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하나님 나라의 입구 마25:31-40 (2014/8/24)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그는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은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 이 땅의 '리스바'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옛날에 평범한 행복을 구하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여인의 꿈은 어느 날 처절하게 찢기고 말았습니다. 나라에 3년 가뭄이 들자 사람들은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고, 여인의 두 아들을 포함한 7명의 남자가 흉년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때는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원통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여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여인은 죽임당한 두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바윗돌 위에 올려놓고 굵은 베로 만든 천을 가져다가 그 위에 쳐 놓았습니다.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무렵부터 가을비가 내릴 때까지 여인은 그 바위 아래 앉아서 낮에는 새가 주검 위에 내려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들이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주검을 지키고 있는 여인의 존재는 어떤 말보다도 강력하게 그 시대의 폭력을 고발하는 풍경이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사울 임금의 후처인 리스바이고 희생당한 이들은 사울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다윗의 잠재적 적으로 간주되어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리스바의 존재는 다윗에게 큰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다윗은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고는 나라가 처한 곤경이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비롯해서 죽임을 당한 이들의 시신을 잘 수습하여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후에야 하나님께서 "그 땅을 돌보아 주시기를 비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삼하21:14b)고 전합니다. 제게는 광화문 광장에서 40일이 넘게 단식하면서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밝혀달라고 요구하는 김영오 씨의 모습과 리스바의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가슴에 치유할 길 없는 상처를 입은 이가 곡기를 끊고 40일을 지냈습니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다 사라져버린 딸의 모습을 본 아버지가 진상을 밝혀달라며 40일 넘게 단식을 단행했습니다. 정파적 입장을 떠나 그의 존재는 이 무정한 세상을 향한 고발장입니다. 그의 한, 그들의 한이 풀리지 않는 한 이 나라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내가 위기에 처할 때 국가가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느냐고 묻자 겨우 7.7%의 아이들만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신뢰의 위기 속에 빠져 있습니다. 총체적인 위기입니다. 무엇을 숨길 게 있단 말입니까? 명명백백하게 진실을 밝히면 됩니다. 왜 되돌릴 수 없는 일에 집착하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세월호에서 죽어간 이들의 한이 신원되지 않는 한 이 나라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 인간의 문제 그런 아픔을 외면한 채 바치는 우리의 찬양을 하나님이 들으실까요? 이것은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그런 절통한 아픔조차 감싸 주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감히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겠습니까? "인간적 고통 앞에는 중립이 없다"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은 어김없는 진실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울라 말합니다. 비천한 이들과 사귀라 합니다.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정치적으로 누구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따지는 것 자체가 불순합니다. 이것은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입니다. 제가 다녀온 떼제 공동체의 설립자인 로제 수사는 스위스 사람입니다. 스위스는 영세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2차 대전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민한 젊은이였던 그는 고통 받는 이들을 품겠다는 의지 하나로 떼제에 정착했습니다. 3년 동안이나 마을의 작은 예배당에서 기도에 매진하던 그의 곁에 형제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미약했지만 하나의 질문 위에 자기들의 공동체를 세우기로 작정했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절실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몸으로 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처음으로 돌본 이들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내려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그들이 찾아간 것은 '독일군 포로'였습니다. 모두의 미움을 받던 이들이었지만 가장 절실하게 이웃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었기에 그들을 만나고 돌보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보았습니다. 이 마음이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너무나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최후 심판의 날에 벌어질 한 광경을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보좌에 앉으신 주님은 모든 민족을 당신 앞에 불러 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놓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한편에 있는 이들에게는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마25:34). 그 복을 받은 이들은 누구입니까? 오랫동안 교회에 다닌 사람들이 아닙니다. 헌금을 착실하게 하고, 은혜 받는 집회에 빠지지 않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몸짓으로 찬양을 올린 이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곤경에 처한 이들의 형제자매가 되어 준 이들입니다.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이들은 '좋은 교인'이 아니라 '참 사람'입니다. 물론 좋은 교인과 참 사람은 떼려야 뗄 수 없게 결합된 말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참 사람됨'의 길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참 사람입니까?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누군가의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이 참 사람입니다. 배고픈 사람을 보면 먹이고 싶어지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잔 대접해주려는 사람, 외로운 나그네를 보면 따뜻하게 맞아들이려 하는 사람, 헐벗은 사람을 보면 어떻게든 입혀 주려는 사람, 병들어 몸과 마음이 다 무너진 사람을 보면 그의 곁에 머물며 힘이 되어 주려는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을 보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넘어 가엾게 여기고 그를 찾아 주는 사람이야 말로 참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 참 사람의 길 참 사람은 조건 없이 자기를 내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비록 그렇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그런 사람을 만나면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15:13)고 말씀하셨습니다. 철학자들은 인간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실존'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국어사전은 실존을 '실제로 존재함'이라고 밋밋하게 해석해놓고 있지만 이 단어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영어로는 이그지스턴스(existence)라고 하는 데, 이 말은 라틴어로 '밖에'를 뜻하는 'ex'와 '서다'는 뜻의 'stare'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실존이란 밖에 서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자기 밖에 선다는 것은 자기를 객관적으로 성찰한다는 말일 겁니다. 자기를 성찰하는 사람은 욕망대로 살지 않고 의미를 추구하며 삽니다. 그렇다면 '실존'이란 의미를 추구하며 사는 삶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삶의 의미는 어디서 발생합니까? 누군가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넘어 다른 사람의 삶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실존의 과제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일 수도 있습니다만 철학자인 E. 레비나스는 낯선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고, 끊임없이 그를 향한 사랑을 선택할 때, 그래서 그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볼 때 비로소 인간의 윤리가 완성된다고 말합니다. '너'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없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은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끄는 소중한 존재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25:40) 주님은 세상의 눈길을 끌지 못하는 이들, 오히려 인간의 땅에서 배척받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을 '내 형제자매'라 이르십니다. 이 말은 빈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바로 그런 이들에게 다가가는 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유대교의 사회적 세계에서 죄인으로 규정되었던 사람들, 땅의 사람이라 하여 천대받던 사람들이야말로 예수님의 최우선 관심 대상이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의 가렴주구로 인해 민중들의 삶이 피폐해졌을 때,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던 어부들과 대지에서 뿌리 뽑힌 채 살고 있던 이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고, 그들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꿈꾸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자구에 매이지 않고 율법의 속뜻을 헤아리곤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말씀과 실천은 이사야의 말과 잇대어 있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7) • 두 갈래 길 지금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안일하게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사는 길과, 두렵더라도 예수님께서 앞서 가신 길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공포심을 주입합니다. 사다리 오르기로서의 삶에서 뒤처지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이 우리를 몰아댑니다. 그러니 관심이 온통 자기에게만 집중되어 이웃들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일 틈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시급하게 복원되어야 할 미덕은 환대의 정신입니다. 적대감이 가득 찬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영혼에는 누군가가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피를 흘리는 깊은 상처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쉽게 분노하고, 쉽게 좌절합니다. 하지만 아무런 조건도 없이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깊은 위로와 치유를 경험합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의 전기를 쓴 마이클 앤드루 포드는 환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환대란 손님에게 집중하는 능력이며(집중), 손님이 자신의 영혼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해내는 능력이다(공동체)." "환대는 다른 사람의 외로움과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외로움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해주는 것이다."(마이클 앤드루 포드, <상처 입은 예언자 헨리 나우웬>, 포이에마, p.125) 우리가 이웃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홀로' 고립되어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해줄 수는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주어진 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힘을 숭상하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제국식 삶의 방식은 하나님 나라의 대척점에 서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도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보다는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며 산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가장 곤고한 이들이야말로 우리 곁에 다가오고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들을 외면하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줄 것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들을 진심으로 환대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그의 곁에 다가가 함께 있어주면 됩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매우 심각한 국면에 돌입하고 있습니다. 거리마다 적대감이 넘칩니다. 신뢰는 무너졌습니다. 희망의 빛은 가물거립니다. 교회는 여전히 안일한 꿈에 젖어 있습니다. 어느 교파는 십일조를 내지 않는 이들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하는 규칙을 제정하려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교회가 길을 잃은 채 떠돌고 있습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기둥이 바로 서야 합니다. 삶을 다시 복원할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다가설 때 세상은 생명이 깨어나는 따뜻한 공간으로 바뀝니다. 주님을 외롭게 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당신의 일을 함께 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 무정한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는 주님의 일에 동참하십시오. 이 땅의 ‘리스바들’의 한이 신원되도록 노력하십시오.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의 이 간구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빕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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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4년 08월 24일 11시 58분 17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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