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향한 순례로서의 삶 요일2:15-17 (2014/8/31)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은 모두 하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 위험 사회의 도래 주님의 평화와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날이 갈수록 삶이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낯선 땅에서 바장이는 것 같은 나날입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은 진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주어진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눈을 질끈 감고 살면 모르되 눈을 뜨고 살기로 작정하면 덧거친 세상이 우리를 가만 두질 않습니다. 한국사회를 잘 아는 외국인들은 한국 사회가 매우 역동적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중적입니다. 좋게 보면 정체되어 있지 않아 활기차다는 말 같지만 실은 부산스럽고 정신이 없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 T.V 뉴스를 통해 중국의 지하철에서 종종 벌어진다는 사태를 보았습니다. 지하철에서 한 사람이 쓰러졌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테러가 벌어진 줄 알고 지하철 밖으로 황급히 달려 나갔고, 영문을 모르는 다른 칸의 사람들도 덩달아 피신하는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사과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던 토끼가 사과 떨어지는 소리를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로 듣고 황급히 달려가고 다른 동물들이 뒤따라 달려가는 우화 속의 이야기가 우리 현실이 되었습니다. 급속한 변화 가운데 있는 중국 사회도 '위험 사회'로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공포를 내면화하고 산다는 건 참 비극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마치 안개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렵습니다. 삶의 예측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불안’이 우리 삶의 기본 정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불안을 잊기 위하여 일이나 오락 혹은 쾌락에 몰두합니다. 약물을 사용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선선한 미소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넉넉한 마음으로 이웃들을 품어주는 이들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웃기는 사람은 더러 있지만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현존을 일깨운다는 뜻입니다. 어떨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현존을 느낄까요? 조건 없는 사랑을 받을 때입니다. 내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낄 때 우리 속의 얼음은 녹게 마련이고, 구름 사이로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처럼 하나님이 보이는 법입니다. • 사랑은 끈질긴 모험 진부해 보이지만 사랑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처럼 닳고 닳은 말이 또 있을까요? 대중가요를 듣다 보면 사람들이 온통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중가요에 사랑 타령이 많은 것은 그만큼 다른 이들과의 관계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직접적이고 크기 때문일 겁니다. 아침 드라마는 온통 사랑과 이별 이야기라고 합니다. 어떤 가수는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사랑을 일컬어 '그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늘 혼자 사랑하고 혼자 이별하고/늘 혼자 추억하고 혼자 무너지고/사랑이란 놈 그 놈 앞에서/언제나 난 늘 빈털털이일 뿐"(바비 킴의 '사랑 그놈'). 누군가와 지속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 시대를 반영한 노래 같습니다. 사랑은 교통사고와 같다지요? 예기치 않은 시간에 찾아오기에 피하기 어렵고, 그 충격은 몸과 마음에 오래 남기 때문이랍니다. 제멋대로 왔다가 자기 맘대로 떠나가는 사랑 때문에 열병을 앓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받기를 갈망하는 것은 모든 생명 현상의 뿌리입니다. 세계적인 영성가로 명성을 얻었던 헨리 나우웬 신부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도 또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주목을 받고 싶어했고, 대중들에게 잊혀질까봐 두려워했습니다. 따뜻한 시선을 언제나 그리워했습니다. 그런 여린 영혼의 소유자인 그에게 깊은 안도감을 주곤 했던 것은 어머니의 눈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종종 (…) 내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사제가 되었을 때, 미국에서 살기 위해 떠났을 때 바라보셨던 그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고통이 공존하는 사랑의 눈으로 말이다. 아마도 그 눈이, 사랑과 슬픔이 공존하는 그 눈이, 늘 나를 감동시켰던 것 같다."(마이클 앤드루 포두, <상처 입은 예언자 헨리 나우웬>, 포이에마, p.173) 사랑은 이처럼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사랑의 방향성입니다. 옛 성인은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그 사람을 결정한다'고 말했습니다. 본문 말씀은 두 방향의 사랑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요한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을 다른 말로 표현했습니다. '육체의 욕망', '눈의 욕망',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이 그것입니다. 이 셋은 한결같이 자기가 중심이 되려는 욕망과 관련됩니다. 자기가 중심이 된다는 것은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지구는 자원일 뿐이고,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는 이용 가능한 연줄입니다. 연줄로서의 역할이 끝나면 관계도 끝납니다.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와 만나는 사람을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합니다. 누군가를 수단으로 삼을 때 이익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영혼의 평강은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외로움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고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면서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셨습니다(창2:18). 인간은 ‘서로 함께’(Miteinander)의 존재입니다. 너 없이는 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전 세계에 살고 있는 이들과 실시간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먼 외국에 살고 있는 이들도 그렇게 멀리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SNS를 통해 언제든 접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계가 깊고 친밀하게 이어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페이스북에 글을 쓰는 이들은 '좋아요' 버튼을 누른 사람들의 수에 민감하고, 트위터를 활용하는 이들은 자기 글을 구독하는 사람 수나 리트윗하는 숫자에 민감합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시원찮으면 마치 무시당한 것처럼 여겨 울적해 합니다. SNS를 통해 맺는 인간관계는 언제든 접속과 차단이 가능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람 모르게 슬쩍 차단할 수 있습니다. 관계가 단절된다고 해도 큰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급변하는 세상에서 진실한 관계 맺기가 쉽지 않습니다. 프랑스 철학자인 알랭 바디우는 '사랑이란 끈질긴 모험'이라 했습니다. 시간과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사랑의 관계에 돌입하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를 넘어서야 합니다. 일상의 단조로움을 견디고 모든 것을 함께 겪어내야 합니다.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눠야 합니다. 제가 주일 예배에만 참석하는 이들이 다른 이들과 관계 맺는 데 조금 더 용기를 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상처 입을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랑의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이들은 다른 이들과 진실한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격적으로 연루되지 않아도 되는 대용물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소비사회에는 두 부류의 노예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중독의 노예와 선망의 노예입니다. 중독의 노예는 뭔가에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들이고, 선망의 노예는 자기가 바라는 바를 얻을 수 없기에 늘 남을 부러워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둘은 소비사회가 낳은 이란성 쌍둥이입니다. 중독도 선망도 병적인 상태입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이들이 거두는 생의 열매는 공허입니다. • 누군가의 고향이 되어주는 삶 요한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아주 단호하게 말합니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너무 단정적인 것이 아닌가 싶지만 이것은 어김없는 진실입니다. 모든 종교가 다 사랑을 말합니다. 그 증언이 참되기 위해서는 종교인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염세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자기 확장의 욕망 위에 세워진 질서를 말합니다. 자기 확장 욕망에 사로잡힌 많은 종교인들로 인해 종교가 맛 잃은 소금처럼 변하고 있습니다. 천하에 없는 소리를 한다 해도 명예와 권세와 돈에 대한 관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종교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며칠 전 저는 광화문에 다녀왔습니다. 여러 해 전부터 가까이 지내고 있는 방인성 목사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목사님은 세월호 참사를 당한 유가족들에게 단식을 풀어달라며 당신이 대신 단식을 하겠다고 말하고는 40일 단식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찾아갔던 날은 그 목사님의 회갑일이었습니다. 그는 광장에서 단식을 하며 회갑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안타까워하는 내게 그래도 귀한 회갑 선물을 받았다며 기꺼워했습니다. 무슨 선물인가 했더니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가 단식을 푼 것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방목사님은 자기가 단식을 시작한 까닭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픔을 받아 안았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지극한 아픔 속에 있는 이들의 고통을 모른 체 한다면 나는 더 이상 목사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의 표정은 비장하지도 않았고, 응답 없는 세상에 대한 미움도 없었습니다. 다만 안타까워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세상의 아픔을 보고 외면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아픔을 덜어주려고 다가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고통 받는 이들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사람들, 반역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벗이 되어 주셨습니다. 가톨릭에서 존경받는 사제인 카를로 마르티니 추기경은 지금 외롭고 힘겨운 사람들의 '고향이 되어 주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좀 어렵게 느껴지나요? 저는 요즘 들어 이웃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고통 받는 이들을 찾아가고, 그들과 함께 머물고, 그들의 고향이 되어 줄 수 없다 해도, 다소 소극적이긴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 속에서 거칠고 야비한 것을 이끌어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상대에게서 따뜻하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것을 이끌어내자는 말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를 진심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방식대로 바꿔놓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말과 표정과 몸짓으로 전달하는 메시지를 경청해야 합니다. 저는 이게 우리 시대의 이웃 사랑의 출발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별 것 아닌 일로 다른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곤 합니다. 다른 이들 속에 잠재된 것들 가운데 나쁜 것이 발현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악입니다. 본문의 마지막 구절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이 말은 상실을 경험해보지 않은 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하지만 큰 실패를 경험하거나, 큰 병을 앓아본 이들이 이 말이 뭘 뜻하는지 즉각 알아차립니다. 그들은 그동안 그렇게 집착하며 살았던 것이 실상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탄식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고, 어떤 경우에든 미움이 아니라 사랑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사랑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사랑이 아니고는 하나님 나라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을 향한 순례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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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4년 08월 31일 12시 00분 35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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