들과 탐욕스러운 제사장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며 살아온 백성들의 죄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것이지요. 정치와 종교가 타락하자 국민들의 정신도 썩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정해진 이치입니다.

이 책의 제목인 <예레미야 애가哀歌>는 1,2,4장의 맨 앞에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 '에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라는 뜻입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우리도 종종 이런 말을 내뱉습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 속에는 '이럴 수는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새번역은 그것을 '아, 슬프다'로 옮겨놓았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절기 때 낭송하는 다섯 두루마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이 책을 유대력으로 아브월 9일, 즉 성전파괴를 아프게 기억하는 날 낭독했습니다. 두루마리 책자를 낭독하는 동안 회중들은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되새기고, 또 자기들의 죄를 깊이 자각하고 슬퍼했습니다. 깊은 슬픔이야말로 새로운 삶의 출발점입니다. 슬픔은 분노의 파도가 될 때도 있지만, 우리 속에 있는 격정과 두려움을 순화시켜주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이라는 책에서 그것을 카타르시스catharsis라 일렀습니다. 관객들은 배우들이 재현하는 어떤 사건, 혹은 두려움과 연민을 자아내는 현실을 지켜보는 동안 자기 속에 있는 격정과 감정이 순화되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지요.

이 책에는 낭독과 기억을 위한 장치가 있습니다. 1,2장과 4장은 각각 22개의 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히브리어 알파벳 숫자와 일치합니다. 애가의 저자는 각 절의 첫 단어를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정교하게 선택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알파벳 순서에 따라 각 구절을 암송하거나 떠올렸을 겁니다. 물론 그 순서가 뒤바뀐 경우가 없지는 않습니다.

• 벌거벗은 우리
애가는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온 고난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뭔가 심상찮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 하면서 현실을 외면하곤 합니다. 어느 시대든 참 예언자들은 '어서 깨어나라'고,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문명 자체가 종언을 고할 수도 있다고 경종을 울리지만 그들의 말은 경청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사람들의 안일한 낙관론에 힘을 보태주는 거짓 예언자들은 인기가 높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낙관적 예언은 오히려 재앙을 더 크게 만들 뿐입니다.

바벨론의 침공으로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영혼의 고향인 성전까지 무너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폐허로 변한 도시는 괴괴하기 이를 데 없었고, 사로잡힘을 면한 사람들의 얼굴은 잿빛이었습니다. 순례의 명절이 되어도 거리는 인적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때서야 제사장들은 탄식하고, 처녀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지도자연하던 이들은 다 잡혀가거나 도망갔고, 악인들은 때를 만났다고 거들먹거립니다. 찬란했던 지난날을 돌아보지만 부질없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잡혀가도 저항하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은 뭇 민족의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 애가'의 저자는 자기들의 처지를 '벌거벗김'이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원수들에게 능욕을 당한 겁니다. 만해 한용운도 일제 치하에 이런 느낌이었던 모양입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라는 시에서 그는 황국신민이기를 거절한 자기 처지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는 집이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이 없는 자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凌辱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抗拒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부분

능욕하려는 장군은 어디에나 있는 법입니다. 한용운은 결기라도 있어서 장군에게 항거라도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고스란히 능욕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선민이라는 자부심은 무참하게 무너지고, 그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다 쓸 뿐입니다. 먹을거리를 구하느라 소중히 여퉈두었던 것을 다 팔아야 하고, 조롱하고 무시하는 이들의 그 의기양양한 눈빛과 마주쳐야 합니다. 이방인들이 성소에 들어가 성전 기물까지 약탈했습니다. 기가 막히지만 그런 만행을 그저 바라볼 뿐입니다.

만해는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눈뜸은 격분이 슬픔으로 바뀌는 그 '사이'에서 발생합니다. 격분이나 슬픔이 타자에 대한 미움이나 자기 연민에 그친다면 그처럼 허망한 것이 없습니다. 미움과 자기 연민을 넘어 더 나은 세상을 열어가야 합니다. 분노하고 저항하되 자기 파괴적인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역사 속에서 시련을 겪는 이들에게 주어진 실존적 과제입니다.

• 슬픔을 넘어
'애가'의 저자는 막연한 슬픔 속에 잠겨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겪고 있는 고난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길 가는 모든 나그네들이여, 이 일이 그대들과는 관계가 없는가? 주님께서 분노하신 날에 내리신 이 슬픔, 내가 겪은 이러한 슬픔이,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1:12)

몇 해 전 용산참사가 난 그 다음 다음 날 저는 남일당 골목길에서 열린 기도회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제 순서가 되어 앞으로 나간 저는 흘낏거리며 그 사건의 현장을 바라보고 지나가는 이들을 향해 바로 위의 구절을 인용해서 크게 외쳤습니다. '길 가는 모든 나그네들이여, 이 일이 그대들과는 관계가 없는가?' 저도 모르게 터져나온 외침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똑같은 일을 또 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무고하게 죽어간 이들은 우리의 죄를 지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어간 이들 곁에는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주님이 계셨습니다.

애가의 저자는 자기가 겪는 고통을 억울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높은 곳에서 불을 보내셔서 자기 뼈 깊이 들어가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발 앞에 덫을 놓아서 걸려 넘어지게 하셨고, 폐인이 되게 하셨다고도 말합니다. "주님께서 내가 지은 죄를 묶고 얽어서 멍에를 만드시고, 그것을 내 목에 얹어서 힘을 쓸 수 없게 하셨다."(14) 무섭도록 정확한 자기 응시입니다. 습관이 되어버린 죄는 서로 얽혀 멍에가 되고, 목에 얹힌 그 멍에는 천근만근의 무게로 우리를 짓누릅니다. 그래서 사랑할 능력도 잃어버리고, 이웃을 돕기 위해 달려가지도 못하고, 진심으로 삶을 경축하지도 못합니다. 비참합니다. 그는 아프게 하나님을 찾습니다.

"주님, 나의 절망을 살펴 주십시오. 애간장이 다 녹습니다. 내가 주님을 얼마나 자주 거역하였던가를 생각하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아픕니다. 거리에는 칼의 살육이 있고, 집안에는 사망이 있습니다."(1:20)

이게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한사코 하나님을 외면하며 살았던 삶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이웃들의 신음소리에 귀를 막고 살았던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더 많이, 더 편리하게'라는 주술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세상은 더욱 위험한 곳으로 바뀔 겁니다. 이제는 더 이상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새 세상을 열기 위해 땀 흘려야 합니다. 국민의 권리를 위임받은 이들이 다시는 자기 욕망에만 충실히 복무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에스겔은 지도자들의 역할을 목자에 비겨 말했습니다. 그 역할은 '헤매는 것은 찾아오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은 싸매어 주며, 약한 것은 튼튼하게 만드는 것'(겔34:16)입니다. 그게 아니고 양 떼를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리고 제 배만 불리는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3.1절과 4.19혁명 그리고 5.18 광주민주화항쟁에서 죽어간 이들이 세월호에서 죽어간 이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넋이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격분과 슬픔 사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디 모퉁잇돌이신 주님과 잇댄 채 새로운 나라를 향해 부단히 걸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4년 05월 18일 11시 53분 3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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